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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병산서원의 풍수입지 분석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1/08/27 [20:38]
고려 중기 창건 풍악서원이 1572년 류성룡에 의해 병산동 경승지에 移建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병산서원의 풍수입지 분석

고려 중기 창건 풍악서원이 1572년 류성룡에 의해 병산동 경승지에 移建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1/08/27 [20:38]

 


고려 중기 창건 풍악서원이
1572년 류성룡에 의해 병산동 경승지에 移建

 

병산서원의 전신은 풍악 서원이다. 풍악 서원이 창건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대략 고려 중기라 한다. 그 후 고려 공민왕이 안동으로 임시 피난 왔을 당시 서당의 학구열에 감동하여 토지와 책자들을 하사했다는 사실로 미루어 고려말, 조선 초에 이미 서당의 명성이 높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 후 1572년 류성룡에 의해 병산동의 경승지에 이건했다.

 

병산서원의 기틀을 이룬 것은 실제로 이때로 보인다. 16세기의 서당은 교육적 측면에서 이미 서원과 동급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건물은 임진왜란으로 불에 타 버린다. 서당의 명목적 주인이자 임진란의 영웅인 류성룡도 1607년 타계한다. 서애를 따르던 후학들이 서애를 기념하고 자신들의 결속을 위해 풍악 서당이 있던 병산동에 서원을 중건하게 되었다.

 

1572년 풍악 서원은 류성룡에 의해 현재의 위치로 이건 되면서 병산서원으로 개칭된다. 1614년 서애가 죽은 7년 후 기존 서당의 규모에 새로 존덕사를 세워 서애의 위패를 봉안하면서 비로소 향사 기능을 갖춘 서원이 건립된 것이다.

 

전사청은 춘추 향사 때 제물을 장만하고 보관하는 곳이므로 존덕사와 함께 건립된다. 사당의 위는 당시 건축 관념인 위계론을 서원 건축에 실험하려 했던 정경세(1563-1633)가 스승인 퇴계의 원칙-주자가례의 준용-을 따르려는 류성룡의 생각을 따른 결과이다.

 

1863년 사액서원으로 승격이 되었다. 병산서원 건립 당시인 17세기는 예학이 절정에 달하였고, 성리학의 성전인 서원들이 엄격한 좌우 대칭과 중심축을 고수하는 건축유형을 만들었다. 또한, 주의의 자연 모두가 좋은 경관을 이루기 때문에 서원 내에 특별한 정원시설을 할 필요가 없었다.

 

1613(광해 5)에 문인(門人)들이 유림과 힘을 모아 류성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존덕사를 창건하고 위패를 모시면서 서원이 되었다. 교육기관에서 출발했지만, 교육적 기능뿐만 아니라 점차 사림 활동의 중심지로 그 영역을 넓혀갔다. 조선시대 최초로 만인소를 작성하는 등 공론장으로서 역할을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1863(철종 14)에 병산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많은 학자를 배출하였고 고종의 서원 철폐령에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의 하나이다.

▲ 병산서원은 화산을 주산으로 삼고 힘차게 좌우 요동치며 뻗어 내려온 지룡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낙동강을 임수로 맞이하는 곳에 있다.   병산서원 홈페이지 사진

 

풍수적 고찰-화산을 주산으로 삼고 지룡의 끝자락에 위치, 낙동강을 임수로 맞이하는 곳

 

(1) 입지분석

 

병산서원은 화산을 주산으로 삼고 힘차게 좌우 요동치며 뻗어 내려온 지룡의 끝자락에 위치하며 낙동강을 임수로 맞이하는 곳에 있다. 화산은 꽃봉오리 형태를 띠고 있는데 연꽃의 산 줄기가 물에 이른 곳에 있는 형국이다.

 

국과 파 분석

자연의 양기 흐름이 좌선수이고 패 철 8층으로 수구(水口)를 보았을 때 파()坤破(곤파)로 모국이 절차가 된다. 즉 좌선수에 목국의 절파이다. 병산서원의 터는 좌청룡이 우백호보다는 형상이 아름답고 수려하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안산이 지나치게 높아 압혈하는 느낌이 강하다. 따라서 이에 대한 비보책이 필요하였다.

 

내룡의 분석

패철 4층으로 주산인 화산에서 서원으로 최종 입수되는 용맥의 이기를 측정해보면 임자용(壬子龍)으로 나타난다 이 경우 12포태(胞胎) 법상 임관용(臨官龍)으로 땅 기운이 생기를 온전히 품을 수 있는 상태이다. 좌선수에 절파이면 임관룡은 중격길용(中格吉龍)으로 수룡이 된다. 화산에서 뻗어내리온 용맥의 박환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나 과협은 강하지 못하고 용맥의 흐름 방향으로 입지가 자리 매김질 되어있다.

 

수의 길흉판단

혈장에 영향을 미치는 양기의 흐름(물과 바람)을 살필 때에는 패철 8층으로 득수와 소수의 방위를 측정한다. 득수와 소수는 좌향이 결정된 다음에 살인황천수와 구빈황천수로 구분된다. 향상오행으로 판단해 보면 입지의 좌향이병향으로 병향은 화국의 정왕향이므로 향상으로 화국이라 판단한다. 득수방위를 패철8층으로 측정해보면 갑묘수(목욕수), 손사수(임관수), 임자수(태수)가 들어온다. 길흉을 판단해 보면 구빈황천수와 살인황천수가 같이 들어오므로 길과 흉이 동시에 상존한다. 소수방위 역시 패철 8층으로 측정하는데 곤수(병수)로 빠진다. 즉 살인황천수가 되어 흉하게 된다. 병산서원 앞을 흐르는 낙동강은 물을 다섯 가지의 오성수로 분류할 때 목성수의 형태이다. 즉 나무토막을 앞에 가로로 놓은 것처럼 곧고 길게 흐른다. 이 경우 용진하면 귀함은 있으나 부함을 말하기는 어렵고 성품이 곧고 강한 자손이 대대로 이어진다.

 

향 분석

병산서원의 입지의 좌향은 임좌병향을 놓았으나 자연의 흐름이 좌선수이고 양기가 목국의 절파인 곤파로 빠지면 정향법(正向法)은 정묘향(正墓向)인 정미향(丁未向)을 놓아야 올바른 향법이 된다. , 계좌정향이나 축좌미향인 향이 된다. 이 경우 좌수가 흘러 곤방으로 나가니 목국의 묘향이 된다 서()에 이르기를 정곤종시만사상(丁坤終時萬斯箱;정향을 하고 곤방으로 물이 나간다면 큰 부자가 된다)이란 바로 이향이다. 발부 발기하고 인정이 대왕하며 복수 쌍전한다.(지리오결 P311)

▲ 7칸으로 구성된 누각인 만대루는 칸 마다 각각 다른 장면을 연출해 줌으로써 서원의 자연경관을 극적인 공간으로 연출한다.   병산서원 홈페이지

 

(2) 배치분석

 

병산서원의 건축물은 전체적으로 장식을 배제하고 있지만, 만대루를 비롯한 건축물들이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뤄 인위적인 장식을 보완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7칸으로 구성된 누각인 만대루는 칸 마다 각각 다른 장면을 연출해 줌으로써 서원의 자연경관을 극적인 공간으로 연출한다.

 

강당을 혈 자리에 배치한 양택풍수 서원이 된다. 좌 우측의 동재와 서재는 사신사의 좌청룡 우백호 역할을 하고 있다. 강당인 입교당의 좌향은 임좌병향으로 놓여있다. 이 경우에도 올바른 입향(立向)은 계좌정향이나 축좌미향의 정묘향을 놓아야 바른 향법이 된다. 좌청룡의 동재는 강당의 중심축에서 이상 안쪽으로 틀어져 배치되어 있다. 이는 병산의 살기를 막기 위한 풍수의 비보책의 목적으로 채택한 방법인 것이다.

 

병산서원의 중심은 강당이지만 만대루의 규모를 볼 때 지나치게 커서 강당을 압도하고 있다. , 서원 건축의 위계를 지키지 않고 있다. 그러나 만대루는 풍수의 비보물로 병산의 기암 벼랑의 살기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배치했던 비보풍수물이다. 기둥과 기둥 사이의 공간은 낙동강의 아름다움이 주변의 풍광과 하나하나 어울려 마치 7폭의 병풍처럼 자연환경과 조화를 이루고 풍수의 역할까지 담당했던 전통건축물이다.

 

고직사는 서원을 관리하는 노비들의 숙소인데 배향하는 인물의 연고지 반대편에 배치하였다. 즉 서애의 연고지가 서원 서쪽의 하회마을이므로 반대쪽인 동쪽에 고직사를 두고 전사청 또한 동쪽에 있다. 반면에 장판각은 서쪽에 배치하였다. 내룡이 임자룡으로 뻗어 내려와 힘차게 흐르는 지점에 혈맥이 위치하고 있다. 사당은 잉의 자리에 위치하고 입교당의 강당은 혈처인 육의 자리에 간잡이 하였다.

 

(3) 소 결

병산서원의 입지는 자연의 흐름에서 최적의 양기를 선택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좌향인 임좌병향보다는 계좌정향이나 축좌미향의 입향법이 올바른 좌향이 된다.

 

일반적으로 서원들이 경사지에 조성된 이유는 각 공간의 위계를 설정해 시각적으로 구현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그러나 기존의 서원과 달리 평지에 자리한 필암서원은 강당과 동·서재가 사우를 일상적으로 바라보도록 공간을 구성하며 건축배치 형식을 창의적으로 적용하여 이후 건립되는 평지형 서원의 전형이 됐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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