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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가 ‘버마 민주화’ 희망 챌린지를 외롭게 펼치는 이유

장정태 | 기사입력 2021/09/03 [08:39]
이유 자비의 종교, 불살생을 이야기하는 불교국가 버마에 안타까움과 참회

장정태 박사가 ‘버마 민주화’ 희망 챌린지를 외롭게 펼치는 이유

이유 자비의 종교, 불살생을 이야기하는 불교국가 버마에 안타까움과 참회

장정태 | 입력 : 2021/09/03 [08:39]

버마에서 지난 2월 쿠데타가 발생한 이후 줄곧 버마 민주화희망 챌린지를 펼치고 있는 장정태 박사(한국불교사 전공 철학박사)의 시위장소는 교회, 사찰, 굿당 등 종교시설뿐 아니라 전국의 명소와 기관, 축제장소 등을 망라한다.

▲ 장정태 박사가 지난 2월부터 희망챌린지를 펼치는 모습 모음. 그러한 열정은 그들과 고통을 함께 못함을 안타까워 하며 간절히 평화를 기원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위 조각사진으로 편집해 놓은 방문 장소는 그중 일부로 장 박사 본인도 일일이 기억 못할 정도 일 것이다. 그러한 그의 열정은 그들과 고통을 함께 못함을 안타까워 하며 간절히 평화를 기원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가 버마에 관심을 갖고 집회에 참석한 것은 지난 2003년 아웅산 수지의 가택연금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수지가 정계 전면에 나서고 나서도 버마의 상황을 변하지 않았다. 자비의 종교, 불살생을 이야기하는 불교국가 버마에서 소수민족 종교탄압에는 철저하게 불간섭주의를 보여주었으며 급기야는 쿠데타까지 발발했다.  

그는 참회하는 마음으로 수지와 군부에게 책임 묻고 제 3의 인물에 의한 버마의 평화를 요구하는 줄기찬 주장을 희망챌린지를 통해 펼치고 있는 것이다.(편집자)

 

수지와 군부에게 책임 묻고 제 3의 인물에 의한 버마의 평화 요구

 

20036월 우연히 신문기사를 보았다. 버마의 독립운동가 아웅산 장군의 여식이 가택연금되었다는 소식이다. 우리세대는 가택연금에 대한 부정적 생각이 있다. 김대중, 김영삼 등 야당정치인에 대한 가택연금 소식이다. 그리고 풍문여고 건너편에 위치한 민주당사 앞에 놓여있는 <민주전선> 당 기관지를 손에 드는 것 조차 두려운 세대다.

▲ 장박사는 2003년 아웅산 수지가 가택연금됐을 때부터 시위에 참석했다. 장정태 사진  

 

연금이란 부정적 이미지와 함께 항의하는 버마인 소식을 접했다. 지금은 대사관이 있는 한남동 가는 길은 전철을 이용할 수도 있고 편리하다.

 

그때는 참 먼길이였다. 마포에서 그곳을 가는 길은 험했다. 142번 버스를 타고 이태원 입구에서 내려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하던 혹 20여분 이상 걸어야 했다. 당시는 그곳에 대사관이 있다는 사실조차 생소했다. 처음 그곳을 갔을 때는 정확히 기억할 수 없지만 집회가 없는 요일이다. 문구점 주인을 통해 수요집회을 알았다. 그후 몇 차례 참석했다. 10여명의 버마사람들과 일본인 프리센스 기자(작가)가 함께했다.

 

당시 우리 사회는 관민합동 시절이였다. 관이 주도하고 민은 따르는 그런 구조였다. 결국 민의 의식이 성숙되기 전 사회는 관에 대한 자기 의견을 밝히는 일은 어려웠다. 버마사태에 모두 무관심했다. 유일하게 관심을 보인 사람들이 대사관 입구 문방구 주인과 초등학교 교장 선생이다. 교문 안 나무 그늘과 화장실 이용 정도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은 경기도 부평 석왕사 영담스님이다. 서울 근교 소규모 사업장에 근무하는 외국인 근로자에게 관심을 보였고 그들 버마인 뿐 아니라 스리랑카를 비롯 외국인 근로자를 돕고 있었다. 이들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을 비롯 경제적 도움을 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집회 참석자들에게 들었다. 영담 스님은 지역 언론사, 협동조합 형식의 다양한 지역활동을 하고 있었다.

 

한동안 이어진 집회는 어느날 접었다. 장기 항의를 수행하기는 많은 경제적 어려움도 있었을 것이다. 그후 세계정세는 변했다. 버마는 그들이 원하던 지도자 수지가 정계 전면에 나서기 시작했으며 버마는 많은 변화가 예상되었다.

 

통치자와 감시에서 벗어난 버마는 새로운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소식 이면에는 소수민족에 대한 종교적 탄압이 있었다. 불교는 자비의 종교, 불살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소수민족 종교탄압에는 철저하게 불간섭주의를 보였다.

 

군과 민간정부의 관계는 금년 2월 시작된 군부에 의한 부정선거 시비와 함께 군사행동으로 깨졌다. 지금은 예전보다 더 심한 분열과 갈등을 보이고 있다. 무장투쟁 뒤에 숨겨진 후 폭풍 그 누구도 책임지지 못할 폭력이다. 서민들은 더 고통을 가져올 것이다. 국내에서는 현 집권자들과 단교 후 무장투쟁을 하는 사람들과 외교관계 체결, 군사적, 물질적 후원 등 다양하게 요구하고 있다. 국가간 협약, 약속 그리고 그곳에 투자하고 있는 우리기업과 민간인 국제관계속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의 폭은 그리 넓지않다. 그러나 그들은 정부는 물론 버마에 투자한 회사들에게도 자신들의 이념적 성향을 강요하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과 달리 수지와 군부에게 책임을 묻고 그들이 아닌 제 3의 인물에 의한 버마의 평화를 요구했다. 

 

그곳 사정을 잘 모르는 서생의 요구인지 모른다. 우리는 정치공학적 해법이 아닌 사람이 죽어가고 있고 삶의 터전에서 쫓겨나 사는 이들의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두 집단 동시 퇴진을 요구했다. 두 집단이 합의 하에 지배하던 시절 소수민족, 불교를 제외한 여타 신앙인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과 살생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들 모두 도덕적 문제를 가지고 있다. 그런 사람들에 의해 버마가 운영되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누구나 스스로 자신들의 정치적 선택을 할 수 있다. 우리의 주장이 독선과 아집에 의한 자기 주장일 수 있고 그리 비춰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이와같은 주장을 하는 이유는 단 하나 그들은 민주주의 정착에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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