광고

신약 배경으로 자리잡은 유대인의 생활과 신앙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18/10/02 [07:31]
사회적 상황, 성전과 회당의 역할과 활동

신약 배경으로 자리잡은 유대인의 생활과 신앙

사회적 상황, 성전과 회당의 역할과 활동

주형식 목사 | 입력 : 2018/10/02 [07:31]

유대인의 사회적 상황
    

로마는 그 영역 안에 있는 각 민족들의 자치를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에, 유대인의 경우에도 산헤드린 공의회가 그 최고 기관으로 역할을 하고 있었고, 종교적 권위는 대제사장과 제사장들에게 있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사이에서도 산헤드린의 권위는 인정되고 있었다. 물론 정치적인 최고 권력은 로마 황제에게 있는 것으로 인정되었다. 그리고 황제가 파송한 총독의 권위가 인정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팔레스타인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실제적인 통치기관은 산헤드린이었다. 예수께서 대제사장 앞에서 재판을 받으시고 사형선고를 받으셨을 때에 이미 사형집행이 결정이 되어버린 것과 다름없었다. 빌라도 앞에 끌려가신 것은 하나의 절차에 불과한 것이었다. 산헤드린이 다만 로마에 대한 도전이 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는다면 유대인 전체에 대한 통치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경우, 로마 황제로부터 주어진 특권을 누리면서 살 수 있었다. 방해받지 않고 회당을 짓고 자기들의 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었으며, 자기들의 종교를 지키며 살 수 있었다. 이렇게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은 종교적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구별되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인 지위로 보아서는 크게 구별된 것이 없었다. 아무래도 팔레스타인에 남아있던 유대인들보다는 디아스포라의 사람들이 더 형편이 나았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든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삶이 유복했던 것은 아니다. 디아스포라의 유대인들 중에 거대한 거지 떼가 있기도 했다.

디아스포라에 비하여 팔레스타인에 살던 유대인들은 철저하게 검소한 삶을 살아야 했다. 예루살렘의 소수 상류층과 갈릴리의 대지주들만이 부유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시대의 팔레스타인 땅 중 많은 부분이 비유대인 영주들에 의해 점유되어 있었고, 이들은 유대인들을 자기 땅의 관리인(청지기)으로 고용하여 관리하고 있었다. 유대 민중들은 밭농사, 수공업, 소매업으로 그들의 생활비를 벌었다. 갈릴리 호수에서는 고기잡이가 이루어졌고, 갈릴리 북부 평야, 예루살렘 주위의 작은 평야에서 농업이 이루어졌고, 요단 골짜기에는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가 무성하게 자랐다. 농촌의 사람들은 고된 노동을 해야만 그들의 삶을 영위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수공업자들, 즉 직조공, 피륙 다듬이공, 제단사, 대장장이, 필사공, 도공들 역시 그리 형편이 낫지 않았는데, 특히 직업 자체가 부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일례로 피혁공은 늘 동물의 시체에서 가죽을 벗겨내는 일을 했기 때문에 부정한 자로 여겨졌고, 세리는 이교 지배자에게 항상 충성하며 정직하지 못한 행동을 하기에 무시를 당해야 했다. 이외에도 율법의 정결규정에 배치된다고 여겨지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모두 부정한 자들로 여겨졌다. 성경에서 “죄인들”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범죄자들이 아니라, 이러한 직업을 가졌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생계를 유지하기 힘들었던 가난한 사람들이 이러한 직업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고, 종교적인 부정함을 피하기 위해 차라리 가난과 구걸생활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많아져 팔레스타인 전역에 퍼져 있었다. 그러나 예루살렘에는 매년 수많은 순례자들이 모였고, 또 큰 시장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다른 지역에 비해서 부유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유대인들의 가정은 대개 창문이 하나도 없는 하나의 방으로 이루어진 집에서 살았고, 저장실에만 자물쇠를 채울 수 있었다. 가족 모두가 한 방에서 잠을 잤고, 아버지는 가장으로서 가족의 행복을 위해 노력해야 했고, 또 율법을 가르쳐야 하는 책임을 가지고 있었다. 혼인은 하나님의 계명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독신생활을 하는 것은 거의 찾아볼 수가 없었다. 남자는 대개 18-24세 사이에 결혼을 하였고, 여자는 12-14세를 넘지 않았다고 한다. 약혼은 남자와 여자의 아버지 사이에 합의를 통해 이루어졌고, 약혼이 이루어지면 혼인결정은 이미 효력을 발생하여, 결혼식 이전에 남자가 죽는다면 그 여자는 과부로 인정되었다. 이혼은 단 한 장의 이혼장으로 가능했다. 혼인 체결을 할 때, 신랑은 소위 혼인 증서를 주어야 했고, 부인을 위해 일정한 금액을 보증해 주어야 한다. 이 금액은 후에 남편이 죽거나 이혼하게 되면 부인에게 주어야 했다. 이혼증서에는 남편과 아내의 이름, 날짜가 기재되었고 이 증서로써 자기 부인이 자유로우며 어떤 남자와도 새로운 결혼을 할 수 있다는 남편의 명백한 해명이 들어있어야 했다. 또 이혼할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가에 대한 율법학자들의 의견서가 첨부되었다. 법적으로는 이혼하는 것이 매우 쉬웠으나, 이혼이 그리 자주 일어났던 일은 아닌 것 같다. 그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었는데, 남편은 이혼할 때에 그 보증한 금액을 아내에게 지불해야 했고, 또 다시 결혼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돈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혼의 결정은 남편이 했고, 여자에게는 이혼을 요구할 권리가 없었다.

여자는 남자에게 종속되었다. 여자는 증인으로서 법정에 나설 수 없었고, 예배에 참석할 수 없었으며, 성전에서도 여자들이 갈 수 있는 영역이 구분되어 있었다. 회당 예배에서는 방청만이 가능했고, 율법의 금지사항을 준수해야 했지만 율법을 공부하고 그 계명을 모두 지킬 의무도 없었다.

노예들 역시 율법의 금령들만을 지킬 뿐, 율법을 배우고 지킬 의무는 가지지 않았다. 유대인 노예들은 7년간 노예생활을 했고, 마지막 해에는 풀려났다. 이렇게 유대인 노예들은 율법에 의해서 보호되었기 때문에, 이방인 노예들은 율법의 보호를 받기 위해 할례를 받고 유대인으로 개종하려는 경우가 많았다. 유대인들이 이방인의 종이 되었을 경우에는 신앙의 동지들과 동족들이 될 수 있는대로 빨리 그들을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전력을 기울였다.

이렇게 여자들과 어린아이들, 노예들은 당시의 율법과는 거리가 있는 자들로 여겨졌다. 예수님 주위에 여자들이 모여들었다는 사실과, 어린아이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막지 않으신 것 등은 당시의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상당히 혁신적인 것이었다.
▲ 예루살렘 성전의 원형인 성막    

성전    

비록 솔로몬의 성전은 완전히 파괴되었고, 스룹바벨이 지은 성전은 그에 비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었지만, 성전의 의식은 율법의 규정에 의해 철저하게 진행되었고, 그 의미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초기의 성전은 초라했지만 헤롯왕에 의해 성전은 완전히 새롭게 되는데, 성전의 구역은 솔로몬 시대보다 거의 배로 넓어졌고, 보는 사람들에게 깊은 감명을 주기에 충분한 화려한 건축물이 되었다. 예루살렘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멀리서부터 번쩍거리는 광채 속에 드러나는 드높은 성전을 볼 수 있었다.

성전에는 넓은 바깥 뜰이 있었다. 이 뜰은 담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희생제물을 사고 파는 상인들과 성전에서 사용하는 돈(Tirisch)으로 바꾸는 환전상들이 여기에 자리잡고 있었다. 바깥 뜰에는 헬라어와 라틴어로 이방인들이 성전에 들어올 수 없으며 들어오는 자는 사형을 당하게 된다는 경고 표찰이 붙어 있었다. 성전 안의 기물들은 성경에 기록된 양식대로 만들어져서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법궤는 솔로몬 성전이 파괴될 때에 사라졌기 때문에 대제사장이 대속죄일에 지성소에 들어갈 때 뿌리는 수염소의 피는 궤가 놓였던 돌판 위에 뿌려졌다.

성전은 이스라엘 종교의 중심지였지만, 또한 대제사장과 제사장들, 사두개인들에게 있어서는 커다란 이권이 결부된 곳이기도 하였다. 종교적인 권위 외에도 경제적인 이권이 결부되어 있었다. 매년 있는 3대 축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성전을 보기 위해 예루살렘에 몰려왔고, 바깥 뜰에 있었던 상인들에게는 상당한 이익이 돌아갈 수 있었다. 이들의 이익은 물론 제사장들에게까지 연결되어 있게 마련이었다. 제사장들은 백성들의 십일조와 상인들로부터 받는 커미션을 가지고 상당히 부유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이들의 경제적 이익에는 사두개인들 역시 연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단지 예루살렘에만 살았던 것은 아니었고, 각 지역에 흩어져서 종교적 직무를 감당하였는데, 지방의 사제들은 매우 가난한 삶을 영위해야만 했다.    
▲ 예수님이 가르치고 치료하셨던 곳에 세워진 가버나움 유대인 회당    

회당   

회당의 시초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회당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 의해서 생겨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유대인들은 타향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기 위해 모일 수 있는 장소를 만들어야 했다. 그러나 회당은 디아스포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에도 생겨나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는 어디에나 회당이 세워졌다.

회당은 대개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는 긴 장방형의 집으로 건립되었다. 입구에는 물이 든 대야가 놓여 있어서 회당에 들어가려는 모든 사람들의 의식적 정결을 행할 수 있었다. 기도실은 수수하고 단순하게 만들어졌고, 한쪽 벽에는 두루마리가 보관되어 예배 때에 꺼내어 사용하였다. 명망있는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좌석이 배정되었고, 학자들은 “모세의 강단”이라 불리는 강단에 회중을 향하여 앉아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볼 수 있도록 하여 성경을 가르쳤다.

회당은 각 지역에서의 유대 공동체를 유지, 보존시키는데 공헌하였다. 세 명으로 구성된 회장단이 회당 공동체의 외적 사무를 관할하였다. 회당의 직원으로는 관리인과 소사만 있었고, 공동체의 명망있는 사람들 가운데 선출된 회당장은 예배의 책임을 맡고 있었으며 집회의 과정이 율법에 따라서 수행되고 있는지를 주의하여 감독하였다. 기도를 인도하고 율법을 낭독하는 직무를 수행해야 할 사람들을 정해서 참석자들을 권고하여 적절한 설교를 하게 하였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매를 때릴 때에는 회당 관리인이 이를 집행해야 했다. 태형은 최고 39대까지 때렸는데, 이는 신명기 25장 3절을 어기지 않기 위함이었다.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기 위해서는 적어도 10명의 남자가 출석하여야 하였다. 사제들과 율법학자들은 공동체 안에서 특별한 직책을 갖지는 않았으나 랍비의 강의를 경청하고 출석한 사제에게 축복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회당 예배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째 부분은 의식적인 측면이 강하고, 둘째 부분은 교훈적인 측면이 강하다. 신명기 6장 4-9절의 “들으라(쉐마)” 본문을 말함으로서 예배가 시작되었다. 이후에는 소위 18기도문이 뒤따른다. 18개의 기도문 중에 처음의 셋과 마지막의 셋은 하나님을 찬양하도록 부르는 것이다. 가운데 12개의 간구는 매일매일의 일상생활에 필요한 것과 관련되어 있었고, 또한 메시야의 대망과 관련되어 있었다. 각 기도문은 대표자가 외우면 매 기도의 끝에 회중들이 아멘으로 화답하였다.

예배의 둘째 부분은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것이었다. 먼저 율법을 읽고 해석하였다. 회중들은 이미 히브리어를 제대로 알지 못했기 때문에, 율법학자들이 히브리어 본문을 읽고 이를 아람어나 헬라어 등으로 번역해 주었다. 이에는 단순히 직역만을 하는 것이 아니라 상당히 자유로운 의역이 이루어졌는데, 이는 곧 그 가르치는 자가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이기도 했다. 율법을 읽은 후에는 다시 예언서에 대한 강독이 이루어졌다. 낭독자는 자기가 원하는 부분을 선택하여 읽을 수 있었고, 이 두 번째 낭독을 끝으로 예배는 끝을 맺었다. 물론 이 두 번째 낭독에도 설교가 포함될 수 있었다. 모든 남자 회원은 설교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다. 누가복음 4장 16-30절에는 예수님이 회당에서 설교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이사야 61장 1-2절을 읽으시고, 그것을 회당지기에게 돌려주고 자리에 앉았다. 그의 설교는 단 한 문장이었다. “오늘날 이 성경 말씀이 너희에게 이루어졌느니라.” 회당예배 때에 이루어졌던 설교의 실례로, 랍비 네호라이의 것이 있다. “한 이스라엘 여인이 홍해를 건넜다. 그녀의 아이는 그녀의 손을 잡고 울었다. 그래서 그녀는 손을 뻗어 바다 가운데 있는 사과와 석류 열매를 따서 아이에게 주었다.” 이스라엘이 홍해를 통과한 역사에 시편 106편 9절 “바다 지나기를 광야 지남 같게 하사”라는 것을 연결시켜 말한 것이다.

회당은 이외에도 여관으로, 학교로서의 역할도 하였다. 율법학자들은 회당에 와서 율법을 연구하였고, 어린아이들도 회당에 모여 율법을 배웠다. 또한 공동체의 자치공간이기도 하였는데, 사람들이 함께 논의해야 할 일이 생겼을 경우에는 회당에 모여서 공동체의 당면 과제를 논의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 가운데 유대인들은 생활과 신앙생활을 유지하였으며, 이는 신약성경의 주요한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주형식(서울 묵동교회 담임목사·목회학 박사)

 

 
  • 도배방지 이미지

주형식 목사의 성서 이해 많이 본 기사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