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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문화와 불교-⑮ 헬레니즘과 쿠샨제국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1/04/05 [08:05]
유목민 월지족 쿠샨제국 세우고 불교를 국교 삼아, 타림분지와 중국에 전파

서양문화와 불교-⑮ 헬레니즘과 쿠샨제국

유목민 월지족 쿠샨제국 세우고 불교를 국교 삼아, 타림분지와 중국에 전파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1/04/05 [08:05]
▲ 인도 아 대륙에 퍼진 헬레니즘 문화: 그리스 풍 옷, 암포라(항아리), 와인, 음악을 보여주는 조각. 간다라, 하다 불교사원. AD 1세기.  

  

유목민 월지족 쿠샨제국 세우고 불교를 국교 삼아, 타림분지와 중국에 전파   

 

쿠샨제국은 월지족이 박트리아를 몰아내고 세운 나라이며, 나중에는 인도-그리스 왕국 까지도 점령하여 대제국을 건립했다. 로마제국이 그리스의 헬레니즘 국가를 병탄하여 로마 대제국을 건설했지만, 그리스정신만은 정복을 못했던 것처럼, 유목민이었던 쿠샨제국도 활과 칼로써 산하와 인민은 무력으로 정복하고 굴복시켰지만, 이미 이 땅과 인민들에게 뿌려진 헬레니즘 사상과 문화는 어쩔 수 없이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월지족은 본래 인도-유럽어족의 토하라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몽골 초원까지 진출해서 유목생활을 하다가 흉노에게 쫓겨서 박트리아까지 밀려나게 되었다. 몽골 중앙 아이막()노인 울흉노 유적 분묘 카펫 자수에서 월지족이 발견되어 화제가 된 바 있는데, 월지족도 흉노 못지않게 광활한 초원을 무대로 활동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 몽골 흉노족 분묘 카펫자수에 보이는 월지족.  

 

아마도 흉노족과 월지족은 몽골 초원을 공유하면서 적대 관계에 있었던 것 같다. 결국 흉노족은 월지족의 왕을 살해하여 해골바가지로 술잔을 만들어서 사용할 정도로 월지족을 초토화 시켰다고 사마천은 사기열전에서 기술하고 있다. 월지족은 서쪽으로 계속 나아가서 결국 박트리아에 까지 이르러서 이 지역을 터전으로 삼아 마침내 쿠샨제국을 세우게 되었다. 월지족은 월지(月氏, 月支) 또는 대월지(大月氏, 大月支)라고 중국 사서에는 기록되고 있다. 대체로 기원전 3세기 중반 경에서 기원전 1세기 중반 경, 중앙아시아와 북아시아에 존재했던 유목 민족인 것으로 보고 있다.

 

이들은 기원 전 3세기 중반 경, 타림분지에 본거지를 두고 동서무역을 독점하였으며, 흉노를 압박하고 인도에도 진출할 정도로 강세를 유지했다. 하지만 묵돌 선우(재위: 기원전 206~ 기원전 176) 말기에 월지는 흉노에 대패, 중앙아시아로 이동하면서 월지의 영토들도 흉노의 영향권 안으로 편입해 들어갔다. 월지족의 주류는 서쪽으로 가서 대월지가 되었고, 일부는 기련산, 곤륜산 등지에 남아 있었는데 이들을 소월지(小月氏)라고 했다.

 

월지족의 극적인 이동은 기원 전 162년경, 흉노의 노상 선우의 공격을 받고 월지의 왕이 살해되었다. 월지는 더 서쪽의 아무다리야 강 주변 소그디아나로 이동하여 박트리아(대하)를 멸망시키고 이곳을 근거지로 무역을 하며 살아갔다. 기원전 130년경 전한의 장건이 반흉노 동맹을 맺으러 한나라 무제의 계책을 제안하러 갔지만, 대월지는 동맹을 거절하였다. 서기 1세기경 대월지는 인도 아 대륙으로 진출, 쿠샨 제국을 건국하는데 성공을 거두게 되고, 나중에 타림분지까지 관할하는 대제국으로 성장하였다.

▲ 월지족(토하라)의 이동경로. 기원전221년에서 기원후 30년경 지도.    

 

대부분의 학자들은 월지족이 인도유럽인에 속한다는 것은 확실하지만, 월지족이 인도유럽인 중에서 어떤 분파에 속하는 가에 대한 가설 가운데 현재까지 확실한 정설은 없다. 중국 문헌과 서방측의 자료를 종합해보면 월지는 토하라인과 함께 인도-스키타이의 일종이라는 가설이 있지만, 그리스의 역사가 프톨레마이오스는 월지의 영역을 토가라(Thogara)로 기록했고, 그리스의 지리학자 스트라본은 박트리아를 침략한 민족을 토카로이(Tokharoi)라고 불렀다. 토하라인은 인도이란어파 계열의 스키타이어를 사용하는 스키타이인과 다르게 독자적인 어파인 토하라어파를 사용하기 때문에 스키타이와 인도이란인과는 다른 분파의 인도유럽인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현재로서는 토하라인들이 월지국의 주요 민족이며 결국 월지족은 토하라인들과 동일민족이라는 것이 제일 유력한 연구이다.

 

사마천의 사기》 〈대완열전의 기록에 의하면 월지국은 둔황과 기련산 사이에 나라를 세웠으나 흉노가 강성해지면서 노상 선우에게 패해 멀리 서쪽으로 이동해갔다고 했으며, 서쪽에 정착한 대월지의 남쪽에는 대하(박트리아), 서쪽에는 안식(파르티아), 북쪽에는 강거(타슈켄트.사마르칸트)가 있었으며 동쪽 3천리 떨어진 곳엔 대완(페르가나)이 있다고 했다.

 

쿠샨제국은 월지를 계승해서 세워진 나라이다. 월지국의 존속 기간이 기원전 221년에서 기원후 30년이라면, 쿠샨제국은 기원후 30년부터 375년까지이다.

 

'쿠샨'은 중국어로 월지족의 다섯 민족 중 하나인 '귀상(貴霜)'에서 유래했다. 월지족은 토하라인들을 한자로 표기한 것으로, 중국 사가들에 의하면 휴밀(休密), 귀상(貴霜), 쌍미(雙靡), 힐돈(肸頓), 도밀(都密)의 다섯 부족이라고 한다. 그들은 원래 타림 분지의 초원에 살았으며, 기원전 176~160년 사이에 흉노에 밀려서 서쪽으로 이주했다. 윌지족은 기원전 135년경에 박트리아를 점령하였고 다섯 부족의 나라로 나누어 지배하였다. 이후 기원전 1세기에 귀상족이 나머지 네 부족을 정복시켰다. '귀상'이라는 이름은 서양에 '쿠샨'으로 전해졌지만 중국에서는 쿠샨 왕조를 계속 월지라 불렀다.

 

처음 쿠샨 왕조는 그들이 정복한 박트리아의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리스 문자를 썼고, 그리스를 본 따 동전을 만들었다. 쿠샨 왕조는 인도양을 통한 무역과 실크 로드를 연결해 주는 통로 역할을 하였다.

▲ 금박을 입힌 구리로 만들어진‘카니슈카 관’. 힌두신인 브라흐마와 인드라에 둘러싸인 부처상과 하단의 두루마리 안에 있는 카니슈카. 기원 127년. 대영박물관 소장.  

 

쿠샨 왕조는 동서양의 문화를 포용하여 그리스 문화와 불교문화가 융합된 그리스식 불교를 발달시켰으며, 중국에는 대승불교로 전해졌다. 쿠샨의 카니슈카 1(2세기경)는 인도의 아소카, 하르샤와 메난더 1세와 함께 불교를 부흥시킨 왕 중 한 분으로 불교도들에게 추앙받고 있다. 그는 카슈미르에서 제4회 불교경전회의를 소집, 불전 편집을 후원했다. 이로써 아함경 불교에서 산스크리트 경전어에 의한 대승불교라는 새로운 분파로 시작하게 되었다.

 

카니슈카 왕(재위: 기원후127기원후150)이 불교 역사에서 주로 언급되는 것은 그가 불교도 왕이었고 불교를 장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쿠샨 제국의 제4대 황제이다. 쿠샨 제국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당시 남아시아에서는 불교가 성하고, 그리스 조각의 영향을 받아 불상 제작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 불교 미술 양식의 불상이 만들어진 지방이 북서 인도의 간다라 부근이었기 때문에 '간다라 미술'이라고 불린다. 쿠샨 제국은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했고, 동시에 페르시아의 문화도 함께 받아들여 혼합문화를 형성했다.

 

불교도들은 그를 마우리아 제국의 황제 아소카와 함께 불교의 대보호자로 칭해왔다. 그의 재위 시에 제4회의 불전 결집이 행하여진 것은 두고두고 자랑거리이다. 또한 불교 시인 아슈바고샤(馬鳴)가 활약했다고도 한다. 카니슈카가 불교와 함께 그리스 여러 신의 숭배와 조로아스터교·힌두교 등을 보호한 것은, 이들 신상(神像)이 당시의 화폐에 새겨져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카니슈카 왕은 조로아스터 교, 브라만 교, 불교의 종교적 혼합주의자였다. 하지만 카니슈카 왕이 불교도 왕으로 우뚝 솟게 된 것은 제4회 불전결집을 후원하여 불교가 중앙아시아, 타림분지의 서역, 중국 한나라에 대승불교가 전파되는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여기서 제4회 불전결집은 그레코-불교와 헬레니즘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으며, 페르시아의 종교인 조로아스터교의 교의가 불교경전 결집에 미친 영향을 참고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이다.

▲ 월지족이 세운 쿠샨제국의 전성기 때의 지도로서 불교의 발생지인 마가다 지역에 까지 진출했다.  

 

불교에 대한 그리스 사상의 영향은 메난드로스 왕의 개종 이후로 히메이션(히마티온:고대 그리스의 옷, 왼쪽 어깨에 걸쳐서 몸에 두르는)을 입은 아폴로로서의 부처상인 동상에서 가장 극적으로 볼 수 있다. 부처님의 상징적인 묘사는 족문(발자취), 보리수, 연꽃, 금강보좌 및 법륜(수레바퀴)이었다. 고대 그리스 불교의 이 혼합주의는 대승불교의 발전에서 분명히 기능적이었으며 마하야나 불교의 원형 단계로 고려된다.

 

헬레니즘 그리스와 불교의 상호 작용은 기원전 334년에 알렉산더가 원정하면서 시작되었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의 사망 후, 그의 제국은 휘하장군들과 함께 분열되었다. 그 과정에서 셀레우코스는 인도로 뻗어있는 땅의 왕이 되었다. 300년에 걸쳐 이 왕국은 다시 더 작은 왕국으로 분열되었다. 그러나 불교는 이러한 인도-그리스 왕들 아래에서 계속 번성했다. 그리스와 불교문화의 우호 관계는 약 5세기까지 계속되었다.

 

이 오랜 세월 동안 불교가 특히 알렉산드리아 주변의 헬레니즘 세계에 영향을 미쳤듯이 그리스 문화는 불교에 영향을 미쳤다. 일부 서양불교학자들은 그리스-불교의 상호 작용이 대승불교로의 진화로 이어지고, 그리스의 신들과 마찬가지로 부처에 대한 인간 신대우를 도입했다고 보는 것이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 한때 쿠샨제국이였던 부하라 마드라사(이슬람 신학교)건물 앞에선 선 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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