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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 문화적 충격과 호기심 불러일으킨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심재길 객원논설위원 | 기사입력 2019/11/04 [21:07]
감옥에서 피사의 작가 ‘루스티켈로’ 만나 25년간의 체험 정리

유럽에 문화적 충격과 호기심 불러일으킨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

감옥에서 피사의 작가 ‘루스티켈로’ 만나 25년간의 체험 정리

심재길 객원논설위원 | 입력 : 2019/11/04 [21:07]

 

마르코 폴로의 출생과 여행기의 시작 

 

그는 베네치아의 유명한 상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니콜로 폴로와 삼촌 마페오 폴로 역시 상인으로서 유명세를 떨쳤다. 폴로 형제는 1254, 즉 마르코 폴로가 태어나기 직전에 동방의 시장을 개척하기 위해 베네치아를 떠났다. 그로부터 얼마 후 마르코 폴로가 태어났다. 그가 자라는 동안 동방으로 떠났던 폴로 형제는 킵차크 칸 국과 일 칸 국 사이의 전쟁으로 다시 베네치아로 돌이가지 못하고 만부득 동쪽으로 가게 되었다. 도중에 쿠빌라이에게 가는 알라우의 사신을 만나 함께 쿠빌라이 칸을 만나게 되었다. 그리고 쿠빌라이 칸의 명을 받고 교황을 뵙기 위해 지중해변에 있는 아크레로 돌아왔으나 마침 교황의 자리는 공석이었다. 하는 수 없이 새 교황이 선출되기를 기다리며 폴로 형제는 베네치아로 돌아 왔다. 그때가 마르코 폴로가 열다섯이 된 1269년 이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를 만났다. 하지만 마르코의 어머니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의 아버지와 삼촌은 베네치아에서 2년 정도 머무르다가 새 교황이 선출되지 않자 쿠빌라이에게 돌아가기로 했다. 이 때 마르코 폴로도 함께 동행 하게 되었다.(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폴로 일행은 쿠빌라이가 부탁한 성유(聖油)를 얻어 떠났으나, 라이아스에 도착했을 때 신임 교황으로 그레고리10세가 선출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아크레로 돌아갔다. 그들은 신임 교황을 알현하고 다시 동방으로 떠났다. 일행은 투르크(터키) 지역과 페르시아, 파미르 고원 ,카슈미르 지역을 통과한 후 쿠빌라이의 수도로 들어갔다. 고비 사막을 지나고부터는 쿠빌라이가 보낸 호위병들의 보호를 받았는데 이는 쿠빌라이가 그들을 각별히 여겼음을 짐작한다.

 

베네치아에서 쿠빌라이의 여름 수도 샨 두 까지 가는데 약 3년의 시간이 걸렸던 셈이다. <동방견문록>의 기록에 의하면 마르코 폴로는 그곳에서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아 네 개의 언어를 익힐 만큼 총명했고 ,새로운 환경에도 금방 적응했다. 그래서 그는 쿠빌라이의 신임을 각별히 받았다. 쿠빌라이는 6개월 이상 걸리는 먼 곳으로 사신을 보낼 때면 마르코 폴로를 자주 보냈다.

 

이럴 때면 마르코 폴로는 그곳의 문화와 풍습을 눈여겨보았다가 돌아와서는 자기가 본 새롭고 신기한 것들을 재미있게 전해주곤 했다. 이런 마르코 폴로를 쿠빌라이는 신뢰하고 사랑했다. 마르코 폴로가 중국에 체류했던 기간은 17년 정도였다. 이 기간 동안 중국의 북부와 남서부, 남동부 지역을 두루 다녔으며 거의 안 가본 지역이 없을 정도였다. 그러나 가장 오래 체류 했던 곳은 아마도 샨 두와 킨 사이가 아닐까 한다.(이 견문록 3장과 5장에 아주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폴로 일행은 중국에 체류하는 동안 여러 차례 귀국의사를 밝혔지만 쿠빌라이는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쿠빌라이의 봉신국인 아르곤 왕의 왕비가 죽었다. 이 때 아르곤 왕은 죽은 왕비를 대신해 같은 혈통의 여인을 쿠빌라이에게 추천해 달라며 사신을 보내 왔다. 쿠빌라이는 사신들에게 코가틴이라는 여자를 발탁 천거해 사신들에게 보내 주었다. 사신들은 고향으로 돌아가다가 잦은 전쟁으로 길이 막혀 다시 돌아 왔다. 마침 이때 폴로일행이 바닷길로 해서 인도에서 돌아 왔다. 그래서 사신들은 폴로 일행과 함께 바닷길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쿠빌라이에게 요청 했다. 쿠빌라이는 하는 수 없이 허락하고 거대한 배와 호위 할 군대와 식량과 필요한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다. 코가틴 일행과 폴로 일행은 무려 14척의 배를 거느리고 1291년 남중국해를 출발해서 인도양을 향해 나아갔다. 2년여 항해를 끝내고 목적지에 도착 했을 때는 극히 일부의 사람만이 살아남았다.

 

아르곤 왕국에 도착한지 얼마 후 쿠빌라이의 사망 소식을 듣게 되었다. 마르코 폴로 일행은 더 이상 쿠빌라이 궁으로 들어갈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고 고향으로 출발해서 1295, 마침내 베네치아에 돌아왔다. 그러나 25년 만에 돌아 온 그들을 알아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친척들에게서도 문전 박대를 당하자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입고 있던 타타르 복장을 뜯고 귀금속을 보여 주었다. 그제서 야 사람들은 그들을 알아보았다. 마르코는 그간 보고 들은 것을 그들에게 말해주었지만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신기한 그의 말을 믿는 사람은 없었다. 유럽 밖의 세계에 대해 거의 아는 것이 없었던 13세기의 유럽 사람들에게 마르코 폴로의 이야기는 놀랍고도 의심스러울 뿐 이였다.

 

40세 정도의 삶을 타국에서 보냈으나 세상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그가 베네치아로 돌아온 지1년 지나 베네치아와 제노바 사이에 해상권을 두고 전쟁이 일어났다. 마르코 폴로도 이 전쟁에 참전했다가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이 때 감옥 안에서 피사의 작가 루스티켈로와 만났다. 마르코 폴로는 자신이 지난 25년간 겪었던 체험들을 말했고 루스티켈로는 그의 이야기를 받아 쓰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1299, 위대한 고전 <동방견문록>이 완성 되었고, 같은 해 그는 석방되어 풀려났다.

 

그 후 의 삶의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132319일에 남긴 그의 유언장에 의하면 그는 도나타라는 여인과 결혼하여 세 명의 딸을 두었다. 또한 가족과 종교단체에 남긴 유산으로 짐작건대 그의 생활은 어느 정도 풍족했던 것으로 믿어진다. 그는 유언장을 쓴 후 1년쯤 지난 132418일 베네치아에서 눈을 감았다. 임종 직전 친구들은 동방견문록에 썼던 거짓들에 대해 참회하라고 권고 했다.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는 아직 내가 본 것의 절반도 이야기하지 못했다.”

 

동방견문록은 유럽에 전해진 최초의 여행기였는가?

 

마르코 폴로가 중국으로 가기 전에 동방에 대한 보고서가 이미 나와 있었다. 선교사나 상인들이 실무적인 목적으로 다녀와 보고한 것인데 카르피니(G,P.Carpini 1182~1252)<우리가 타타르인 이라고 부르는 몽골의 역사>와 뤼브뤼키G.Rubruquis1220~1293)<뤼브뤼키의 여행기>가 그것이다.

 

이탈리아의 가톨릭신부였던 카르피니는 교황 인노센트 4세의 명으로 몽골 인에게 그리스도교로 개종할 것을 권유하기 위해 1245년에 리옹을 떠났으며, 육로를 거쳐 몽골 제국의 수도 카라코룸에 도착했다가, 1247년에 귀국했다. 비록 기독교를 전파하는 데는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카르피니의 보고서는 유럽에 동방을 알린 최초의 문서가 되었다.

 

또한 프랑스의 프란체스코회 수도사였던 뤼브뤼키는 루이 9세의 친서를 받아 군사동맹을 맺기 위해 몽골로 갔다. 1253년에 출발하여 1255년에 돌아왔다. 원래의 목적은 이루지 못했으나 그의 보고서는 카르피니의 여행기보다 더 많은 정보를 담고 있어 몽골제국을 아는데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마르코 폴로는 살아 생전에는 허풍쟁이라고 비웃음을 샀지만) 그가 죽은 후 유럽에서 성경다음으로 인기 있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인쇄술이 발명된 후 에도 더 다양한 판본들이 나왔다. ‘루스티겔로의 원본은 남아 있지 않지만 그의 원본을 필사한 것과 인쇄술이 발명된 이후 찍어낸 판본들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그 종류만도 120 여 종에 이른다고 한다. 필사본들은 대부분 <세계의 기술> 혹은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라고 나왔지만 이탈리아에서는 그의 별명을 따 <백만의 책>으로 나왔다. 이것이 일본에 전해지면서 <동방견문록>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 되었다. 우리나라에도서도 같은 제목으로 옮겨졌다.

 

동방견문록의 영향으로 지리상의 대 발견

 

동방견문록은 유럽 사람들에게 문화적 충격과 새로운 문화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켰다. 그 중에서도 지리상의 발견은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탐험 의지를 심어주었다.

 

15세기를 전후하여 많은 인물들이 아시아대륙 혹은 인도를 찾아 탐험을 떠났다.

 

1)인도를 찾아 떠난 콜럼부스(1451~1506)는 동방견문록을 철저히 연구한 후 탐험을 떠났다가 신대륙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으면서도 그는 그곳이 인도라고 믿었다.

 

2)향료를 찾아 떠난 바스코 다가마.(1469~1524)는 포르투갈 항해사로 임마누엘1세의 후원을 받고 최초로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

 

3)기억 속의 카타이를 찾아 떠난 벤토 드 고에스(1562~1607)- 바스코 다가마보다 한 세기 정도 후의 군인이었던 그는 16세기 당시 중국과 사람들의 기억 속에 묻힌 카타이가 같은 국가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페르시아 상인으로 가장하고 1602년 아그라에서 출발하여 1606년 쑤저우(깐쑤성 북서부에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 그는 그곳에서 베이징에 있던 마테오리치(1552~1610)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의 회신으로 중국과 카타이가 동일하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10년 후 병으로 생을 마감 했다. 그의 여행 기록은 마테오리치가 편집하여 낸 여행기에서 17세기 중앙아시아의 모습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4) 몽골제국(타타르)에는 기독교, 이슬람교, 우상숭배의 미신 등 신을 믿는 사람들이 공존 하고 있다. 제국의 제 1인자인 칸은 기독교를 최고의 신으로 믿고 섬겼다. 사마르칸트(우즈베키스탄 중부의 도시)에 있는 성 요한 교회를 차가타이왕의 지원으로 건축 했다. 대 칸은 십자가를 자신을 돕는 수호신으로 믿는다.

 

*네스토리우스(Nestorius) 파는?

네스토리우스는 기독교의 종파 중 하나로 비 칼게돈 교파이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대주교 네스토리우스가 주장한 신학론이 중심이다. 기독교 초창기에 갈라져 나오고 5세기 이후 심하게 탄압받아 주로 아시아지역에 전파되었다. 현대까지 이 교파는 아시리아 동방교회를 통해 존속하지만 네스토리우스의 신학설 자체는 폐기된 상태이다.

참고: 마르코 폴로의 길을 걷다 동방견문록, 루스티겔로 지음, 배진영 번역 옮김, 서해문집.

▲ 심재길(‘심재길의 성경분석-역사 그분 이야기’ 저자)    


 

심재길(‘심재길의 성경분석-역사 그분 이야기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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