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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과 가톨릭의 수난

심재길 | 기사입력 2019/03/05 [22:28]
대담한 무신론 자리잡고 공산주의 씨앗 된다

프랑스 혁명과 가톨릭의 수난

대담한 무신론 자리잡고 공산주의 씨앗 된다

심재길 | 입력 : 2019/03/05 [22:28]

프랑스 혁명은 1789714~1794727, 혹은1799 119일까지였다고 본다. 당시 상황을 보면 전 국민 2500만명 중 약 2% 정도인 제일 신분(로마가톨릭 성직자), 2신분인(귀족)들은 전 국토의 절반을 차지하고 국가의 중요 요직을 독점하고 각종 세금을 면제받고 사치한 생활을 누리는 반면 98%에 해당하는 대부분의 국민들은 무거운 세금을 감당 해야했다.

 

이 무렵 미국 독립전쟁에 참여하여 국가부도 상태였다. 루이 왕정은 국민들을 더욱 압박 했다. 마침내 누적되었던 불만을 품어오던 시민들이 혁명을 일으켜 구제도(앙시엥 레짐)를 타파하면서 가톨릭 교회와 성직자들에게 복수하기 시작했다.

 

혁명의 주도세력인 쟈코뱅당은 공포정치로 국왕 루이 16세 부부를 체포하여 단두대에서 처형시켰다. 또한 수도원을 폐쇄하고. 교회재산을 몰수하고 약 4만여명의 가톨릭 성직자들을 체포.투옥 유배 처형시켰다. 이 혁명은 전형적인 시민혁명이었다.

 

과격한 공포정치의 주도세력인 쟈코뱅당은 1794727일에 45명을 단두대에서 처형시키고 이후 3일동안 103명을 처형시키는 만용을 부렸다.

 

이들 쟈코뱅당의 독재를 제압한 데미도르의 반동(themidorian Reaction)을 혁명의 종결로 생각하기도 하지만 나폴레옹 보나파르트(Napoleon Bonaparte)의 구테타로 총재정부를 해산시키고 통령정부를 수립하여 강력한 중앙 집권체제를 구축한 1799119일을 혁명의 종결로 간주한다.

 

이때 로마 바티칸의 교황 피우스(Pius 61775~1798)는 프랑스 혁명을 악마의 혁명이라고 맹비난했다. 이에 프랑스 혁명군 알렉산더 베르띠에(Alexander Berthier)장군은 이탈리아로 처들어가서 로마시를 점령한 후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으로 들어가 교황을 체포했다.

 

이때 교황은 자신의 즉위 23주년 기념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1798215일이었다.

 

베르띠에 장군은 교황은 어떤 기능도 해선 안되고 어느 누구에게도 교황직을 계승할 수도, 해서도 안된다고 포고령을 발표 했다. 그는 80세의 교황을 체포 압송하여 프랑스 남부 리용과 마르세유 사이 발랑스(Valence) 감옥에 유폐시켰다.

 

교황은 그 다음해 829일 죄수의 신분으로 옥사했다. 그의 시신은 매장도 되지 못한채 방치 되다가 18022월에 베드로 성당으로 이장되었다.

 

로마 교황권은 나폴레옹 집권 중에 계속 추락하였다. 나폴레옹은 종교에 무관심했다.1801715일 제251대 교황 피우스 7세와 조약을 체결했다. 혁명으로 인한 질서 회복과 민심수습을 위해 교황의 협조를 얻기 위해서였다. 내용은 교회 재산 몰수승인, 교황이 임명한 주교를 파직시키고 대신 나폴레옹 정부에 충성을 서약한 사람들을 주교에 임명하는 내용들이었다.

 

나폴레옹은 새로운 주교를 임명했다. 영국과 러시아를 제외한 전 유럽을 정복한 그는 독일로 쳐들어가서 교황령 전부를 몰수하고 300만 가톨릭 신자들을 해산 시켰다.

▲ 1804년 교황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에 참석했다. 나폴레옹은 전통적 대관식에서처럼 교황이 씌워주는 왕관을 받지 않고 스스로 썼다. 피우스 7세는 그를 축복하는 손짓을 하며 뒤에 앉아 있다. 나폴레옹은 1808년 로마교황청을 점령하고 교황을 감금시켰다.    

 

1804년 교황 피우스 7세는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에 참석하여 도유했다. 나폴레옹은 1808년 로마교황청을 점령하고 교황을 감금시켰다. 또한 교황청 군대를 해산하여 흡수 합병했다. 그리고 1809년에 교황령을 프랑스에 합병시켰다. 그 대신 연 200만 프랑을 지급하기로 했다. 교황은 이에 반발하여 1809610일 나폴레옹을 파문하는 교서를 자성했으나 미처 행동으로 옮기지 못했다. 나폴레옹은 이를 빌미로 교황을 납치하여 감금한 후 1812년 파리 근교 퐁텐블로 이송했다. 18141월여기서 다시 이탈리아 북부 사보나로 이송중 나폴레옹이 몰락한 후 석방되어 로마교황권이 부활하기 시작했다.

 

교황권은 예수회를 부활시키고 1815년 오스트리아 빈 회의에서 콘살비 추기경에 의해 회복했다. 1816년에는 성서공회를 정죄하고 백성들의 성경 사용을 막기도 했다. 1870718일 교황의 무오설을 반포 했다.

 

이와 같이 피우스 7세 부터 교황권의 부활은 요한계시록 131~4절의 예언의 성취를 확인케 한다.(이상락저 다니엘 240~242)

 

1793년 프랑스 혁명의회는 그리스도교를 폐지하고 성경을 금지한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이런 결과는 기나긴 중세 동안 교황권의 잘못된 행동에 대한 결과들이었다.

 

그 결과들로서 지식인들인 볼테르, 루소와 같은 사람들에 의해 대담한 무신론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성경은 그것을 일대 지진이라고 했다.(요한계시록1113)

 

프랑스 혁명은 공산주의라고 하는 현존하는 유산을 남겼다. 쏘비에트 레닌과 트로츠키는 1917년 볼쉐비키 혁명을 준비하면서 프랑스 혁명 전 과정을 세밀히 분석했다.

 

마르크시스트 역사가들은 1789년 프랑스의 부르주아혁명이 19세기 유럽에서의 연속적인 혁명적 요소들을 초래 했다고 정의했다. 부르주아 혁명은 18483월 프랑스에서 프톨레타리아 혁명이 일어나는데 밑거름이 되었으며 사회주의와 공산주의혁명이 전 세계로 확산되게 했다.

(‘심재길의 성경분석-역사 그분 이야기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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