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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사명대사 <회심곡>으로 본 서민불교에서 효 의미 찾기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08/03 [07:14]
숭유억불정책 속에 파급 쉽지 않아 습합을 꾀한데서 연유...향유계층은 서민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사명대사 <회심곡>으로 본 서민불교에서 효 의미 찾기

숭유억불정책 속에 파급 쉽지 않아 습합을 꾀한데서 연유...향유계층은 서민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1/08/03 [07:14]

<연재순서>

()유교, 도교, 무속, 민속적 요소들이 혼합된 불교가사 <회심곡>

<><회심곡>에서의 효...유교사상이 자연스럽게 불교사상과 융화

()<회심곡>은 효 사상보다도 인생무상과 인과응보의 과정이 중심축 

▲ 조선시대 승려 휴정은 232구로 구성된 볼교가사 <회심곡>을 지었다. 사진은 고향인 밀양에 있는 동상  

 

<회심곡>은 조선시대 승려 휴정이 지은 불교 가사로 232구로 구성되어 있다. 16세기 말경에 지은 것을 1704(숙종 30) 명간이 엮어 1776(영조 52) 해인사에서 펴낸 목판본 권선염불문에 실려 전한다. 순 한글로 회심가곡이라고 하여 나옹화상이 지은 서왕가와 함께 기록되어 있다.

 

내용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탐욕심(貪慾心)을 버리며,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염불하여 본심(本心)을 바르게 닦아 극락에 가서 태평가(太平歌)를 부르자는 권념송불(勸念頌佛) 232구의 가사이다. <회심곡>은 문전염불을 하는 문승들이나 절 걸림을 위한 걸립승, 동량승들에 의해서 많이 불려졌으며 모연승이나 모연패와 같은 유희집단에 의해 불렸다.

 

<회심곡>은 부르는 주체에 따라 <화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와같은 구분은 세속화된 일반사회에서 불리는 것과 구분하기 위해 달리 부르기 시작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현재 박송암류의 불교 <회심곡>과 경기 민요의 안비취로 나뉘어 전승되고 있다. 우리가 쉽게 듣고 알고있는 <회심곡>은 안비취에 의해 보급된 <회심곡>일 가능성이 높다.

 

숭유억불정책 속에 파급 쉽지 않아 습합을 꾀한데서 연유...향유계층은 서민

 

<회심곡>은 불교가사이면서도 유교, 도교, 무속외에 민속적 요소들이 혼합되어 이루어진 특징을 가지는데 이것은 숭유억불정책을 써서 민간에서는 무속이나 민속적 요소가 만연했던 조선 시대에 순수 불교적 요소가 그대로 파급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므로 불교 자체를 수용하면서도 당시의 사상적 바탕을 외면하지 못하고 습합을 꾀한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진다.

 

도입부에 유교의 충효사상을 삽입하였지만 결국 <회심곡>을 향유계층은 서민들이다. 주로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면서 불교적인 교리를 통해 인생의 무상을 달래려 했다. 이와같은 시도는 종교사상과 함께 서민들의 삶을 위로 해주는 민중성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회심곡>은 다른 사상의 전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불교사상을 포교하기 위한 음악이었다는 사실이다.

 

서민불교는 서민들 속으로 성직자가 다가가는 불교의 모습 

 

우리 사회는 1980년대 민중이란 단어가 항시 사용되었다. 원효의 불교관을 민중과 함께한 정토신앙에서 찾았다. 민중불교를 원효의 교화방편으로 인식하였다. 불교계 재야단체 이름도 민중불교였다. 이후 서민불교라는 시대의식이 싹트면서 원효뿐 아니라 삼국유사에 등장하는 대안, 사복 등 다수의 승려들을 민중불교에서 서민불교의 주창자로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특징은 서민과 함께 생활하면서 서민의 종교적 욕구와 고통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들 대부분은 시내나 촌락에서 민가와 다름없는 도량을 짓고 살며 처자를 돌보지 않고 농사를 짓고 농사꾼 노릇을 하면서 서민과 같은 말로, 불교의 인과를 설명하였다. 그러나 연구자들은 서민불교는 권위적 교단의 승려에서 소외된 승려집단의 생존방식으로 인식하기도 한다.

 

승려집단에서는 방편을 통한 포교의 수단으로 민속신앙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러나 서민불교는 고도화된 학문불교가 아니라 서민들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있는 불교다. 그것은 개신교와 만나면 서민 개신교, 서민 천주교가 될 수 있다. 혹자는 민속적 요소를 일부 포함시킨 모습을 통해 기복신앙으로 매도될 수도 있는 불교의 한 모습이다.

 

서민불교에서 말하고자 하는 서민이란 관직이 없는 평범한 사람이며 귀족 등에 대하여 사회적인 특권을 가지고 있지 않은 보통사람을 말한다. 서민불교는 말 그대로 서민들 속으로 성직자가 다가가는 불교의 모습이다. 기다림이 아니라 다가가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 성직자다. 그리고 서민들은 자기 입장에서 믿는 불교다. 그것은 기복신앙일 수 있고 맹목적 믿음일 수도 있다. 이와같은 신앙형태가 존재하는 이상 서민불교, 서민 종교는 생명력을 가질 수 있다.

 

우리 고유 민속신앙과 불교가 어떻게 습합되며 이 땅에 토착화하는가

 

효는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이 되는 윤리이다. 그래서 효를 백행의 근원이라고도 하고 덕의 근원이라고 한다.

 

()’의 글자를 봄 노인()를 아들()이 업고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즉 효란 부모(늙고 노쇠한)를 섬기는 것이 모든 섬김의 근본이라는 것이다.

 

전통사회에서의 효는 권장하되 불교는 용납하지 않는다는 사상이 사회적 불문율로서 지켜져 왔다. 그런데 현대사회에 와서는 개인적인 문제로 치부할 뿐이다. 자식을 위해서는 모든 희생을 견디면서 정작 부모에 대해서는 인색하기 이를 테 없다. 그것은 가정에서 문제가 아니라 사회복지 정책에서도 이와같은 모습을 보인다.

 

결국 가정적, 국가적으로 노인에 대한 관심이 줄면서 효는 중대한 위기국면에 처해 있다. 본 논문에서는 우리 고유의 민속신앙과 불교가 어떻게 습합되며 이 땅에 토착화하는가를 민속문학인 회심곡등을 통하여 고찰하고자 한다.

 

<회심곡>은 조선시대 선조(宣祖) 때의 고승(高僧) 서산대사(西山大師) 휴정(休靜)이 지은 불교포교 가사(歌辭).1776(영조 52)에 판각(板刻)염불보권문(念佛普勸文)신편보권문(新編普勸文)에는 회심가(回心歌)로 실려 전하고, 필사본 ·활자본 등 여러 이본(異本) 중에는 회심곡(悔心曲)이라고 표기된 것도 있다. 내용은 부모에게 효도하고, 탐욕심(貪慾心)을 버리며, 착한 일을 많이 하고, 염불하여 본심(本心)을 바르게 닦아 극락에 가서 태평가(太平歌)를 부르자는 권념송불(勸念頌佛) 232구의 가사이다. <회심곡>은 문전염불을 하는 문승들이나 절 걸림을 위한 걸립승, 동량승들에 의해서 많이 불려졌으며 모연승이나 모연패와 같은 유희집단에 의해 불렸다.

▲ 박송암류의 불교 <회심곡>과 경기 민요의 안비취로 나뉘어 전승되는데 우리가 쉽게 듣고 알고있는 <회심곡>은 안비취에 의해 보급된 <회심곡>일 가능성이 높다.   

 

<회심곡>은 부르는 주체에 따라 <화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와같은 구분은 세속화된 일반사회에서 불리는것과 구분하기 위해 달리 부르기 시작하면서 붙인 이름이다. 현재 박송암류의 불교 <회심곡>과 경기 민요의 안비취로 나뉘어 전승되고 있다. 우리가 쉽게 듣고 알고있는 <회심곡>은 안비취에 의해 보급된 <회심곡>일 가능성이 높다.

 

화청의 생산시기에 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후 범패와는 다르게 창작된 불가다. 즉 부르는 주체에 따른 구분과 달리 내용에 따른 구분을 하기도 한다.

 

경기 민요의 <회심곡>은 부모의 은혜를 다 갚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마음을 노래한 곡이다. 즉 부모에게 효도하고, 탐욕심을 버리며 착한 일을 많이하고, 염불하여 본심을 바르게 닦아 극락에 가서 태평가를 부르자는 권념의 송불의 가사이다. 이에비해 불교 <회심곡>은 사찰의식과 의례에 따라 가사를 개작하기도 하였다.

 

<회심곡>은 불교가사이면서도 유교, 도교, 무속외에 민속적 요소들이 혼합되어 이루어진 특징을 가지는데 이것은 숭유억불정책을 써서 민간에서는 무속이나 민속적 요소가 만연했던 조선 시대에 순수 불교적 요소가 그대로 파급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므로 불교 자체를 수용하면서도 당시의 사상적 바탕을 외면하지 못하고 혼용을 꾀한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아진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회심곡>은 다른 사상의 전파를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불교사상을 포교하기 위한 음악이었다는 사실이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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