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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교의 성립과 발전(下)향교의 사회교화기능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06/15 [09:58]
제향의식과 사회교화의 중심 향교

향교의 성립과 발전(下)향교의 사회교화기능

제향의식과 사회교화의 중심 향교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1/06/15 [09:58]

<연재순서

()향교의 역사와 교육과정

() 향교의 기능과 입지, 공간구성

()향교의 사회교화기능

 

유교의 이념 계승과 확산을 위한 文廟享祀

 

향교는 문묘(文廟) 유교의 이념 계승과 확산을 위한 선현들을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조에 있어서 문묘향사(文廟享祀)는 향교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였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전국 향교는 크게 차이가 없다. 문묘향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전주 향교는 대설위(大設位)로서 대성지성문선왕 공자(大成至聖文宣王)를 정위(正位)로 안자(顔子, 復聖公), 증자(曾子, 宗聖公), 자사(子思, 述聖公), 맹자(孟子, 亞聖公)를 모시고, 동벽(東壁)에는 공문(孔門) 10척 중 5위와 공조 3(민손(子蹇), 염옹(仲弓), 단목사(子貢), 중유(子路), 복상(子夏) 5宋朝6賢 中 주돈이(濂溪), 정이(伊川), 장재(橫渠) 3)를 종향(從享)하고 서벽(西壁)에는 공문 10철 중 5위와 송조 6현 중 3(염경(伯牛), 재여(子我), 염구(子有), 언언(子游), 전손사(子張) 5宋朝6賢中 정호(明道), 소옹(康節), 주희(朱子) 3)를 종향한다. 동무(東廡)에는 중국7현 중 4(유약(孔門), 복승(秦代), 한유(唐代), 이동(宋代))와 우리나라 18현 중 9(설총(弘儒侯), 안향(文成公), 김굉필(文敬公), 조광조(文正公), 이황(文純公), 이이(文成公), 김장생(文元公), 김집(文敬公), 송준길(文正公))를 봉안(奉安)하고 서무(西廡)는 중국 7현 중 3(복불재(孔門), 동중서(漢代), 사마광(宋代))와 우리나라 18현 중 9(최치원(文昌侯), 정몽주(文忠公), 정여창(文獻公), 이언적(文元公), 김인후(文正公), 성흔(文簡公), 조헌(文烈公), 송시열(文正公), 박세채(文純公))를 봉안하였다.

▲ 문경향교의 춘계 석전대제 봉행 모습  

 

문묘(文廟)의 향사(享祀)는 처음 중국 당 나라의 석전례전(釋奠禮典)에 의거하여 서울 중앙 성균관에서는 춘하추동(春夏秋冬) 4시의 중월상정(仲月上丁)에 석전제(釋奠祭)를 행하고 지방의 향교에서는 춘추 중월상정(仲月上丁)의 두차례 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뒤에 성균관이나 향교 다 같이 봄과 가을 두 차례 석전제를 거행하게 되었다.

 

석전시일(釋奠時日)은 중앙 성균관으로부터 지방의 향교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같은 시일에 거행되는데, ‘매세중춘중추상정일석채선고사유(每歲仲春仲秋上丁日釋采先告事由)’라하여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맨 처음 丁日)1년에 두 차례씩 제향(祭享)한다. 그런데 1949년 설위개정(設位改定)과 함께 석전(釋奠)의 일자도 개정하였다. 석전의 석()자는 놓다(舍也) 또는 두다(置也)의 뜻이고 전()은 그치다(停也)의 뜻이다. 일설에는 우양(牛羊) 등 고기를 제물(祭物)로 올리고 음악을 연주하는 의식을 석전이라 하고 오직 나물()만 드리는 의식을 석채(釋菜)라고도 한다. 즉 종래에 봄과 가을 두 차례로 하던 제향(祭享)1년에 한 번으로 하고 공자의 탄생일인 827일 양력에 기념 석전(釋奠)만을 올리는 그것으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성균관에서 먼저 시행을 하고 각 지방향교에 시달하였다. 그러나 각 지방향교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편이 많아서 전례대로 봄과 가을 두 차례의 석전을 올리되 일자만 변경된 대로 따르게 되었다. 봄에는 종래의 예에 따라 음 2월 상정일(上丁日)로하되 가을에는 8월 상정일에 행하던 것을 고쳐 공자 탄신을 음 827일로 간주하여 이날에 석전을 행하게 되었다. 석전의 시각은 고대에는 밤 축시오각(丑時五刻)으로 하였던 것이나 현재 전주 향교에서는 정오 15분에 석전제(釋奠祭)를 시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정에 따라 다소 늦기도 한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왕조는 사전(事典)을 크게 대··소로 나누었다. 종묘와 사직을 대사(大祀)에 넣고 공자에 대한 제례를 중사(中士)에 넣어 중시하였다. 향교가 교육기관으로서의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것은 바로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봉사(奉祀)하는 문묘(文廟)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문묘는 유학의 상징이었다. 왕도 향교 앞을 행차할 때는 하마(下馬)하거나 하가(下駕)하여야 했다. 그리고 감사가 군현(郡縣)을 순행할 때 수령이 도입하고 임금이 밀릴 때에 반드시 행하여야 할 의례가 문묘에의 알성(謁聖)이었다.

 

문묘를 성묘로 신성시하고 문묘에 대한 훼손이나 위판의 도난 등을 각 고을 객사에 봉안한 전패(殿牌)에 대한 모독과 같은 강상지변(綱常之變)으로 간주하여 수령을 파직하거나 심하면 고을을 항읍(降邑)하기도 하였다. 문묘에 대한 제례는 정기적인 것과 부정기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정기적인 것은 2,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하는 가장 큰 제례인 석전제(釋奠祭)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거행하는 삭망 분향 제(朔望 焚香 祭)가 있다. 부정기적인 것은 향교의 건물을 수리할 때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전후로 거행하는 이안제(移安祭)와 환안제(還安祭), 문묘에 불시의 재난(도난, 화재, 뇌우등)을 입었을 때의 위안제, 문묘에 위패를 새로이 봉안하거나 제외할 때의 예성제(禮成祭)등이 있었다. 대체로 석전제와 예성제는 수령이 친행(親行)하고 나머지 제례는 교임과 지방 양반들이 거행하였다.

 

16세기 후반 서원의 보급과 함께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상대적으로 더욱 위축되어 갔으나 이에 반하여 향교의 제례적 기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그리하여향교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 성묘(聖廟)이고 가장귀중한 것이 향사하는 예법이다라고 하였고, 최근에 이르러향교는 제례에만 치중하니 공자의 사당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오게 되었다.

 

제관(祭官)은 헌관(獻官), 전예관(典禮官), 제집사(諸執事), 알자(謁者), 찬인(贊引)등으로 구분된다. 헌관(獻官)은 공자 이하 4성에 술잔을 올리는 제관으로서초헌관(初獻官),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의 각 1인이 있고 동서로 종향(從享)된 설위(設位)에 잔을 올리는 분헌관(分獻官)이 있다. 중설위(中設位)와 소설위(小設位)의 종향설위의 차이에 따른 전예관(典禮官)은 제사의 진행을 맡아서 홀()을 부르는집예(執禮), 축문(祝文)을 읽는 대축(大祝), 제수(祭需)의 진설(陳設)을 맡은진설관(陳設官)이 각 1명씩이 있다. 집사는 전내집사(殿內執事)와 전외집사(殿外執事)로 구분되는데 전래 집사는 대성 전안에 제사를 지내는데 필요한 집사이다. 전외집사는 동·서무종향된 설위에 제사하는 집사와 서재집사(西齋執事)가 있다. 전래 집사는 술독이 술병을 맡아 헌관에게 술을 따라 드리는사준(司樽)과 향을 받드는봉향(奉香), 향로(香爐)를 받드는향로(奉爐), 술잔을 받드는봉작(奉爵)이 각 1인이 있다. 전외집사에는찬인(贊引)」「찬창(贊唱)」「찬알(贊謁)이 있는데 찬창은 집례가 홀을 부를 때에 뒤따라서 재창하는 임원으로 1인을 둔다. 찬알은 알자(謁者)라고도 하는데 행사의 시종을 고하고 헌관을 인도하는 임원으로 1인을 둔다. 찬인은 제집사와 유생들을 인도하는 임원으로서 소설위(小設位)의 경우에는 1인 중설위(中設位)의 경우에는 3인을 둔다. 제관분정(祭官分定)은 당시 향교의 운영을 장관(掌管)하는 전교(全校), 재장(齋長), 도유사(都有司)가 장의(葬儀) 또는 유생회의(儒生會議)를 거쳐 제관선정(祭官選定)의 결의에 따라 석전일의 1주일 전에 통고한다. 전에는 제관에 피선(被選)되는 사람은 잔치 수일 전부터 음주(飮酒)와 가무(歌舞)를 삼가고 적상문병(吊喪問病)을 하지 않으며 군수 목사는 형살치죄(刑殺治罪) 등 모든 악사(惡事)에 참관하지 않고 제전(祭前) 2일 동안 목욕재계를 하고 제소(祭所)에서 숙박치제(宿泊致齊)를 하였다고 하는데 현재는 이러한 치성은 보기 드물다.

 

제관들이 입는 제복은 소임(所任)에 따라 다르다 즉 헌관(獻官)은 제복이라 하여 위모관(偉帽冠)에 조복(朝服)과 같은 것을 입고 분헌관(分獻官)은 사모관대(紗帽冠帶)를 두른 관복을 입는다. 이처럼 조복이나 관복을 제복으로 하는 것은 공자를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왕호를 붙이었기 때문에 왕 앞에 관복으로 진배(進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헌관은 혁포화(革布靴)를 신고 상아(象牙)나 목()으로 된 홀()을 잡는다. 집예(執禮), 대축(大祝)은 청색과 백색 도복을 입고, 집사들은 흑색 유건을 쓰고 흑색 도복을 입는다. 제복은 청의(靑衣), 적상(赤裳), 백중단(白中單)으로 되어있다.

 

문묘의 제사 때 쓰는 제기(祭器)는 고대의 제례에 쓰던 변수(籩豆)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은 대나무로 만든 죽기(竹器)요 두()는 나무로 만든 목기(木器)다 변기(籩器)는 신위의 좌변진설(左邊陳設)에 쓰고 목기(木器)는 신위의 우변진설(右邊陳設)에 쓴다. 신위(神位)의 정면 중앙에 조(,), 기장(), 피쌀()4가지 곡물을 올리는데 좌편의 백미와 수수는 모나게 만든 방형의 ()를 쓰고 우편의 기장과 피살은 둥글게 원형으로 된 ()를 사용한다. 이는 천지 음양의 이치를 좌우에 상징(象徵)하는 것이 다 좌편의 변기에는 건포(乾脯)와 과물(果物)등 마른 식물(食物)을 담고 우편의 두기(豆器)에는 젓갈이나 채류(菜類)로 된 김치 등 물기 있는 식물(食物)을 쓰는 것도 음양이치(陰陽理致)의 나눠짐을 적응시키는 것이다. 술을 올리는데도 인공(人工)을 가()한 단술(釀齋) 청주(盎齋)와 더불어 자연수(自然水)로 된 명수(明水)와 현주(玄酒)를 쓴다. 술을 담는 그릇도 소를 모형한 희준(犧罇)과 코끼리를 모형한 상준(象罇), 산을 그린 산준(山罇)의 세 가지를 갖추어 쓰게 된다. 술잔도 용 모양으로 된 용작(龍勺)을 갖추어야 한다.

 

공자와 안(), (), (), ()5성에는 폐백(幣帛)을 드리고 희생(犧牲)을 알린다. 폐백은 보통 창호지(窓戶紙)로 대용하고 공자에게 올리는 양성(羊腥, 염소머리)은 생계(生鷄)로 대용하고 4성에게 올리는 돈성(豚腥)은 저육(豬肉)을 쓴다. 예제(禮祭)에 규정된 녹포(鹿脯), 사슴 고기포는 쇠고기 포(牛肉脯)로 대용하고 녹해(鹿醢), 사슴고기 젓갈은 소의 허파로 대용하며 면해(免醢)는 새우젓갈로 대용할 수밖에 없다. 봉자(棒子), 깨금은 은행으로 능인(菱仁), 마람은 호도로 대용하는 등 형편에 따라고 하기 어려운 것은 모두 대용하고 있다. 제수(祭需)는 진설도(陳設圖)에 나타난 것을 갖추어야 한다.

 

이상은 공자의 설위전(設位前)에 제사하는 진설(陳設)과 그 밖에 전내좌우(殿內左右)와 전외동서무(殿外東西廡)에 종향(從享)하는 사위(祀位)에 제사하는 진설(陳設)은 따로 표시한 진설도(陳設圖)처럼 아주 간략하게 되어있다.

 

제사에 필요한 기물(器物)은 변(), (), (), () 외에 술잔, 잔대 술동이, 조육상(俎肉床), 향촉(香燭), 향합(香盒), 촉태(燭台), 축판(祝板), 축고(), 세면기(洗面器) 등이 있다. 제향의식(祭享儀式)은 그 절차가 매우 엄격하다.

 

초헌관(初獻官)이 알자(謁者)의 안내를 받아 전내(殿內)의 진설(陳設)을 점검한 뒤 제관(祭官)들이 명륜당에 모여 제복(祭服)을 입고 알자와 찬인(贊引)의 안내를 받아 대성전으로 들어간다. 대성전으로 들어간 헌관(獻官)이나 집사(執事)들은 각각 자기 위치에 배열하고 모두 함께 신위(神位)를 향해 사배(四拜)를 한 뒤 각자 신위 앞에 나아가서 공자로부터 사성의 신위에 차례로 분향하고 폐백(幣帛)을 드린다. 술잔을 올리는 데도 봉향(奉香)이 향을 받들고 봉작(奉爵)이 술잔을 받들면 사준(司樽)이 술병을 들어 술을 따르고 봉작이 술잔을 받아서 신위에 올리게 된다. 헌관은 술잔을 신위 앞에 올리는 동안 신위 앞에 꿇어앉았다가 일어나며 4배를 한다. 이때 나아가고 물러가는 일동일정(一動一靜)이 모두 집예(執禮)과 찬알(贊謁)이 홀기(笏記)에 적힌 행례절차(行禮節次)를 부르는 대로 행한다. 초헌관이 잔을 올리면 대축(大祝)이 축문을 읽는다. 삼헌관(三獻官)5성에 폐백과 술잔을 올리는 삼헌예(三獻禮)가 끝나고 분헌관들이 좌우에 배열된 종향 신위에 술잔을 올리는 분헌례가 끝나면 초헌관이 다시 신위 앞에 나아가서 신위에 올렸던 술잔과 조육(胙肉)을 받아서 음복(飮福)한다. 이는 신에게 복전(福田)을 받는다는 뜻에서 음복수조예(飮福受胙禮)라고한다. 이 예가 끝나면 초헌관이 축문과 폐백을 대성전 밖 서쪽에 불사르는 망예예(望瘞禮)가 있으며 이 망예례 뒤에 제관 학생 일동이 신위를 향하여 4배하고 물러남으로써 석전(釋奠)의 의례가 모두 끝나게 된다. 제례의식은 처음과 마침이 모두 홀기의 내용에 따라 행한다.

 

이 석전제에 주락(奏樂)이 뒤따르는데 지금은 성균관의 석전제에서만이 주악과 춤이 따르고 지방에서는 없어진 지가 오래 된다고 한다. 전주 향교 석전제에는 대학의 국악과 학생들이 참여하기도 한다. 석전제의 축문에 중국 연호를 썼으나 지금은 이를 없애고 단기년호(檀紀年號)를 쓴다. 그리고 옛날에는 5성 앞에 드리는 축문이 각각 따로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의 축문으로 되어있다. 석전의 제례가 끝나면 제관들에게는 봉송(封送)이라는 명목으로 제물을 나누어 싸주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그리고 제관과 유생들이 다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제사가 끝난 다음에 유교에 대한 계발 강연하기도 하고, 지방의 효렬(孝烈)등 유행(流行)이 높은 사람을 가리어 시상하는 창선식(彰善式)을 갖기도 한다. 한편 향교의 의례 가운데 석전제(釋奠祭)외에 매달 초하루와 보름날 촛불과 향불을 밝히는 삭망분향예(朔望焚香禮)가 있다. 이 의례는 향교의 유반(儒班)이 선현의 도덕과 교훈을 잠시라도 잊지 않고 추모하는 정성을 표하는 의례이다. 이 의례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대성전에서 5성의 신위 앞에 분향한다.

 

미풍양속 고취, 도의 생활 앙양시키는 교화사업-鄕飮酒禮,鄕射禮,養老禮

 

향교에서는 일반 민중을 상대로 유풍(遺風)을 불어 넣어 사회적인 미풍양속(美風良俗)을 고취(鼓吹)하고 도의 생활(道義 生活)을 앙양(昻揚)시키는 교화사업(敎化事業)이 행하여졌다 예를 들면 향음주례(鄕飮酒禮), 향사례(鄕射禮), 양로례(養老禮) 등의 행사가 그것이다. 향음주례란 한 고을의 선비들이 모여 학덕과 연륜이 높은 사람을 주빈으로 모시고 술을 마시며 잔치를 하는 의례였다. 이 의례는 고대로부터 유학자들의 주목을 받았는데 그것은 이 의례를 통하여 경로(敬老)와 목인(睦隣)등이 실천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즉 이 향음주례에서는 학덕과 연륜에 따라 앉는 순서, 좌차(座次)가 정해졌는데 이러한 행사를 통하여 학덕과 연륜이 많은 사람은 자신보다 윗자리에 앉았으며 연륜이 적은 사람은 자신보다 아랫자리에 앉았기 때문에 누구를 존경하는 마음으로 받들어야 할 것이며 누구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보살펴 주어야 할 것인지를 아주 구체적으로 파악하며 실천할 수 있었다. 또 이처럼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으로 대하면 자연히 이웃과 화목하게 지낼 수 있었다. 향음주례를 실시할 경우 좌차에 의해 한편으로는 상하와 귀천이 엄격히 구분되며 다른 한편으로는 사랑과 공경으로 이루어진 화목한 사회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래서 유학자들은 일찍부터 이 향음주례에 대해 주목하였다.

▲ 대구 칠곡향교의 향사례  

 

향사례(鄕射禮)는 향음주례와 마찬가지로 고을의 유덕자(有德者)를 존경하고 양속(良俗)을 조장(助長)하는 향교의 연중행사다. 본래는 중국의 풍속으로 전래한 것이다. 조선조 성종이 성균관에서 대사예(大射禮)를 행한 뒤 전국에 실시하도록 교시하였다 그 절차는 매년 33일과 99일에 고을에서 효제충신(孝悌忠信)의 덕행(德行)이 있고 의례에 밝은 사람을 주빈으로 삼아 (집 근처에 을 만들고 90보 거리에 과녁을 세워 향음(鄕飮) 때와 마찬가지로 빈주(賓主) 사이에 재배예(再拜禮)로 맞아 술잔을 차례로 돌리고 빈 주가 짝이 되어 활쏘기하는데 맞춘 사람이 맞추지 못한 사람에게 벌주를 주는 행사이다.

 

양로례(養老禮)는 지방관청에서 미풍양속을 조장하는 예속행사(禮俗行事)의 하나였다. 봄과 가을 좋은 날을 택하여 향교 명륜당 마당에 천막을 치고 동·서재의 장의(掌議)들의 인도를 받은 지방의 나이 많은 노인들을 모신다. 그리고 이 자리에 지방의 수령이 예리(禮吏)를 데리고 나와서 수령이 노인들에게 차례로 읍하여 예를 하면 노인들은 이에 답례하고 이어 술과 음식을 나누는데 지방관이 노인들에게 일일이 술잔을 권한다. 이때 예리(禮吏)가 노인들에게 종이와 붓을 돌리면 노인들은 거기에 행정의 법도, 선정(善政)을 권면하는 글을 올리게 되는 행사이다 지금은 이 행사가 없어졌다. 현재는 이런 행사가 없어졌다. 지금까지 전주향교를 기준으로 향교의 전통의례와 진설음식을 살펴보았다. 시대에 따라 소멸된 것 가운데 현대에 재현도 필요해 보인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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