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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식 목사의 지상 설교●예수님께서 우리집에 오시면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21/09/06 [14:42]
주형식 목사의 성서 이해

주형식 목사의 지상 설교●예수님께서 우리집에 오시면

주형식 목사의 성서 이해

주형식 목사 | 입력 : 2021/09/06 [14:42]

(마가복음 1:29-31) “회당에서 나와 곧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웠는지라 사람들 이 곧 그의 일로 예수께 여짜온대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오늘 본문에 보시면, 예수께서 한 집에 들어가십니다. 그 집은 시몬과 안드레의 집입니다.

 

(마가복음 1:21) “저희가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곧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유대인들은 안식일이면 회당에 모입니다. 그리고 랍비가 오면 그에게 가르침을 청합니다. 예수님이 회당에 가시니 말씀을 부탁드려서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설교를 하셨습니다. 그런데 23절부터 26절을 보시면, 말씀을 가르치는 중간에 갑자기 귀신들린 사람이 와서 귀신을 쫒아내는 이적을 행하십니다. 말씀을 가르치시고, 귀신을 쫒아내시니 예수님은 아마도 피곤하셨을 것입니다. 회당에서 베드로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실제로 가버나움이라는 마을에 가면 지금도 예수님이 설교하신 회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서 멀지 않은 곳에 베드로의 집터가 있습니다. 얼마나 가깝냐 하면 한 1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거리입니다.

 

회당에는 발디딜 틈도 없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있는 가운데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말씀 후 예수님이 피곤한 모습을 보이자 그 모습을 제일 먼저 알아차린 제자가 베드로입니다. 다행스럽게 집도 회당에서 제일 가깝습니다. “주님, 저희 집에 가서 잠시 쉬시죠이렇게 초대를 했을 것입니다.

 

보통 손님을 초대하면 집사람하고 상의를 해야 하는데 베드로는 그런 상의도 없이 그냥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그런데 언뜻 보면 아내와 상의도 안하고 손님을 초대하는 권위적인 남편같지만, 말씀을 살펴보면 베드로는 아내를 무척 사랑하는 남편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에서 뭐라고 이야기했습니까? 저 베드로처럼 아내를 데리고 다닐 권한이 없겠느냐?”제자들과 사도들 중에서 베드로만 유일하게 늘 아내와 함께 전도여행을 다녔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다 보니까 장모님까지 모셨습니다. 아무튼 예수님은 잠시 쉬시기 위하여 베드로의 집으로 물러가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가 열병으로 앓아누워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이 가정에 예수님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예수님이 들어가는 모든 집에선 항상 이런 역사가 일어납니다. 예수께서 집으로 들어오시면 시몬 베드로의 집에 가셨을 때 일어났던 사건들, 이 놀라움의 사건들, 축복의 사건들, 그 동일한 사건이 오늘 우리의 집에 일어날 수가 있다는 사실을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어떤 사건이 일어날 수가 있을까요?

 

문제가 없는 가정이 있을까요? 어떤 가정도 문제로부터 자유로운 가정은 하나도 없습니다. 한 청년이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제가 다니는 직장이 너무 문제가 많습니다. 문제없는 직장 하나만 소개해 주세요.” 목사님이 청년을 태우고 어디론가 갑니다. 공동묘지에 도착을 합니다. “, 여기가 문제가 하나도 없는 직장이오.”

 

우리 교회도 문제나 고민거리가 있습니까? 문제없는 교회는 세상에 단 한 군데도 없습니다. 우리가 산다는 것은 문제와 더불어 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문제는 도처에 있습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피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문제가 있으면 문제를 일으킨 상대방을 바꿔 보려고 합니다. 그래서 남편도 바꾸고, 아내도 바꿔봅니다. 직장도 바꿔봅니다. 교회도 바꿔봅니다. 바꾸는 것이 적절한 방법일 수도 있지만 능사는 아닙니다. 부딪혀 극복하는 것이 더 축복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문제가 없어서 행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은혜로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여전히 문제가 존재합니다. 하지만 세상과 다른 점은 문제의 해결자를 모시고 살아간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 말이 무엇입니까? “임마누엘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임마누엘되시는 예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누구나 행복합니다. 하지만 인생의 시련을 만나면 누구에게 호소할까요? 한계에 부딪힐 때, 내 생각, 내 노력, 내 방법이 통하지 않을 때, 절박한 상황을 만날 때 누구에게 갈까요? 이것이 신앙인과 비신앙인의 차이점입니다.

 

어떤 경우에는 기도해도 당장 해결되지 않는 일이 있습니다. 시련과 고통이 오래 지속됩니다. 그러나 감추어진 어떤 이유 때문에 오래 지속되지만 마침내 때가 되면 풀리지 않을 것 같은 수수께끼가 순식간에 무너지고 길이 보이는 때가 있습니다. 또 어떤 경우에는 내가 원하는 방식대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풀렸습니다. 세월이 지나간 후 돌이켜 보았더니 주님의 방법이 더 좋은 방법이었네!” 이런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나 자신의 요구대로, 내가 주문한 그대로 주께서 응답하셨다면 나는 더 커다란 인생의 곤고함을 경험했었을 것인데, ‘그래서 주님이 이런 방식으로 해결해 주시는구나!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하나님, 나보다 내 인생의 형편과 가정의 형편을 더 잘 아시는 주님이 그래서 고난과 시련을 허용하셨구나!’ 이러한 사실을 깨닫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것입니다. 모든 문제는 결국 해결됩니다. 해결자이신 주님이 우리 가정에 오시면 해결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문제의 해결이 더 큰 축복일까요? 예수님의 사랑을 경험하는게 더 큰 축복일까요? 주님의 사랑을 체험한다는 것은 문제가 해결된다는 사실보다 훨씬 더 좋은 것입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일회성 문제해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예전엔 마을이나 가정에 문제가 생기면 무당을 불러서 궂을 했습니다. 무당을 부를 때 무당하고 어떤 관계를 가지려고 부르지 않습니다. 조상님 넋을 위로해서 우리 마을에, 우리 집에 액운이 떠나게 해달라고 하기 위해서,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무당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우리 가정에 주님을 초청하는 것은 궂을 하는 것처럼 일회성 문제해결을 위해서 초청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보다 더욱 중요한 영원한 관계를 위해서 초청하는 겁니다. 예수님이 마태복음 1128절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문제를 다 해결해 주겠다?”이렇게 말씀하셨습니까?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당신과 관계를 맺기를 원하셨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초청하면 문제도 해결이 되겠지만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문제를 해결하시는 그리스도를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의 장모를 고쳐주시는 장면을 보면 흥미로운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1:31)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이와 똑같은 사건을 취급하고 있는 마태복음 815절을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8:15) “그의 손을 만지시니 열병이 떠나가고 여인이 일어나서 예수께 수종들더라

 

여기서 만진다는 말은 원어로 매우 부드럽고 섬세한 만짐을 의미합니다. 그녀의 손을 만지셨다! 아주 다정하게 터치하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서를 보시면 주님이 병자를 고치실 때 다양한 방법으로 고치시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한가지 방법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는 말씀만 하십니다. “고침을 받을지어다. 가서 확인해 보아라.” 또 어떤 경우에는 진흙을 가지고 눈에 바르십니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런데 말씀만으로 고칠 수 있는 분께서 베드로의 장모를 굳이 다정하게 손을 잡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병 고침보다 베드로의 장모에게 더 먼저 일어났던 축복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조용히 만지셨습니다. 이것이 더 좋은 체험입니다. 우리가 주님께 구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응답받기 전에 이와 같이 더 좋은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입니다. 때로는 기도 응답받고 문제해결하기 위해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정도 수준에서 예수님 믿는 거라면 예수님은 문제해결사 정도의 수준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분은 병 때문에 교회 나왔고, 병 때문에 기도 시작했는데 병이 낫지를 않습니다. 그럼 실망하고 교회 나오지 말아야 하는데 그런데도 계속 교회에 출석합니다. 그분은 기도하면서 자기 병의 문제 뿐만 아니라 죄의 문제를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병은 여전히 낫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믿음으로 자신의 처지를 극복한 것입니다. 이것이 병이 낫는 것보다 더욱 큰 그리스도인의 축복입니다. 주님이 우리 가정에 오셔서 한 사람 한 사람 만져주시면, 주님의 만짐을 경험하는 사람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1절을 다시 보시면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저희에게 수종드니라" 낫고 나니까 얼마나 감사합니까? 마가복음은 저희라고 되어 있는데, 마태복음 815절에서는 예수께 수종들더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이적을 보고 수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의 집에 몰려들었습니다. 고침을 받은 여인이 어떻게 했을까요? 열심히 밥도 하고, 식사도 준비하고, 또 예수님과 함께한 사람들을 섬겼습니다. 그 때만 그랬을까요? 여기 수종들더라는 말은 원어의 의미를 보면 미완료 과거형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헬라어 성경을 정확하게 번역하면 그후에도 계속해서 수종을 들었더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마음 속에 감사가 있습니다.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봉사의 일을 하고 싶어집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이 사건 이후로 평생 주님을 섬겼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누가복음 8:1-3) "이 후에 예수께서 각 성과 촌에 두루 다니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반포하시며 그 복음을 전하실새 열두 제자가 함께 하였고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

 

여기 보면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하여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저는 이 여인들 가운데 틀림없이 베드로의 장모도 포함되어 있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누가복음 23장에 보시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등에 지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십니다. 그것이 너무 힘들어서 구레네 시몬에게 억지로 십자가를 지이고 이 언덕을 오르시던 주님의 뒤를 따르고 있었던 여인들, 예수님을 따르며 울고 있었던 여인들 속에 베드로의 장모가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23:55)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뒤를 좇아 그 무덤과 그의 시체를 어떻게 둔 것을 보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무덤에 안치되었습니다. 그 때 그 분의 무덤과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서 동산에 올라왔던 여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갈릴리에서 함께 온 여자들입니다. 가버나움이 어디에 있는 동네입니까? 갈릴리입니다. 갈릴리에서 여기까지 찾아온 여인들! 주님께 받은 은혜! 이 은혜를 잊지 못하고 주님을 좇으며 섬겼던 여인들, 그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증거하는 가장 중요한 증인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개인적으로 만나고 체험한 삭개오와 니고데모가 어떻게 평생을 주님을 섬기게 되었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주님을 자기 집으로 모신 삭개오는 재물보다 더 큰 축복을 경험하였고, 인생의 황혼에 주님을 만난 니고데모는 끝까지 주님을 증거하는 증인이 되었습니다.

 

베드로의 장모는 인생의 황혼에, 혹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 그 순간, 사위에게 얼마나 감사했을까요? 어느 날 자기 집에 예수님을 초청했기 때문에, 예수님의 손길을 체험하고 예수님의 사랑과 구원을 체험했기에 얼마나 사위에게 감사했을까요? 우리의 부모님들을 위해서, 또 우리의 자녀를 위해서, 우리의 남편과 아내를 위해서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우리의 가정에 예수 그리스도를 초청한다면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 부모님에게 이보다 더 큰 효도가 어디 있을까요?

 

 

또한 부모들이 자녀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하고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도록 해준다면 부모의 손길이 미치지 않을 때, 부모가 아무 것도 해줄 수 없을 때 그들은 예수님을 붙잡고 승리할 것입니다. 가족들이 같이 주님 앞에 나아 오셨습니까? 곁에 있는 가족들의 손을 잡고, 함께 사랑을 나누는 믿음의 가족들과 손을 잡고 기도해 드리십시다. 주님, 이들이 주님의 손을 붙들고 승리하도록, 끝까지 주님을 따라갈 수 있도록, 우리 주님의 손을 든든히 붙잡을 수 있도록 내 사랑하는 이들을 축복하여 주시옵소서!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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