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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청법문: 초청법문:티베트 수행자들의 보호자 캄뚤린포체-

매일종교신문 | 기사입력 2011/05/30 [16:01]

초청법문: 초청법문:티베트 수행자들의 보호자 캄뚤린포체-

매일종교신문 | 입력 : 2011/05/30 [16:01]

초청법문:티베트 수행자들의 보호자 캄뚤린포체


“보시는 대상 없는 지혜와 궁극적 자리를 닦는 일”


불교 조계종 상도선원(선원장․미산 스님)은 지난 5월 22일 큰법당에서 북인도 다람살라 따시종(길상마을이란 뜻)지역 깜빠갈 사원에 주석중인 제9대 깜뚤(Khamtrul) 세둡니마 린포체를 초청, 법회를 가졌다. 깜뚤 세둡니마는 티베트의 위대한 스승 깜뚤린포체의 아홉 번째 환생자이며, 티베트 수행자들의 보호자로 알려져 있다. 다음은 깜뚤 세둡니마 린포체의 법문을 발췌, 요약한다. <편집자주>


원만 구족하신 부처님은 세상에서 다양한 법을 굴리셨습니다. 부처님은 각자 근기에 맞게 법을 설하셨지요. 유능한 의사가 환자 각각의 상황과 이유에 맞게 약을 주는 것처럼 부처님은 각자의 근기와 성향, 원하는 바, 그리고 업에 맞춰 법을 주셨답니다. 그렇게 해서 근본불교, 대승, 금강승 등 다양한 승(乘)이 생겨났지요.

부처님은 초전법륜에서 고집멸도(苦集滅道) 사성제를 설하셨습니다. 독이 독인 줄 알아야 피하듯, 고통이 고통인 줄 알아야 벗어날 수 있습니다. 모든 법은 ‘모여서’ 이루어졌지요. 그러므로 무상하고, 항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고통입니다. 불이 뜨거운 것이 본질이듯, 윤회계의 본질은 고통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법에 들어가는 문에서는 동기, 즉 마음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어떻게 쓰느냐가 관건이죠. 우리가 현생을 중시할 때 어떻게 법을 추구하고, 내생을 중시할 때 어떻게 마음을 쓰는지 살펴야 합니다.  마음의 량도 살펴봐야 합니다. 사바세계의 고통을 벗어나려면 마음을 잘 써야 하지요. 마음의 동기가 바를 때 법에 제대로 들어가고, 그래야 제대로 된 결과가 나옵니다.

우리는 먼저 고제(苦諦)를 잘 사유해서 윤회계가 고통이라는 것을 먼저 분명하게 인식해야 합니다. 법을 닦는다 함은 윤회계가 고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우리가 닦는 대상은 윤회계를 벗어나 구경 성불하는 것이죠. 중생은 고통이 고통인 줄 모르고, 윤회계가 의미 없음을 몰라 벗어날 생각이 없고, 벗어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모릅니다. 윤회가 좋다는 마음이 있기에 과거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이렇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윤회계를 계속 돌며 불과(佛果)와는 거리가 멀어질 것입니다.

고통을 인식하고 아는 것만으로는 해탈이 안 됩니다. 왜냐하면 고통은 이미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인(因)은 업과 번뇌입니다. 번뇌는 아집과 무명의 집착이지요. 나의 것을 집착하고  사랑하며, 내가 아닌 것에 대해서는 타(他)가 생기고 타에 대해서 모르고, 해를 끼치려는 인(因)과 연(緣)이 돌아 악업을 짓게 되고 윤회계를 돌게 됩니다. 아집인 번뇌를 끊고 고통이 고통인 줄 알아야 합니다. 

고가 고통인줄 알고 대처하는 방법, 즉 인(因)을 강구해야 합니다. 모든 승에서는 공통적으로 부처님과 스승님들은 의사, 법은 약, 그리고 번뇌와 아집을 병이라 말하죠. 병을 치료하는 방법이 수행이라는 것을 알고 인식해야 합니다. 법을 잘 듣고, 계합시켜 실제로 익히고, 마음이 하나하나 변화하게 만들어가야 합니다.

윤회계를 벗어나고자 하는 염리심(厭離心) 만으로는 고통의 뿌리를 끊지 못합니다. 성불을 위해서는 두 가지가 요구됩니다. 첫째는 고통의 뿌리를 끊어 벗어나는 마음이고, 둘째는 해탈의 공덕을 알아야 합니다. 업과 번뇌는 우리의 마음을 힘들고 어렵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 몸이 결과인 고통을 겪습니다. 윤회는 잠시는 좋아 보이지만, 원리가 ‘모여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고통(생로병사)입니다. 반드시 뿌리를 끊어야 하지요. 해탈은 무엇을 해탈하겠다는 것인지 살펴봐야 합니다. 우리는 어디에 얽매어 있습니다. 업과 번뇌의 힘(밧줄)에 묶인 채  끊임없이 돕니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해탈, 열반이라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고통은 허물, 벗어나려는 의지 가져야

번뇌와 아집의 병 치료하는 것이 수행

아집 사라질 때 궁극적 보리심 드러나


그러므로 고집멸도의 고통이 허물인 줄 알고 벗어나야 합니다. 업과 번뇌로부터 벗어나야 합니다. 고통을 일으키는 집착과 아집, 번뇌를 끊고 열반을 이루기 위한 수행과 해탈의 공덕을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 안에 불성은 이미 있으니 우리는 벗어나고자 하는 확신만 있으면 벗어날 수 있습니다. 윤회계를 벗어나는 방법과 구경을 성취하는 방편으로 부처님은 육바라밀을 설하셨습니다. 육바라밀에는 대승 수행의 모든 방편이 다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길을 가고 안 가고는 각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 길을 가려면 우리는 반드시 정진을 해야 합니다. 정진을 하면 불성의 근본 힘이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궁극의 성불의 길로 가는 기본적인 제도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방편의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지혜의 측면입니다. 방편은 자애, 연민을 통해 보리심을 증득하는 것입니다. 자애, 연민을 관상하고 일으켜서 보리심을 내는 것인데, 자타평등심 한 마음이 일어나게 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공성(空性)의 지견, 곧 공성의 깨침이 일어나는 것이 지혜입니다. 이 둘을 하나로 써야 구경이 성취됩니다. 처음부터 이 둘이 하나여야 합니다. 그러므로 둘 중 어느 하나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마치 새의 두 날개와 같습니다. 연민 즉 보리심과 지혜 즉 공성의 깨침이 같이 있어서 종국에 이 둘이 하나가 되도록 익히는 것이 대승이며 금강승입니다.

이런 연고로 육바라밀을 닦을 때 방편과 지혜를 하나로 해야 합니다. 지혜와 공덕 두 자량 (資糧)을 하나로 닦아야 합니다. 보시를 예로 들어보면 삼륜청정이라고 하지요. 보시하는 사람과 보시물과 보시를 받는 사람 이 삼자가 본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보시를 한다는 것이 원래 대상이 없는 지혜를 닦는 것이고 궁극적 자리를 닦는 것입니다. 자성을 깨치는 것이 궁극의 자량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너와 나 없는 자리, 즉 우리가 바로 부처라는 것을 드러나게 하기 위해 너와 나 둘의 자리를 거칠 수밖에 없습니다. 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계를 철저하게 지킬 때 우리 안의 본성이 현현하게 됩니다.

구경의 절대적 보리심, 불성, 공성을 체득하기 위해서 우리는 너와 나 사이의 사랑과 연민이라는 상대적 보리심을 증득해야 합니다. 사랑과 연민은 매우 중요합니다. 대승에서는 사랑과 연민의 크기와 깊이가 다릅니다. 일체 모든 중생이 성불하게, 행복하게 해야겠다는 지혜가 내게 일어나게 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 영구불멸의 진정한 보리심(본래 있으므로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만)에서 보면, 허공이 있는 한 중생이 있고, 중생이 있는 한 업과 번뇌가 존재하며, 내가 존재하는 만큼 고통이 존재합니다.

모르는 옆의 모든 타인이 다 부모입니다. 귀한 부모가 참지 못할 고통 속에 있으니 행복하게 해드려야겠다고 부모에 대해 이해하고 관찰을 하다보면, 우리가 모르던 무한한 근원적인 사랑이 됩니다. 이처럼 일체를 해탈시키겠다는 마음이 일어날 때 상대적 보리심이 증득됩니다. 이건 근본불교 보리심의 량과 다릅니다. 보리심이 일어나면 그 이익이 얼마나 큰지 스승과 성취자들이 다 말했습니다. 여러분도 다 알고 있으나 어렵고 안 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 마음을 돌이켜보며 보리심이 일어나도록 생각하고 명상을 해야 합니다.

티베트 불교는 우리 마음속에서 보리심이 일어나도록 닦는 수행을 합니다. 먼저 중생을 도움이 필요한, 자애를 일으키는 대상으로 보고 행과 불행을 바꾸는 수행입니다. 나의 행복을 타인에게 보내고 타인의 불행을 내가 받는 땅렌 수행입니다. 이를 자타교환수행이라 합니다. 나의 아집이 사라지기만 한다면 그대로 공성(궁극적 보리심, 자성)이 드러납니다. 가까운 사람,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타교환수행을 해 보십시오.

불과를 증득하려할 때 마음의 발원, 즉 원 보리심이 있고 상대적 보리심이 있습니다. 대승에는 현교와 밀교가 있고 그 뿌리는 연민과 보리심입니다. 윤회계를 벗어나게 하겠다는 연민과 벗어나기 위한 보리심이 있습니다. 금강승의 길에서는 방편이 다양합니다. 보리심을 증득하는 방법이 다양한데 두 가지로 보면 생계차제와 원만차제가 있습니다. 생계차제는 우리 자신을 부처, 관음, 또는 문수로 관상하는 것이며 이 세상을 정토로 관상하는 것입니다. 현상계가 부정하다는 인식을 대치, 정화하는 방법이 생계차제입니다. 우리 자신이 본래 그대로 본존(부처님)이며 정토라는 것을 인식시키는 것이지요. 원만차제는 관상이 아닌 본원 자리로 돌아감을 뜻합니다. 윤회도, 열반도 근본 자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윤회계가 있다는 집착, 번뇌의 마음을 일으키는 순간이 윤회계이며, 열반은 적정입니다. 둘 다 마치 실재하는 것처럼 집착하는 것을 벗어나서 둘을 하나로 써야 합니다. 금강승은 윤회와 열반을 하나로 쓰는 방편이 뛰어납니다.

각 승의 수행방편은 다양합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번뇌와 무명에 대한 대치법을 공통적으로 시설하고 있습니다. 근본불교에서는 탐진치를 대상으로, 보살은 번뇌가 일어나는 것을 보살의 자료로 씁니다. 금강승에서는 번뇌의 근원을 보아서 생각(생주이멸)을 볼 때 번뇌의 힘에 끄달려가지 않고 오묘한 상태에 성성하게 존재해 나가고자 합니다. 지(止)와 관(觀)을 통해 한 변에 머물지 않으며 한 변에 치우치지 않는 그 자리에서 양변을 편안하게 쓰고 머무는 것이 우리의 수행법입니다. <정리=정성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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