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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성과 영성의 만남●이어령 교수와 이재철 목사-“고등종교와 하등종교의 분기점은 자기부정”

매일종교신문 | 기사입력 2011/05/31 [09:43]

지성과 영성의 만남●이어령 교수와 이재철 목사-“고등종교와 하등종교의 분기점은 자기부정”

매일종교신문 | 입력 : 2011/05/31 [09:43]
지성과 영성의 만남●이화여대 석좌교수와 이재철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

“고등종교와 하등종교의 분기점은 자기부정”


이 글은 ‘2010년 양화진목요강좌’에서 이어령 이화여대 석좌교수와 이재철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가 ‘종교’를 주제로 각각 지성과 영성을 대표해 나눈 대담으로, 본지가 동영상에서 발췌 요약한다. 본지 제 16호(2010년 4월 15일자)에 그 첫 번째 대담 ‘삶과 가족’을 실은 바 있으며 이후 교육, 사회, 경제, 정치, 주택문제 등에 대해 대화를 나눴고 지난해 12월 3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 선교기념관에서 8번 째 대담이 이뤄졌다. 이후 이 목사가 안식년을 맞아 만남은 없는 상태. 오래 된 대담이기는 하나 지면으로 강좌를 마련해달라는 독자들의 요청에 의해 지상중게한다. (편집자주)


사회(김종찬): 인간과 종교는 어떤 관계인가. 인간은 왜 종교에 천착하는가.

이재철: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지극히 제한적이다. 과학을 통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현상학적인 것이지 근본적인 것이 아니다. 우리의 지능이나 능력으로 볼 수 없는 것, 알 수 없는 것, 그 근본적인 것에 대한 답이 종교에서 나온다.

종교는 눈에 보이는 것만이 모든 것이라고 단정하는 세상의 가치관과는 다르다. 종교적 가치관은 보이지 않는 것, 영혼이다. 고등종교일 경우 다 사랑이고, 관용이고, 자비다. 종교의 이름으로 벌이는 분쟁과 전쟁은 종교를 믿는 사람들의 문제이다.

고등종교와 하등종교를 구분하는 분기점은 자기부인이다. 고등종교가 타락하면 성직자가 급증하고, 그러면 자기 부인이 없어진다. 성직자들이 자기부인의 삶을 산다면 지원자가 많을 수 없다. 따라서 많은 종교기관이 생겨나고, 종교의 기복화가 나타난다. 내가 사역하는 종교기관에 사람을 오게 하기 위해서는 상대가 듣기 좋은 말을 전하게 된다. 그래서 종교가 기복화 되고, 이해집단화, 세속화집단이 된다. 따라서 권력을 추구하고, 자기 교단을 위해 전쟁도 하고 테러도 일으키는 온갖 부작용이 벌어진다.

사회: 인류역사에서 종교는 언제부터 존재했는가.

이어령: ‘어느 무신론자의 기도’는 최초의 인간, 아담이 언제 울었을까를 상상하면서 쓴 시다. 아담이 대낮에 얼마나 기뻤을까. 그런데 밤이 왔다. 최초의 인간이 최초로 맞이하는 밤이 얼마나 무서웠겠는가. 그런데 암흑의 절망에서 어제 본 태양이 솟아올라왔을 때 아담은 목 놓아 울었을 것이다. 최초의 새벽, 그 때 종교가 시작했다.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권능과 두려움을 알았을 것이다. 어둠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 죄의식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은 종교가 필요 없고, 종교가 태어나지 않는다. 태초의 종교는 어둠과 빛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확실한 것 같다.

네안데르탈인들은 죽음을 매장했다. 어떤 짐승이 매장을 하는가. 인간의 죽음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울고 장례식을 지내줬을 것이다. 무덤에서 먼 곳에 있는 꽃이 나온 것은 영혼을 달래려는 뜻일 것이다. 이것이 종교의 시작이다. 장례식이 종교의식으로 바뀌는 것이고, 그게 종교의 시작이고, 죽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종교가 있다.

종교는 가장 중요한 본질적인 것을 가르친다는 뜻을 지니고 있지만 종교는 배우는 거다, 구하는 것이다. 성경의 ‘구하라 주실 것이다’는 말이 기가 막히다. 하나님도 구해야 주시지 안 구하면 절대 못준다. 나는 하나님을 구한 적이 없다. 그런데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과 앞을 못 보는, 인간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발견하고 하나님 앞에 무릎 꿇고 구하게 되었다. 다른 데서 구할 수 있다면 증거도 없는 하나님을 찾겠는가. 밤의 공포와 햇빛의 찬란함을 보고 울어본 사람은 종교를 찾는다.


사회: 각 종교들은 자신들의 기원을 어떻게 얘기하는가.

이어령: 종교의 원류는 신화니까 모른다. 2500여 년 전 인도 석가모니가 나오는데 그것은 이전에 있던 브라만이라는 토착종교에 대한 1차 종교혁명이다. 공자 이전에는 자기 조상만 모셨다. 공자는 처음으로 하늘이라는 말을 종교에 끌어들였다. 2차 종교혁명은 마르틴 루터 등 각 종교에서 교리나 중심인물을 배제하고 하나님과 직거래하자는 개혁이다. 문명과 종교는 밀접하다. 농업혁명이 일어났을 때 1차 종교혁명이 일어났고, 산업혁명시대에는 마르틴 루터와 칼뱅 등 2차 종교혁명이 있어났다. 3차 종교혁명은 지식정보가 발달한 나라에서 일어난다. 한국에 종교가 중심이 되어 움직이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다.

1차 종교혁명은 중간과정을 없애자는 거였다. 2차 종교혁명 때는 하나님과 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성이 생겨 종교가 새롭게 부활했다. 3차 종교혁명은 지식정보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다. 인터넷에 접속해 보면 세계 사람들과 만난다. 하나님과의 접속도 이와 비슷하다. 교회가 키보드다.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쌍방적이다. 하나님과 직접 접속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오고, 교회가 아닌 개인이 직접 누르면 갈 수 있는 네트워크 된 종교세계가 온다.


이어령: “죽음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종교가 있어”

이재철: “인간의 근본적 문제 해답 종교에서 나와”


사회: 종교가 서양과 동양에서 어떤 길을 걸어 왔고, 동서양의 종교가 각각 어떻게 이해했는가. 우리나라 사람들이 이해하는 종교는 무엇인가.

이재철: 서양에서는 종교를 릴리전이라고 부른다. 두 해석이 있다. 종교예식을 집전하는 사제가 종교적 예문을 계속해서 읽는 것에서 나왔다. 또 하나는 ‘다시 연결한다’는 의미다. 절대자 신과 인간을 다시 연결시켜주는 역할이 종교다.

서양이 이해하는 종교가 동적이라면 동양은 정적이다. 서양이 외향적이라면 동양은 내향적이고, 서양이 행동적이라면 동양은 사유적이다. 서양종교의 궁극적인 관심은 신과 저 세상이다. 동양의 종교는 윤회사상이나 권선징악적인 내세관이 있기는 하지만 주된 관심사는 나거나 이 세상이다. 동양종교는 현 세계의 질서를 유지하는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태도를 견지하거나 탈세상적인 무아지경을 추구했다. 서양종교가 동양종교 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한 시기가 있었지만 근자에 들어 동양종교들에 깊은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행동하고 적극적인 이것은 잘못하면 내적으로 허해진다. 그래서 서양종교가 내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동양종교를 배우려는 것은 동서양의 차이가 갖는 하나의 결과론적인 형태가 아닌가 보여진다.

우리나라에 최초로 유입된 고등종교는 불교이고, 조선 5백년은 유교가 국가종교로서 영향력을 미쳤다. 지금은 조선 말기에 들어온 천주교와 개신교가 한국에서 가장 큰 종교집단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태동된 천도교나 증산교 등도 있다. 우리나라에는 이런 종교가 유입되기 이전에 샤머니즘이 깊이 뿌리내리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고등종교가 들어와 자리를 잡아도 세월이 흐르면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는다. 불교도 샤머니즘을 극복하지 못하여 기복화 경향이 있고, 유교 역시 ‘하늘을 섬기라’고 했으나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조상을 섬기는 종교로 변형되었으며, 200여 년 역사를 가진 기독교의 기복주의화도 역시 샤머니즘의 뿌리에 기원하고 있다. 이처럼 고등종교들도 한국에 들어와서 면면히 이어온 샤머니즘과 혼합되는 특성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불교나 기독교 속에 들어있는 샤머니즘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종교 본래 모습을 되찾지 않으면 종교가 사회의 혼란을 가중시킬 우려가 있다.

사회: 어느 서양저널리스트는 한국에 종교가 들어가면 한국종교가 되고, 공산주의가 들어가니 한국공산주의가 되니, 민주주의도 한국민주주의가 되지 않을까 생각된다고 했다.

이재철: 헐버트 선교사는 ‘대한제국멸망사’에서 ‘한국인들은 사회적으로는 유교’라고 썼다. 그리스도인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도 여전히 편치 않다. 유교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으니 해결되지 않는다. 또 헐버트는 철학적으로는 불교적이고, 고난을 당하면 미신적이 된다고 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어떤 종교를 갖고 있는가를 보려면, 그 사람이 고난을 당할 때 어떻게 대응하느냐를 보면 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 불교인이나 기독교인들이 고난을 당했을 때 부처님의 불도를 따르고, 예수님의 말씀을 좇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깊이 생각해 봐야 한다.

사회: 넓은 의미에서 무신론, 마르크시즘, 나치즘, 애니미즘도 종교로 볼 수 있는가. 종교와 이념 또는 애니미즘은 어떻게 다른가.

이어령: 종교를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다르다. ‘나는 이런 생각을 가졌고, 이게 나의 삶의 방식이다. 나는 죽음을 이렇게 생각한다’면 그건 종교다. 기독교와 마르크시즘은 정반대인데 행위는 비슷하다. 유물을 신으로 바꿔놓으면 똑같다. 아인슈타인은 과학과 종교는 점점 융합하게 될 것이다고 했다. 극과 극이 마지막에 만난다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니체만큼 신을 잘 아는 사람이 없다. 그만큼 기독교를 잘 알았기 때문에 신은 죽었다는 말을 할 수 있었다. 신의 논쟁에 말려드는 사람은 다 유신론자다. 진짜 무신론자는 신이라는 관념조차 없는 사람이다.

교회에 생명이 아니라 생활을 위해 온 사람은 잘못 왔다. 그건 인간이 해 줄 수 있고,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 이익을 위해 일하지만 예외가 있다. 그게 가족이다. 자기가 죽더라도 가족을 위하려고 한다. 우리는 안타깝게도 가족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했다.

기본적인 생명학적인 조건만 가진 사람들은 죄의식이 없다. 죄가 없으면 하나님도 모르고 종교도 안 생겨난다. 자기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큰 죄인이 없다. 내가 남을 미워하면 안 되는데 미워할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가 존재하는 게 죄다. 내가 앉으면 이만큼 다른 사람이 못 앉는다. 남을 밟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이 환경, 착한 사람 악한 사람이 아니라, 인간이면 어쩔 수 없는 상황 그게 죄다. 방안에 혼자 있으면 얼마나 자유로운가. 다른 사람이 오면 굳는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했는데 이웃이 지옥이다. 이웃이 존재하는 한 그만큼 내 몫이 줄어든다. 이것을 인간의 힘으로 풀어갈 수 있다는 것이 휴머니즘이다. 인간은 원죄를 져서 안 되니, 인간보다 훨씬 나은 어떤 존재가 나를 도와줘야 튀어나올 수 있다.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죄의식이 없다. 한국에서 말하는 죄와 기독교에서 선악과 따먹은 원죄와는 차이가 있다. 한국은 어느 의미에서는 성선설이다. 인간이 먹고 자고 기복적인 것이 한국에는 잘 맞는다. 교회 와서 덕 보려고 오는 것이 샤머니즘이다. 그것 자체가 죄다. 피붙이니까 사랑했고,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니까 사랑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필리아, 아가페가 아니다. 지성을 가지면 안 될 사람이 지성을 가지니까 원폭도 만든다.


이어령: “교회에 덕 보려고 오는 것이 샤머니즘

이재철: “종교적 투쟁, 종교 아닌 종교인의 문제”


사회: 정통과 이단, 사이비 기준은 무엇인가. 또 모든 종교는 관용과 자비를 얘기하면서 불관용, 무자비, 분쟁한다. 이걸 어떻게 이해하며,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이재철: 정통과 이단을 구분하는 분기점은 그 종교의 경전이다. 유대교 랍비들은 주후 90년에 유대교 경전 39권을 확정했다. 그게 구약성경이다. 그 이유는 기독교가 자신들의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기독교가 397년에 교회지도자들이 모여 신약성경 27권을 신약의 경전으로 확정했다. 그것은 사람들이 자꾸 이상한 글을 쓰고 이게 하나님의 말씀이다고 하거나, 사도들이 쓴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기독교 경우 2세기에 두 이단이 있었다. 마르시온은 영지주의를 주장했다. ‘지구 위에 신이 있는데 이 신으로부터 유출된 신들 중 가장 열등했던 신이 여호와다. 그 신이 천지를 창조했기 때문에 천지창조가 실패했고, 인간이 타락했다. 여호와는 인간을 구원할 능력도 없으면서 화만 내는 신이다. 이 열등한 여호와를 이야기하는 구약은 성경에서 제외해야 하고, 신약성경 중에서 히브리서 등은 유대인들의 관습을 토대로 쓰여졌기 때문에 신약에서 빼야 된다.’고 주장했다. 마르시오는 2천 년 최초로 하나님의 말씀을 잘라내는 이단이었다. 그 이후 몬타누스는 그릇된 성령운동, 궤도를 벗어난 신비운동주의자였다. 그는 종말론을 주장하면서 보헤사성령이 자기에게 임하였기 때문에 자기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 성경이 된다고 했다. 성경을 잘라 내거나 덧붙이면 이단이다.

사이비는 성경 한 구절을 성경전체로 왜곡시킨다. 가령 요한 3서 1장 2절의 “너의 영혼이 잘 됨 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기도한다.”는 이 말씀은 ‘…네가 그렇게 되기를 기도 한다’는 말인데 ‘네가 예수 믿는데 사업이 안 되는 것을 보니 네 영적 상태가 안 좋구나.’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종교가 자기 부인을 상실하면 종교의 본질을 상실하고 이해집단의 권익을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다. 그때부터 종교와 신의 이름으로 행하는 모든 일들은 세상에서 일어난 일보다 더 추악할 수밖에 없다.

사회: 각 종교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이 어떻게 다른가. 또 종교는 사람의 삶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해답을 주는가.

이재철: 범신론은 신이 만유일체고 만유일체가 신이다. 스피노자는 신과 자연은 한 실재에 대한 다른 두 이름이라고 했다. 범신론세계에서는 인간도 신이다. 창조주와 구원자자 있을 수 없다.

불교는 인간은 괴롬과 고통덩어리이고, 수행을 통한 깨달음으로 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본다. 불교는 본질을 죄로 보지 않기 때문에 죄의식이 희박하고, 구원자가 필요 없기 때문에 자력종교라고 한다.

이슬람은 복종이라는 뜻이다. 무슬림은 복종하는 사람이고, 복종의 기준은 알라 신이다. 내가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알라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라, 알라의 명령에 복종함으로써 구원을 얻게 된다고 본다. 무슬림들에게는 행함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다섯 가지 의무는 반드시 지켜야 한다. 알라는 신이고, 무함마드는 그의 예언자로 고백하는 의무와 정해진 시간에 하루에 다섯 번 기도해야 하고, 헌금과 구제, 라마단기간 동안 금식, 일평생 한 번은 성지를 순례해야 하는 의무를 행해야 한다. 이슬람교는 일종의 자력종교인데, 불교와는 달리 죄를 강조한다. 어떤 복음이나 구원의 기쁨은 찾아보기 힘들다.

개신교는 인간은 죄인이므로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없다. 그리스도라는 구원자가 밖에서 와서 그 죄로부터 구원해 준다. 기독교를 가리켜 타력종교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가 구원해 줘서 그 분을 좇는다.

종교가 모든 답을 다 주는가. 두 개의 답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삶의 모든 문제에 답을 주지 않는다. 성경은 구원을 위한 백과사전이지 인간의 모든 삶을 위한 백과사전이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가 삶의 모든 답을 줄 수 있다. 성경을 해석, 재해석하고 삶에 적용하면 가능하다. 고등종교와 하등종교의 분기점이 자기부정이다. 미신이란 내게 있는 것으로 신을 얼러서 내 목적을 성취하려는 것이지만, 신앙은 내가 믿는 절대자로 인해 내가 바뀌는 것이다. 우리가 얻으려는 내 욕망의 답은 성경에 없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빚어지기 위해서 이것을 버려야 한다. 그러면 성경은 모든 질문에 답을 준다.

사회: 이 질문과 관련해서 더 보태줄 말씀이 있는가.

이어령: 한국 사람들은 삶에 대해 신체성이 강렬하다. 사람의 생명을 목숨이라고 한다. 한국 사람들은 고통을 당하거나 죽어갈 때 ‘사람 살려’하지 ‘나 살려’ 하지 않는다. 반면 서양 사람들은 ‘나 살려’ 그런다. 사람 살리라는 데 사람이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한국 사람들은 사람을 완성된 것으로 보지 않았다. 한국 사람들은 백지상태에서 태어나서 사람 되는 거다. ‘저 사람 사람 됐어, 사람 못 됐어.’ 사람이라는 가치가 있는데 사람이 배우지 않으면 사람이 못 된다는 뜻이다. ‘나도 사람이다.’는 말은 절대자가 아니니 봐달라는 거고, ‘너도 사람이냐’는 말은 사람이 짐승보다 높다는 거다. 한국에서의 사람은 신과 만물의 중간자다. 한국 사람은 종교 없이도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윤리가 있다. 사람이라는 가치를 생활의 최대치로 봤기 때문에 신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 한국 사람의 의식에 영성이 들어가면 한국은 대단히 현세적인 것과 내세적인 것이 잘 어울리는, 헤브라이즘과 헬레니즘이 잘 결합할 수 있는 조건이 많다.

사회: 지성의 입장에서 볼 때 신앙생활에서의 영성의 역할과 필요성이 무엇이고, 영성의 입장에서 지성의 역할과 필요성은 어떤 것인가.

이어령: 물이 확 엎질러지면 대부분의 아이들은 즉시 걸레를 가지고 와서 닦는다. 죄의식도 있고, 야단맞을 소지가 있으므로 증거를 없애는 거다. 지성은 이런 거다. 반면 우는 애가 있다. 겁나서 운다. 이게 감성이다. 지성은 해결하는 거고, 감성은 자기가 놓인 상태를 호소하는 거다. 울면 어머니가 대신 닦아준다. 어느 쪽이 좋은지 모른다. 그러나 영성은 점핑한다. 영성은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일을 창조한다. 영성에 가장 가까운 사람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다. 갑자기 영감이 떠올라 한다. 지금까지 논리가 확 바뀌는 것이다. 인과를 벗어나야 영성이다.

지성은 기획하고 따지기 때문에 예측 가능하다. 자기 눈으로 보면 이 세상에 의심 안 가는 것이 없고, 이치에 닿은 것이 하나도 없다. 지성을 갖는 순간 고통스럽다. 옳지 않은 상황 하에서는 지성을 가진 사람은 항상 박해를 받는다. 정말 옳았던 거냐. 더 깊이 알고 보면 아니다. 영성으로 가면 몰라서 박해 받은 것을 알게 된다. 영성은 인간의 지적오만을 넘어서는 어떤 힘, 그 앞에서 내가 오만해질 수 없는 힘이다. 이 영성은 바깥에서 오지 내가 공부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지혜와 영성은 생명처럼 주어지는 것이다. 

이재철: 하나님의 로고스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로직을 알아야 한다. 로직은 지성이다. 지성은 배양할 수는 있지만, 그 능력 역시 하나님이 주신다. 하나님이 주신 지성을 연마할 때에 하나님의 로직을 더 잘 이해하고 로고스를 더 깊이 깨우치게 된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했다. “너는 네 형제 눈에 있는 티끌은 보면서도 어떻게 네 눈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왜 거기에 대해서는 지각력을 갖지 못하느냐는 말이다. 너희들이 내 말을 따른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너희들의 지성을 갖고 깨달아 보라는 말이다.

지성을 동원하면 결과가 전혀 달라진다. 지성이야 말로 영성을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수단이다. 그러나 지성은 어떤 경우에도 로고스 위에 올라갈 수 없다. 로고스에서 파생된 것이니까. 지성으로 로고스를 생각하고 내 삶에 적용하면 내 삶 자체가 영적예배가 된다. 사도바울이 예수님을 만나 영성의 세계로 들어갈 때 시력을 상실했고, 안수를 받고 눈에서 비늘이 벗겨지면서 영성의 삶이 시작됐다. 자기의 지성을 로고스 아래 내려놓은 그 눈으로 로고스를 보고 쓴 게 로고스가 됐다. 믿음이 있을수록 더 지성을 연마해야 한다.(정리: 이중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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