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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을 느끼는 것조차 행복인 ‘생존자’와 감사함의 행복을 모르는 불행한 ‘종교인’

매일종교신문 | 기사입력 2011/01/26 [16:16]

불행을 느끼는 것조차 행복인 ‘생존자’와 감사함의 행복을 모르는 불행한 ‘종교인’

매일종교신문 | 입력 : 2011/01/26 [16:16]
신민형 '일상 속 종교이야기'

불행을 느끼는 것조차 행복인 ‘생존자’와

감사함의 행복을 모르는 불행한 ‘종교인’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시체더미와 생존자 모습.


아내는 요즘 나에게 일요예배 동참을 요구하지 않는다. 유명 목사의 잇단 성추행과 폭행, 비방 등의 행태가 부끄러운 탓이 있을 것이다. 혹은 내가 목사님의 설교를 들으며 비아냥거리는 듯한 야릇한 표정과 말을 내뱉지 않을까 우려하는지도 모른다. 일상생활에서 사람의 활동은 전면활동과 후면활동으로 나뉜다고 한다. 어빙 고프먼이란 학자의 이론이다. 특히 신성한 종교적 행사에서 극적으로 나타나는데 ‘전면’에서 이상화된 자아를 스스로나 다른 이들에게 내보이는 반면에 우리를 지탱해 주는 것, 우리의 생물학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일은 눈에 안 보이는 ‘후면’에 간직해 둔다는 것이다. 내가 목사님의 귀한 설교를 들으며 사건화된 목사와 교회들의 세속적 욕망인 ‘후면’을 떠올리는 것은 예배출석의 역효과만 생겨나고 아내의 집중된 기도에 방해가 될 따름이다.

아내는 이러한 나를 의식하지 않고 집중하는 기도를 올리고 싶은 거다. 근래 심각해진 매장의 운영난과 경제적 압박 등에 간구하며 위로받는 기도가 필요한 것 같다.


아내는 왜 기도하고 성경 筆寫를 할까

가장 불행한 한국 50대 여성, “마음안정 위해 종교믿어”


아내는 기도에 그치지 않고 새벽마다(잠들지 못하거나, 일찍 깨어나거나) 컴퓨터를 이용한 성경 필사(筆寫)를 한다. 교회 홈페이지에 컴퓨터 자판 연습하듯이 매일의 성경 구절을 따라 적는 코너가 등장했는데 펜과 멀어진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이다.

그가 기도와 필사에 열심하면 할수록 나의 속은 탄다. 말 못하는 속앓이가 얼마나 크기에 아무 말 없이 예배참석하고 필사에 몰입할까.

한 신문의 신년특집기획으로 연재하는 ‘행복시리즈’에서 조사한 전형적 50대 여성의 모습을 보는 듯해 나의 마음이 아려온다. 이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50대 여성은 조사대상 10개국 여성 중 불행점수 1위를 차지했다. 1950년대 팍팍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전통적 가치관과 급변하는 사회를 치열하게 버텨온 한국의 50대 여성은 평생 축적된 경제적 부채와 부모세대와 자녀에 대한 굴레에서 살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의 종교활동은 그러한 삶에 대한 위로가 위주다.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종교를 가졌다’는 비율이 77.8%로 전 세계에서 이 답이 가장 많이 나왔다. 덴마크·호주 여성은 같은 질문에 각각 10.6%·22.4%이었다. 이 조사는 “종교를 종교 자체로 믿는 사람은 높은 행복감을 보이지만, 현실 탈피를 위한 도구로 종교를 활용할 경우 행복감은 거의 상승하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뻔히 그 분석의 내용과 처방을 알면서도 아내에게 그러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오히려 마음의 상처가 된다는 것을 아는데…. 또한 대한민국 50대 평균 남성도 아내의 고민을 현실적으로 해결할 능력이 없는 ‘샌드위치 세대’라고 하지 않은가.

그래도 아내와 마주 보며 ‘속앓이 사정’을 허심탄회하게 듣고 싶어 어젯밤 아내의 퇴근시간에 맞춰 선술집 회동을 했다. 아내에겐 기도와 성경필사가 마음의 위안이 되듯이 나에겐 술이 위안이 된다. 아내 역시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속풀이보다 듣기만 했다. 내가 느꼈던 그의 난감한 상황을 정리해주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조용히 듣고만 있다는 것은 내 판단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한 태도가 더 안스러웠다. 잠깐 화장실에 다녀오는 것처럼 일어나 편의점에 들러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금연 3개월 만의 흡연은 짜릿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대범해졌다. 또 다시 흡연을 계속하면 가래와 구토현상, 피로감이 쌓인다는 것을 그간의 경험으로 알고 있었지만 그 순간의 담배는 나에게 커다란 위안이었다. 술이 주는 너그러움, 우면산 산책의 여유, 일의 구원(救援)과 같은 역할이다.


‘불행을 같이 나눌 수 있다는 행복’

아내에게 보여주고 싶은 한계상황 ‘생존자’의 삶


최근 나는 술과 담배, 우면산과 ‘일에 대한 몰입’과 같이 삶의 위로가 되는 책을 한권 읽었다. 삶의 위로 차원을 넘어 생명에의 외경과 희망의 의지를 생기게 했다. 지난 연말 수년 만에 만난 언론계 선배 차미례 씨가 건네준 자신의 번역서 ‘생존자-죽음의 수용소에서의 삶의 해부’(테렌스 데 프레 지음.서해문집 간)란 책이다. 나치의 집단수용소인 ‘아우슈비츠’와  소련의 강제수용소 ‘굴락’ 등 죽음과 공포, 동물적인 욕구 이외에는 내일과 희망이란 단어를 엄두조차 못내는 인간들의 생존양식을 행동과학적, 그리고 철학적으로 기록했다. 인류의 가장 극한적이고 끔찍한 상황에서의 동물과 같은 인간의 삶을 다루어 놓아 인간의 비루함, 비열함, 비천함과 나약함, 허무감을 느끼게 할 것 같아 읽기가 꺼져진다. 그러나 오히려 그 안에서 생명에 대한 근원적 애착, 일말(一抹)의 인간적 유대감과 배려를 찾을 수 있기에 감동을 준다.

책을 읽는 내내 정신력을 말살하는 배설물 범벅이 된 수용소, 시체 태우는 냄새와 연기, 구덩이에 쏟아 부어지는 갓난아기들의 모습이 암울하게 오버랩 되며 문화와 종교, 지식과 교양 등 인류의 문명이 무너지고 심지어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망이라는 성욕이 소멸되는 지옥세상을 보았다.   

“오줌과 똥이 다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밤이 될 무렵이면 이것들이 녹으면서 악취를 풍겼다. 우리는 통상적인 의미의 인간이 아니었다. 짐승보다 못한 두 다리로 걸어가는 시체들이었다.”

그러나 상상조차도 어려운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인간의 존엄과 생명의 불꽃을 보존하려는 치열한 의지가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 것은 감동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의 본성 깊숙이 뿌리박은 근원적 생명력과 그를 통해 살아남는 생존자의 이야기는 희망이었다. 태초 극한상황을 겪었던 인간 본연의 모습과 신의 존재를 보는 듯 했다. 극한적 잔학함 속에서도 놓치지 않는 삶의 가느다란 끈, 희미하고 쇠잔해졌으나 드러나고 마는 선의와 최소한의 품위는 영웅의 그것보다 큰 위대함을 느끼게 했다.

서두에 거론한 어빙 고프의 ‘인간의 전면활동과 후면활동’도 이 책에서 거론된 것이다. 전면활동과 후면활동이 분별되지 않는 생존만을 위한 삶의 기록들은 바로 다시는 인류에게 생겨나지 말아야 할 진실이었다.

“행복하여라, 사랑하는 사람을 가진 채 홀로 앉아 꿈꾸고 울 수 있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여라, 형이상학적 문제를 두고 스스로 마음을 괴롭히고 있는 사람들이여!… 행복하여라, 병원의 침대나 집에서 정상적인 생을 누린 끝에 정상적인 죽음을 맞는 사람들이여!”

인간이 정신 밑바닥에 떨어지고도 그 모든 고통을 이겨낸 생존자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행복론일 것이다. ‘생명보다 더 큰’ 인간다움에 대한 신념을 가진 인간에게서 말이다.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진짜 참는 것도 아니다”

“고통과 불행을 말하는 것은 진짜 고통과 불행이 아니다”


차 선배는 ‘역자의 말’에서 자신의 험난한 인생을 이야기하며 이 책이 33년 동안 자신을 구원해주었다고 했다. 가족의 실종, 암 투병, 고통스러운 인간관계와 빈곤 등에 직면하면서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고 진짜 참는 것도 아니다. 참는다는 것은 진짜 참을 수 없는 것을 참는 것이다.”는 주문을 외우며 생활했다고 했다. 그가 33년 전 금서가 된 번역서를 새롭게 번역해 세상에 내놓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를 생존자들에 비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지만 그는 가족의 실종과 빈곤 속에서도 화사한 화장과 패션으로 의연한 품위를 지키고 있었다. “똥오줌을 그대로 배설하지 않고 식기통에 누던가 구정물에라도 얼굴을 닦는 등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지 않은 사람들은 일찍 죽었다”는 생존자의 생존법칙이 떠올랐다. 그는 ‘불행한 대한민국 50대 여성’(이젠 60대 초반)의 전형이지만 생존자들의 극한적인 삶을 관찰하고 비교하며 자신의 행복을 가꾸어 왔던 것이다.

나는 품위 있는 인사동 한정식 집에서 그와 우아한 이야기를 나누며 아내에게 그와 책에 관한 이야기를 꼭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아내는 그와 10여 년 전 내 직장에서, 그리고 수년전 관훈클럽 문화유적 답사지에서 함께 만난 적이 있으므로 그와 그의 책 이야기가 피부에 와 닿을 것 같았다. 마치 목사님의 설교를 인터넷에서 듣는 것보다 교회 본당에서 들어야 더 피부에 와닿듯이 말이다.

아마도 아내는 차 선배에게 그런 아픔이 있느냐고 되물을 것 같다. 그러면 나는 이렇게 화답할 것이다. “당신도 전혀 그런 고통을 드러내지 않고 품위와 자존심을 갖추고 있소. 생존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닌 아픔을, 그것도 나와 나누며 살아가는 우리 부부는 행복한 거요.” 그리고 “고통과 불행을 말하는 것은 진짜 고통과 불행이 아니오”라는 말을 차용하겠다. “우리가 이렇게 고통을 나눌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자”는 것도 잊지 않을 것이다. 감사함의 행복을 모르는 불행한 ‘종교인’ 보다 불행을 느끼는 것조차 행복이라 생각하는 ‘생존자’가 진실된 인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종교를 종교 자체로 믿으라’는 하나님의 뜻이란 생각이 든다. 아내가 나의 이런 이야기에 다소 위안을 받기 바란다. 더욱 원하는 것은 ‘당신 사고는 오만하고 비뚤어진 망상’이란 말을 듣지 않는 것!  나는 하나님의 뜻만큼 생존자의 근원적 생명력을 존중하며 아내의 나에 대한 평가와 아내의 행복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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