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안식일 설교

주형식 | 기사입력 2018/11/20 [12:33]
“지계석은 나와 하나님과의 약속이며, 신뢰의 표식”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안식일 설교

“지계석은 나와 하나님과의 약속이며, 신뢰의 표식”

주형식 | 입력 : 2018/11/20 [12:33]

"지계석은 나와 하나님과의 약속이며, 신뢰의 표식”


(고전 4:1-5)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고린도는 지정학적으로 그리스 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연결하는 곳에 위치한 도시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 로마에서 소아시아지방으로 최단거리로 가려면 이곳 고린도를 통과해서 가야만 합니다. 이 그리스본토와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이어주는 이 가느다란 곳에 고린도가 위치했는데 이곳의 폭이 6.4km 밖에 되지 않습니다. 로마제국은 이 최단거리의 교역루트를 포기할 수는 없어서 ‘디올코스’라는 길을 만들었습니다.

이 ‘디올코스’를 보면 당시 로마라는 나라가 얼마나 대단한 나라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디올코스’라는 말은 ‘가로지르다’라는 말과 ‘육지’라는 말의 합성어입니다. 말 그대로 육지를 가로지르는 길입니다. 예를 들어 로마에서 출발한 배가 고린도 항에 도착을 하면, 배는 마치 거대한 기차의 선로와 같은 곳에 그대로 올려집니다. 그리고 길이 6.3km의 이 선로를 따라 배가 육지로 이동이 됩니다. 그래서 반대편 항구로 이동을 시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배는 700km 이상을 돌아서 가야하기 때문에 이 ‘디올코스’는 당시에 최첨단의 기술이 집약된 수송방법이었고, 매우 안전하고 경제적인 방법이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의 ‘디올코스’는 로마제국 내에서 동서무역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고린도는 당연히 경제의 중심지로서 가장 크게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디올코스’를 운영하려면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따라서 무역과 경제가 호황을 누리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기회의 땅, 부요의 땅이 고린도가 된 데에는 바로 이러한 배경이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기회의 도시였지만 고린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부자는 아니었습니다. 고린도에도 빈부의 차는 극심했고, 그것은 교회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교회 내에서 부요한 성도와 가난한 성도 사이의 긴장이 존재했습니다.

예를 들어 ‘그리스보’는 회당장이었고, ‘에라스도’는 고린도의 재무관이었으며, ‘가이오’는 고린도성도들이 다 모일 수 있는 큰 집을 소유한 부자였습니다. 반면에 고린도교인 중에 많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습니까? (고전 1:26)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 28절의 바울의 표현 그대로하면 천하고, 멸시받고,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결국 교회 안에서도 빈부격차로 인한 문제가 발생했음을 말씀을 통해 발견할 수 있습니다.

(고전 11:20-22)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이는 시장하고 어떤 이는 취함이라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고린도는 부요와 기회의 땅이었지만, 세상의 부요함은 교회 안에서도 있는 사람과 없는 사람을 나누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결국 성만찬조차도 성도들의 연합을 도모하는 자리가 아니라 신분과 계층의 장벽을 확인하는 자리로 변질되고 만 것입니다.

또한 고린도는 성적으로 매우 문란한 도시였습니다. ‘코린티아조마이’라는 단어는 ‘고린도 사람처럼 행동하다’라는 말인데, 극작가인 아리스토파네스는 이 단어를 자신의 작품에서 ‘간통하다’, ‘문란하다’라는 말로 사용하였습니다. 그만큼 고린도는 당시 로마제국 내에서 ‘성적으로 타락한 곳’이라는 이미지가 뿌리박힌 곳이었습니다.

고린도의 아프로디테 신전에는 천명이 넘는 여사제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일은 제사지내러 오는 남자들과 육체적 관계를 맺는 일이었습니다. 고린도의 여사제들이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상선이 고린도에 도착을 하면 배는 ‘디올코스’에 올려놓고, 선원들은 전부 아프로디테 신전으로 갔다고 합니다.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의 분위기는 교회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고전 5:1)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라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비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 심지어 교인들 중에는 아버지의 아내와 부정한 관계를 맺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매우 격앙된 어조로 이러한 사람들을 교회에서 출교시키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고린도의 타락한 문화는 도시의 부요함과 더불어 성도들을 미혹하는 중대한 도전이 되었습니다.

고린도는 또한 그리스의 다신교가 뿌리깊게 자리잡은 곳이었습니다. 로마의 시인이자 철학자인 플루타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자는 결혼하면 남편의 친구들과 친해져야 한다. 그중 가장 중요한 남편의 친구는 남편이 섬기는 신이다.” 이런 헬라사회에서 남편이 섬기는 신을 믿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여성이나 자녀들이나 노예가 가장의 신을 섬기지 않고 기독교로 개종한다는 것은 큰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가정에서 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을 하는 데에도 교회에 다니는 것은 엄청난 장애요소가 되었습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소위 자발적 결사조직들이 굉장히 활발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동종직업 결사, 종교 결사, 장례 결사, 가문 결사 등이 있었는데, 그중에서 가장 강력한 응집력이 있었던 것이 동종업계 결사였습니다. 선원, 운송업, 상인, 목수, 대장장이 등 각각의 직업마다 결사를 만들고 자신들의 수호신을 섬겼습니다.

예를 들어 선원들의 결사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을 수호신으로 믿었습니다. 따라서 선원들은 출항하기 전에 포세이돈에게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선원들 중에 그리스도인은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기존 선원들과 갈등이 생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포세이돈이 인정하지 않는 선원이 배를 탈 경우, 분노한 포세이돈이 배를 난파시킬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선원들의 결사는 그리스도인 선원을 끼워주는 것을 꺼려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처럼 고린도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는 그 순간부터 기존의 인간관계와 생계유지에 대단히 큰 어려움이 발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고린도교회에는 이러한 신앙적 도전에 굴하지 않는 성도들이 있었지만, 반면에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는 성도들도 있었습니다. 바울이 그런 성도들을 향하여 뭐라고 이야기합니까?

(고전 10:14,20)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 되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이처럼 1세기 고린도교회는 영적인 대쟁투가 벌어지는 전쟁터, 격전지였습니다. 빈부의 격차, 성적인 문제, 신앙적인 문제라는 많은 도전들에 맞서서 성도들은 ‘신앙’과 ‘타협’ 사이에서 치열한 고민과 결단을 해야만 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내부적으로도 심각한 문제가 있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었습니까?

(고전 1:10-12)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내 형제들아 글로에의 집 편으로서 너희에게 대한 말이 내게 들리니 곧 너희 가운데 분쟁이 있다는 것이라 이는 다름아니라 너희가 각각 이르되 나는 바울에게, 나는 아볼로에게, 나는 게바에게, 나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는 것이니”

여기 10절 말씀에 “온전히 합하라”라는 말씀의 헬라어 원뜻은 “회복하라”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처음 세울 때에는 온전한 연합이 있었는데, 그가 떠나고 나서 세월이 흐르자 교회가 서서히 분열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바울의 눈에 비친 고린도교회의 분열은 매우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헬라문화는 지혜와 토론을 즐겨했습니다. 이런 지역의 문화에 익숙한 고린도교인들은 바울의 말대로 헛된 자랑에 사로잡혔습니다. 자기들끼리 파당을 만들고 서로 지혜와 신앙의 우월함을 자랑하면서 경쟁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교회의 설립자인 바울을 따랐고. 어떤 이들은 달변가로 아가야지방에서 성공적으로 사역한 아볼로를 추종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의 영향력과 지명도에 기댄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는 그리스도를 파당의 우두머리로 삼는 교인들도 있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고린도교회에 성령의 은사가 많이 주어졌습니다. 은사는 좋은 것이지만 은사 자체가 교회를 하나되게 하지는 못하는 것입니다. 지혜와 지식을 추구하면서 영적인 우월의식까지 갖게 되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면 교회의 예배가 어지러워졌습니다. 예배 시에 자신에게 계시가 임했다고 주장하면서 예언을 쏟아내고, 여기저기서 이해할 수 없는 방언들이 막 터져나왔습니다. 교회 내부의 이러한 분열과 무질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세상적인 자랑의 기준과 우월의식을 물리쳐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청지기’를 헬라어로는 ‘오이코노모스’라고 합니다. 바울서신 가운데 이 ‘오이코노모스’가 사용된 곳이 2군데 있는데, 로마서 16장 23절에서 고린도 도시의 재무관 에라스도를 언급하면서 재무관이라는 말에 사용된 단어가 바로 ‘오이코노모스’입니다.

또 다른 한 곳이 바로 고린도전서 4장 2절의 “맡은 자”에 사용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청지기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이해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오이코노모스’가 ‘집’이라는 뜻의 ‘오이코스’와 ‘관리자’라는 뜻의 노모스가 합쳐진 말이라 ‘주인이 맡긴 것을 주인의 뜻대로 관리하는 위탁관리인’이라는 뜻의 청지기와 뜻이 일맥상통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비밀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비밀”을 알기 위해서는 그 앞의 고린도전서 2장 1,2절의 말씀을 살펴보면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고전 2: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4장 1절의 하나님의 비밀은 헬라어로 ‘미스테리온’이라고 합니다. 이 ‘미스테리온’이라는 말에서 오늘날 영어의 ‘미스테리’라는 단어가 나왔습니다. 미스테리는 말 그대로 ‘비밀’이라는 말입니다. 이 ‘미스테리온’이 고린도전서의 다른 곳에서도 사용이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2장 1절의 “하나님의 증거”에 ‘미스테리온’이라는 말이 동일하게 사용되었습니다. 2장 1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비밀을 전할 때에”라고 바꿔서 읽어보면 하나님의 비밀이 무엇인지 분명해 집니다. 그 비밀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비밀은 사람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고, 오직 성령의 능력으로만 깨달을 수 있는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육체에 속한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이지만, 부르심을 입은 자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고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합니다.

바울 당시에 십자가형은 잘 아시는 것처럼 로마제국의 적이나 노예에게 내리는 최고의 형벌이었습니다. 전시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채찍으로 수형자의 피부를 갈기갈기 찢고, 내장이 흘러내리고, 뼈가 튀어나온 채 형틀을 짊어지고 형장까지 걷게 하는 극도로 잔인한 형벌이었습니다.

(고전 1: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이렇게 사람취급도 받지 못하는 십자가에 전능한 하나님이 무능하게 달려 죽는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련한 말이었습니다. 세상적인 논리와 지혜를 추구하고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들에게 신의 전능함과 십자가의 무능력함은 공존할 수 없는 모순덩어리였습니다. 바로 여기에 헛된 지혜를 자랑하는 고린도교인들의 모순이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논리와 상식으로는 이해되지 않는 십자가를 믿는다고 하면서, 오히려 세상의 기준을 따라 살아가는 모습이 고린도교인들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 곧 십자가 복음의 청지기를 자처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교인들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합니다. 세상의 지혜를 쫒아가며, 우월의식에 사로잡혀있고, 서로가 분열하는 고린도교인들에게 유일한 처방은 십자가를 붙드는 것이었습니다. 세상보다 크신 예수님의 사랑과 십자가 희생을 깨달을 때 세상의 가치는 점점 작아지고, 세상의 기준과 자랑도 내려놓을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분의 겸손 앞에서는 어떠한 우월의식이나 영적인 교만도 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맡은 자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 말합니다. 어떠한 경우에는 “믿음”을 강조하다보면 “행함”이 약해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믿음”이라는 말의 헬라어인 ‘피스티스’는 그 뜻이 “믿음”도 있지만, 또 다른 뜻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충성”입니다. 한 단어 안에 “믿음”과 “충성”이 같이 있다는 것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기독교 신앙은 “믿음”이라는 “앎”의 차원과, “충성”이라는 “삶”의 차원이 서로 손을 맞잡고 조화를 이룰 때 온전하여 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온전한 ‘오이코노모스’, 청지기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가나안에 들어가려고 준비하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음과 같이 명령하셨습니다.

(신 19:14)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어 얻게 하시는 땅 곧 네 기업된 소유의 땅에서 선인의 정한 네 이웃의 경계표를 이동하지 말지니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각 지파별로 기업을 분배받았습니다. 그리고 각 지파의 경계를 표시하는 경계로 지계석을 세웠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 경계선을 임의로 변경하지 말라고 명하셨습니다.

우리나라도 30~40년 전까지만 해도 농촌지방에서는 경계를 표시하는 돌이나 말뚝, 혹은 나무심기를 볼 수가 있었습니다. 집과 집 사이에, 밭과 밭 사이에 이와 같은 경계표시는 사람 사이의 재산을 상호 보호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이 경계석은 사람들 사이의 신뢰의 표시가 되었습니다. 모든 인간관계가 신뢰의 여부에 달려있다고 볼 때에 이와 같은 경계석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것입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죄들을 지적하시면서 ‘이렇게 행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죄들이 각각 무엇인가 하면 ‘우상을 섬기는 죄’, ‘부모를 경히 여기는 죄’, ‘이웃의 지계석을 옮기는 죄’였습니다.

이스라엘에게 '경계선'은 성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 경계선을 정해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경계선을 바꾸어 자기 것으로 만드는 일은 언약을 파괴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였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권력과 재력을 가진 사람들이 탐욕에 빠져서 힘없는 사람들의 기업을 탈취하는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러한 일로 인해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경계선 논쟁이 계속해서 일어났습니다.

(잠 23:10) “옛 지계석을 옮기지 말며 외로운 자식의 밭을 침범하지 말지어다”

먼 훗날, 솔로몬은 다시금 지계석을 옮기지 말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야 시대에 아합 왕은 나복의 포도원을 탐내어 빼앗아버린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 삶의 현장에도 경계석, 지계석 때문에 문제가 일어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중.일 양국은 심각한 영유권에 대한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중국명 댜오위다오. 일본명 센카쿠 섬이 그것입니다. 또 일본은 우리 땅 독도에 대해서도 시비를 하고 있습니다. 독도는 누구의 땅입니까? 독도는 분명히 우리 대한민국의 땅입니다. 독도 소유권에 대한 것을 전 세계에 과거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현재 실효적으로 우리에게 소유권이 있음을 확실하게 홍보해야 합니다.

솔로몬이 이 말씀을 한 것을 보니까 지계석을 옮기는 일들이 왕왕 있었음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엇 때문에 지계석을 옮겼을까요? 그것은 분명 탐욕때문이었습니다. 탐욕으로 인하여 지계석을 옮기는 일들이 있었지만, 지계석을 옮기는 것은 결국 신뢰를 저버리는 일이 되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 나와 하나님 사이의 신뢰를 깨뜨리는 일이 된 것입니다. 잠언기자는 신뢰를 소중히 여기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약속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사회적 약속 역시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사회적 약속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법과 질서입니다. 우리는 사회현실을 보면서 각기 자기에게 주어진 일, 즉 내게 주어진 일의 경계를 잘 지키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면서 우리들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들이 있습니다. 정치인은 정치인으로 지켜야할 경계, 군인은 군으로 지켜야할 경계, 종교인은 종교인으로 지켜야할 경계, 교사는 교사로서의 경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경계를 잘 지키면 이 사회는 보다 바람직한 세상으로 발전해 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가지게 된 신앙의 경계를 잘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지계석은 삶의 표준이고 선과 악의 가름판이기도 합니다. 가치관이 오도되어지고 본받을 표준이 없는 시대에 하나님의 말씀 성경이 우리의 지계석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라틴어로 ‘캐논’이라고 합니다. ‘캐논’이라는 말은 기준, 경계석, 지계석이라는 말입니다. 이 기준대로 우리의 삶을 엮어 가라고 잠언기자와 신명기 사상은 권고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날이 밝으면 동산 위로 해가 솟았다고 말합니다. 한 낮이 되어 그림자가 짧아지면 해가 머리 위에 와있다고 말합니다. 저녁놀이 지고 사방이 어둠에 잠기기 시작하면 해가 넘어갔다고 말합니다. 사실 곰곰이 생각해보면 해는 하루 종일 그 자리에 있었는데 사람들은 해가 하루 종일 움직였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해와 같이 변치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신뢰는 변함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상황과 입장에 따라 지계석이 오락가락 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의 상황과 입장에 따라 경계석의 기준을 넘나든다면 이 사회가 어떻게 되겠습니까? 사사기에 보면 자기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했다고 합니다. 이 사회가 이렇게 살면 어떻게 됩니까? 사사기 약 350년 동안 실패와 절망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스포츠 운동경기를 봐도 금을 밟으면 실격되는 경기가 엄청나게 많습니다. 아이들이 노는 놀이에서도 금을 밟으면 죽었습니다. 운전을 하다가 중앙선을 침범하면 큰 일 납니다. 남의 집도 허락없이 들어가면 바로 경찰서로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정하신 금이 있습니다. 가장 기본적인 금은 십계명입니다. 그것을 함부로 밟거나 넘으면, 그래서 하나님을 섬기지 않거나, 우상을 섬기거나, 살인을 하거나 그런 금을 밟고 넘으면 안됩니다.

지구 역사상 최초의 죄는 무슨 죄입니까? 아담과 하와가 넘지 말아야 할 금을 넘어버린 것 아닙니까?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을 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는 사단의 말을 들은 것입니다. 인간이 넘지 않아야 할 경계표를 넘은 것이 인류 최초의 죄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따로 떼어놓으시고 그것은 하나님의 것이니 따먹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이 선악과는 무엇입니까? 그 경계석은 무엇입니까?

지계석은 나와 하나님과의 약속이며, 신뢰의 표식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옮기므로 하나님과의 신뢰를 깨뜨리는 일들이 결콬 없어야 할 것입니다. 영적인 지계석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소유물을 내것으로 하는 것은 지계석을 옮기고, 하나님과의 신뢰를 깨뜨리는 일인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우리의 모든 것들의 소유자는 하나님입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이며, 우리는 단지 하나님께서 잠시 맡겨 주신 것을 관리하는 ‘오이코노모스’(청지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맡아서 하나님 뜻대로 관리하고 사용하다가 하나님 앞에 가서 그것을 사용한 일에 대해서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나를 위해 특별하게 구별하신 지계석을 감사함으로 여기시며, 그것을 옮기지 않고, 끝까지 하나님과 온전한 신뢰관계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주형식(서울 묵동교회 담임목사·목회학 박사)
  • 도배방지 이미지

주형식 목사의 성서 이해 많이 본 기사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