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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청춘의 별’ 신성일, 파란만장한 삶 재조명 받아

매일종교 뉴스1팀 | 기사입력 2018/11/21 [17:29]
11월7일 경북 영천 ‘星一家’에 영면…온라인커뮤니티 중심으로 핫이슈로 급부상

영원한 ‘청춘의 별’ 신성일, 파란만장한 삶 재조명 받아

11월7일 경북 영천 ‘星一家’에 영면…온라인커뮤니티 중심으로 핫이슈로 급부상

매일종교 뉴스1팀 | 입력 : 2018/11/21 [17:29]
11월7일 경북 영천 ‘星一家’에 영면…온라인커뮤니티 중심으로 핫이슈로 급부상

‘국민배우’ 고(故) 신성일(申星一)의 삶이 재조명되고 있다. 11월18일 주요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어 상위에 ‘신성일’이 등극한 가운데 온라인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파란만장한 그의 인생과 관련해 다양한 의견이 쏟아지며 핫이슈로 급부상 중이다.대중문화평론가 김경민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신성일은 1960~70년대를 대표하는 미남 배우로 한국영화의 상징적 존재로 강렬한 눈빛으로 대표되는 반항아 이미지에서 나오는 젊은 청년 이미지로 유명하다”며 “신성일은 유명세나 인지도 출연작으로 본다면 당시 배우 출연료 1위를 차지했으며 2위와는 무려 수십 배나 차이가 났던 독보적인 스타”라고 언급했다. 아울러 그는 “60년대 배우 출연료가 보통 1만8000원이었을 당시 신성일 혼자 45만원을 받았을 정도의 독보적인 인기를 누렸다”며 “신성일은 사투리가 무척 심해 대부분 성우 더빙으로 처리했으며, 1960년대 신성일의 목소리 전담이었던 이창환은 원래 라디오 드라마 등에서 인기를 끌던 성우로 알려진다”고 밝혀 눈길을 끌었다. 지금까지도 신성일의 사망 소식을 접한 네티즌들은 연이은 추모 메시지로 분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 고(故) 신성일(1937~2018)    

영원한 ‘청춘의 별’ 지다… 故신성일이 이 시대 청춘에 남긴 '맨발의 울림'     

‘영원한 청춘의 별’이 졌다. 향년 81세. 전후(戰後)의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1960~70년대 산업화 시대의 방황하는 청춘을 위로한 톱스타 신성일(1937~2018). 대표작 ‘맨발의 청춘’을 통해 지적이면서도 반항적이고 불량기 어린 사랑과 정열로 ‘청춘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 암울한 시대의 낭만을 지켜냈던 청춘의 아이콘이 영원히 잠들었다.

3000명의 지원자가 몰려든 신필름 전속 신인배우 공모에서 서울대 진학을 꿈꾸다 가세가 기울어 빚쟁이들을 피해 무작정 상경한 강신영을 발탁한 한국영화의 거목인 ‘야생마’ 신상옥(申相玉·1926~2006) 감독이 자신의 성을 따서 지어준 예명이 신성일(申星一). 그 이름의 뜻처럼 ‘뉴스타 넘버 원’으로 충무로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채 반세기 영화인생을 마감하고 눈을 감자 그의 빈소에는 영화계와 올드팬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2017년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고 투병해온 ‘국민배우’ 신성일은 11월4일 오전 2시 30분 81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전날 저녁 한때 사망 오보( 사태도 빚어졌지만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된 빈소에는 아내이자 동료 배우인 엄앵란(82)과 장남 석현, 장녀 경아, 차녀 수화 등 유족이 차분히 조문객을 맞았다.

장례는 고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사흘간 영화인장으로 치러졌다. 한국영화인단체총연합회 지상학 회장과 후배 배우 안성기가 공동장례위원장을 맡았다. 장례위원으로 영화계 각 분야 인사가 위촉된 가운데 고문은 신영균 한국영화배우협회 명예회장과 배우 김지미, 문희 등이, 부위원장직은 배우 이덕화, 장미희, 송강호, 강수연, 최민식 등이 맡았다. 6일 오전 10시 영결식을 거쳐 서울추모공원에서 화장된 뒤 장지인 경북 영천 선영에서 영면했다.    
▲ 고(故) 신성일은 ‘영화인장’으로 11월6일 오전 10시 영결식을 거쳐 화장된 뒤 다음날 경북 영천 자택인 ‘성일가’(星一家)에서 영면에 들어갔다.   

문재인 대통령과 이낙연 국무총리 등 각계에서 쏟이진 수많은 조화(弔花) 속에 미소짓는 고인의 영정을 처음으로 맞은 원로배우 최불암은 “반짝이는 별이 사라졌다. 우리 또래의 연기자로서 조금 더 계셨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다”며 “고인이 남긴 업적이 오랫동안 빛나기를 빈다”고 애도했다.원로배우 이순재도 “60년대 영화의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한 거목이 한명 갔다. 이는 팬들이 다 기억할 것”이라며 “신성일씨 관련 작업은 많은 자료가 남아있어 후학에게도 좋은 교본이 될 것이고, 관계기관에서도 이를 홍보해 고인을 추모하고 아쉬워할 수 있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신영균 명예회장은 "배우라는 직업은 행복한 직업이다. 80년을 살다 갔지만, 영화 속에서 하고 싶은 것은 다 했다. 짧은 인생이었지만 행복했을 것"이라며 "이제는 천당 가서도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잘 지냈으면 좋겠다"며 추도했다.1962년 ‘아낌없이 주련다’에 아역으로 고인과 출연했던 안성기는 “‘스타’라는 이름이 누구보다 잘 어울리는 분이었다”며 "지난봄부터 내년(2019년)에 영화 한 편을 같이하기로 약속했고, 시나리오도 거의 완성됐다고 들었다. 오랜만에 같이 영화를 해서 기뻤는데 허망하게 가시니 너무나 안타깝다"고 말했다.

이따금 고인의 영정을 어루만지며 슬픔을 가누던 엄앵란은 취재진에 54번째 결혼기념일을 열하루 남기고 떠난 고인의 유언을 공개했다. 11월1일 고인을 마지막으로 봤다는 엄앵란은 “(며칠전 고인을 찾은) 딸이 ‘마지막으로 할 말 없느냐’고 하니, ‘재산없다’라고 답했다”며 “딸이 ‘어머니에게는 할 말 없느냐’고 물으니 ‘참 수고했고 고맙고 미안하다고 전하라’고 했다”고 전했다.‘원조 졸혼’격으로 수십 년을 떨어져 살아왔으면서도 방송을 통해 “신성일씨와 나, 우리는 동지야. 남자도 여자도 아니야. 영화하는 동지”라고 했던 엄앵란. 영정 앞에서도 남편을 가정적인 남자가 아닌 ‘사회적인 남자’라고 하면서 “사람이 존경할 만해서 55년을 살았지, 흐물흐물하고 능수버들 같은 남자였으면 못 살았어요”라고 회고했다. 엄앵란은 “신성일은 사회적이고 일밖에 모르는 남자라고 생각한다”며 “남편은 뼛속까지 영화인이었다. 까무러치는 때까지 영화 생각뿐이어서 가슴이 아팠다. 그렇게 버텨서 오늘날까지 많은 작품들이 나오지 않았나 싶다”고 덧붙였다.

‘원조 국민배우’를 향한 애도 물결이 이어지면서 스크린을 넘나든 고인의 불같은 열정과 사랑이 재조명되고 있다. 신성일은 빼어난 외모와 지적이고 반항적이면서 성적 매력이 넘치는 이미지로 1950~60년대 배우들과 차별화하면서 청춘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연 청춘 아이콘이었다. 신성일의 인기는 미국의 제임스 딘, 프랑스의 알랭 들롱 등 당대 월드스타들과 비견될 정도였다.신상옥 감독 영화 ‘로맨스 빠빠(1960)’로 데뷔한 이후 신필름을 나와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에 출연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를 스타덤에 올려놓은 작품은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으로 카리스마 넘치면서도 반항적인 이미지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청춘영화의 대명사가 됐다. 이 영화를 계기로 ‘세기의 결혼식’을 올린 신성일과 엄앵란이 주연한 청춘영화가 쏟아졌다.주연 출연만 507편, 상대 출연 여배우만 118명이었던 신성일. 생전에 대표작으로 세 편을 꼽았는데. ‘맨발의 청춘’에서 부잣집 딸을, ‘만추(1966)’에선 특별휴가를 나온 모범수 여성을, ‘별들의 고향(1974)’에선 호스티스 여성을 사랑한 로맨티스트였다. 배우를 넘어 제작, 기획에도 참여해 충무로에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지켜왔다.“1960년대 후반부터 정치권에서 숱한 유혹이 있었다. 이를 악물고 10년만 버텼다”고 회고했던 신성일의 열정은 개명한 정치인 강신성일의 인생으로도 이어졌다. 두 번의 낙선 끝에 대구 동구에서 16대 총선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돼 대중예술계의 정책 지향점을 넓히기도 했다.

2017년 폐암 3기 판정을 받고도 “그깟 암세포 모두 다 떨쳐내겠다. 이겨낼 자신이 있다”며 “막장드라마 대신 따뜻하고 애정 넘치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 영화 ‘행복’이라는 작품을 기획 중”라고 밝혔던 천생 영화꾼 신성일. 암 투병 중에도 지난 10월 청바지 차림으로 레드카펫을 밟은 부산국제영화제에서 2019년엔 영화 ‘소확행’을 내놓겠다는 의지를 밝혔지만,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이 시대 마지막 로맨티스트로 팬들과 영영 작별을 고했다.이런 신성일의 영화 열정을 기리기 위해 영화계는 훈장 추서를 추진 중이다. 이에 빈소를 찾은 나종민 문화체육관광부 1차관은 “국민에게 큰 기쁨을 주신 분이 돌아가셔서 정부도 안타깝게 생각한다”며 “영화계와 유족 측에서 훈장 추서를 말씀했다.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면서 영화계와 협의해 예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신성일은 2011년 내놓은 자서전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나는 신성일이다' 라는 자존심 하나로 평생을 살아왔다. 영광의 세월도 있었고,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굴욕적인 순간도 있었다. 내 혈압이 사건에 따라 오르락내리락했다면 아마도 100번은 더 죽지 않았을까 싶다”며 걸어온 길을 반추했다.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으로서 말년에 이 시대 청춘들에게 고언도 잊지 않았다. “나는 근 10년 이상 백수건달 생활을 할 때도 하루도 안 빼고 달리고 운동하며 심신을 단련했다”며 전한 메시지는 세대를 뛰어 넘는 큰 울림을 던지고 있다.“난 젊은이들에게 ‘정면돌파하라’고 외치고 싶다. 자신을 믿고 기회가 올 때까지 준비하고 기다려라.   
      
故신성일, 영천 자택서 영면…이철우 경북지사 추도사 
신성일은 독실한 불자…부인 엄앵란과 불교계와 깊은 교분
     

한국 영화계의 ’큰 별’ 배우 고(故) 신성일(본명 강신성일)이 11월7일 경북 영천시 괴연동 ‘성일가(星一家)’에서 영면에 들었다. 고 신성일은 이날 오전 10시 성일가 정원에서 열린 하관식(관을 땅속에 앉히는 의식)을 끝으로 별들의 고향, 영천에서 영원히 잠들었다. 하관식은 30여분 정도 진행됐으며 유가족과 참석한 영화계 인사들은 “영생하세요”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관식에는 주민 500여 명도 참석해 고인의 안타까운 타계를 애도하며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하관식에 앞서 성일가에는 고인이 주연했던 영화의 주제곡이 흘러나와 참석자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평생 고인의 팬으로 성일가를 자주 찾았다는 B씨(65·영천시 완산동)는 “고인은 은막을 주름잡았던 한국 최고의 국민 배우로 한국 영화계의 상징적 인물이었다”면서 “많이 그리워질 것 같다”고 말했다. 하관식에 이어 대구국제뮤지컬페스티벌 조직위원회가 마련한 추도식이 열렸다. 고인은 대구 출신으로 2008년부터 5년 동안 조직위의 제2대 이사장을 맡았다. 이후에는 명예조직위원장으로 추대돼 ‘뮤지컬 도시, 대구’ 알리기에 앞장서 왔다. 추도식은 고인에 대한 묵념과 약력 보고, 추도사 및 추모시 낭독, 추모공연, 분향 등의 순으로 진행됐다. 이철우 경북지사는 추도사를 통해 “힘들고 어려웠던 1960~1970년대 수많은 청춘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스스로 한국 영화발전의 초석이 되셨다”면서 “별이 빛나는 하늘에서 영화처럼 멋진 삶을 사십시오”라고 말했다. 경상북도와 영천시는 고인의 꿈이었던 ‘신성일 기념관’ 설립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로 했다. 생전 예술을 사랑했던 고인을 위해 경북도립교향악단은 고인이 좋아했던 음악을 위주로 추모공연을 했다.

한편, 신성일은 부인 염앵란과 함께 대표적인 불자 연예인이고 주위 분들도 많이 돌보았다고 전해 진다. 신성일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 엄앵란과 함께 불교계와 깊은 교분을 이어왔다.

주위의 영화인들도 잘 돌봐왔다고 한다. 이와 관련된 일화가 하나 전해지고 있다. 신성일은 2010년에 앞서 1999년에 작고한 영화배우 고 최무룡의 천도재를 부산 범어사에서 치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신성일과 최무룡은 생전에 절친했다고 한다.         
▲ 11월7일 경북 영천시 괴연동 ‘성일가(星一家)’ 정원에서 고 신성일(본명 강신성일)의 유해 안장을 위해 그가 믿었던 불교에 따른 종교의식이 진    

당시 불교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신성일은 “보름 전에 최무룡 선배님이 꿈에 나타나 상서로운 후광을 뿜으며 내 이름을 불러 잠에서 깨어났다”며 “고인이 자신의 넋을 위로해 달라는 의미로 꿈을 해석했다”며 천도재를 봉행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기도 했다.

천도재 이후 신성일은 “범어사 스님들께서 정성스럽게 천도재를 지내 주시어 정말 감격스럽고 고맙다”며 “매년 천도재를 올리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엄앵란도 독실한 불자로 알려졌다. 엄앵란 또한 왕년에 신성일과 함께 한국영화계를 이끌던 대스타였다. 엄앵란은 신성일과 결혼한 이후 사실상 은퇴했다. 그러다가 2000년대 초반에 주부 등을 주요대상으로 하는 다수의 프로그램에 출연해 세월의 무게가 느껴지는 조언으로 제2의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신성일은 한때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낙선하기도 하고, 안 좋은 일에 휘말리기도 하는 등 풍파를 겪기도 했다. 그때마다 부인 엄앵란이 곁에서 든든히 남편을 지켜주었고, 그런 엄앵란은 불교에 의지해 기도로 마음을 다스려 왔다고 한다.   
            
‘지지 않는 별’이되다…故신성일 추모 열기     

‘국민배우’ 신성일 생전에 끝까지 영화인으로 당당한 모습을 보여주기 위한 노력이 공개됐다. 11월18일 방송된 MBC 시사교양프로그램 '휴먼다큐-사람이 좋다'에선 신성일의 생전 부산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모습 등이 공개됐다. 신성일은 타계 한달 전인 10월4일, 부산 해운대구 영화의전당에서 열린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했다. 이날 공개된 영상에는 신성일이 레드카펫에 서기 전 준비 중인 모습이 담겼다. 레드카펫을 당당하게 걸어오며 취재진 앞에서 건재함을 과시했던 신성일의 모습과 달리 의료진을 대동하고 온 병약한 모습의 무대 뒤 신성일의 모습은 팬들을 안타깝게 했다.신성일은 진통제로 버티면서도 "오늘 목표가 '살아 있다. 죽지 않았다'였다. 루머가 뜨니까 해명해야 하지 않겠나. 백마디 말보다 사진 한 장으로 살아 있다고 보여줘야한다"라며 자신의 사망설에 대응하려 나왔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사망설이 난 것에 대해 반려견이 사망한 것이 알려지다가 와전되어 자신이 사망했다는 소문이 났다고 사망설의 전말을 설명하기도 했다. 이어 "2차로 전이됐다지만 이겨낼 것"이라며 치료에 대한 의지를 보이기도 했다.
▲ MBC 화면 캡쳐    

◆배우 故신성일 그가 마지막으로 가족들에게 남긴 말은?    

갑작스런 아버지의 임종에 대해 신성일의 둘째 딸 강수화씨는 아버지가 임종을 맞이하기 전, 아버지의 투병 생활에 대해 털어 놓았다. 병세가 악화돼 옮긴 광주의 한 병원에서 그는 통증이 너무 심해져 이렇게 누워도 아프고 저렇게 누워도 아픈 상황에서 진통제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힘든 투병 생활을 했다고 한다.항상 영화를 생각하며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신성일에게 병들고 근육이 빠져버린 몸은 자신의 모습이라고 상상하기 힘든 것이었다. 병원에 문병을 와서 발을 씻겨 주겠다는 엄앵란의 말에 단호하게 거절했다는 고 신성일. 이유는 바로 언제나 건강하고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그였기에 노랗게 황달 끼가 온 몸을 보이기 싫어서였다. 게다가 발톱도 깎지 못한 채 앙상한 병자의 발은 보는 이마저 마음이 아플 정도라고 했다.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이자, 자신이 출연한 영화의 주인공 같은 인생을 살다 떠난 한국 영화계의 거성 신성일의 마지막 폐암 투병생활과 가족들에게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휴먼다큐-사람이 좋다’를 통해 공개됐다. 신성일이 타계하기 전에 남긴 유언은 엄앵란에 고맙다, 미안하다고 전하라는 것이었다. 긴 세월 함께한 아내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느껴져 안타까움을 더했다. 

◆타계 4주전, 부산 국제영화제에 참석한 신성일의 미공개영상 단독 공개     

1964년 제 7회 부일영화상 남우주연상을 시작으로, 백상예술대상, 대종상영화제, 청룡영화상 등 시상식에서 수상한 신성일. 그가 살아생전, 마지막으로 참여한 공식 행사인 2018년 부산국제영화제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휴먼다큐-사람이 좋다’에서 최초 공개됐다. 부산 호텔에서 만난 신성일의 모습은 레드카펫 위에서처럼 건강한 모습이 아니었다. 두 명의 간호사를 대동한 채 양팔에 진통제를 맞고, 목까지 전이된 암 세포 때문에 목 보호대를 착용해야 하는 병약한 모습이었다. 그가 몸이 힘든 상태임에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한 것은 이장호 감독과 약속한 2019년 크랭크인 예정인 영화 ‘소확행’에 대한 애정과 그가 사망했다는 소문을 불식시키기고 건재함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신성일은 자신이 기르던 개가 2개월 전 사망한 것이 주변 사람들에게 회자되다가 개가 죽었다는 것은 빠지고 ‘신성일이 투병 중에 사망했다’는 소문이 났다는 것. 요양을 위해 영천 집을 비워 둔 사이 발생한 웃지 못 할 해프닝이었다.         
▲ MBC 화면 캡쳐  

◆가족의 고백- 엄앵란과 딸이 말하는 나의 남편 신성일, 나의 아버지 강신성일     

1960년 배우 엄앵란이 신상옥 감독의 영화 ‘로맨스 빠빠’에서 본 신성일의 첫인상은 ‘멋있다’였다. 1964년에 개봉한 정진우 감독의 영화 ‘배신’을 통해 연인이 된 두 사람은 같은 해 11월, 부부의 연을 맺었다. 엄앵란은 영화 ‘맨발의 청춘’에 출연한 젊은 신성일을 보면 80세가 넘은 지금도 여전히 ‘참 잘 생기고 싱싱했다’고 감탄한다. 특히, ‘깡패 역할의 액션이 마음에 든다’고 말하는 엄앵란은 여전히 신성일에 대한 애정을 내비쳤다. 그렇지만 엄앵란에게 남편 신성일은 ‘집안에서 볼 수 없는 대문 밖의 남편’이었다. 신성일·엄앵란 부부의 별거는 오랫동안 지속됐고, 신성일은 2011년 출간한 그의 자서전에서 본인의 혼외 로맨스를 솔직하게 털어놓아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일까, 신성일은 사망 전 마지막으로 남긴 말 중 하나가 부인 엄앵란에게 ’고맙고 미안하다고 전해라’였다고 한다. 
▲ MBC 화면 캡쳐    

딸 강수화씨에게 신성일은 미워할 수 없는 든든한 아버지였다. 2016년 영천에 내려온 막내 딸을 발에 물이 젖는다며 80세 노구임에도 번쩍 업어 들고는 개울을 건넜던 신성일. 딸 수화씨는 “개울가에서 자신을 업어줬던 그런 아버지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며 “평생 건강한 채 그 자리에 계실 줄 알았던 아버지가 하루가 다르게 쇠약해지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가슴이 아팠다”고 말했다. 엄앵란은 신성일이 타계한 뒤 신성일을 경북 영천 자택에 마련된 선영에 모시며 "부부로 지낸지 55년, 오늘 보니 당신 대단한 사람, 참 베푸는 사람이다. 여보 저승에서 만나. 내 자리 비워놓으라"고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한편, TV조선 '인생다큐-마이웨이'에서도 신성일 추모특집을 방송했다. TV조선은 11월8일 '인생다큐-마이웨이' 제122회서 '영화계의 큰 별' 고(故) 신성일 추모 특집 방송 '하늘의 별이 되다'를 방송했다. 이날 방송에서는 그간 한 번도 공개되지 않은 고인의 항암치료 과정과 요양병원에서의 모습, 생전 인터뷰 등이 공개됐다. 고인은 생전에 "그때 내 눈에 그 여자밖에 없었다"고 말할 정도로 부인 엄앵란과 애틋했던 시절과 사인까지도 비슷할 만큼 서로를 사랑했던 부부의 추억을 공개했다.

"나는 두려움 없다. 두려움을 가지면 어떻게 영화를 촬영하나? 그럴 땐 본인을 믿어야 한다"고 지론을 말하며 '폐암'이라는 인생의 거대한 두려움 앞에서도 결코 무릎 꿇지 않고, 이겨내고자 한 강한 의지도 전했다.

신성일 타계 며칠 뒤인 11월9일 신영균예술문화재단(이사장 안성기)이 주최한 ‘제8회 아름다운예술인상’ 시상식에서 신성일은 공로예술인 부문을 수상하게 됐다. 엄앵란은 상을 대신 받아들고 "한국 영화사 가장 화려한 발자취를 남긴 사람, 본인이 있었으면 좋아했을 것이다. 죽을 때까지 영화인이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신성일은 만인의 스타로 화려한 삶을 살다가 영원히 별이 됐다. 타계 후 보름도 더 지난 지금까지 신성일을 그리는 팬들의 추모의 메시지는 끊이지 않고 있다.           

“신성일 선생님에게 이 賞을”… 윤정희의 눈물
100여편 공동 주연한 윤정희가 말하는 신성일


“선생님과 100번째 영화를 같이 하는 건데 그걸 같이 못해 너무나 아쉽습니다. 오늘의 이 상(賞)을 신성일 선생님에게 바치고 싶습니다.” 영평상 공로상을 받은 배우 윤정희(74)가 고(故) 신성일을 언급하며 눈물을 비쳤다. 한국영화평론가협회(회장 조혜정)가 11월13일 서울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개최한 제38회 영평상 시상식에서였다. 남편인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함께 참석한 윤정희는 “‘청춘극장’으로 데뷔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공로상을 받게 돼 행복하고 감사합니다. 제 데뷔 시절은 한국 영화의 황금기였습니다. 좋은 감독님들의 좋은 작품에 출연해 럭키하다고 생각합니다. 2010년에는 이창동 감독님과 영화 ‘시’를 촬영한 것도 배우로서 큰 행운이었다”고 되돌아봤다.  
▲ 11월13일 영평상 시상식에서 공로상을 수상한 윤정희가 고 신성일을 추모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윤정희는 “제가 파리에서 신성일 선생님의 소식을 들었는데 지금도 눈물이 나려고 한합니다. 신 선생님께서는 저와 100편 가까운 영화를 같이 만들었습니다. 촬영하고 쉴 때 모든 개인 고통 즐거움을 저에게 하소연하고 즐겁게 이야기하며 그렇게 가깝게 지낼 수가 없었습니다. 선생님도 하늘나라에서 저를 많이 생각하실 것”이라며 울먹였다.  이날 시상식은 수상 여배우들이 하나같이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여 참석자들이 함께 눈시울을 붉혔다.

선성일과 윤정희. 두 배우는 한국영화의 황금기였던 1960년대부터 무려 99편의 영화를 함께한 사이다. 그 시작은 1967년 개봉한 ‘청춘극장’. 김내성의 소설을 원작으로 일제강점기의 청춘들을 그린 이 영화는 1200대 1의 경쟁을 뚫고 주연으로 발탁된 ‘배우 윤정희’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영평상을 수상하러 서울을 찾은 그가 당시 신성일의 모습을 회고했다. “‘청춘극장’ 때는 제가 너무 긴장을 해서, 긴장한 것밖에 기억이 안 나요. 첫 작품이라 그때는 잘 몰랐어요. 작품을 많이 하면서 형제같이 지내게 됐죠.” 99편이라면 그의 300여편 출연작 가운데 무려 3분의 1이다. 500편 넘는 신성일의 출연작에선 5분의 1을 함께한 셈이다. 대부분 주연이란 것을 감안하면 출연작 편수도, 함께한 작품 수도 요즘 배우들로선 상상하기 힘든 규모다. 그의 말마따나 “말이 안 되는” 규모다. 그 중에도 ‘안개’(1967), ‘장군의 수염’(1968), ‘위기의 여자’(1987)등은 호평과 함께 두 사람이 함께한 대표작으로도 꼽힌다. “거의 매일 만나다시피 했어요. 장면마다 다른 팀이 촬영할 때, 우리가 쉬는 시간이면 신성일 선생님이 ‘미스 윤’ ‘미스 윤’하면서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즐거운 일, 마음 아픈 일, 저를 동생같이 생각해 그냥 모든 얘기를 다하셨어요. 고민 하소연도 하시고. ‘미스 윤, 그런데 말야’ 하시던 게 지금도 떠올라요.” 두 사람은 나이를 먹어가면서도 처음처럼 대개 ‘선생님’과 ‘미스 윤’으로 서로를 불러왔다. 신성일은 생전에 회고록 『청춘은 맨발이다』에서 “나와 함께 가장 많은 작품을 한 여배우는 윤정희”라며 “엄앵란 다음으로 내 속내를 터놓을 수 있는 여배우”라고 밝힌 바 있다. 2017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열린 신성일 회고전 때에도, 2016년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윤정희 데뷔 50주년 특별전과 그에 앞서 팬들이 마련한 데뷔 40주년 상영회 때도, 당연한 듯 현장에 함께해 서로를 축하했다. 두 사람은 화려한 자리 이전에 지금과는 여건이 사뭇 다른 촬영 현장을 함께 겪은 동료였다. “제가 늘 그래요, 건우 백의 연주 여행을 따라다니면서 연주하자마자 쉬지도 못하고 또 다른 나라 가고 하는 게, 우리가 영화 찍을 때 잠 못자고 밤새며 고생했던 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고.” 촬영 도중 작게라도 충돌한 일을 묻자 그는 “전혀”라고 잘라 말했다. “그럴 일이 없죠. 호흡이 잘 맞았으니.” ‘배우’ 신성일에 대해선 이렇게 말했다. “그 많은 역할을 역할마다 소화를 잘 하셨어요. 화면에 나타나잖아요.”  신성일은 10여년 전 파마머리로 공식석상에 나타나 “윤정희·백건우 부부 덕”이라고 한 적 있다. 피아니스트 백건우가 선물한 베토벤 전기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아 닮은 머리 모양을 했다는 얘기였다.  

윤정희는 영화계 선배이자 신성일의 부인 엄앵란과도 ‘결혼교실’‘떡국’등 70년대 개봉한 영화에 함께 출연한 바 있다. 영화로는 자주 만나지 못했어도 “앵란 언니”라고 부르는 가까운 사이다.      
수암(守岩) 문 윤 홍<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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