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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한국 서원의 설립 배경과 공간배치(上)

장정태 | 기사입력 2020/12/02 [07:43]
서원 등장의 사회적 배경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한국 서원의 설립 배경과 공간배치(上)

서원 등장의 사회적 배경

장정태 | 입력 : 2020/12/02 [07:43]

 

▲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서원」 9곳 왼쪽부터 소수서원(경북 영주시), 도산서원(안동시), 병산서원(안동시), 옥산서원(경주시), 도동서원(대구시 달성군), 남계서원(경남 함양군), 필암서원(전남 장성군), 무성서원(전북 정읍시), 돈암서원(충남 논산시)    

<연재순서>

()서원 등장의 사회적 배경

()한국 서원의 공간 구성  

  

신분제 사회의 폐단으로 철폐되었다가 세계유산 등재로 다시 주목받는 서원

 

성리학의 나라 조선은 이성계의 건국 이후 일관된 정책이 있다. 유교가 지배하는 이상 국가다. 인간의 삶과 행동거지 등 사회적 체를 지배한 유교는 이와 같은 동일체 사고가 한 사회를 지배하게 되는 배경에는 단일한 교육체계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조선은 건국과 동시에 고려의 교육제도인 관학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국가 공무원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향교 교육이다. 조선 중기 이후 시작된 당쟁은 중앙정부에서 낙향, 귀양 등 다양한 이유로 향리에 터를 잡게 된다. 이들 지식인을 중심으로 형성된 사학교육 기관인 서원은 철저하게 사학교육 기관이면서 하게 된다.

 

이와 같은 단일 목적의 사학은 단일한 사고체계를 형성했다. 서원은 배향 인물을 중심으로 형성된 단일사고 체계는 같은 이념을 통해 세력화를 이룬다. 서원의 이와 같은 모순에도 불구하고 오랜 시간 유지되었다.

 

현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학연의 뿌리는 서원을 중심으로 한 일면도 있다. 서원은 향교와 더불어 제향과 교육기관으로 기능은 신분제 사회에 한 폐단으로 인식되었다. 결국, 1868년 조선조 말 서원철폐령에 의해 많은 서원이 철폐되었다. 이와 같은 부정적 면과 함께 서원은 2019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면서 다시 한번 주목받게 된다.

 

관학의 쇠락으로 등장해 교육의 주도권을 잡은 조선 시대 사립학교 

 

조선의 지도이념이었던 유교는 신분적 명분론에 따라 군신(君臣), 부자(父子), 부부(夫婦), 양반(兩班)과 상민(常民), 주인과 노비 등과 같이 지배질서를 유지되었다. 국가 권력 구조와 관계 깊은 신분제도는 사회를 통치하는 표준인 것이다. 따라서 유교적인 윤리관을 기본으로 유교 정치를 내세웠고 사회질서의 확립을 위해 성균관, 학당, 향교 등 관학 교육을 강화하고 유학 서적, 유교 의례서 등의 보급에 힘썼다.

 

서원은 강학, 제향 그리고 교류와 유식을 주요 기능으로 하는 조선 시대의 사립학교다. 사립 성리학 교육기관으로서 후속 세대의 학문적 양성을 기본 목표로 하면서 선현에 대한 제향의 기능 또한 독보적으로 전승하고 존속해왔다. 더불어 사림의 정치, 문화, 교류의 중심지로서 교류와 유식이 강조되어 다른 교육 유산과 구별되는 서원만의 차별성을 가진다. 성리학에 관한 연구와 인성교육을 그 주된 목적으로 삼았다.

 

세종 때 들어서 관학 교육이 정비되었지만, 이때부터 관학이 출세 도구로 변질하기 시작했고, 향교의 교관은 질이 크게 저하되었다. 더군다나 세조의 집정은 선비들의 관학 교육 참여에 찬물을 끼얹는 꼴이 되었다.

 

성균관, 향교 등 관학은 생도가 미달하였고 벼슬에나 관심이 있는 무리가 학문에 뜻을 두지 않고 관학에 남아있었다. 16세기 들어서 관학의 부진은 극한 상황에 이르는데, 연산군은 성균관을 연회 장소로 이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학자들의 독서를 금하기까지 했다. 점점 관학은 쇠락해서 갔고 진정한 교육의 장이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등

장한 서원은 쉽게 교육의 주도권을 잡아갔다.

 

조선의 최고 사회 계급으로서 문관과 무관이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 양반이다. 이 양반의 자녀들만 서원에 적을 들 수 있었고 이것은 서원 건축의 특수한 사회성을 통해 알 수 있다.

 

서원을 통해서 學緣性 돈독히 하고 반대세력의 견제를 피해 

 

16세기 이후의 조선 사회는 사림에 의해 주도되었는데 사림세력의 정치적 성장은 서원이 큰 역할을 하였다. 고려 말 정몽주, 길재의 계열로 불사이군(不事二君)을 내세워 정치참여를 거부하였던 지식인들은 성종 때가 되어서 중앙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성리학에 기반을 두어 도덕과 의리를 숭상하고 학술과 언론을 바탕으로 왕도정치를 구현하려 하였다.

 

그러나 부국강병을 명분으로 권력을 잡고 있던 훈구세력과 대립하여 4번의 사화(士禍)를 유발하였다. 사림세력은 사화로 인해 큰 타격을 입었고 세력을 키우기 위한 궁극적 방안을 모색한다. 향촌에서 자란 사림들은 향촌에 뿌리를 내리고자 하였다. 이에 사창제(社倉制)의 시행을 주장하고 유향소(留鄕所)를 다시 세우고 향약을 시행하면서 세를 확장하려 했다. 그러나 그 의도를 알아차린 훈구세력의 방해로 그 일들은 쉽게 성사되지 않았다. 그래서 세력 결집을 위한 새로운 장으로 서원을 구상하게 된다.

 

서원은 명목상 어디까지나 교육 시설이었으므로 정치적 반대세력으로부터의 견제를 피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서원을 통해서 학연성(學緣性)을 돈독히 하면서 자신들의 힘을 키울 수 있게 되었다.

▲ 병산서원은 류성룡의 고향인 하회마을 근처에 자리 잡았다. 소수서원, 남계서원, 필암서원, 동남서원 들 서원 배향자의 고향이 가장 강력한 입지이다.    

 

서원 배향자의 고향이 가장 강력한 입지...장수유식처와 묘소 등에도 자리잡아 

 

서원 입지의 연고를 분류하면 출생지(고향)가 대부분이다. 서원의 건립과 유지에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서원의 건립에 우호적인 세력이 많고 후손들이 대를 이어서 운영을 뒷받침할 수 있는 곳이 출생지(고향)로서, 서원 배향자와 가장 강력한 연고를 가진 곳이다. 그 외에 장수처, 휴식처, 묘소 등의 연고지가 있었다.

 

첫째 출생지 입지이다. 소수서원은 안향의 고향에 자리 잡았다. 안향의 집은 순흥 읍치의 남쪽이었으며, 어릴 때 숙수사에서 책을 읽었다. 병산서원은 류성룡의 고향인 하회마을 근처에 자리 잡았다. 류성룡은 하회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병산서원의 전신인 풍악 서당은 류성룡의 집안인 풍산 류씨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류성룡의 묘소는 하회마을 북동쪽의 남산면 수동리에 있다. 남계서원은 정여창의 고향인 지곡면 개평 마을이 보이는 곳에 자리 잡았다. 남계서원 북쪽 승안산 기슭에는 정여창의 묘소가 있다. 필암서원은 김인후가 태어난 곳이며 묘소가 있는 맥동 마을 근처에 자리 잡았다. 김인후가 인종의 忌日에 올라가 통곡하던 장소인 난산(卵山)도 맥동 마을에 있다. 돈암서원은 김장생의 고향 마을인 임리에 자리 잡았다. 서원의 창건지도 임리이고 옮겨 세운 현재의 위치도 임리이다. 임리 이웃의 고정리에는 김장생의 묘소가 있다. 임고서원은 정몽주의 고향인 임고면에 자리 잡았다. 출생지는 우항리이며, 처음 서원을 건립한 곳은 고천동이며, 현재는 양항리에 서원이 있다. 서원의 북서쪽에 정몽주의 선친 묘소가 있다. 자계서원은 김일손의 고향에 자리 잡았으며, 자계서원 북서쪽에 김일손의 묘소와 재실이 있다.

 

둘째, 장수유식처 입지이다. 장수나 유식의 장소에 자리 잡은 서원도 있다. 도산서원은 退溪 李滉(퇴계 이황)61세 이후 거처하면서 학문을 연마하고 수양하고 제자들을 가르친 도산서당의 뒤편에 자리 잡았다. 회연서원은 정구가 세운 회연초당(檜淵草堂) 자리에 자리 잡았다. 구연서원은 신권이 제자를 가르치던 구주서당(龜州書堂) 자리에 자리 잡았다. 옥산서원은 이언적이 은거하여 학문을 연마하던 독락당(獨樂堂) 아래로서, 이언적이 유식하던 자계 계곡이 세심대에 자리 잡았다.

 

기타 입지는 묘소 아래, 후손의 세거지, 수령이 선정을 베푼 곳, 절개를 지친 충신과 관련된 곳 등이다. 도동서원은 김굉필의 묘소 아래에 이건자리 잡았다. 옥동서원은 황희의 후손들이 세거하는 마을에 자리 잡았다. 무성서원은 최치원이 수령을 지냈던 태인 지역의 읍치 인근에 자리 잡았다. 창절서원은 단종이 별세한 영월에 자리 잡았다.

 

한국의 서원은 조선시대(16세기 중반-17세기 중반) 성리학 교육기관의 유형을 대표하는 9개 서원으로 이루어진 연속유산이다. 한국의 중부와 남부 여러 지역에 걸쳐 위치한다. 서원은 중국에서 도입되어 한국의 모든 측면에서 바탕을 이루고 있는 성리학을 널리 보급한 성리학 교육기관으로 탁월한 증거가 되는 유산이다. 세계 문화유산으로서 가치로는 성리학 개념이 한국의 여건에 맞추어 지역화되는 역사적 과정을 서원의 기능과 건축적 배치 등에서 잘 보여주는 유산이다.

 

서원의 구성은 서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이는 시대와 흐름에 따라서 기능이 달라졌음에도 기인한다. 처음에는 교육 시설이 중요시되었으나 17세기 후반 아래로 제향 시설 중심으로 건물이 조영되고, 19세기에 와서는 대체로 사당과 강당만으로 구성된 단순한 형태의 모습으로 서원 구조가 바뀌고 있다.

 

서원의 설립 목적은 후학에 대한 강학과 선현에 대한 제향이다. 따라서 서원 경관은 기본적으로 유생들의 장수(藏修)를 위한 강학공간, 선현을 배향하고 제사하는 제향 공간으로 구성되며, 누문(樓門)을 중심으로 한 유식공간, 강학과 제향을 지원하는 고직사 공간도 있다. 外門(외삼문)을 들어서면 유식 공간과 강학 공간이 있으며, 강학 공간을 지나 內門(내삼문)을 들어서면 제향 공간이다.

 

여기서는 서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강당과 사당 기타 주요 건물을 살펴보면 강당은 선비들이 모여 학문을 토론하고 원생들의 강학 공간으로 서원 내 중심 건물이다. 이곳에서 학생들이 글을 배우는 곳이며, 아울러 선생의 거처가 되기도 한다. 따라서 서원 내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보통 5칸 정도로 계획된다. 이 경우 중앙으로는 대청을 3칸 규모로 크게 꾸미고 그 양 옆으로는 온돌방 두 개를 드린다. 평면적으로는 지극히 단순한 대칭성 구조이나 기능적으로는 여름과 겨울을 모두 수용하고 아울러 공적인 건물로서의 품위도 갖게 한다.

 

강당과 사당 사이에는 재실이 있다. 재실은 강당과 함께 교육공간의 핵심을 이룬다. 강당을 중심으로 좌·우의 재실을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라 하고 동재에는 서재에 기거하는 학생보다 선배가 기거한다.

 

사당은 선현의 신위를 모시고 제사하는 공간이다. 이는 선현들의 모습을 직접 찾아뵈울 수 있어 존현숭배의 마음과 학업 의욕을 고취 시켰다. 배향은 보통 한 사람이 주향으로 시작한 후에 존숭하는 인물이 생기면 추가로 배향하였다. 사당의 크기는 그리 크지 않으며, 아담한 정면 3칸 규모로 1~5인의 위패를 모시고 의식을 치르기에 적당한 지극히 검소한 규모로 지어졌다.

 

이 밖에 서원을 구성하는 시설로는 서적의 간행과 수집·보관 및 관리를 위한 장판각, 제향 시 필요한 제수를 마련하고 기물을 보관하는 전사청(제기고), 원생들의 휴식과 여가를 위해 또는 사회의 장소인 누각, 제향 구역의 정문인 내삼문(내신문), 외부에서의 출입구역인 외삼문, 성스러운 영역임을 알리는 홍살문, 서원의 관리와 노비의 거처인 고직사 등이 있다.

 

서원 영역에서 중요한 공간 가운데 유식 공간과 강학 공간을 앞 부분에 배치한 것은 유생들의 드나듦이 많아 항상 활달하고 생동하는 공간으로 느껴지도록 하기 위함이고, 제향 공간을 뒷부분에 둔 것은 유생들의 출입을 제한하여 그곳이 항상 존엄하고 정밀한 느낌이 들게 하기 위함이다.

 

강학 공간은 강당과 제사로 이루어지는데, 남계서원을 비롯하여 초기에 건립되는 서원들은 동재와 서재가 강학 공간의 출입구가 있는 앞부분에서 마당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도록 하였고, 강등은 뒷부분에 배치되었다. 이러한 건물 배치는 강당이 서원 전체 영역의 중심에 자리 잡도록 계획한 방식에 속한다. 이렇게 동재와 서재가 강당 앞마당에서 서로 마주 보고 자리 잡은 배치형식을 전재후당 배치라고 하는데, 건물들이 마당 주위로 자리 잡은 점에서 사신사형 배치라고 할 수 있다.

 

서원은 원래 강학이나 유식 외에 유생들이 사우에 모신 선현에게 올리는 제향을 통해 선현의 정신과 학덕을 되새기면서 성리학이 요구하는 인성을 가진 인간이 되게 하는 교육적 효과를 얻게 하는 목적이 있었던 것인데, 17세기 후반이 되면 같은 인물을 배향하는 서원을 여러 곳에 세우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이러한 현상은 성리학자들이 서원을 통해 그들의 정치, 사회적인 입지를 강화하려는 수단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이와 같은 서원의 폐단에 대해 중앙정부에서는 같은 학자에 대한 서원 또는 사우의 설치를 금하는 조처를 내렸으나 지켜지지 않았다. 따라서 명종 이전에 설립된 29개 서원 선조 대에 224개 서원, 숙종 때 한 개도에 8·90개 서원이 세워졌다. 읍마다 원사(元祀)가 없으며 한 개의 읍에 수 개씩 세워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양적인 비대화는 조세의 감소와 양민이 서원의 노비가 되어 군역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강학 도장보다 유식화의(遊食樺議)를 일삼았다. 이들은 모여 중앙정계의 붕당과 표이(表裏)가 되어 조정을 비방하고, 심하게는 서원을 근거로 하여 서민을 괴롭히는 등 횡포가 만연하였다. 고종 6(1864) 사액서원과 향현사에 주어졌던 특권을 모두 폐지했다. 만동묘의 철폐를 명하고 83월에 팔도의 첩향서원(疊享書院), 향현사(鄕賢祠)를 전부 철폐하였다. 도학 충절이 특히 탁월한 사람에 대해서만 개소의 서원 또는 향현사의 존재를 허락하였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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