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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0년의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심재길 객원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9/09/30 [21:25]
유대인 정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 먀오족 정체성 “고구려 사람”

1300년의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유대인 정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 먀오족 정체성 “고구려 사람”

심재길 객원논설위원 | 입력 : 2019/09/30 [21:25]

유대인 정체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은 민족”, 먀오족 정체성 고구려 사람

 

오스트레일리아 인류학자 게디스(W.R.Geddes 1916~1989)는 세계역사에서 끊임 없는 고난을 당하면서도 불굴의 의지로 끝까지 이겨낸 두 민족이 있다고 한다.

 

그 중 하나는 먀오족이고 다른 하나는 유대인이다. 먀오족은 고구려가 멸망당한 후 당나라에 의해 중국의 남쪽으로 강제 이주 당한 고구려 유민이다.(후일 당나라는 이들을 야만인 이란 의미로 이름을 만든 것임).

 

고구려는 6682~9월까지 ·당 연합군의 침공에 의해 멸망되고 말았다. 당시 고구려 인구는 350~400만 이었고,170개의 성과 697천 호를 보유했었다.

 

당나라 장수 이적은 보장왕과 고구려 일반백성 20만 명을 9~12월까지 당나라로 압송하여 당 고종에게 인계했다.

 

구당서에 의하면 고구려의 상류층(군인 포함) 20만 명, 28,200호를 산서성 위쪽 오르도스지역과 감숙성 땅으로 이주 했다. 훗날 당나라 장수로 이름을 떨친 고구려 후예가 많이 배출 되었다. ‘고사계쿠 차의 안서도호부에서 이름을 떨쳤고, 그의 아들 고선지도 당나라를 위해 변방의 이방민족과의 전쟁에서 용맹을 떨쳤으나 안록산의 난에 연루되었다는 모함으로 비참한 생을 마감 했다.이들 모두가 고구려의 후예였다.

▲ 고구려의 패망으로 가족이 중국으로 이주한 뒤,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선지(高仙芝)의 발자취를 그린 KBS 공사창립 특집 3부작 다큐멘터리 '고선지 루트'의 한 장면.  


당나라는 가급적 옛 고구려 땅에서 멀리 이주 시켰다. 이는 만에 하나 반항의지를 꺾기 위해서였다. 당나라가 이들 고구려 유민들을 남쪽 지방으로 이주시킨 이유는 한족화’, ‘농경화’,‘병력화하려는 의도였다. 특히 이 지역은 기후가 온난하고 농경지화할 수 있는 지역이어서 이들 유민들을 가족 단위로 이주 정착시켜 농지를 개간하면 국가재정 수입 증대를 꾀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들 고구려 유민을 정착 시킬 지방은 남쪽 강회도, 산남도, 회남도 즉 장수성(강소성), 장사성(강서성), 저장성(절강성), 후난성(호남성), 안후이성(안휘성), 후베이성(호북성), 샨시성, 허난성, 쓰촨성 일부, 윈난성 까지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그러나 경작이 힘든 경사진 산비탈과 거칠고 척박한 땅들 뿐이었다. 그러나 열심히 힘들게 농사를 지어 놓으면 평지의 한족들이 수확물을 빼앗아 가는 일이 비일 비재했다. 그래서 한족들과 잦은 갈등과 충돌이 때론 으로, 전쟁으로 화하여 자연 성격이 난폭해지고 자구차원에서 그들만이 외로운 생활을 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이들 먀오족은 혈통을 중시하여 다른 민족과는 결혼을 금하고 그들끼리 결혼을 하고 고구려의 전통문화와 풍습을 철저히 지키고 자신들의 조상이 이곳으로 오게 된 일을 항상 생각했다. 자신들의 선조가 하신 말씀들을 생각하고 기억을 되새겨 떠나온 고국은 춥고, 눈이 내리고, 얼음이 얼고 큰 강을 두 개나 건너왔다고 했다. 이들은 만주 쪽에서 이주한 유민인 것으로 믿어진다. 또 다른 사람들은 바다를 건너왔고 바다와 모래사장을 기억하고 있다. 이들은 아마도 평양성 일대에서 왔을 것으로 믿어진다.

 

이들은 죽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가는 꿈을 두 줄 그림으로나, 실로 수를 놓은 치마나 바지에 새겨놓은 것은 조상들이 건너온 큰 강을 표시 한 것으로 찾아갈 때를 기억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또한 옛날의 고구려 성을 표시한 그림을 그린 겉옷을 입는다. 그들은 고구려의 전통문화와 풍습을 철저히 지키고 후 세대에게 전수시키고 있다.

 

먀오족이라 불러지게 된 사연은 여러 가지 있으나 먀오족이라고 처음 만들어 부른 사람은 송나라 때 주희였다. 주희는 후난성 담주에서 공직생활을 할 때 이들이 자주 난을 일으키기 때문에 삼묘와 같은 난을 자주 이르킴으로 먀오족이라는 말을 썼다. 이 말이 뜻하는 것은 야만이란 뜻으로 불러지게 되었다. 그들은 문자가 없다.

 

*먀오족이 지키고 있는 전통 문화와 풍속들

 

1) 고구려의 축제인 동맹과 비견되는 축제도 거행하는데 부여의 영고와 같은 북을 모셔오는 의례를 거행 한다. 이 때 머리에 꽂는 새 날개 모양의 은제 장식품은 신라의 새날개형 관식과 같은 모양인데 이런 관식의 시원은 고구려에 있다.

 

2)복식에 있어서는 남자들이 가랑이 사이에 삼각형모양의 바대를 댄 바지를 입고 여자들은 주름치마를 입는다.(고구려 고분 벽화와 같이)

 

3)결혼식은 아내의 집에서 하고 산다.

 

4)형이 죽으면 형수와 산다.

 

5)죽은 자의 시신을 집 안에 묻으며 망자의 영혼을 고구려 땅으로 보낸다.

 

# 먀오족 염원인 풍습의 사례들

 

상들이 이곳으로 올 때 건넌 강을 표시한 독특한 수를 놓아 두 줄로 한 옷을 입고 있다. 이것은 고향으로 돌아 갈 때 찾아가기 위한 표시로 두 강은 황하와 창장(장강)을 의미한다.

 

2000년도 인구조사에 의하면 먀오족은 중국내 56개 민족 중 5위로 중국 본토에만 894만 명과 동남아 등 서방 선진 국가 즉 프랑스, 미국, 캐나다, 호주, 아르헨티나, 가이아나 등 국가에 200만명이 거주하고 있다. 그래서 이들은 모두 1000만 명의 민족이다. 서방 선진국으로 갈 수 있었던 사연은 프랑스와의 베트남전쟁, 미국과의 베트님 전쟁에 참전한 것에 기인하고 있다. 홍콩 영화 동방불패는 이들 먀오족을 소재로 한 것이다.

 

유대인의 정체성은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선택함을 받은 민족이다

먀오족의 정체성은 우리는 고구려 사람이다

 

*참고:김인희, 1300, 디아스포라 고구려 유민, 푸른 역사.

유홍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중국편1 ). 창비.

윤태옥 길 위에서 읽는 중국 현대사, 책과 함께

▲ 심재길(‘심재길의 성경분석-역사 그분 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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