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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식 목사의 지상 설교●없애버려야 할 산당이 있습니까?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21/08/31 [08:53]
내 개인의 영적성장을 방해하는 산당을 없애버려야 한다

주형식 목사의 지상 설교●없애버려야 할 산당이 있습니까?

내 개인의 영적성장을 방해하는 산당을 없애버려야 한다

주형식 목사 | 입력 : 2021/08/31 [08:53]
 

세계 어느나라 사람들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유독 한국 사람들은 전통이라는 것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 같습니다. 역사와 전통을 아끼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것에 적응하기가 그만큼 어렵고,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왠지 변화가 두렵고, 변화에 따르는 책임감을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까지 하던 일을 그대로 하는데 익숙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그냥 해오던 습관이 여전히 뿌리 깊게 내 생활에 남아 있는지 한번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예후의 칠년에 요아스가 위에 올라 예루살렘에서 사십 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시비아라 브엘세바 사람이더라 요아스가 제사장 여호야다의 교훈을 받을 동안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되...”(왕하 12:1~2)

 

이스라엘 왕국은 솔로몬 사후에 북방 이스라엘과 남방 유다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북방 이스라엘은 선한 왕이 한명도 나오지 않을 정도로 패역한 나라였지만, 그래도 남방 유다에서는 간간이 선한 왕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히스기야, 여호사밧, 요시야 등의 선한 왕과 더불어 등장부터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왕이 있었습니다. 마치 한편의 영화와 같이 왕이 된 사람이 바로 요아스 왕이었습니다.

 

유다는 오랫동안 악한 왕들이 통치하고 있었습니다. 아달랴라는 악한 왕후가 있었는데 얼마나 악했냐하면 왕이 될만한 아들, 손자들을 모두 죽여버린 무서운 여자였습니다. 요아스는 아달랴의 아들 아하시야의 아들인데 아버지가 죽자 아달랴는 손자인 요아스를 죽이려고 합니다. 참으로 비정하고 무서운 할머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아달랴의 딸이자 요아스의 고모인 여호세바 공주가 죽임을 당하는 왕자들 틈에서 갓난아기 요아스를 데리고 와서 성전에 유모와 함께 몰래 숨깁니다. 그래서 요아스는 할머니로부터 죽임을 당하지 않고 성전에서 고모의 보살핌 속에서 6년간을 숨어 지내게 됩니다. 7년째가 되던 해에 제사장 여호야다가 군사들을 모아 아달랴를 죽이고, 성전에 숨어있던 요아스를 왕으로 추대합니다.

 

요아스는 하나님의 교훈을 받는 동안에 정직하게 살던 왕이었습니다. 어떻게 죄악이 넘치던 곳에서 그렇게 자랄 수 있었을까요? 어릴 적부터 성전에 도피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랐기 때문입니다. 당시 상황은 서로 죽이고 죽는 혼란과 정변의 시대였습니다. 하지만 요아스는 살아남기 위해 성전에 숨었고, 그곳에서 자라면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말씀과 기도를 가까이 하는 생활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요아스가 칭찬받을 일을 살펴보면, 필요한 재정을 모아 퇴락해가고 있던 성전을 수리하라고 명령합니다. 성전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어느 부분이 수리가 필요한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요아스의 명령을 따라 성전을 말끔하게 리모델링합니다.

 

제사장 여호야다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조언을 따라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을 행하며 선정을 베푸는 왕이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야다가 죽은 후에는 바른 말로 책망하는 제사장 스가랴를 돌로 쳐서 죽이는 등 하나님을 떠나 우상을 섬기고, 선지자와 제사장을 멀리하는 타락한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아람왕의 침공으로 전쟁에 패하게 되고 자신의 신하에 의해 살해당하여 비참하게 죽임당합니다. 하나님과 백성들의 큰 기대를 가지고 출발한 요아스의 말로가 왜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을까요? 성경을 읽다보면 요아스가 범한 작지만,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실수를 발견하게 됩니다.

 

성경을 통독하다보면 열왕기서에서 유독 자주 등장하는 어떤 장소가 무척 눈에 거슬립니다. 그곳은 산당이라는 곳입니다. 오직 산당을 제하지 아니하였으므로 백성이 오히려 산당에서 제사하며 분향하였더라(왕하 12:3)

 

이 말씀은 열왕기상과 열왕기하에서 5번이나 반복되는 말씀입니다.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던 요아스 역시 산당을 제거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산당이란 것이 무엇이길래 열왕기서의 저자는 이렇게 반복적으로 언급하면서 산당을 주목할까요?

 

산당은 영어로 “High Place", 높은 곳이라는 의미입니다. 산당은 원래 가나안에 살던 원주민들이 산의 정상에서 우상숭배를 하던 곳이었습니다.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다 몰아내고 그 새긴 석상과 부어 만든 우상을 다 파멸하며 산당을 다 훼파하고(33:52)

 

하나님께서는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거든 산당을 다 제거해 버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들어간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당을 제거하지 않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장소로 삼았습니다. 흔히들 이스라엘 백성들이 산당에서 우상숭배를 하였다고 막연히 생각하기 쉬운데, 이방백성들은 산당에서 우상숭배를 했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산당예배가 사사시대를 거쳐 사울, 다윗, 솔로몬 시대까지 이어져 산당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던 것입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렸던 곳도 기브온에 있는 산당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이 건축된 이후에도 백성들은 산당에서 예배를 계속 드렸습니다. 유다의 선한 왕이었던 아사나 여호사밧도 산당을 없애지 못했습니다. 히스기야와 요시야 때가 되어서야 산당을 없애버리려는 노력을 하지만 그 뿌리와 전통이 얼마나 깊은지 완전히 없애 버리는데는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언제 산당이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는가 하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귀환한 후에야 비로소 완전히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산당이 성전 예배와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예배가 예루살렘 성전에서만 드려지게 되니까 백성들이 여러 가지로 불편한 점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사는 곳 가까운 곳에 산당을 지어놓고 하나님께 예배드린다는 마음이 점점 변질된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면서 예배를 드리는 일이 산당에서 이루어졌지만, 정통 제사나 예배가 되지 못하고 자기만족적이고 자기표현의 한 수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성전예배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엄격한 절차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물을 가져오고,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를 통하여 용서를 받고, 하나님과 관계를 회복하는데 산당예배는 그냥 여호와의 이름 하나를 기억하고 부르면서 나머지는 죄다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이 산당예배가 결국 어떻게 됩니까? 점점 혼합주의적 형태를 띠게 된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은 물질적, 세상적 축복을 하나님께서 또한 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신앙의 근본적 추구는 주님과의 교제, 예배, 사귐,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아브라함의 복은 기본적으로 영생이며, 영원한 복입니다. 성경의 복을 모조리 물질적 복처럼 해석하는 것은 명백한 해석적 오류입니다.

 

요아스는 성전을 수리한 왕입니다. 어떻게 보면 종교개혁을 일으켰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성전을 수리했으니까 요아스가 참 믿음이 좋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아람왕 하사엘이 쳐들어왔을 때, 요아스는 성전의 금을 다 하사엘에게 줍니다.

 

유다 왕 요아스가 그 열조 유다 왕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가 구별하여 드린 모든 성물과 자기가 구별하여 드린 성물과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에 있는 금을 다 취하여 아람 왕 하사엘에게 보내었더니 하사엘이 예루살렘에서 떠나갔더라” (왕하 12:18)

 

정말 성전이 천지를 주관하시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계신 곳이라고 믿었다면 요아스는 성전을 찾아 하사엘의 침범을 두고 하나님 어찌하면 좋으리까?’ 하고 기도했어야 하는데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내가 처한 상황을 넉넉하게 인도하실 분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 만남, 교제, 관계, 이러한 것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갑자기 어려운 난관을 마주하니 돈을 써서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혼합주의입니다. 교회도 다니고 하나님도 믿지만 문제가 생기면 처리하는 방식은 세속적 생각이나 돈의 힘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한 개인적이고 친밀한 만남이 없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친밀한 교제와 교통에 있는데, 이것을 도외시 해 버리고, 보상을 바라는 심리로 신앙생활을 하는 위험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성전을 수리할 때에 원래 십일조를 드려서 레위인들이 십일조를 받으면, 그 다음에 레위인들이 받은 십일조에서 또 십일조를 떼서 성전에 드리고 그러면 제사장들의 생활을 위해서, 또한 성전수리의 비용으로 충당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은을 드렸다는 말씀이 나옵니다.

 

오직 그 은을 일하는 자에게 주어 그것으로 여호와의 전을 수리하게 하였으며(왕하12:14)

 

모세율법 가운데 은으로 십일조를 드리라는 명령은 전혀 없습니다. 이 말은 무엇입니까? 점점 십일조의 의미가 퇴색해진 것입니다. 잘 준행되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로 은을 걷어서 성전을 수리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이 있고, 이 말씀만이 우리의 삶과 교회를 든든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많은 성도와 교회들이 하나님의 말씀 없이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의 뤼벡교회에 가면 낡은 벽에 작자 미상의 시가 한편 적혀 있습니다. 제목은 주는 우리에게 말씀하신다입니다.

 

너희는 나를 주라 부르면서 따르지 않고,

너희는 나를 빛이라 부르면서 우러러보지 않고,

너희는 나를 길이라 부르면서 따라 걷지 않고,

너희는 나를 삶이라 부르면서 의지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존귀하다 하면서 섬기지 않고,

너희는 나를 강하다 하면서 존경하지 않고,

너희는 나를 의롭다 하면서 두려워하지 않으니,

그런즉 너희를 꾸짖을 때에 나를 탓하지 말라

 

내 마음 속의 산당을 제거할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내 삶에서 가깝게 하는 것입니다. 독일의 신학자 칼 바르트는 하나님의 말씀을 3가지로 정의내릴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기록된 말씀인 성경입니다.

둘째는 성육신하신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셋째는 선포되어지는 말씀, 곧 강단에서 전해지는 설교입니다.

 

먼저 우리는 개인적으로 날마나 기록된 말씀인 성경을 늘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야 하겠습니다.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늘 기도생활에 힘써야 할 것입니다. 강단에서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이 삶에 적용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티눈이 발에 생긴 적이 있습니다. 이 티눈이 골치 아픈 것은 아픔을 무릅쓰고 티눈이 생긴 살을 떼어내도 뿌리가 살아있으면 다시 또 생긴다는 겁니다. 그래서 티눈약을 티눈이 생긴 부위에 꼼꼼하게 발라줘야 합니다. 매일매일 정성스레 발라주면 부위가 딱딱해 집니다. 그러면 조심스럽게 눈물이 찔끔찔금 나는 걸 참고 딱딱해진 살을 떼어 냅니다. 그런데도 또 자칫 잘 제거하지 않으면 또 생깁니다. 까만색 뿌리가 얼마나 야속해 보이는지 모릅니다. 오랜 시간 고생한 후에야 간신히 티눈을 제거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이런 티눈과 같은 것은 혹시 없습니까? 없애려고 노력하지만 잘 없어지지 않는 우리의 나쁜 문화나 습관은 없습니까? 우리 교회의 전통이나 문화 중에 좋은 것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합당치 못한 문화나 습관, 없애야 할 것은 무엇인가?

 

산당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티눈같은 존재였습니다. 이 산당을 없애려고 오랜 시간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산당을 뿌리채 없애는 일은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부터 드리던 산당예배는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후에야 비로소 그 뿌리까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교회에서, 우리의 가정에서, 우리의 삶에서 마치 산당과도 같이 여전히 없어지지 않고 있는 악습들이 있지는 않는지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개선해야 할 습관이나 전통이 있습니까? 우리의 가정에서 개선해야 할 습관이나 전통이 있습니까? 아니면 나의 개인생활에서 유지하고 있는 악습이 있습니까? 우리 교회의 산당을 훼파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의 산당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내 개인의 영적성장을 방해하는 산당을 이제는 없애버려야 합니다.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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