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守岩 칼럼
‘깨달음의 등불’로 사바세계를 밝혀라
부처님오신날은 자비를 실천하는 날이 되어야
기사입력: 2019/05/10 [07:24]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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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오신날은 자비를 실천하는 날이 되어야 
  

 

사월초파일은 부처님오신날로 해마다 전국 각 사찰에선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신을 봉축하는 연등행사를 비롯해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불기(佛紀) 2563(2019) 부처님오신날(512)에 즈음해 연등행사의 참여와 자비의 실천은 뜻 깊은 일이다.

 

국가무형문화재 122 연등회는 불자들의 잔치를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축제로 자리 잡았다연등회의 역사는 불교가 왕성했던 삼국시대, 그 중에도 신라 때부터 고려조에 이르기까지 계속돼온 우리민족의 세시풍습이었다. 특히 연등회는 신라 경문왕6(866) 정월 보름에 왕이 흥룡사에서 간등(看燈)하고 백관에게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三國史記)신라본기(新羅本紀)등에 전해지고 있으며, 고려 태조 왕건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서 연등회와 팔관회를 시행할 것을 유훈으로 남겼다. 고려사(高麗史)에 따르면 오늘날과 같은 사월초파일 연등회는 1167(의종21)부터이다.

 

조선왕조는 불교를 탄압했으므로 연등회와 팔관회 같은 불교의례가 축소되거나 철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불교는 신라로부터 고려를 거쳐 이미 백성들의 종교로 깊게 뿌리내려 쉽게 혁파하지 못하였다. 불교의 배척은 신흥유학자들의 주장이었을 뿐, 현실적으로는 궁궐에 내불당을 두는 등 예불을 온전히 단절시키지 못했다.

 

사월초파일 연등행사는 우리 민족의 문화요, 전통으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것이 사실이다. 앞으로도 초파일 연등행사는 오랜 전통으로 계속 이어질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챙겨야 할 것은 초파일에 왜 등불을 밝혀야 하는 것인지, 그에 관한 진정한 의미를 아는 것이다. 첫째, 부처님 당시 빈자(貧者)의 등불처럼 비록 가난한 자의 등불이었지만 새벽녘까지 꺼지지 않았던 그 믿음, 곧 신앙의 등불이어야 한다. 둘째, 마음의 어둠(무명우치無明愚癡)을 밝히는 지혜광명, 곧 깨달음의 등불이어야 한다. 셋째, 어려운 이웃들과 함께하는 자비보시의 등불이어야 하며 넷째, 우리민족의 염원인 남북평화통일을 기원하는 통일의 등불을 밝혀야 한다는 것 등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한마디로 깨달음이다. 하지만 깨닫고 실천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 있으랴. 2600여년 전 인도 카필라바스투(Kapilavastu: 싯다르타 태자가 29년 간 살았던 석가족의 작은 왕국) 정반왕(淨飯王·Suddhodna)과 마야부인(摩耶夫人·Māyā) 사이에서 태어난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는 29세에 출가하여 히말라야 우루빌라 숲속에서 설산수도 6년을 거쳐 깨달음을 얻어 80세 열반할 때까지 오직 중생교화를 위해 일생을 바쳤다. 궁극적으로 부처님처럼 사회에 환원하는 깨달음의 사회화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따라서 불교의 3대강령인 자비와 보은, 평등의 사상을 실천궁행하는 것이고 불법승(佛法僧) 삼보를 믿고 따르는 것이며 사월초파일 연등법회에 참여하여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되어야 할 것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참된 의미는?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실 때의 모습은 어떠했는가. 신비롭게 묘사되어 있다. 이는 인도 문화이기도 하고 2600년전 문화이기도 하다. 그 당시에는 우리 인간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신()에 의해 이뤄진다 이렇게 사람들이 믿었기 때문에 우리에게 일어나는 일상사까지도 신들과 결합돼 얘기가 되었다.

 

부처님은 인도대륙 북쪽 카필라바스투라는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정반왕, 어머니는 마야부인이었다. 산월이 가까워오자 마야부인은 정반왕에게 친정에 가서 애기를 낳고 돌아오겠다고 인사를 하고 아침 일찍 동쪽 문으로 출발했다. 정오 정도에 이르러서 카필라성과 데바다하의 중간지점에 이르렀다. 그때 아주 아름다운 숲을 만났는데, 그 숲에는 아쇼카나무에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었다. 마야부인은 가마에서 내려서 꽃구경을 즐겼다. 그때 많은 꽃나무 가운데 가장 탐스럽게 핀 왕자다운 꽃나무를 보고 가까이 가서 오른손을 들어 그 꽃가지를 잡는데 마침 산기(産氣)를 느꼈다. 그래서 애기 낳을 준비를 해서 애기를 낳았다고 한다. 경전의 기록에 의하면, 그때 범천왕은 황금그물로 애기를 받았고 인드라천은 일산으로 그늘을 만들어줬다. 그 때 용왕이 나타나서 더운물과 찬물로 애기를 씻기자 애기의 몸은 황금빛으로 빛났다. 애기는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었는데 그러자 걸음마다 연꽃이 피어났다. 애기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한 손으로 땅을 가리키며 이렇게 외쳤다.

 

천상천하유아독존 삼계개고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오직 나 홀로 존귀하고 삼계는 모두 괴로움인데, 내가 마땅히 이를 편안케 하리라)

 

부처님이 태어난 모습을 묘사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진짜 그랬을까? 믿는 사람은 그대로 믿으면 되고, 뭘 그랬을까 의심이 되면 이것이 무엇을 상징하는 것일까 이렇게 보면 될 것 같다. 신들이 부처님 오심을 찬미하고 받들었다 하는 것은 붓다는 신들의 세계 보다 위에 있었다, 신들의 세계도 초월했다 이런 의미이다.

 

일곱 발자국을 걸었다는 것은 인도 문화에서 유래했다. 인간은 그 지은 바에 따라서 가장 열악한 지옥부터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이렇게 육도를 윤회하게 되는데 인도 당시의 문화는 인간은 복을 지어서 천상에 태어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불교의 가르침은 윤회의 세계 안에 있는 좀 더 나은 세계가 아니라 윤회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해탈과 열반을 지향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천상의 세계가 아니라 천상의 세계도 벗어나 버린, 윤회를 벗어나 버린 해탈을 성취하신 분이다 하는 것을 말한다.

 

'천상천하 아당안지'에서 '천상'이라는 것은 신들의 세계를 말한다. '천하'라는 것은 인간 세계를 뜻한다. 인간의 세계는 첫째, 물질이 세상을 지배한다. 둘째, 권력이 세상을 지배한다. 셋째, 인기와 명예가 세상을 지배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질과 권력과 인기와 명예를 구한다. 그래서 인간들은 그 세계에 묶여 있다. 우리는 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의 노예가 되고 명예의 노예가 되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살아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신들의 노예이다. 여기서 신들이라는 것은 종교적인 믿음도 들어갈 것이고 사상과 이념도 포함된다. 우리는 이념과 사상, 믿음의 노예가 되어서 살아가고 있다그래서 부처님은 "신들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통틀어서 자신의 존재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라고 선언한 것이다.

 

우리가 이 무지에서 벗어난다면 바로 우리 자신이 이 우주의 주인이고 자기 운명의 주인이 된다. 부처님은 신도 어쩌지 못하는 인간 존엄의 절대성을 선언한 것이다. 천상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천하의 굴레에서 벗어난 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존귀한 존재라는 것이다.

 

오늘날 이 시대를 자아상실의 시대라고 한다. 스스로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이런 자아상실의 시대에 자기를 되찾는 길, 자기의 존엄을 회복하는 길, 이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의 참의미이다. 바로 그 길로 가려면 붓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행복은 밖에서 누가 주는 것이 아닙다. 그러나 우리는 행복을 늘 밖으로부터 찾고 있다. 남편이 조금만 더 잘해주면, 아이들이 조금만 더 말을 잘 들으면, 돈이 조금만 더 있으면, 조금만 지위가 더 높아지면, 사람들이 자기를 조금만 더 알아주면 나는 얼마나 행복할까? 그러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불행하다며 자기를 잃어버리고 경계에 팔려서 우왕좌왕하며 방황하고 있다. 나의 삶은 그 누구도 어쩌지 못한다. 자신의 행복은 자기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했다.

 

 "행복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불행도 내가 만드는 것이네. 진실로 그 행복과 불행, 다른 사람이 만드는 것 아니네." 

 

우리는 자기가 아닌 것을 자기로 착각하고, 영원하지 않을 것을 영원할 것이라 착각하기 때문에 두렵고 불안하고 방황하며 살아가게 된다. 항상 하지 못할 것 같은 이 몸뚱이를 항상 할 것처럼 생각하고, 젊음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이 몸이 늙어가는 것이 괴롭고, 죽음이 가까이 온다고 생각하면 괴롭다. 내가 가진 재물이 영원할 것처럼 생각하는데 이 재물 또한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의지할 것이 못 된다. 내가 가진 지위도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니 우리가 이 세상의 무엇에 의지하고 살겠는가? 이에 대해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남에게 의지하지 말고 너 자신에게 의지하라. 진리 아닌 것에 의지하지 말고 진리에 의지하라"

 

나의 무지와 잘못된 습관의 노예가 되어 인생이 고달프다. 삶이 본래부터 고달픈 게 아니다. 저 다람쥐도 삶을 고달프게 살지 않는다. 그런데 우리 인간이 왜 고달프게 사는가? 그래서 이 무지를 깨트려야 한다. 자기가 경험한 일부분을 전체라고 단정하기 때문에 진실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옳다는 생각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것은 다만 나의 경험에 의해서 알아진 사물의 한 부분일 뿐이다. 나에게 그렇게 들렸고 나에게 그렇게 비춰졌을 뿐이지 그것이 실상은 아니다. 이렇게 집착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괴로움은 훨씬 적어진다. 그래서 스스로 괴로움이 없는 사람, 자유로운 사람이 되는 것, 즉 열반과 해탈을 성취하는 것이 붓다가 이 세상에 오신 뜻이고 우리가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이유이다.

 

그래서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어떤 이유를 붙이지 말고 어떤 상황에서든 자신의 행복을 유지시켜야 된다. 삶의 자유로움을 간직해야 한다. 비록 병이 나서 누워있을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지라도, 잠시 마음의 평정을 잃었더라도 빨리 평정심을 되찾아 삶이 여일(如一)해야 한다. 이렇게 자신의 삶에 충실할 때 자기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다.

 

이것만이 전부라고 생각하면 안된다. 이는 첫번째 한 구절일 뿐이다. 뒤에 나오는 '삼계개고 아당안지'가 있다. 나는 자유롭고 행복해졌는데, 내 주위를 둘러보니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괴로움 속에 헤매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도 내가 얻은 이 행복의 세계로 그들을 인도하리라라고 다짐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들 또한 자유와 행복을 마음껏 누리도록 도와주리라.

 

이것이 '삼계개고 아당안지'이다. 먼저 자기 스스로의 행복을 추구하고, 또한 나만이 아니라 나와 함께 살아가는 가족들, 이웃들 주변 세상도 함께 이 자유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뜻을, 태어나실 때의 모습으로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부처님오신날을 맞이하여 북한주민들의 고통에 대해서 연민을 느끼고 한반도 평화의 중요성을 자각하고 통일에 대한 발원을 했으면 한다. 전세계 사람들을 생각할 때 절대빈곤은 우리가 함께 퇴치해 나가자. 환경을 파괴하는 삶의 방식은 공멸을 초래하기 때문에 우리가 좀 자제를 하자. 나 하나 변한다고 뭐가 변하겠느냐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우리들부터 작은 노력을 해나갈 때 우리 후손들까지 오래도록 행복한 삶의 터전을 누릴 수 있게 된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신을 위해서다.

 

부처님오신날은 자비실천하는 날

 

부처님가르침의 핵심은 ‘상구보리(上求菩提하화중생(下化衆生)’이다달리 말하면 지혜와 자비이다불자라면 부처님 가르침에 의지해 수행하는 것은 기본이다참선교학염불주력(呪力: 불행이나 재해를 막아준다고 믿는 신비한 힘), 사경(寫經), 사불(寫佛: 부처님을 그리면 부처가 된다는 뜻으로, 내 손으로 직접 부처님을 모시면서 내 안의 부처를 확인하고, 그 자성불自性佛을 밖으로 그려내 자신의 눈으로 보며 부처와 하나되는 수행법)  각자 근기(根基) 맞는 수행법에 따라 정진한다더불어 자비를 실천하는 것도 중요하다. ‘상구보리 하화중생 상하(上下)라는 글자에 얽매어 “깨달음을 구한 후에 중생을 교화하겠다 생각에 머물러서는 안된다수행도 중요하지만중생을 교화하고 구제하는 자비의 실천은  놓을  없는 덕목이다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다시   마음에 새길 필요가 있다.

 

아무리 부처님 가르침의 내용을 많이 알아도 자비심을 지니지 못했다면 무슨 쓸모가 있으랴수행법을 선택해 정진하듯각자 처지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자비를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중생들의 시선에서 ‘()구보리 ()화중생’ 해야 하지 않을까보리를 구하는 일과 중생을 제도하고 구제하는 일은 선후(先後)보다 동시(同時) 개념으로 이해해야 한다.

 

평소의 자비행도 당연하지만 부처님오신날을 맞아 보시(布施) 마음을 내는 것은 그 의미가 크다인연 있는 사찰에 연등을 다는 한편 종단에서 추진하는 크고 작은 불사 그리고 지역의 복지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자비행에 동참하는 것은 ‘하화중생 실천하는 일이다부처님오신날의 의미를 더욱 깊게 하고 환희심도 느낄  있을 것이다진심이 담긴 등불을 켜고종단과 이웃을 위한 자비를 실천할 갈등과 차별이 존재하는 사바세계도 조금은  밝아질  있다. 우리 모두 무명에서 벗어나는 깨달음의 등불로 사바세계를 밝히자.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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