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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전 침략국 심장부서 ‘독립함성’…동아시아 反제국주의 기폭제
‘민족자결 주창’ 2·8독립선언 100주년…'3·1운동 마중물' 넘어 의미 재평가
기사입력: 2019/02/10 [12:08]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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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자결 주창’ 2·8독립선언 100주년…'3·1운동 마중물' 넘어 의미 재평가

“전(全)조선청년독립단은 아(我) 이천만 민족을 대표하야 정의와 자유의 승리를 득(得)한 세계 만국의 전(前)에 독립을 기성(期成·꼭 이루기를 기약)하기를 선언하노라 … (중략) … 한·일합병(강제병합)이 오족(吾族·우리 민족)의 자유의사에 출(出)하지 아니하고 오족의 생존과 발전을 위협하고 또 동양의 평화를 교란하는 원인이 된다는 이유로 독립을 주장함.”(2·8독립선언문 및 결의문)

서설(瑞雪)이었나. 지금부터 꼭 100년전 1919년 2월8일 일본제국주의의 심장부에서 유학 중이던 조선 학생들이 독립을 선언한 날 도쿄(東京)에는 30년 만의 큰 눈이 내렸다. 2·8독립선언 100주년을 하루 앞둔 7일 도쿄는 그날의 시린 아픔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은 높고 맑기만 했다. 이날 도쿄 지요다(千代田)구 간다(神田) 재일본한국YMCA 정문 옆에는 ‘조선독립선언(1919 2·8)기념비’가 묵묵히 서 있었다. 도쿄에서 몇 안 되는 2·8 독립선언을 알리는 흔적이다. 재일본한국YMCA에선 이날 2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100주년 기념 전야제가 열렸다.

실제 독립선언이 있던 장소는 이곳에서 서쪽으로 700m 떨어진 니시칸다(西神田) 지역에 있다. 1906년 조선의 기독교인들이 일본에 와서 세운 당시 재일본도쿄조선YMCA회관은 송년회 등으로 조선 유학생이 자주 모인 곳이다. 일제 감시가 느슨해 웅변대회가 자주 열렸고 이는 유학생의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계기가 됐다고 한다.

245㎡(약 74평) 규모의 서양식 2층 목조건물이던 회관은 1923년 간토(關東) 대지진 때 완전히 불타 없어졌고 현재 5층짜리 현대식 건물로 탈바꿈한 상태였다. 1층에는 세탁소가 들어섰다. 무심한 세월 속에 의거의 현장은 사라져 가고 있어도 불의의 시대에 정의를 외친 2·8독립선언의 민족자결 정신은 우리 겨레의 역사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사실상 적도(敵都)에서 발표된 2·8독립선언은 일제 강점 하에서 조선에도 큰 영향을 주어 범민족적 독립운동인 3·1운동의 불씨를 지폈고, 같은 해 4월11일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하는 계기가 됐다.

일본 시민단체인 고려박물관 하라다 교코(原田京子) 이사는 2·8독립선언과 3·1운동 정신에 대해 “단순히 일본을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동양 평화를 희망한 이 운동들은 이후 한국에서의 광주민주화운동, 촛불혁명으로 이어져 지금도 살아 있다”고 평가했다.    

침략국 심장부 도쿄서 “대한독립” --그들은 어떤 미래를 꿈꿨을까
임시정부 등 뿌리 넘어서 정신의 원천 …2·8선언 일본은 물론 해외서도 큰 파문
       

“(독립)요구가 실패 시는 오족(吾族·우리 민족)은 일본에 대하여 영원히 혈전(血戰)을 선(宣·선포)함.”(2·8독립선언 결의문)

100년 전 1919년 2월8일 일본 도쿄의 조선 유학생들은 2·8독립선언을 통해 영구 혈전(血戰)을 언급하면서 조국광복에 대한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 조선 유학생들을 독립의 열망으로 이끈 것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대두한 민족자결주의였다.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을 받지 않고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뜻이다.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이끄는 미국의 활약으로 1918년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세계 약소민족은 독립을 향한 커다란 용기를 얻는다. 재일조선인 유학생들도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우리나라에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 움직임을 시작한다.

▲ 일본 제국주의의 심장부 도쿄에서 1919년 2·8독립선언을 주도한 청년 지사들. /사진=독립기념관    

1919년 1월6일 조선유학생들은 재일본동경조선YMCA(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 모여 최팔용·백관수·김상덕·김도연·전영택 등 10명을 실행위원으로 선출하고 독립선언을 결정했다. 병으로 사

임한 전영택 대신 이광수·김철수가 더해져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했다. 당시 도쿄가 서울보다 외국의 소식을 접하기 쉬운 국제도시였던 것도 유학생들에게 독립 열망이 달아오르게 한 요인으로 거론된다. 일본에 있던 유학생들은 전세계적으로 퍼진 민족자결주의의 흐름을 조선 본토보다 먼저 파악할 수 있었고, 제1차 세계대전을 정리하는 1919년 프랑스 파리 강화(講和)회의가 우리 민족의 독립 의지를 세계에 알릴 기회라는 사실도 알았다.

운명의 2월8일 오전. 핵심 멤버들이 모여 영어와 일본어로 된 독립선언문과 결의문을 일본 정부 요인들, 일본 귀족원과 중의원 의원들, 도쿄 주재 각국 공관, 매체에 우편으로 보냈다. 이어 당시 조선인 유학생의 거의 전체라고 할 수 있는 600여명(재일한인역사자료관 기준)이 오후 2시 YMCA 강당에 모여 독립선언문·결의문을 채택하는 거사를 일으켜 조선의 독립을 만방에 알렸다. 독립선언 후 일본 경찰은 주도 학생 등 60여명을 체포했으며 이 가운데 9명이 기소됐다. 2·8선언 소식은 일본 국내는 물론 해외에도 보도돼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사실상 적도(敵都)에서 독립선언이 발표됐다는 소식은 조선에 큰 영향을 주어 3·1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광복군의 정신이 대한민국의 뿌리라면 그 정신의 원천은 2·8선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할 수 있다.

과거 3·1운동의 마중물로만 인식됐던 2·8선언이 최근에는 당시 조선, 일본, 중국을 연결하는 동아시아지역의 반(反)제국주의 네트워크 차원의 보다 큰 틀에서 재평가되고 있다. 1910년 일본의 대한제국 강제병합에 이어 1915년 일본의 대중(對中) 21개조(條) 요구로 동아시아에서 반일(反日) 기운이 높아졌다. 반(半)식민 위기의 중국 유학생과 망국의 조선 유학생의 교류로 조선, 중국, 대만인이 연결된 반제국주의 운동이 고개를 들었다. 이는 2·8선언에 일조했다.
▲ 2·8독립선언 100주년을 하루 앞둔 7일 도쿄 지요다구 간다 사루가쿠초 재일본한국YMCA 정문 옆에 우뚝 서 있는 ‘조선독립선언기념비’를 방문객이 가리키고 있다.     

2·8선언의 결과는 일본 사회에 충격을 줘서 일본 내 진보적 지식인 사이에서도 조선과 조선의 민족주의에 대한 이해를 높였다. 청일전쟁 결과로 1895년 일제의 첫 ‘외래 신민(臣民)’이 된 대만인에게도 영감을 줬다.

이같은 사실은 2·8선언이 일본의 철권통치에 맞서 돌출적으로 발생한 일시적 사건이 아니라

는 점을 보여준다.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이어 민족자결주의가 대두한 가운데 민족과 지역을 넘어 형성된 반제국주의 네트워크의 도도한 흐름이 파리 강화회의를 계기로 표출된 것이다.

오노 야스테라(小野容照) 규슈(九州)대 인문과학연구원 역사학부문(조선사) 준(準)교수는 2월2일 도쿄 한국중앙회관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이와 관련해 “2·8선언은 ‘3·1운동의 도화선’이라는 평가를 뛰어넘은 중층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며 “2·8선언 자체가 다양한 의의와 논점을 가지고 있다”고 강조했다.

체포된 조선 유학생들 변호한 ‘일본판 신들러’
후세 다쓰지·하나이 다쿠조 등 日변호사 “자기나라 독립 외친 것이 내란죄냐” 항변
     

“학생 신분으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부르짖은 것이 어찌하여 일본 법률의 내란죄에 해당하느냐. 민족자결의 사조(思潮)에 비추어 학생들의 주장은 정당한 것이다.”   

1919년 2·8독립선언으로 체포된 조선 유학생을 전심으로 도운 일본인들이 있었다.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1953), 하나이 다쿠조(花井卓藏) 같은 일본인 변호사들이다. 이들의 노력으로 내란죄를 적용하려고 했던 검사의 논고는 인정받지 못했고 출판법 위반이라는 비교적 가벼운 판결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고 한다. 일본인 지식인들은 체포된 유학생들을 위한 YMCA의 모금운동에도 흔쾌히 동참했다. 100년의 시공(時空)을 초월하는 한·일 우의(友誼)의 진정한 가교인 셈이다.            
▲ ‘일본인 신들러’ 후세 다쓰지     

그중에서도 후세 다쓰지는 2000년 한국의 한 방송에서 소개된 뒤 ‘일본인 신들러’라고 불리고 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사업가였던 오스카 신들러는 자신의 재산을 털어 유대인을 구해 인도주의의 상징이 된 인물이다.

후세 다쓰지는 도쿄전문학교(현 와세다대)를 거쳐 메이지(明治)법률학교를 졸업한 뒤 22세 때 판사검사등용시험에 합격했다. 검사 임관 1년 만에 퇴임한 뒤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2·8독립선언 사건 외에도 1923년 일왕(日王) 암살을 실행하려던 중 발각돼 체포된 박열 의사 사건, 조선공산당 사건 등을 변호하고 일본의 대(對)한반도 및 조선인 정책을 비판했다.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의 조선인 학살 진상 규명 등 조선인 민권 개선을 위해 노력했다.

2004년 한국정부는 후세 다쓰지에게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일본인으로서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은 인물은 그가 처음이었다.   

文 대통령 “2.8독립선언 의미 되새기며 독립운동 역사 기리는 날 되길”     

문재인 대통령은 8일 “‘2.8독립선언’의 의미를 되새기며 3.1독립운동과 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지는 우리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한다”고 밝혔다.  

이날 문 대통령은 페이스북에 ‘2.8독립선언을 기리며’라는 글을 올리며 “100년 전 오늘, 600여명의 조선유학생들이 함박눈이 내리는 도쿄 조선YMCA회관에 모여 일본의 심장 한가운데에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날 유학생들이 낭독한 ‘조선청년독립선언서’는 우리 독립운동의 화톳불을 밝히는 ‘불쏘시개’가 되었다”고 평가했다.  이어 “‘2.8독립선언서’는 학생들에 의해 작성되었고 3.1독립운동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데 큰 의미가 있다”며 “젊은 유학생들은 민족의 의사를 무시한 일제의 군국주의를 규탄했고 동양평화와 세계평화를 위해 독립이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정당한 방법으로 독립이 이뤄지지 못한다면 최후의 일인까지 열혈을 흘릴 것, 영원한 혈전을 불사할 것이라는 의기를 보여주었다”고 전했다.    

또한 문 대통령은 “오늘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행사가 도쿄 재일한국 YMCA와 서울 YMCA에서 동시에 열린다. 한완상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 위원장님과 피우진 보훈처장이 유학생 대표들과 도쿄 행사에 함께한다”라며 “저도 독립선언을 실행한 최팔용, 윤창석, 김도연, 이종근, 이광수, 송계백, 김철수, 최근우, 백관수, 김상덕, 서춘 등 도쿄 조선청년독립단 열한 분의 이름 하나 하나를 기억하겠다”고 말했다.     

독립투쟁·민주화···학생운동의 시작은 100년전 도쿄에서
100주년 맞아 학생운동 원류로 조명…“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보여줘
    
1919년 기미년 2월 8일 일본 도쿄에서 조선인 유학생들이 모여 2·8 독립선언을 했다. 조선인 유학생들이 도쿄의 당시 조선기독교청년회관, 현재 재일(在日) 한국YMCA 건물에 모여 독립선언서와 결의문을 발표한 역사적 사건이다. 조선인 유학생들은 독립선언서와 독립청원서를 각국 대사관과 공사관 등 외교 공관은 물론 일본 정부와 국회에도 발송하고 독립선언식을 열었다. 2·8독립선언은 일제(日帝)의 무단통치에 신음하던 동포들에게 조국 광복에 대한 희망을 심어주고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를 세계만방에 알린 국제적인 사건이다. 한일(韓日)국교 수립 뒤론 매년 일본 도쿄의 재일본한국YMCA회관에 재일교포, 재일한국인, 광복회원, 정부와 주일본 한국 대사관. 한국·일본YMCA의 관계자 등이 모인 가운데 2·8 독립선언 행사가 열려왔다.  

◆‘敵 심장부’에서 독립선언       

적국인 일본의 심장부인 수도 도쿄에서 통쾌하게 독립선언을 한 것 자체가 세계 역사상 유례가 드문 대담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더구나 젊은 유학생들이 앞장섰다는 것은 그야말로 학생이 공부하고 유학하는 목적이 개인의 출세나 영달이 아니라 나라와 민족, 국민을 위하는 것임을 보여준 사례로 평가할 수 있다. 당시 학생들의 독립 의지와 민족의식을 짐작할 수 있는 거사이다. ‘청년이 살아야 민족이 산다’ ‘젊은이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나올 수밖에 없는 우리 역사의 명장면이다.     
▲ 8일 서울과 일본 도쿄에서 '2·8 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왼쪽은 서울 종로구 서울YMCA, 오른쪽은 일본 재일본 한국 YMCA에서 기념식 참석자들이 만세삼창을 외치는 모습.    

◆‘스릴러 영화’ 뺨치는 독립선언 과정

이날 조선인 재일 유학생 600여 명 앞에서 와세다(早稻田)대 정경과 학생이던 최팔용 (1891~1922년)이 ‘조선청년독립단’ 발족을 선언했다. 그 뒤 같은 와세다대 철학과 학생인 소설가 이광수(1892~1950년)가 기초한 2·8독립선언서를 메이지(明治)대 법학과 학생이던 백관수 (1889~1952년)가 낭독했다. 당시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활동하다 1월 중순 파리강화회담이 열리던 프랑스 파리로 건너가 2월부터 독립을 위한 외교활동을 펼친 김규식(1881~1950년) 선생의 지시에 따라 조소앙(1887~1958년) 선생이 도쿄에 파견돼 유학생을 지도해 이뤄졌다는 설도 있다. 조소앙 선생은 2월 1일 중국 지린(吉林)에서 발표된 최초의 독립선언인 대한독립선언에 서명한 독립운동가이다. 2·1 대한독립선언, 2·8 독립선언과 3·1 독립선언이 서로 연관됐음을 보여주는 독립 운동가들의 활약상이다. 독립 운동가들이 국경을 넘나들고 국제 전보를 치며 독립선언서를 조선 땅에서 인쇄해 일본으로 다시 가져가는 장면 등은 한 편의 스릴러 영화를 보는 느낌이 들 정도다. 과감하고, 치밀한 준비 속에 펼쳐진 초기 독립운동의 모습이다.  

◆모든 학생운동의 元祖

2·8 독립선언은 같은 해 있었던 3·1운동은 물론 그 뒤 국내외에서 벌어진 독립운동의 기폭제로 평가받았다.  조선인 유학생들이 주도한 2·8독립선언은 3·1운동은 물론 1926년의 6·10만세운동, 1929년의 광주학생운동으로 이어지는 독립운동과 학생운동을 촉발한 신호탄이었다. 2·8독립선언은 독립운동은 물론 이 땅에서 벌어진 모든 학생운동의 원조(元祖)로 볼 수 있다. 학생들이 기득권이 아닌 민중과 민족의 이익을 위해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겠다는 선구자적 의지를 보였다는 점에서 특히 그렇다. 특히 올해 100주년을 맞아 더욱 뜻이 깊다.

그러면 허를 찔린 일제는 당시 어떻게 대응했을까. 이날 600여 명의 재일 조선인 학생은 독립선언서 낭독에 이어 참석자들이 독립선언을 가결하고 앞으로의 운동 방향을 논의했다. 그런데 갑자기 일본 경찰이 들이닥쳐 참석자 가운데 60여 명이 잡혀갔다. 이 가운데 8명은 나중에 기소까지 당했다. 학생들은 2월12일에 다시 모여 독립운동을 논의하다 또 붙잡혀 갔다. 이런 일련의 사건이 국내외에 계속 보도되면서 국내 조선인의 의식을 자극해 결국 3·1운동으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다.

2·8 독립선언서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 선언문에 ‘조선의 독립국임과 조선인의 자주민임을 선언’했다, 이는 3·1독립선언서와 일치한다. 3·1 만세운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최후의 일인까지 최후의 일각까지 민족의 정당한 의사를 쾌히 발표하라’며 민족의 궐기를 촉구했다. 2월1일 중국 지린(吉林)에서 발표한 2·1 독립선언에 이어 조선의 유학생 청년들이 일제 심장부에서 독립선언서 낭독과 집회라는 과감한 행동에 들어가면서 민족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3·1운동의 도화선이 됐다고 할 수 있다.  

◆‘국제정세 흐름’ 활용  

그러면 1919년 2·1 대한독립선언, 2·8 독립선언, 3·1 독립선언과 만세운동을 왜 벌였을까. 독립선언 몇 달 전인 1918년 11월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프랑스 파리에서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 등 각국 대표가 모여 강화조약의 내용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1차대전 뒤 새로운 세계질서를 재편하는 외교적 회의가 열리니 조선의 지식인과 학생들은 독립의 기회로 보고 행동에 나섰다. 국제정세의 흐름을 속에서 독립을 이루고 자존과 국민 이익을 되찾을 방법을 구체적으로 추구했다는 점이 돋보인다. 게다가 한 해 전인 1918년 1월에는 미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이 유명한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포함된 14개조를 발표했다. 민족자결주의는 각 민족 집단이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독립과 정치 조직, 정치적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고, 타민족이나 타국가의 간섭을 인정하지 않을 집단적 권리를 말한다. 그 발표 뒤 전세계 약소민족, 피압박 민족의 가슴에는 불이 붙었다.    

◆‘민족자결주의’ 理想論 철저히 무시     

월슨의 민족자결주의는 어떤 성과를 거뒀나? 민족자결주의가 포함된 1개조는 미국 프린스턴대 총장 출신인 윌슨 대통령의 이상주의가 작용한 선언이라는 평가이다. 민족자결주의는 다민족국가이자 패전국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오스만튀르크 제국을 해체해 수많은 나라를 새로 만드는 데에만 적용한 측면이 강하다. 14개조에는 ‘식민지 문제의 공정한 해결’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강대국 식민지를 독립시키고 해방시킨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오히려 파리강화회의의 결과로 체결된 베르사유조약 등 강화조약을 통해 승전국인 강대국들은 패전국의 식민지나 영토를 마음대로 차지하고 나눠가지고 자신의 영향권으로 편입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100년 전에도 민주공화국에 목말라

2·8 독립선언은 어떤 형태의 독립국가를 추구했을까. 독립선언에만 그치지 않고 독립운동의 목적을 ‘민주공화국’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나라를 세우는 것임을 분명히 한 최초의 선언이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민주공화국과 한민족의 인류에 대한 기여라는 지향점을 분명히 담고 있다는 게 2·8 독립선언의 가장 큰 특징이다. 바로 ‘정의와 자유를 기초로 한 민주주의 선진국의 모범을 취하야 신국가를 건설한 후에는 건국 이래 문화와 정의와 평화를 애호하는 우리 민족은 세계의 평화와 인류의 문화에 공헌함이 있을 줄을 믿노라’라는 구절에 이런 내용이 담겼다. 독립선언을 해도 나라의 독립에 그치지 않고 독립 뒤에 인류 문명사에 기여할 내용까지 밝혔다는 점에서 참으로 뜻깊다고 하겠다. 그런 점에서 한민족의 독립운동은 그 자체로 인류사적인 가치가 있다. 오늘날 대한민국이라는 민주공화국의 뿌리가 여기까지 뻗어있다. 2·8독립선언은 참으로 자랑스러운 일이다.  

◆국제사회, 그때나 지금도 냉혹해    

2·8 독립선언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 사람에 따라 수많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이 땅의 학생운동은 공동체를 위한 자기희생과 헌신으로 시작했다는 사실도 그 중 하나이다. 이를 바탕으로 학생운동 경력을 자신의 입신(立身)이나 정치적 이익에 활용하는 것은 운동의 정신과 동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국제적인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은 윌슨의 14개조가 국제사회의 흐름이 될 것으로 판단해 적극적인 움직임에 나섰지만 강대국은 이런 이상주의나 이념은 장식용으로만 사용하고 자국의 이익만 챙겼다. 결국 수많은 약소민족과 피압박 민족은 눈물을 삼키며 장기간의 독립운동에 들어갈 수밖에 밖에 없었다. 대부분 제2차 세계대전 뒤에나 독립을 이룰 수 있었다. 한민족도 그 중 하나다. 이처럼 냉혹한 국제관계는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이다. 결국 국제사회에선 나라나 국민이 힘을 가져야 제대로 뜻을 펼 수 있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베트남에서 열리는 2차 북미정상회담이 목전에 다가온 지금, 100년전 2·8 독립선언은 생각하기에 따라 우리에게 참으로 많은 가르침을 준다.     

일본 지식인 226명 “日정부, 식민지배 사죄로 韓日갈등 풀어야”    

와다 하루키(和田春樹) 도쿄대 명예교수 등 일본 지식인 226명이 6일 성명을 통해 ‘일제의 한국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를 통해 한일 갈등을 풀어야 한다’고 일본 정부에 촉구했다. 이들은 특히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은 ‘1910년 한일(韓日)강제병합이 무효였다’는 한국 측 주장을 무시하고 강제적으로 맺은 불평등 조약임을 강조했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에 기초해 한국 대법원의 강제 징용 피해자 배상 판결에 대응하기 위해 제3국 위원이 참여하는 중재위 회부 절차를 밟기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와다 교수 등은 이날 오후 도쿄 중의원 제2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2019년 일본 시민 지식인 성명’을 발표했다. 와다 교수를 포함해 교수, 변호사, 언론인과 와세다(早稻田)대 이종원 교수 등 21명이 이번 성명서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특히 이들은 “올해는 ‘3·1 독립선언문’이 발표된 지 100년이 되는 기념비적인 해”라며 성명서에 독립선언문 내용도 담았다. 이들은 “당시 조선 민족은 일본에 병합되어 10년간의 고통을 겪으면서도 ‘일본을 위해서라도 조선이 독립해야 한다’고 설득하고자 했다”며 “이제 우리들은 조선 민족의 이 위대한 설득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동북아 평화를 위해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무라야마 담화와 간 총리 담화를 바탕으로 한 식민 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죄야말로 한일, 북일(北日) 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키는 열쇠”라고 덧붙였다. 

와다 교수는 “현재의 일본과 한국의 비정상적인 대립과 긴장 관계를 우려해 긴급히 성명을 발표하게 됐다”며 “일본인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과거를 점차 잊고 있다. 무라야마 담화와 간 총리 담화를 잊어버리면 일본은 이웃 국가와 제대로 지낼 수 없다”고 성명서 발표 이유를 설명했다. 
▲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 등 6명은 2월6일 오후 도쿄 지요다구에 있는 중의원 제2 의원회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이런 내용을 담은 '2019년 일본 시민 지식인 성명'을 발표했다.    

발기인들은 1910년 한일 병합조약의 불합리성과 1965년 한일 기본조약의 문제점도 집중 조명했다. 가스야 겐이치(糟谷憲一) 히토쓰바시(一橋)대 명예교수는 “‘일본이 언제까지 한국에 사죄해야 하느냐’는 말도 있지만 일본은 역사적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일본 자객은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전대미문의 행동을 했다. 병합조약도 강제로 체결했다. 이를 감안할 때 청구권협정이 제대로 체결됐다고 말하는 게 이상하다”고 했다.

다나카 히로시(田中宏) 히토쓰바시대 명예교수도 “1910년 병합조약은 여러 문제가 있다. 그 조약에 따르면 한국은 독립 자체를 할 수 없다. 병합조약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해 이번 성명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게 됐다”고 밝혔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청구권협정에 기초해 한국 대법원의 강제 징용 피해자 판결에 대응하는 강경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청구권협정은 ①협정의 해석이나 시행에 관한 분쟁이 발생하면 우선 양자 협의로 해결하고 ②양자 협의가 실패하면 한일 정부가 한 명씩 임명하는 위원과 제3국 위원이 참여하는 중재위를 가동하도록 돼 있다. 일본 정부는 지난 1월9일 한국에 양자 협의를 공식 요청했고, 30일 이내에 답변을 달라고 요청했다. 

앞서 2월2일 아사히(朝日)신문은 ‘일본 정부 내에선 한국이 양자 협의에 응할 가능성이 낮다고 보고 다음 단계인 중재위 회부 단계를 준비하고 있다’고 전했다. 중재위 회부 시기는 ‘최초 협의 요청 시점으로부터 60일이 되는 3월 초순까지 중재 절차에 들어가는 방안이 유력하다’고 덧붙였다. 일본 외무성 관계자는 “한국의 징용공(강제 징용) 판결에 대해 일본 정부 내 비난 목소리가 매우 높다. 중재위에서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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