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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서원’ 9곳 세계문화유산 등재 확정

이준혁 기자 | 기사입력 2019/07/07 [10:50]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문화적 전통의 증거”

‘한국의 서원’ 9곳 세계문화유산 등재 확정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문화적 전통의 증거”

이준혁 기자 | 입력 : 2019/07/07 [10:50]

조선 시대 교육 기관이었던 경북 영주 소수서원 등 전국의 서원 9곳이 유네스코 세계유산 중 문화유산(Cultural Heritage)으로 등재됐다.

 

문화재청은 아제르바이잔 바쿠에서 개최된 제43차 세계유산위원회가 6(현지시간) ‘한국의 서원을 세계유산목록에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고 이날 밝혔다. 서원은 조선시대 인재 양성의 요람이자 학문과 정치의 중심 역할을 했다.

 

9개 서원은 충남부터 전남까지 전국 곳곳에 분포해 있다. 소수서원을 비롯해 경북 안동의 도산서원과 병산서원, 옥산서원(경북 경주), 도동서원(대구 달성), 남계서원(경남 함양), 필암서원(전남 장성), 무성서원(전북 정읍), 돈암서원(충남 논산)이 포함된다. 원형이 비교적 잘 보존됐다는 평가를 받는 이 서원들은 2009년 이전에 모두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됐다.

 

서원은 조선시대 핵심 이념인 성리학을 보급하고 구현한 장소다.

 

'한국의 서원'은 중국의 영향을 받긴 했지만, 지역에서 스승을 모시고 성리학적 이념에 따라 교육적 학파를 구현해 갔다. 이는 점차 관()이 주도하는 형태로 관인을 양성하는데 힘을 쏟은 중국의 서원과 구별된다.

 

우리나라 역사 속에는 수많은 서원이 설립되었는데 조선 후기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대부분 훼철됐다. 이번에 세계 유산으로 지정된 9곳의 서원은 16~17세기에 설립된 곳으로, 이러한 역사 속 굴곡에서도 살아남았고 비교적 일찍 국가지정문화재 사적으로 지정돼 원형을 잘 보존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계유산위원회는 한국의 서원에 대해 오늘날까지 교육과 사회적 관습 형태로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성리학과 관련된 문화적 전통의 증거라며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게 변화하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Outstanding Universal ValueOUV)가 인정된다고 평가했다.

 

이번 등재로 우리나라는 세계유산 14건을 보유하게 됐다. 석굴암·불국사, 해인사 장경판전, 종묘(이상 1995), 창덕궁, 수원 화성(이상 1997), 경주역사유적지구, 고창·화순·강화 고인돌 유적(이상 2000),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2007), 조선왕릉(2009),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2010), 남한산성(2014), 백제역사유적지구(2015), 산사, 한국의 산지승원(2018) 등이 앞서 등재됐다. 제주 화산섬과 용암동굴만 자연유산이고, 나머지는 모두 문화유산이다.

 

북한에 있는 고구려 고분군(2004), 개성역사유적지구(2013), 그리고 중국 동북지방 일대 고대 고구려왕국 수도와 묘지(2004)를 합치면 한민족 관련 세계유산은 17건이다.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의 약사와 현황은 다음과 같다

 

영주 소수서원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임금이 이름을 지어낸 사액서원(임금이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린 서원)이다.

 

조선 중종 37(1542)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제사하기 위해 사당을 세웠다가 유생들을 교육하면서 백운동서원이라 명명됐다.

 

이후 명종 5년 풍기군수 이황의 요청에 의해 '소수서원'이라 사액됐다.

 

서원의 건물은 전형적 서원의 구조를 따르지 않아 배치가 자유로운 편이 특징이다.

 

안동 도산서원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1501~1570)이 도산서당을 짓고 유생을 교육하며 학문을 쌓던 곳을 모태로 한다.

 

이황이 세상을 떠나고 4년 뒤인 1574년 그의 학덕을 추모하는 문인과 유생들이 상덕사란 사당과 전교당 동·서재를 지어 서원으로 완성했다.

 

이듬해인 1575년 선조에게서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고, 영남지방 유학의 중심지가 됐다.

 

도산서원은 건출물이 민간인들의 집처럼 전체적으로 간결하고 검소하게 꾸며져 이황의 품격과 학문을 공부하는 선비의 자세를 잘 반영한 것으로 평가 받는다.

 

안동 병산서원

 

병산서원은 안동에서 서남쪽으로 낙동강 상류가 굽이치는 곳에 화산(花山)을 등지고 자리하고 있다.

 

원래는 풍악서당이란 이름으로 풍산 유씨의 교육기관이 자리했는데 지역 사림들이 서애 유성룡의 학문과 업적을 기리기 위한 곳으로 세웠다.

 

철종 14(1863)에 임금으로부터 '병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서원내 건물로는 위패를 모신 존덕사와 강당인 입교당, 유물을 보관하는 장판각, 기숙사였던 동·서재, 신문, 전사청, 만대루, 고직사가 있다.

 

병산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을 담당해 많은 학자를 배출한 곳으로,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 때에도 남아 있었던 47개의 서원 중 하나다.

경주 옥산서원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을 배향한 곳으로 지어졌다. 이언적의 학문은 퇴계 이황에게 이어져 영남학파 성리설의 선구가 됐다.

 

이곳은 선조 5(1572) 경주부윤 이제민이 처음 설립했다. 그 다음해에 선조에게서 '옥산'이라는 이름을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이곳은 공부하는 장소인 구인당이 앞에 있고, 제사를 지내는 체인묘가 뒤에 위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식을 띄고 있다.

 

또 옥산서원은 많은 고서를 보유한 것이 특징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원본 9권과 이언적의 '수필고본' 등 많은 서적이 보관·보존돼 있다.

달성 도동서원

 

도동서원은 선조 38(1605), 지방 유림에서 한훤당 김굉필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김굉필은 김종직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고 조광조를 제자로 뒀다. 또 김굉필은 성리학 이론 중 실천윤리를 강조했다.

 

도동서원은 조선중기 서원의 배치 특징인 전학후묘 형식을 갖추고 있다.

 

도동서원은 1607년 사액을 받았는데, 서원의 명칭은 '공자의 도가 동쪽으로 왔다'를 의미한다.

함양 남계서원

 

남계서원은 문인 일두 정여창(1450~1504)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기 위해 지역 사림이 조선 명종 7(1552)에 지었다.

 

이후 명종 21(1566)에 나라에서 '남계'라는 사액을 받았으나, 정유재란(1597)이 터지고 왜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하지만 선조 36(1603) 사림들이 나촌으로 이를 옮겨 다시 지었다가, 광해군 4(1612) 옛 터인 지금의 위치에 재건했다.

 

남계서원은 '어정오경백편'·'고려사' 등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

장성 필암서원

 

이 지역 출신 문인인 하서 김인후(1510~1560)를 추모하기 위해 선조 23(1590)에 지어진 서원이다.

 

이곳 역시 남계서원 처럼 정유재란 당시 불타 없어졌으나 인조 24(1624)에 재건했다. 이후 현종 3(1662)'필암서원'이라는 사액을 받았다.

 

1672년에는 지금의 자리로 서원을 이건했다.

 

이 곳 역시 전학후묘의 형태로 건물이 배치됐다. 휴식처가 되는 확연루를 시작으로 수업을 받는 청절당, 그 뒤에 학생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동재와 서재가 자리한다. '확연루'의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쓴 것이다.

정읍 무성서원

 

무성서원은 신라 후기의 학자였던 최치원(857~?)과 조선 중종때 관리였던 신잠(1491~1554)를 모시고 제사 지냈던 서원이다.

 

본래 태산서원으로 불리웠다가 숙종 22(1696) 무성서원이라고 사액 받았다.

 

이곳 역시 앞에는 공부하는 공간을 두고, 뒤에는 제사 지내는 사당을 배치한 전학후묘의 건물 배치로 이뤄져있다.

 

이곳에는 성종 17(1486) 이후의 봉심안, 강안, 심원록, 원규 등의 귀중한 서원자료가 보존되어 있다.

논산 돈암서원

 

돈암서원은 '한국의 서원'으로 세계유산에 등재된 9곳의 서원 중 건립시기가 가장 늦다. 사계 김장생(1548~1631)을 배향하기 위해 인조 12(1634)에 건립됐다.

 

김장생은 율곡이이의 사상과 학문을 이은 예학의 대가였다. 예학은 전란으로 큰 피해를 입은 국가 질서를 새롭게 정립하기 위해 연구된 학문이다.

 

이러한 김장생의 학문은 아들인 김집에게로 이어졌고, 이후 송준길과 송시열에게로 전해졌다.

 

현종 원년(1660), 임금에게 돈암이라는 현판을 사액 받아 사액서원이 됐다. 이후 김집, 송준길, 송시열을 배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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