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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보호의 한계, 믿음의 한계

신민형 | 기사입력 2018/10/02 [22:12]
예수님·부처님의 삶 닮고 싶지만,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동물보호의 한계, 믿음의 한계

예수님·부처님의 삶 닮고 싶지만,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신민형 | 입력 : 2018/10/02 [22:12]

우리를 탈출한건지, 유기된 것인지 보름전 법화산에 나타난 토끼가 한편으론 자유롭게 보이면서도 다가올 추위와 배고픔이 걱정됐다.   

그런데 몇일전부터 우리에 함께 있던 짝이 찾아왔는지, 산속에서 새로운 짝 만났는지 한쌍이  되어 산길을 쏘다닌다. 추위 오기 전에 적당한 토굴을 찾아 겨울을 났으면 좋겠다. 이 청명한 가을에 한껏 숲속 자유와 공기를 만끽하니 둘이 한겨울 부둥켜 안고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 정도 생각에 그치는 것이 나의 한계이다. 동물보호론자는 아니더라도 강아지 일생을 보살펴 본 경험자로서 애완동물에 대한 측은지심은 있으나 막상 동물보호에 나서는 일은 기피하는 것이다. 토끼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랬다. 누군가 보호자가 나타나길 바랬으나 내가 나서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다. 외롭고 처량한 토끼 사진을 가족 카톡방에 올리고 아내와 며느리의 반응을 예상하며 건성으로 ‘집에 데리고 가면 어떨까?’를 물었다. 당연히 “토끼는 아파트에 키우기에는 냄새가 심하다”는 등의 응답이었다. 그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동물애호가임을 자처하나 실제로 자신이 보호자로 나서진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의 동물보호론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내가 처음 산 속 토끼를 발견한 때는 지난 9월 평양에서의 역사적 3차 남북정상회담이 열렸을 때였다. 그리고 그날 대전의 한 동물원에서 암컷 퓨마 한 마리가 우리를 탈출했다가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퓨마의 죽음은 역사적 남북정상회담보다 더 큰 관심을 끌었다. 남북정상회담 기사와 관련해 가장 많이 달린 포털 댓글이 3,000여 건이었던 것에 비해 퓨마 댓글은 1만2,000건에 이르렀고 검색어 순위에서도 남북정상회담이 7만 번 검색되는 동안 퓨마 검색은 36만 5,000번이 넘었다고 한다. 죽은 퓨마에 대한 동정과 사살에 대한 비난이 들끓었고 애도의 물결도 이어졌다. 대한민국 국민이 남북회동의 감동보다 동물보호론자로서의 측은지심과 분노가 더 컸던 것이다.     

그러나 만약 퓨마 포획작전이 실패로 인명 피해라도 생겨났다면 어땠을까? 퓨마 사살에 대한 분노와 비난만큼 사살하지 않은 것에 대한 분노와 비난으로 들끓었을게 분명하다. 그게 사람의 한계가 아닐까?     

토끼와 퓨마에 대한 생각을 비약시켜 사람의 한계를 사회적·종교적으로 생각해보게 된다.     

나를 비롯한 대부분 사람들이 동물을 보호하고 싶은 마음은 있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는 것과 같은 처신은 종교생활에서도 엿보게 된다. 예수님의 삶을 존중하지만 예수님처럼 수난의 삶을 살고 싶지 않은 것과 같다. 부처님 삶을 닮고 싶지만 부처님의 고행과 짝없는 삶을 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예수님·부처님의 삶 닮고 싶지만,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종교적·사회적으로 인간의 소중한 가치인 사랑· 자비· 정의· 민주· 인권· 공정· 희생· 평화 ·평등 등 각종 미덕에 대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생명같이 중히 여긴다며 목소리를 높이지만 막상 자신의 현실 문제로 닥치면 그에 반하는 행동을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동물보호를 외치지만 동물보호 실천엔 한발 비켜서듯이 각종 미덕의 가치들을 소리높여 외치지만 자신 아닌 타인들이 지켜야 할 것으로 강조하는데 그친다. 예수님 사랑과 부처님 자비를 날마다 기도하나 예수님 부처님 삶을 원하지 않는 것과 같을 것이다. 현재 개개인과 사회· 국가에서 외쳐대는 멋진 구호들이 허공의 메아리처럼 들리는 이유이다.    

결국 예수님이나 부처님이 공동체를 통해 사랑과 자비의 가치를 사람들에게 인식시키고 공동체를 통해 실천했듯이 공동체의 힘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개인주의가 팽배하고 사회가 피폐, 분화될수록 건전한 공동체의 역할이 점점 중요해진다.     

나도 토끼의 겨울나기를 염려하다가 막상 토끼들이 위기에 처하면 내가 직접 보호는 못하더라도 동물재난구조센터나 동물보호단체의 힘을 빌리는 것으로 나의 한계, 사람의 한계를 벗어나야겠다.     

그러나 인간과 사회의 가치를 추구하는 공동체들이 그 가치들을 빙자해 자신을 위한 이익집단으로 변질하는 사례가 넘쳐난다. 심지어 교회나 절 등 종교 공동체에서도 그런 추한 모습이 드러나는 세태가 한탄스럽다. 그렇다고 모든 공동체가 그렇다고 보진 않는다. 인간의 측은지심 등 근본적 착한 마음이 일어나 모이게 되면 그릇된 공동체를 바로 잡는 공동체가 생겨나게 될 것이란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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