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종교의 사회적 역할②:종교를 거부하는 사회 --박선목 부산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매일종교신문 | 기사입력 2011/05/31 [10:13]

종교의 사회적 역할②:종교를 거부하는 사회 --박선목 부산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매일종교신문 | 입력 : 2011/05/31 [10:13]
현대사회에 있어서 종교의 미래와 그 전망 3

-박선목 부산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


종교의 사회적 역할②

종교를 거부하는 사회


니체,러셀,마르크스,베르그송,스피노자

 

종교가 삶에 있어서 만능적인 것이 아니기에 앞의 긍정적인 측면에 반해 부정적인 측면도 있는 것이다. 종교를 거부하는 이유는 종교가 지니고 있는 교리의 결함, 유물론적 우주관에 의한 신의 부정, 개인생활을 억압하는 종교적 조직의 힘에 의해서이다. 또한 과학적 힘 앞에서의 종교의 무력함과 일상생활에서의 종교의 무용론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종교적 삶의 가치관과 현실적 삶의 가치관의 차이에서 종교를 거부하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을 일일이 설명할 수 없고 종교 자체의 부정적인 측면과 유물론적 입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어 보겠다.

모든 철학사상은 신을 전제로 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경우로 나누어진다. 따라서 우리의 삶도 신을 머리에 이고 사는 경우와 그렇지 않은 삶으로 나누어진다. 또한 신을 믿다가 믿지 않는 인생으로 끝나는 사람도 있고 일생에 몇 번이고 종교를 바꾸는 사람도 있다. 사람들은 스피노자(1632~1677년)가 신을 거부한 사람이면서 신에 미친 사람이라고 한다. 이 점에 있어서는 니체(1844~1900년)도 비슷한 경우이다. 사실 스피노자의 사상은 신을 전제하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는 사상이다. 그런데도 왜 신을 거부하였을까? 그들은 전통적 신의 부정적 측면을 공격하고 새로운 현실적 신, 자연을 포괄한 신을 내세웠던 것이다. 니체는 종래의 신을 사람의 정신, 추측 그리고 하나의 사상에 불과하다고 한다. 이러한 신은 피안의 세계에 있는 실체가 없는 허상이다. 이 허상이 사람들의 무한한 의욕을 틀 속에 가두어 두었기에 개인으로 하여금 초인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그리스도의 교리나 계명은 니체로부터 거부당한다. 니체가 본 교리는 사람의 삶이 충동을 억압하는 것이다. 그는 “모든 신들은 죽었다”고 외쳤다. 이것은 사람이 디오니소스적 삶을 추구할 때 종교적 교리가 거부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베르그송(1859~1941년)은 종교를 정적(靜的)종교와 동적(動的)종교로 나누었다. 콩트와 스펜서가 주장한 것처럼 베르그송도 종교를 사회적 요구에서 기원된 것으로 간주한다. 즉 사람들이 신이나 주술의 환경적인 힘을 인격적인 술어로 생각하는 것에 익숙해짐에 따라 종교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라 본다. 이러한 종교는 지식의 문제도 아니요 시상(詩想)에 의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현실적 요구에 의한 것인데 이러한 종교를 정적종교라 한다. 이 정적종교는 지성에 의한 것이면서, 오히려 사용함에 있어서 개인을 억압하고 사회를 분해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베르그송은 외적 혹은 자연적 종교를 부정한다. 실제로 베르그송은 관념론자도 유물론자도 아니다. 그는 세계를 창조한 신 같은 것을 믿지 않고 창조자와 피조물과의 구별을 초월한 그 자체를 세계라 한다. 그리하여 사람의 실존을 억압하는 종래의 인격신, 즉 정적종교를 거부한다. 그리고 인류와 우주를 넘어서 모든 존재와 일치하는 극한점에서 성립되는 개방적이고 창조적인 동적종교를 역설한다.

우리는 뒤르켐이나 프로이트에서도 신이 거부당하는 내용을 보게 된다. 뒤르켐은 사회의 표상이나 인격화가 신이라 한다. 물론 그는 마르크스처럼 신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기원이나 교리의 성립근거를 사회에서 찾고 있다. 즉 신의 관념이 사회를 구성하는 정신적 지주가 아니라 오히려 사회가 개인의 사상과 행위를 지배하기 위하여 관념적인 하느님의 개념을 사람에게 심어 주고, 사회 자신이 하느님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에서 유일신의 종교를 부정한 것이다. 프로이트는 종교를 ‘자연의 위협에 대한 심리적 방어’라 한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에 의해 검증가능성을 갖지 않는 신과 초자연적인 실재성을 거부한다. 결국 신앙은 성취욕에 의한 개별적인 심리의 반영이다. 그러므로 종교 관념의 발생은 심리학적 범위 안에서이다. 프로이트에게 있어서 종교는 방어, 치료, 성취의 심리적 현상을 가공적인 신 관념과 연결시킨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심리적 현상에서 설명하고 있다.

한편 사람들은 삶에 있어서 악한 행위를 합리화하는 경향이 있다. 가령 죄를 짓고서 자신만 알고 있는 사실로 감추기도 하고, 다른 사람이 죄를 짓는 것을 공감함으로써 자신의 죄를 합리화한다. 이것은 신을 부정하는 원초적 심리현상이다. 그런데 세상에 악이 본래부터 있었다고 한다면 그 악의 근거는 하나님일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악의 근거가 될 수 없기에 신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의 어디서고 하나님이 악이라고 표현한 적이 없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악은 원래 그 자체가 선한 것이지만 잘못된 방향으로 가 버린 것”이라 한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악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고 사람에 의해 생긴 것이라 한다. 만일 사람이 악의 원인이라면 선의 원인도 사람이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선한 일을 행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은 하나님의 본질 중의 하나이니 악으로써 하나님을 거부하게 된다. 또한 악의 원인이 사람이라면 이 악을 행할 수 있게 만든 하나님이 근본적으로 책임을 져야 하기에 하나님께 그런 책임이 없다면 악의 근거는 모호하게 된다. 그러나 라이프니츠(1646~1716년)는 악을 육체적 고통인 물리적 악, 선과 함께 만든 도덕적 악, 존재에 완전성이 결여된 형이상학적 악으로 나누었는데, 그는 형이상학적 악에서 신의 완전성의 결함을 인정하게 된다. 칸트도 도덕적인 악에서 신을 요청으로 받아들인다. 사실 신은 전능하기 때문에 악을 없앨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악은 사실로 주어져 있으니 신이 있다면 전능한 것이 아니요, 또한 신이 선하므로 악을 선으로 바꿀 수 있는데도 그렇지 못하니, 악의 입장에서는 신이 없는 것으로 된다.

러셀(1872~1970년)은 신을 거부하는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모든 것이 원인을 갖는다고 하면 하나님도 모든 것에 포함되어 원인을 갖게 되고, 자연법칙의 일관성을 부정하는 데서 하나님의 섭리적 작용을 부정한다. 또한 악을 고치기 위해서 하나님이 있게 되면 하나님은 이 악의 전제로 있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의 교리나 예수의 설교에 있어서 성령을 거역하는 자는 죄를 받는다는 교리적 결함을 지적한다. 즉 그리스도교를 믿지 않고 죄를 짓는 자가 지옥에 간다면 죄와 지옥은 신의 창조물이요, 또한 도덕적으로도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수께서 무화과나무 앞에서 무화과에 열매가 없음을 알고 앞으로 영원히 네 열매를 먹지 못하리라 한 것은 성자다운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그리스도를 믿지 않으면 모두 악하게 된다고 하는 그 자체가 종교를 거부하는 원인이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설교에서 나타난 인간적 본질을 부정하는 내용, 그리스도교를 믿는 사람들이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더 악을 행하는 경우 등에서 신을 거부하게 된다. 포이어바흐(1804~1872년)는 “너의 적을 사랑하라는 준칙은 단지 개인적인 적에게만 적용되는 준칙일 뿐 공중의 적, 즉 신앙적인 적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 규율이다”라고 한 것처럼 러셀도 신앙과 사랑을 구별한다. 즉 사랑은 만인의 것이지만 신앙은 믿는 자에 한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마르크시즘에서 종교의 부정적 면을 찾아야 하겠다. 마르크스(1818~1883년)는 헤겔의 관념변증법과 포이어바흐의 과학적 유물론을 근거로 하여 유물변증법을 전개한다. 헤겔의 변증법은 정신의 활동과정, 즉 이념이 자신을 부정하고 외부로 표현된 것이 자연이요, 자연에서 다시 자신에로 돌아간 것이 정신이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변화의 원인을 헤겔처럼 정신에 두지 않고 오히려 변화의 원동력이 물질임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념도 두뇌 안에 있는 물질로 보았다. 그래서 모든 존재의 근거, 모든 변화의 근거는 물질이다. 즉 신이 존재의 근거가 아니라 물질이 종교의 존재근거가 되게 된다. 여기서 신앙은 하부구조에 대한 상부구조로서 이데올로기이다. 그에 따르면 물질이 정신보다 더 근원적이기 때문에 종교는 물질에 딸려 있는 허구적 개념 또는 억압적 개념이다. 그는 종교를 인민의 아편이라 한다. 마르크스에게 이러한 종교개념을 심어준 사람이 포이어바흐인데 그는 종교를 사람에서 시작하여 사람에서 끝나는 것이라 주장한다. 즉 신은 객관적으로 본 사람의 본이다. 그러므로 신은 실체가 아닌 가공적 존재이다. 결국 종교는 사람의 정신구조와 그 활동에 연결된 의식구조이다. 이러한 내용을 마르크스가 자연종교와 인위적 종교로 구분한 후 후자에 대한 그의 종교론이 주된 내용이 된다.

마르크스는 그리스도의 종교관과 세계관을 전도된 세계관이라 한다. 왜냐하면 종교는 현실적 노동력을 무시하고 위로와 존엄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심리가 종교적 이데올로기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과 이상이기 때문이다. 사실 마르크스가 주장하는 것은 신을 포함한 사회의 모든 제도가 사람에 의해 창조된 것인데, 이 모두를 신에 의해 창조된 것으로 보는 그 자체가 잘못이란 것이다. 이는 종교를 심리적 관점에서 보지 않고 사회적 기능에만 관련시킨 하나의 편견이다. 즉 우리 사회에서 종교의 원인은 소외이고 소외의 결과가 종교라는 종교론을 주장한다. 이에 사회에서 소외의 감정이 사라질 때 당연히 종교도 사라지게 된다는 것이다. 사실 마르크스는 종교가 자본과 노동을 착취하는 위선적 역할을 하는 것으로 보았기에 궁극에 가서는 종교를 부정한 것이다.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