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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산(甑山)의 미륵신앙관(彌勒信仰觀)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8/10/04 [07:27]
정역사상, 동학사상, 무당의 사상까지...대표적 습합 종단의 형성자

증산(甑山)의 미륵신앙관(彌勒信仰觀)

정역사상, 동학사상, 무당의 사상까지...대표적 습합 종단의 형성자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18/10/04 [07:27]
▲ 증산은 자신이 미륵이란 확신을 그의 종도들에게 심어주었다. 또한 장차 미륵불이 되어 금산사에 살게 될 것을 예언했다 사진은 금산사 미륵불.    

증산의 자신이 미륵이란 생각은 성도 후 화천하기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다. 증산의 선경의 모습은 마치 미륵경전들에 나오는 용화회상의 모습과 흡사하다. 여하튼 증산은 상제요 미륵불이라는 절대적 권능과 힘으로, 고통에 헤매는 민중들에게 머지않아 다가 올 용화회상에 대한 희망과 꿈을 심어줌으로써 좌절하지 아니하고 살아 갈 수 있도록 가르쳤던 것이다.    

이같은 가르침에 따라 증산이 사망한 이후 생겨나게 된 많은 교파 중에서 상당수가 미륵불로서의 증산을 받들게 되고 그 중 몇 개 교파는 교명자체를 불교적인 명칭으로까지 붙이게 된다.    

이런 증산의 주장에서 엿보이는 것은 종전 한국 전역에 퍼져 있던 잡다한 민간신앙의 신관을 해석하였음과 동시에 기성종교의 영역까지 융화시키려는 종교운동을 전개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한말 사상의 대변인인 김일부의 정역사상과 수운의 동학사상, 나아가 무당의 사상까지 종합시킨 대표적 습합 종단의 형성자라고 볼 수 있다.    

증산사상의 인존관과 함께 신명관은 우리 무속신앙의 그것과 함께 가장 독특한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런 민중들의 기대 심리를 증산은 적절히 이용 하고 있다.    

미륵이나 미타에 대한 민중의 절실한 발원은 진인으로서 현세에의 내림을 바라는 기대로 바뀐다. 이러한 발상과 관련이 있는 것이 동축국사상이다. 부처님이 태어난 인도를 서축(西竺)이라하면 우리나라는 정법을 지키는 진정한 불국토라는 것이다. 일체의 불, 보살이 이곳에서 나타나는 민중의 기대가 깔려 있다.    

종도 김경학의 아들 용주가 스물 여덟살 인데 폐병으로 여러 해 동안 앓아서 사경에 이른지라 경학이 대성께 아뢰면 곧 낫다가 오래 되면 복발하여 여전히 앓으므로 온 집안이 걱정으로 지내더니 하루는 밤중에 대성께서 문밖에서 꾸짖어 가라사대 아비가 오는데 일어나 맞지 아니 하느냐 하시니, 용주 문득 정신을 차리거늘 경학이 붙들어 일으키려 하니 대성께서 금지하시고 스스로 일어나기를 명하셨습니다. 용주가 억지로 몸을 떨며 일어나니 문밖으로 내세워서 한참동안 달음질을 시키시고 밥을 가져다 먹이라 하시니 용주가 그 밥을 삼분지이나 먹는지라 말씀하시니라.    

기를 달음질도 하고 밥도 많이 먹으니 아픈 사람이 아니로다 하셨습니다(大經 8-38). 위 말씀에서 당신께서 용주에게 아비가 오는데 일어나 맞지 아니하느냐 하신 것은 용주의 모친이 용주가 어렸을 때에 용주를 금산사 미륵불의 아들로 정하고 치성들여 온 것을 말씀하신 것이니 이는 당신께서 신앙습속을 들어 금산사 미륵불의 화신임을 알게 하신 말씀입니다.    

불타를 비롯 동서양 여러 성현들의 간곡한 청에 의해 이 땅에 출현하면서
동학신자는 최수운의 갱생을 기다리고,
불교신자는 미륵의 출세를 기다리고,
예수신자는 예수의 재림을 기다리나,
한 사람만 오면 저의 스승이리라.    

증산 출현으로 그동안 여타종교가 말하던 이상적 세계, 미래향의 세계가 끝났음을 암시하고 있다. 단순히 증산교라는 하나의 종교에 국한된 메시아가 아니라 인류가 이땅에 생명의 뿌리를 내린 후 줄기차게 기다렸다는 이상적 인간 성인의 출현으로 자신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천사 경석과 공우께서 가라사대 .... 나는 서천서역대법국천계탑천하대순이라 동학주에 「시천주조화정」이라 하였으니 내 일을 이름이라 내가 천지를 개벽하고 조화정부를 열어 인간과 하늘의 혼란을 바로 잡으려하여 삼계를 둘러 살피다가 너의 동토에 그쳐 잔피에 빠진 민중을 먼저 건지려 함이니 나를 믿는 자는 무궁한 행복을 얻어 선경의 낙을 누리리니 이것이 참 동학이라 궁을가에 “조선강산명산이라 도통군자 다시 난다” 하였으니 또한 나의 일을 이름이니라.    

강증산이 삼계를 돌아다니다가 고달픔에 헤매는 민중을 먼저 건지려고 동녘땅에 내려왔기 때문에 한국은 강증산의 조국이 되고 따라서 강증산은 조국에 대한 민족적 의무를 짊어지게 되었으며, 또한 강증산은 리상실현운동에 조국인 한국, 그리고 혈연관계가 있는 한국민족을 중심으로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얼굴은 금산사 육장금신 미륵불의 그것과 같이 온유하고 원만하게 보이고 빛나 보였다. 신명의 모습이기도 했다. 이제 육장금신은 여의주를 손에 받았으나 증산께서는 입에 물었고 양미간에 둥근 백호주가 박히고, 왼손바닥에 任자와 오른 손바닥에 무자를 가진 몸으로 나타나신 하늘 사람이었다.    

동학신자 사이에 ‘대선생이 갱생하리라’고 전하는 바이나, 이는 대선생이 다시 나리라’는 말인즉, 내가 곧 대선생이로다.

또, 옛적부터 계룡산 정씨 왕국, 칠산의 범씨 왕국을 일러 오나, 이후로는 모든 말이 영자를 나타내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정씨를 찿아 운수를 구하려 하지 말지어다. 나를 믿는자는 무궁한 행복을 얻어 선경의 낙을 누리리라.    

증산이 밝히고 있는 자신과 금산사 미륵과의 관계로, 이후 직접 증산을 모셨던 제자들을 비롯하여 후대 증산을 만나보지 못했던 이들에 의해 더욱 구체적으로 증산=미륵의 관계가 제시되고 있다.    

김자현의 모친상을 치른 며칠후 종도들이 모인 곳에서 증산은 유언 비슷한 말을 남긴다. 그의 말 속에서도 증산은 자신이 미륵이란 확신을 그의 종도들에게 심어주고 있다.    

사람의 죽음의 길이 멀지 않고, 문턱 밖이 바로 저승이다. 나는 죽고 사는 것을 뜻대로 한다. 나는 金山寺로 들어가서 불양답(佛養沓)이나 차지할 것이다. 내가 金山寺로 들어가리니 나를 보고 싶거든 금산사로 오라    

증산은 평소에도 말하기를 “금산사는 내가 있을 곳이요, 용화동 밖으로 자네들이 살 것이네”라고 하였다고 한다. 장차 미륵불이 되어 금산사에 살게 될 것을 예언한 것이다.    

내가 장차 열 석자로 오리라. 금산사 미륵불상의 크기를 말하고 있다. 증산은 살아서도 금산사의 미륵불 신앙을 떠나지 못하고 그 주위를 맴돌며 살고 있었다.    

이러한 증산 사후의 가르침들이 증산계 교단들이 금산사를 비롯하여 용화동 주변을 떠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자신의 탄생과 사후 머물 곳이라고 하는 금산사는 후백제를 일으킨 견휜의 원찰로서 미륵신앙의 본거지로 여겨져 왔고, 이 지방 인근의 사람들에게는 일종의 성지로 여겨져 오던 터이다. 주술 사회적인 성향이 짙은 당대의 사람들은 일상적이 아닌 이변이나 동요에 따르는 불안을 으레히 풍수지리상의 결과, 혹은 진인에 대한 신앙과 연결지으리라는 점은 적절한 판단이며,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이 바로 예견된 구세주가 내림할 성지라고 생각할 때 이는 더욱 절실한 것이다.
 
증산 생전 하루는 약방 후원에 청죽십여를 친히 심으신 뒤에 약방에 갖추어 둔 모든 물목을 기록하여 공우와 광찬을 주시며 가라사대 이 물목기를 금산사에 가지고 가서 그곳에 봉안한 석가불상을 향하여 마음으로 업어다가 마당 서편으로 옮겨 세운다는 생각을 하면서 불사르라 하시니 두 사람이 금산사에 가서 命하신 대로 행하니라 이로부터 몇 해 후에 금산사를 중수할 때에 석가불전을 마당 서편으로 옮겨 세우니 미륵전 앞이 넓어지니라.    

증산교인들은 이러한 증산의 일련의 일들을 통해 우연한 불사의 현장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증산이 내다본 선지적인 식견으로 바라보며 평소 자신이 약속했다는 재림을 기다리는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있는 것 같다.  (삼국유사문화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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