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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과 세르반데스

심재길 | 기사입력 2019/05/03 [21:37]
이슬람 함대를 격퇴시킨 기독교 연합군 ‘돈 후안’의 리더십

레판토 해전과 세르반데스

이슬람 함대를 격퇴시킨 기독교 연합군 ‘돈 후안’의 리더십

심재길 | 입력 : 2019/05/03 [21:37]

 

이슬람 함대를 격퇴시킨 기독교 연합군 돈 후안의 리더십

 

1571107일 그리스 레판토(나프팍 토스)앞 바다에서 유럽의 기독교도 함대와 이슬람교도 함대 사이에 벌어진 해전의 승리로 유럽의 도시들은 흥분과 환희의 도가니에 휩싸였다. 그도 그럴 것이 동로마제국이 1453529일 오스만 투르크 이슬람교도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된 후 기독교문명권의 유럽은 100년도 넘게 활력을 잃고 큰 실의에 빠졌다.

 

동방으로 교역로마저 차단되어 실의와 빈궁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심지어 투르크인은 16세기 초에는 베오그라드와 부다페스트를 거처 신성 로마제국의 수도인 오스트리아 빈 부근까지 세력을 뻗쳤다.

 

마침내 그리스 앞바다 레판토에서 유럽의 기독교도의 연합군과 투르크의 이슬람 군 간의 운명을 결정지을 해전이 벌어졌다. 이 때 기독교도의 연합군을 총지휘는 신성로마 황제 카를 5세의 서자이며 에스파냐 왕 펠리페2세의 이복동생인 25세의 돈 후안 데 아우스트리아였다.

 

양진영의 함대는 수적으로도 비슷했고 전력 면에서도 그야말로 용호상박(龍虎相博)이었다. 그러나 승리는 우월한 리더십을 지닌 편에 돌아갔다. ‘돈 후안의 리더십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날 4시간 정도 치려진 해전에서 에스파냐와 이탈리아 병사 8000여 명이 전사 했고, 부상자는 그 두 배에 달했다 그러나 투르크 함대의 전사자는 그보다 세배나 되었다.

 

훗날 돈키호테를 집필하게 될 젊은 날의 세르반데스도 이 해전에 뛰어 들었다. 가슴에 총상을 두 번 입었고 세 번째 입은 총상으로 평생 왼팔을 쓰지 못했다.

 

레판토 해전의 승리는 서유럽인들에게 투르크 세력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오랫동안 투르크 세력의 압도적 우위를 보이던 끝에 유럽에 날아든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것은 길고도 지속적인 부흥의 시작이었다. 투르크는 이 해전에서 패한 후 쇠락의 길을 걸었고, 기독교 문명권은 상승세를 타기 시작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30년 로마제국의 수도를 발칸반도 끝자락인 비잔티움(콘스탄티노플)으로 천도한 후 395년 데오도시우스 황제가 동·서 로마를 분리한 후 국력이 약화됨으로서 로마는 476년 게르만족의 한 용병 대장인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 되었으나, 동로마는 오스만투 르크 에 멸망될 때 까지 이질적인 헬레니즘 문화권에서, 주변 민족들로부터 수 없이 침략을 받고도 잘 버텨왔으나 1453529일 압도적인 오스만 투르크에게 멸망되고 말았다.

 

동로마는 헬레니즘 문화의 전통이 강한 동방적 문화 요소와 융합하여 비잔틴 문화를 발전시켰다. 서유럽의 전통문화가 파괴된 후에도 그 문화 전통을 잘 보전하여 멸망 후 이탈리아에 전하여 르네상스 즉 문예 부흥을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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