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너
전체기사포커스범종교가톨릭개신교불교민족종교해외종교이슬람다문화 사회기획특집
전체기사 Trend & View 마음을 비춰보는 포토에세이 종교지도자 칼럼 이상훈 박사의 ‘바둑으로 배우는 성경공부’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편집  2019.04.23 [02:04]
守岩 칼럼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안내데스크
신문사소개
광고안내
저작권문의
구독신청
불편신고
독자투고
제휴안내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 보호정책
기사제보
守岩 칼럼
잊혀진 독립지사 문윤국 목사
평북 독립운동 주도하며 파리강화회의 제출 독립청원서 서명
기사입력: 2019/04/11 [23:15]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3․1운동 33인 민족대표 이상으로 공적이 있으나 국민에게 알려지지 않은채 이름도 빛도 없이 살다간 독립지사 금산 뮨윤국 목사(1877.01.30~1958.01.02)  


평북 독립운동 주도하며 파리강화회의 제출 독립청원서 서명 

수십억원 독립지원금 上海臨政지원33인 민족대표에는 빠져

 

문윤국 목사외에 남평문씨 문중에는 124명의 독립지사가 있다

문윤국 목사는 평양신학교를 11회 졸업(37)하여 덕성, 덕흥, 연봉 등 3개 장로교회에서 목사로 봉직

191931 독립선언보다 앞선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서에 서명, 날인하여 제출, 음력 1월 첫 조선독립운동 시발점이 되게 했다

독립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함으로써 유관순 열사의 31만세운동으로 이어져 전국 확산의 기폭제가 되게했다.

전 재산을 처분해 독립군자금으로 김숙제목사를 통해 상하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이승훈 장로와 협력하여 오산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에 앞장섰다

▲ 문윤국 선생의 공적이 인정돼 뒤늦게 정부로부터 표창과 훈장이 추서됐다. 사진= 문용현 제공.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국내외 동포들이 기념행사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면서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그 가운데 나라를 구하기 위해 크게 헌신했으면서도 잊혀진 독립지사들을 찾아내 재조명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동안 정부나 국민 모두 이를 너무 소홀히 하지 않았는가 하는 반성도 뒤따라야 할 것이다.

 

그 누구보다 헌신적인 독립운동을 했으면서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 채 잊혀진 인물 중에 대표적으로 금산 문윤국(文潤國, 1877~1958) 선생이 있다. 문 선생은 31운동 독립선언서에 33인의 민족대표로 동참하고도 남을 만큼 지대한 공적이 있으나 우리 국민 중에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드물다.

 

독립지사 문윤국 목사

 

문윤국 선생은 1877130일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상사리에서 문정흘(文禎紇)3남으로 탄생했다. 선생은 1909년부터 1913년까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덕흥에서 한문교사 및 정주읍 신안소학교 교사를 역임하며 후학 양성에 힘썼다. 1910년 기독교에 입교, 1913년 평양 조선예수교장로회 신학교에 37세의 나이로 입학, 만학(晩學)의 의지를 불살랐다. 특히 영어와 한학(漢學)에 능통했다.

 

문윤국 선생은 평안북도 정주군 덕언면 덕흥(德興)과 덕성(德星), 신안면 연봉(蓮峰) 3개 교회에서 목사로 봉직하던 중 19192(음력 1) 선천군 남교회에서 개최된 평북노회에 참가, 조선독립 13() 발기인의 한 사람으로서 독립청원서에 서명날인했다. 선생은 파리 만국평화회의에 제출하는 독립청원서에 전국 13개도 대표로 서명, 제출함으로써 평안북도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선생은 독립만세운동을 기획하고 주도하여 후일 유관순 열사를 중심한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1운동 독립선언서에 33인의 민족대표로 동참하길 권유받았으나 스스로 물러나자 기독교계의 대표 이승훈 장로가 선생의 두 손을 꼭 잡고 눈물로써 거사 실패 후의 후사(後事)를 당부하자 선생이 목사로 담임하고 있었던 덕흥교회 이명룡김병조 두 장로가 대신 서명하게 된 것이다. 선생은 19193월 독립만세 운동의 시발점이었던 아이포(阿耳浦)면사무소 뒷산에서 수천 명의 군중과 함께 조선독립을 선언하였다. 이어 3.1 운동 당시 평안북도 선천 정주 및 오산 지역에서 일어난 4000여 군중의 독립운동을 이끌다가 검거되어 징역 2년을 언도받았다.

 

선생은 이승훈 장로와 협력하여 세운 오산학교를 중심학고 만세운동을 앞장서 결행하다 일경(日警)의 창검에 3곳이나 찔리셨으나 죽기를 굴하지 않았다. 옥중에서 4개월간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도 굳건한 독립 의지에는 변함이 없었다. 이에 일제(日帝)는 군수(郡守)자리를 주겠으니 협조하라고 회유까지 하였으나, 선생은 󰡒내가 너희 도둑놈들 밑에서 벼슬을 할 줄 아느냐󰡓고 고함을 치며 훈교(訓敎)한 끝에 2년형을 언도받고 복역 중 특사로 반감되어 출감했다.

 

출옥 후에도 일경의 감시가 계속돼 1921년부터 지하운동을 전개하고 만주에 거주하는 김숙제 목사를 통해 독립군 자금 78000(당시 쌀 한가마가 7원으로 상정할 때 현시가로 약 17)을 상하이(上海)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당시 문윤국 선생이 금광을 한다는 명목으로 재산을 가져갔기에 󰡐목사가 패가망신해서 고향에 도저히 있을 수 없으니까 도망가 버렸다󰡑고 소문이 났었다. 나중에 유서를 통해 집안의 재산이 상하이 임시정부의 김숙제 목사를 통해 전달되었음이 밝혀졌다.

 

선생은 요시찰인물로 지목되어 불가피하게 충북 괴산으로 거처를 옮겨 3년을 지낸 후 계속되는 감시로 강원도 정선으로 이주해 청년들에게 한학을 가르쳤다. 그 후 1945815 해방으로 환고향(還故鄕)해 슬하에 아들을 하나 두었으나 북한이 공산화되자 처자식을 남겨두고 강원도 정선으로 다시 남하였으니 그 이후 상봉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8년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정선군수를 통해 세 차례나 정치에 참여할 것을 권유받았으나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에만 전념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했다. 그러던 중에 195812일 강원도 정선군 북평면 북평5리 노루목에서 조국의 평화통일을 기원하며 별세함으로써 여생을 고향 정주가 아닌 정선 산골에서 마쳤다.

 

선생은 이승만, 최남선 등과 친분이 있었고이승훈이 오산(五山)학교를 설립할 때에 배후에서 함께 하였고 1990년 국가유공자로 선정됐다. 세계평화통일가정연합 창시자 문선명(文鮮明) 총재의 종조부(작은할아버지)이기도 하다.이름도 빛도 없이 나라를 위해 살다 간 문윤국 선생의 숭고한 애국정신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 빛나고 있는데도 노후를 보낸 강원 정선 거처(居處) 현장에는 변변한 기념비 하나 세워져 있지 않다.  

▲ 문윤국 독립지사의 유일한 혈손인 문선명 총재와 문용현    


문선명 총재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 문윤국 목사의 애국활동

 

문 총재의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를 통해 본 문윤국 목사

 

문선명 총재는 생전에 종조부 문윤국 선생에 관해 가끔 증언하였다. 문 총재의 자서전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29페이지- 내 인생의 분명한 나침반)와 여러 말씀을 통해 종조부 문윤국 선생의 업적을 기렸다. 다음은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인으로에 기록된 문윤국 목사에 관한 문 총재의 증언 내용이다.

 

우리 본관(本貫)은 전라도 나주에 옆에 있는 남평입니다. 문정흘 증조할아버지는 문성학(文成學) 고조할아버지가 낳으신 3형제 중 셋째 아드님이셨습니다. 그 증조할아버지가 또 치국(治國), 신국(信國), 윤국(潤國)3형제를 낳으셨는데 우리 할아버지가 맏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학교도 안 다니고 서당에도 가신 적이 없는 일자무식이었지만, 듣기만 하고도 삼국지를 모두 외울 정도로 집중력이 대단한 분이셨습니다. 삼국지만이 아닙니다. 누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해주면 그것을 모두 외워서 줄줄 읊으셨습니다. 무엇이든 한번만 들으면 다 기억하셨습니다. 할아버지를 닮아 아버지도 4백 쪽이 넘는 찬송가를 모두 외워서 부르셨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조건 베풀며 살라는 증조할아버지의 유언을 잘 따르셨습니다만, 재산을 지키지는 못하셨습니다. 셋째인 윤국 작은할아버지가 집안 재산을 저당 잡혀 몽땅 날리셨기 때문입니다. 그 후 집안 식구들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지만, 우리 할아버지나 아버지는 한 번도 윤국 할아버지를 원망하지 않으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노름하느라 재산을 없앤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저당을 잡혀가며 빌린 돈은 모두 상하이임시정부로 전해졌습니다. 당시 7만 원이면 상당히 큰돈이었는데 윤국 할아버지는 그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털어 넣으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목사로 영어와 한학에 능통한 인텔리였습니다. 덕언면의 덕흥교회를 비롯해서 세 군데 교회의 담임목사를 지낸 윤국 할아버지는 최남선 선생 등과 더불어 기미독립선언문을 기안했지만, 기독교 대표 16인 중에 덕흥교회 사람이 셋이나 되자 민족대표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셨습니다. 그러자 오산학교 설립에 뜻을 같이했던 남강 이승훈 선생은 윤국 할아버지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만약의 경우 거사에 실패하면 후사를 맡아달라고 당부했다고 합니다.

 

고향으로 돌아온 윤국 할아버지는 만세를 부르러 거리로 쏟아져 나온 사람들에게 태극기 수만 장을 인쇄하여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그해 38일에 정주군 오산학교 교장과 교원, 학생 2천여명 각 교회 신도 3천여명, 주민 4천여명과 회합하여 아이포 면사무소 뒷산에서 독립만세 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셨습니다. 할아버지는 2년형을 선고받고 의주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다가 이듬해 특사로 출감했지만, 일본경찰들의 박해가 심하여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여러 곳으로 피신을 다니셨습니다. 일본 경찰에게 고문을 당한 할아버지의 몸에는 죽창으로 찔러 움푹 팬 큰 흉터가 있었습니다. 시퍼렇게 날이 선 죽창으로 두 다리와 옆구리를 찔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윤국 할아버지는 끝끝내 굽히지 않으셨다고 합니다.

 

모진 고문에도 도통 말을 안 들으니 독립운동만 안 하면 군수 자리라도 주겠다는 회유도 받으셨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내가 너희 도둑놈들 밑에서 벼슬할 줄 알았느냐?󰡓하며 서슬 퍼렇게 호통을 치셨다고 합니다.

 

내가 일고여덟 살쯤의 일입니다. 윤국 할아버지가 잠시 우리 집에 머물러 계신 것을 알고 독립군들이 찾아온 적이 있었습니다. 독립자금이 부족해 도움을 요청하려고 눈이 쏟아지는 밤길을 걸어온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잠든 우리 형제들이 깰세라 우리 얼굴을 이불로 덮으셨습니다. 이미 잠이 달아나버린 나는 이불속에서 두 눈을 말똥말똥 뜨고 누워 어른들이 나누는 이야기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어머니는 그 밤중에 닭을 잡고 국수를 삶아 독립군들을 대접했습니다.

 

아버지가 덮어씌운 이불 밑에서 숨을 죽인 채 듣던 윤국 할아버지의 말씀은 지금도 귓전에 생생히 남아있습니다. 할아버지는 󰡒죽어도 나라를 위해 죽으면 복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것은 암흑이지만 반드시 광명한 아침이 온다󰡓라는 이야기도 하셨습니다. 고문의 후유증으로 늘 몸이 불편하셨지만 목소리만은 쩌렁쩌렁하셨지요. 󰡐저렇게 훌륭한 할아버지가 왜 감옥에 가야 하나? 일본보다 우리가 더 힘이 세면 그런 일이 없을 텐데…󰡐하며 안타까워하던 심정도 잊히지 않습니다.

 

일본경찰의 괴롭힘을 피해 객지를 떠돌다 연락이 끊어졌던 윤국 할아버지의 소식을 다시 듣게 된 것은 1966년 서울에서였습니다. 사촌동생 문용기(文龍基 장로)의 꿈에 나타나서는 󰡒내가 강원도 정선 땅에 묻혀있노라󰡓고 하셨답니다. 꿈속에서 받은 주소를 찾아가보니 할아버지는 이미 9년전에 작고하시고 그 자리에 잡초가 무성한 무덤만 덩그러니 남아있었습니다. 나는 윤국 할아버지의 시신을 거두어 경기도 파주로 이장해 모셨습니다.

 

광복이후 공산당이 목사들과 독립운동가들을 가리지 않고 마구 죽이는 일이 있었습니다. 윤국 할아버지는 행여 식구들에게 폐가 될세라 공산당을 피해 38선을 넘어 강원도 정선으로 향하셨는데, 우리 식구들은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첩첩산골인 정선에서 붓을 팔아 연명하시다가 나중에는 서당을 세우고 한문을 가르치셨다고 합니다. 윤국 할아버지에게 한문을 배웠던 제자들의 말에 의하면 평소에 즉흥적으로 를 즐겨 쓰셨다고 합니다. 그렇게 쓰신 시를 제자들이 모아놓은 것이 130여수나 되었습니다

▲ 문윤국 목사가 단신 월남하여 은거하다 생을 마감한 강원도 정선의 집이 방치돼 있다. 나라를 위해 크게 헌신한 독립지사가 살다간 곳이라고 알려주는 흔한 표지판 하나 없이 버려져 있다.사진=문용현 제공    


식구들을 잃어버리고 산 설고 물이 선 정선 땅에 살면서도 윤국 할아버지의 마음은 나라 걱정에 매여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또 󰡐애당초 뜻을 세움에 스스로 높은 것을 기약하고, 사욕일랑 터럭 끝만치도 용납하지 않아야 한다(厥初立志自期高궐초입지자기고 私慾未嘗容一毫사욕미상용일호)󰡑는 시구(詩句)도 남기셨습니다. 윤국 할아버지께서 독립운동을 하신 행적은 뒤늦게 정부당국의 인정을 받아 1977년과 1990년에 대통령 표창과 건국훈장이 추서되었습니다. 숱한 시련 속에서도 나라 사랑하는 마음을 일념(一念)으로 삼았던 할아버지의 마음이 그대로 녹아있는 시구를 지금도 종종 읊조립니다.

 

요즘 나이가 들어갈수록 윤국 할아버지의 생각이 점점 더 납니다. 나라 걱정하시던 그분의 마음이 절절이 내 마음을 파고듭니다. 나는 윤국 할아버지가 직접 가사를 붙여 지으신 󰡐대한지리가󰡑를 우리 식구(신도)들한테 모두 가르쳐주었습니다. 백두산부터 한라산까지 한 곡조로 부르고 나면 속이 다 후련해지는 맛에 요즘도 우리 식구들하고 즐겨 부르곤 합니다.  

▲ 문윤국 독립지사의 유일한 친필. 학업과 경력서. 친필 원본: 문용현 제공    

 

大韓地理歌(대한지리가)

 

東半球(동반구)突出(돌출)大韓半島(대한반도)

東洋三國(동양삼국) 要地(요지)에 자리를 잡고

 

()으로는 廣闊(광활)滿洲平野(만주평야)

()으로는 깊고 푸른 東海(동해)로다

 

()으로는 多島海(다도해) 大韓(대한)바다요

西()로는 깊고 누런 黃海(황해)로다

 

三面(삼면)바다 水中(수중)에 쌓인 海産物(해산물)

魚類(어류)조개 數萬種(수만종) 우리 보배일세

 

北極端(북극단)縱立(종립)主宗(주종) 白頭山(백두산)

鴨綠(압록) 豆滿(두만) 二大江(2대강)水源(수원)이 되고

 

東西(동서) 分流(분류) 兩海(양해)注入(주입)을 하여

支那(지나) 蘇聯(소련) 境界(경계)宛然(완연)하도다

 

半島中央(반도중앙) 江原道(강원도)에 빛난 金剛山(금강산)

世界(세계) 貢獻(공헌) 그 이름은 大韓(대한)의 자랑

 

南方蒼海(남방창해) 우뚝 솟은 濟州(제주) 漢羅山(한라산)

往來(왕래)하는 고깃배의 目標(목표) 아닌가

 

大東(대동) 漢江(한강) 金剛(금강) 全州(전주) 四大平野(사대평야)

七千萬民(칠천만민) 同胞(동포)衣食寶庫(의식보고)

 

雲山(운산) 順安(순안) 開川(개천) 載寧(재령) 四大鑛山(사대광산)

우리 大韓(대한) 光彩(광채) 있는 地中寶物(지중보물)일세

 

京城(경성) 平壤(평양) 大邱(대구) 開城(개성) 4대 도시는

우리 大韓(대한) 光彩(광채)있는 地中都市(지중도시)일세

 

釜山(부산) 元山(원산) 木浦(목포) 仁川(인천) 4대 항구는

內外國(내외국) 貿易船(무역선)集中地(집중지)일세

 

大京城(대경성)을 심중으로 뻗친 鐵道線(철도선)

京義(경의) 경부(京釜) 2幹線(간선) 연락(連絡)이 되고

 

京原(경원) 湖南(호남) 양지선(兩支線) 南北(남북)에 뻗쳐

三千里江山(삼천리강산) 周遊(주유) 넉넉하도다

 

歷朝(역조)變遷(변천)을 말하는 古蹟(고적)

檀君箕子(단군기자) 2천년의 建都地(건도지) 평양

 

高麗始祖(고려시조) 太祖王建(태조왕건) 松都開城(송도개성)

李朝朝鮮(이조조선) 5백년의 始王地(시왕지) 京城(경성)

 

2천년의 文明(문명)을 빛낸 新羅(신라)

朴赫居世(박혁거세) 시조천 名邑地(명읍지) 慶州(경주)

 

山水風景(산수풍경) 절승한 忠淸(충청)

夫餘(부여)는 백제 초왕(初王) 온조의 창조 고적지

 

未來(미래)開拓(개척)할 대한남아(大韓男兒)

文明(문명)波濤(파도)三海(삼해)를 친다

 

閑村山邑(한촌산업) 平民(평민)의 머리를 씻어

未來(미래)世界(세계)行進(행진)을 하세  

▲ 문선명 총재가 성화(聖和․타계) 한 달 전인 2012년 8월2일 서울 용산구 오산고등학교를 방문해 학교 관계자들을 격려하고 있다. 오산학교는 독립운동가였던 종조부 문윤국 목사가 이승훈 선생을 도와 세운 민족학교로, 문 총재는 이 학교에 입학했다가 정주공립보통학교로 전학했다.사진출처=세계일보  

 

문총재 말씀 속에 드러난 문윤국 목사

 

...우리 종조부(문윤국 할아버지)(독립운동의) 괴수였어요. 내가 어제 보고받고 1시가 넘도록 생각을 했어요. 여기서 10시에 들어가 가지고. 이런 역사를 모르고. 이런 할아버지가 한 마디라도 했으면 내가 최고의 독립투사의 왕의 자리와 같은 데서 다 엮을 수 있었을 것을. 내가 왜 몰랐노! 아버지가, 할아버지가 왜 안 가르쳐줬노! (지금의) 이런 고민은 안 했을 것 아니에요. ... 아버지, 할아버지, 종조부가 (내게) 󰡒너는 네 마음대로 사는 것이 아니야. 할아버지가 지시한 대로어려울 때는 내가 가르쳐줄게󰡓 (라고) 약속을 하고. 목사라고 하니 물어볼 것이 얼마나 많아. 물어보면 답변 못할 줄 알고 (할아버지가 나를) 만나지를 않아.

 

우리 할아버지(문윤국)가 형태네 집이 정선()이니까, 가끔 가서 자랑하는 것이 뭐냐면 󰡒우리 손자 가운데 천재가 났는데 어떻게 됐는지 보고 싶어도 못 가본다고󰡓 그런 말을 들었다는 거예요. 서당에서 글 잘 쓰는 사람들이 모여 대회 같은 것을 하는데, 자기 손자 되는 사람이 글을 쓰는데. 명필이라는 사람은 손으로 쓰는데 우리 손자(문 총재를 말함)는 입에 (붓을) 물고 글을 쓰고, 발로 쓰는데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디 있나?󰡓라고 생각했다는데 그게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에요. 돌아보면 󰡒아아, 우리 할아버지가 말년에 자기의 후손 가운데서 뜻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을 마음에 품고 기도도 많이 했겠구만󰡓 그런 생각을 하는 거에요. 역사는 하늘이 같이 하면 그 역사는 망하지 않아요. [2007510일 문총재 말씀]

 

우리 종조부(문윤국 할아버지)가 이북 5도 책임자였어요. 우리 할아버지의 영화를 만들어야겠어요. 왜정 때 그 할아버지에게는 손자들도 인사를 못하게 했어. , 경찰들이 얼마나 주목하고 있겠어. 종조부는 아시아의 예언서를 풀 수 있는 총책임자였어. 오산고보를 세울 때, 이승훈 선생은 우리 종조부 교회의 장로였어. [2007615일 문총재 말씀

 

오산고보를 만들고 독립선언서를 기안한 우리 할아버지(문윤국 목사)가 한시(漢詩)도 많이 써서 남겼습니다. (강원도)정선에서 돌아가셨어요. 내가 일곱, 여덟 살 무렵 우리집에 독립운동 하는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대한지리가󰡑를 만든 분이 우리 그 할아버지입니다. *애국사상이 담긴 이 노래는 문총재의 부친 문경유 선생을 통해 문용기 장로가 이어 받아 오늘에 이른 것이라고 했다. [2008315일 문총재 말씀]

 

...오산고보를 우리 종조부(문윤국 목사)가 세웠습니다. 우리집이 오산집이었습니다. 나를 오산집 쪼금눈이라고 했어요. [200897일 문총재 말씀]

 

문윤국 할아버지가 강원도 정선 산골짜기에 묻혔었는데 지상으로 와 가지고 자기가 묻힌 장소를 가르쳐 주었어요. 영계에 가 있으면서도 지상에 연락할 수 있는 것은 영육계에 있어서 충효지도(忠孝之道)의 대표적이지 않으면 지상에 와서 후손들에게 연락할 수 없어요. 공신의 대표적 기준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다는 사실이야. [200916일 문총재 말씀]

 

첫째 할아버지가 치국이고 그 다음에 신국이고 또 그 다음이 윤국이야. 남는다고 하는 윤활 윤(.) 그 이름대로 오산고보를 세워 가지고 많은 애국자를 길렀어요. 애국자를 길러 가지고, 내가 20대를 중심삼고 졸업하고 돌아올 때 만주에서 공산당하고 민주세계, 오산고보 학생들 300명이 싸우다가 왜인들이 불을 놔 가지고 타 죽어 버렸다고. 그 갈대밭의 참상까지 직접 보고를 받은 집이 우리 집이이에요. 내가 그때 어렸을 때였지요.

 

오산고보라든가 독립선언문까지 우리 집안의 우리 할아버지가 기안했다는 것을 알았어요. 말들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내가. 대화를 다 듣고 물어보지도 않았어요.

 

그때의 사실이 요 3개월 전에 형태, 형태라는 사람이 그 내용을 이야기했어요. 내가 글씨를 여덟 살부터 서당에 오는 할아버지한테 과거 패스를 위해 공부하는 󰡐사서삼경(四書三經)󰡑(유교를 배우거나 가르침에 있어 가장 핵심이 되는 경전으로, 사서는 논어(論語), 맹자(孟子), 대학(大學), 중용(中庸)의 네 가지 경전을 말하고 삼경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주역(周易)의 세 경서를 말함) 교육 받으려 서당에 오는 사람들이 30, 40, 50 아저씨들이 수두룩한데 내가 여덟 살 그때 쓴 글씨가 장지에 썼어. 그 사람들이 글씨를 못 쓰거든. 언문 글씨를 못 쓰니 글씨를 배우는데 체를 우리 할아버지가 써 주어야 할 텐데 선생님이 썼어요.

 

(윤국 할아버지가) 우리 손자 가운데는 천재적인 아기가 있어 가지고 입으로도 글씨를 쓰고 발로도 글씨를 쓴다는 이야기를 자기(형태)가 들었는데 자랑하더라는 말을 들었어요. 그것을 알고 우리 할아버지와 인연인 것을 알았어요. 그러면 그때 그 천재라는 손자가 누구냐 하면 나를 두고 말하는 거예요. [2009110일 문총재 말씀]

 

31 독립문서 기안을 우리 할아버지가 했다는 것을 내가 알았어요. 10대 전에 들었어요. 문윤국 할아버지는 최남선 선생으로부터 이승만 박사로부터, 송일국의 외할아버지 김좌진 장군과 친구사이였어요. 어깨동무 하던 사이였어요. 작은 할아버지는 동양사상을 공부하고 목사까지 했어요. 그 집(김형태 집)에서 윤국 할아버지가 하는 말이 󰡒손자 가운데 천재 같은 신동이 있다󰡓 고 했어요. 내가 열두 살에 과거에 합격하고 사서삼경을 다 외는 사람들 앞에서 글을 쓰는데 체를 잡아서 쓴 사람이에요. [200963일 문총재 말씀]

 

SBS 특집다큐에서 문윤국 선생의 활동상 짧게 소개

 

20091224일 오전(자정) 1245, SBS를 통해 󰡐SBS 특집다큐- 소월, 중섭, 그리고 오산󰡐이라는 제목으로 방영됐다.

 

이 다큐멘터리에는 문윤국 선생의 독립운동 모습을 재연(再演)으로 잠시나마 확인할 수 있있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 러닝타임 40분 중에 약 1분 이내로 짧게 소개되어 아쉬움이 있다. 이후 나머지 프로그램에는 일제시대 민족저항시인 김소월과 민족화가 이중섭을 통해 시와 그림으로 당시 억압받던 시대상을 표현한 내용을 담고 있다. 독립운동가를 길러냈던 오산학교의 설립자 남강 이승훈 선생의 영상도 포함돼 있다. (취재: 문운홍 대기자)

▲ 독립지사 문윤국 목사의 유일하게 생존하고 있는 종손 문용현(89세)    

 

 

 

ⓒ 매일종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주간베스트 TOP10
배너
광고
광고
광고
광고
  안내데스크신문사소개광고안내저작권문의구독신청불편신고독자투고제휴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 보호정책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범 종교의 진정성을 두루 살펴 보고 이해함으로써 각 종교와 사회의 화평과 상생, 조화를 이룬다.
회장 이옥용 /발행-편집인 신민형 / 양형모 상임고문 / 편집국장 이광열 / 청소년보호책임자 강은나
우) 140-846 서울시 용산구 원효로 1가 70번지 (83길 21)
대표 전화: 02-703-8267 | 팩스: 02-3211-4419 인터넷 매일종교신문
등록번호:서울 (아)01319(범종교신문 등록 2009년 9월 1일,2013년 6월 15일 제호변경)
기사제보 : minhyung-s@hanmail.net
Copyright ⓒ 2009-2013 매일종교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