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신라 국학으로 창건, 경주향교의 1500년 역사와 구조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07/31 [06:37]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신라 국학으로 창건, 경주향교의 1500년 역사와 구조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1/07/31 [06:37]

 

▲ 경주향교 신삼문에서 보이는 보물 제 1727호 대성전. 경북도 제공 사진  

 

경주향교 대성전(慶州鄕校 大成殿)은 경상북도 경주시 교동에 있는 조선 시대의 건축물이다. 2011년 12월 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27호로 지정되었다. 경주향교는 대설위 향교로서 경상북도에서 규모가 가장 큰 향교이다. 전체적으로 임란이후 중건 때의 모습(기단의 축조방식과 고맥이석의 조영기법, 공포와 창호, 가구에 고식의 기법)을 잘 보존하고 있으며, 2000년 수리때 종도리에서 발견된 상량문은 대성전의 역사와 경주향교의 변화를 밝혀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선조(宣祖) 33년(1600년) 부윤 이시발(李時發)이 전사청(典祀廳)과 함께 중건하고, 도덕산(道德山) 도덕암(道德庵)에 임시로 봉안했던 대성전의 위판을 다시 가져다 모셨다. 광해군(光海君) 6년(1614년) 부윤 이안눌(李安訥)이 개수하였다. 

 

헌종(憲宗) 7(1841)과 고종(高宗) 10(1873)에 중수되었으며, 당시 작성한 진사(進士) 한문건(韓文健)의 상량문(上樑文)과 여강(驪江) 이우상(李瑀祥)의 기문(記文)이 남아 있다.

 

신문왕 2(682) 국학으로 창건된 것이 경주향교의 시초

 

경주향교는 신문왕 2(682) 국학으로 창건되어 경() 일인을 두고 관장케 한 것이 시초이다. 이보다 앞서 진덕여왕 2(648) 김춘추가 당나라에 들어가 국학을 돌아본 뒤 석존에 참례하고 돌아오니 이것이 우리니라에 석존이 알려진 처음이며 동왕 5년에 대사(大舍) 2인을 두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이 전한다.

 

이에 대하여 양촌 권근은 말하기를 진덕여왕때 둔 대사는 국학의 관직이니 신문왕이 국학을 세우기 전에 이미 이러한 관학이 있었다면 학교도 반드시 있었을 터인데 지금 상고할 길이 없다하였다.

 

성덕왕 16(717) 태감(太監) 수충(守忠)이 당으로부터 공자와 1072제자의 화상을 갖고 돌아와 봉안했다. 향교의 위치는 계림(鷄林) 서쪽, 문천(文川) 북쪽에 해당하는데, 신라의 국가 최고교육 기관인 국학(國學)이 있었던 자리로 알려져 있다. 신라 멸망 뒤에 서라벌이 경주로 개칭되면서 고려 조정에 의해 향학(鄕學)이라는 이름의 지방교육 기관으로 개편되었는데,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원효(元曉)가 태종 무열왕(太宗武烈王)의 과부 공주를 만난 요석궁(瑤石宮)에 대해 "지금의 학원이 이곳이다"(今學院是也)라는 주석을 남기고 있다.

 

숙종(肅宗) 31(1705) 부윤 여필용(呂必容)이 경상관찰사 김연(金演)의 협조를 얻어 향교를 중수하였다. 고종(高宗) 17(1880) 부윤 민치서(閔致序), 22(1885) 부윤 민영규(閔泳奎)가 향교를 중수하였으며, 중수 당시에 경주의 유림 손상규(孫相奎)와 최세학(崔世鶴)이 지은 기문(記文)이 남아 있다(두 사람 모두 월성 즉 경주를 본관으로 삼는 경주 유림이었다). 동왕 광무(光武) 3(1899) 다시 유림의 지원으로 향교를 중수하였을 때는 군수 조의현(趙儀顯)이 몸소 기문을 지었다.

 

1919년 유림들이 모성계(慕聖契)를 결성해 성금을 모아 향교를 중수하였다. 그러나 해방 뒤 6.25 전쟁으로 향교는 관리되지 못하고 방치되었고, 서재와 전교실이 무너지기까지 하였다. 1956년에야 지방 유림들이 다시 모성계를 결성, 향교를 중수하고 전교실을 복원하였다. 1978년 담장을 다시 쌓았다.

 

2011127일 경주향교 대성전이 대한민국 보물 제1727호로 지정되었다. 향교 안에는 선조 34(1601) 당시 제독관 손기양(孫起陽)이 흩어져 있던 각종 학규(學規)를 엮어서 작성한 경주향교학령(慶州鄕校學令)이 남아 전하고 있는데, 일종의 교내 학칙으로써 이는 조선 전기 향교 교육의 실태를 살펴볼 수 있는 자료 중 하나이다.

경주향교는 경상북도 안에서 가장 규모가 큰 향교이다. 제향공간인 대성전을 앞에 두고, 강학공간인 명륜당을 뒤에 두는 전형적인 전묘후학(前廟後學) 배치를 갖추고 있다.

▲ 경주향교는 전면 3칸, 측면 3칸. 맞배지붕. 주심포계 외 1출목 2익공식 공포로 수성됐다. 경주향교 홈페이지  

 

전면 3, 측면 3. 맞배지붕. 주심포계 외 1출목 2익공식 공포로 짜여 있다. 기단은 장대석을 2단으로 쌓은 곳과 지대석 위에 면석과 갑석을 올린 곳이 섞여 있으며, 남쪽 가운데와 동서 기단 남쪽 끝에 돌층계가 설치되어 있다. 건물 네 모퉁이마다 동자주를 세워 지붕을 받쳤다. 대성전 앞면의 계단석은 안압지(雁鴨池)에서 옮겨왔다고 하는데, 명륜당 기단 등에서 발견되는 석탑 부재 등의 유구와 함께 보존 가치가 크다.

 

중건된 연혁이 분명하고 간결하고 위엄있는 목조 건물로 고건축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2000년 다시 중수되었고, 2011122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727호로 지정되었다.

▲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열리는 석전례(釋奠禮)    


대성전에서는 해마다 음력 2월과 8월에 석전례(釋奠禮)가 열리며, 그 밖의 다른 시기에는 개방되지 않는다.

 

명륜당(明倫堂) 경주향교에서 교생들이 학습하고 생활하는 곳, 명륜당과 동서 재를 포함하는 강학공간은 대성전의 제향공간보다 낮게 배치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 대성전이 중건되고 광해군 6(1614)에 부윤 이안눌이 명륜당과 동서 재를 중건하였다. 명륜당은 앞면 5, 옆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집이다. 중앙에 대청 3칸을 두고 좌우로 겹실 1칸을 두었다. 앞면 1칸은 모두 통칸이다. 헌종(憲宗) 7(1841)과 고종(高宗) 10(1873)에 대성전과 함께 중건되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으며, 1978년에 다시 중건되었다. 1982년에 동재와 같은 양식으로 서재와 함께 고직실이 중건되고, 1995년 명륜당에 이어 2002년에 동재가 중건되었다. 동서 재 모두 정면 5,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축물로 앞면 반칸에 툇마루를 두고 내부는 모두 통칸으로 삼았다. 송단(松壇) 명륜당 북쪽에 위치해 있다.

 

선조 34(1601) 제독관 손기양이 경주향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틈틈이 남산에서 캐어온 소나무를 향교 외삼문 밖과 명륜당 뒤뜰에 심었던 데서 유래한다. 효종(孝宗) 6(1655) 석축으로 조성되었다. 사부(師傅) 정극후(鄭克後)가 지은 기문 송단기가 남아 있는데, 정극후는 송단의 소나무를 두고 "이 소나무가 무성하면 유학(儒學)은 융성할 것이요, 소나무가 잘리거나 말라 죽으면 유학의 도는 영쇠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철종(哲宗) 7(1856)까지 송단에는 18그루의 소나무가 있었는데, 18그루의 소나무는 향교에 배향된 해동 18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철종 7년 봄에 당시 송단의 소나무 가운데 한 그루가 바람에 쓰러져 그 자리를 어린 소나무 수백 그루로 메우고, 향교의 노비에게 보호할 것을 명했다(재임기사록). 원래의 송단 범위는 현재보다 넓은, 지금의 향교 뒤뜰 뿐 아니라 담 너머 내물왕릉 앞의 솔숲까지 포함하는 범위로써, 향교의 북쪽을 보충하는 비보림 역할도 하는 것이었다. 존경각(尊經閣) 명륜당 북쪽, 송단 동쪽에 위치해 있는 정면 2, 측면 1칸의 건물이다. 현종(顯宗) 10(1669)에 부윤 민주면(閔周冕)이 송단 동쪽에 지었다. 지금의 건물은 1989년에 복원된 것이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 도배방지 이미지

많이 본 기사
1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