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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막서 출발한 세계 최대 교회…‘희망의 목회자’ 조용기 목사
9월14일 소천…18일 한국교회장, 오산리최자실국제금식기도원 묘원 안장
기사입력: 2021/09/16 [23:19]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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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4일 소천18일 한국교회장, 오산리최자실국제금식기도원 묘원 안장

 

여의도순복음교회 조용기 원로목사가 91486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조 목사는 20207월 뇌출혈로 쓰러진 후 서울대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오다 이날 오전 713분 소천(召天: 별세)했다.

 

() 조용기 목사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설립해 한국교회의 부흥과 세계교회 성장을 주도하며 개신교 선교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조 목사는 '20세기를 빛낸 위대한 복음 전도자'로 평가받는다. 그가 설립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93년 세계 최대 규모 교회로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했다. 19585월 고() 최자실 목사와 서울 은평구 불광동에서 천막교회로 시작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61년 서대문교회를 거쳐 1973년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이름을 변경, 한국 교회의 부흥기를 이끌었다. 19581명의 신자로 출발한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폭발적인 성장세로 1993년 성도 수 70만 명을 돌파하며 세계 최대의 교회로 거듭났다. '조용기'라는 이름은 20세기 동안 전 세계에 가장 많이 알려진 한국인이기도 했다.

 

조 목사는 1958년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한 뒤 당시 최자실 전도사와 서울 은평구 대조동에서 천막 교회를 세우며 목회를 시작했다. 천막 교회는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전신이다. 오중복음,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으로 폭발적인 부흥을 일으키며 성도 수 78만명의 세계 최대 교회를 일궜다.

▲ 9월14일 소천한 고(故) 조용기 목사(1936~2021)   


조용기 목사는 한국 개신교 최전성기를 이끌었던 주역이다. 1960년대 희망을 설교한 그의 교회에는 구름 인파가 몰렸고, 조 목사와 여의도순복음교회는 한국 사회와 함께 성장했다.

 

이병철, 정주영, 김우중 등 기업인들이 세계 시장을 누빌 때 조 목사는 지구 120바퀴 거리를 날아 세계 선교에 나섰다. 대조동 천막 교회 시절부터 세계 선교를 꿈꿨던 조 목사는 우리나라가 자동차, 비행기는 못 만들어도 복음과 예수를 전하는 일에서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고 한다. 조 목사의 경상도식 억양 영어 설교엔 구름 인파가 몰렸다. 브라질 상파울루 집회에는 150만명 이상이 운집하기도 했다. 해외에서 그는 폴 조’ ‘데이비드 용기 조로 유명했다.

 

1966년부터 1978년까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20085월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이후 영산(靈山)조용기자선재단 이사장을 지냈다.

 

조 목사는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함께 세계적인 복음 전도자로 손꼽힌다. 한국과 세계교회에 강력한 성령 운동과 철야 예배, 구역조직(셀 모임)의 핵심원리를 전수했다. 조 목사는 세계 최대의 교회라는 타이틀에 그치지 않고 심장병어린이돕기운동, 굿피플 및 영산조용기자선재단 설립, 사회복지법인 엘림복지회 운영, 평양조용기전문심장병원 건립 운동 등 각 분야로 전인 구원의 사역을 왕성하게 전개했다.

 

한세대, 순복음영산신학원, 미국 베데스다대, 국민일보, 신앙계, FGTV, 굿티비 기독교복음방송 등을 설립하며 신학교육과 문서·방송 선교에도 힘썼다. 오산리최자실기념금식기도원, 국제교회성장연구원 등을 통해 교회부흥의 원리를 전 세계에 나누며 성령 운동을 주도했다.

 

빈소는 여의도순복음교회 베다니홀에 마련됐다. 장례예식은 18일 한국교회장으로 진행된다. 하관예배는 같은 날 오전 10시 경기도 파주시 오산리최자실국제금식기도원 묘원에서 열린다유족으로는 장남 희준, 차남 민제 국민일보 회장, 삼남 승제 한세대 이사 등이 있다. 부인 고 김

성혜 여사와는 지난 211일 사별했다. 

▲ 고 조용기 원로목사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조문객들이 기도하고 있다.     

 

교계, 조용기 목사 추모 메시지 세계 복음화 향한 큰 걸음, 우리가 이어가자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의 14일 별세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의 삶과 신앙을 추모하는 교계 원로·관계자와 교단, 교회연합기구의 메시지가 이어졌다.

 

림인식 노량진교회 원로목사는 조 목사님은 우리나라가 가장 어려울 때 목회를 시작해 여의도순복음교회는 물론이고 우리나라와 세계 복음화에 크게 기여하신 하나님의 종이었다너무 일찍 하나님 품에 안기셔서 너무 섭섭하다고 말했다. 박조준 국제독립교회연합회(WAIC) 설립자도 복음 사역을 위해 큰 헌신을 하셨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오늘은 한국교회가 복음의 큰 별을 잃은 날이라고 했다. 손인웅 덕수교회 원로목사는 희망과 긍정의 신앙을 심어주셨던 조 목사님께 깊은 감사와 최고의 경의를 표한다고 밝혔다.

 

이동원 지구촌교회 원로목사도 민족이 힘들고 좌절할 때 조 목사님의 메시지가 민족의 내일을 여는 길을 제시했다동시에 조 목사를 통해 전 세계에 복음을 베푼 것도 큰 은혜였다고 회상했다.

▲ 9월14일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마련된 조문소와 고 조용기 목사 영정 사진   

  

교단의 추모사도 이어졌다.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합동 배광식 총회장은 조 목사님은 절대 긍정과 절대 희망으로 많은 사람에게 갈보리 십자가 밑의 희망의 복음을 제시했다면서 위대한 복음 전도자의 모범을 따라 후대도 주님의 지상명령 성취에 앞장서자고 말했다.

 

전세계 복음화를 위해 헌신했던 조 목사에 대한 그리움도 전했다. 장종현 예장백석 총회장은 조 목사가 육신의 고통 가운데 말씀 선포로 민족을 살리고 생명을 살렸다면서 온 세계를 다니며 선포했던 소망의 복음과 희망의 메시지, 긍정의 신앙이 지금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데 하나님의 신실한 종과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이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기독교한국침례회 박문수 총회장은 조 목사님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푯대 역할을 하셨다이 시대 가장 뛰어난 설교자로 20세기 후반 전 세계에 성령운동을 일으켰다고 기억했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 이상문 총회장은 예수님 속죄의 은혜를 믿음으로, 영혼과 육체가 구원받고 질병과 가난에서 해방된다는 조 목사님의 가르침은 전 세계의 병든 자와 가난한 자에게 큰 희망을 줬다하늘나라에서 영원한 안식을 기원한다고 전했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이홍정 총무는 “6·25전쟁 이후 빈곤과 폐허를 극복하기 위한 산업화 시대에 이 땅의 민중에게 다가온 복음은 영혼이 잘됨같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되는 일이었다조 목사님은 그 시대를 삼박자구원의 복음으로 섬기셨다. 이제 우리는 탈성장시대에 책임있게 응답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대표회장 소강석 이철 장종현 목사)도 추모사를 통해 복음을 통한 삶의 변화와 긍정적 삶의 가치를 가르침으로써 모든 국민에게 희망으로 세상을 이길 용기를 갖게 했다면서 “NGO 선한사람들(현 굿피플) 설립과 헌혈운동, 소년소녀가장 돕기, 4704명의 심장병 어린이 무료수술, 평양 심장병원 추진, 국민일보 창간 등 한국교회를 위한 큰 족적을 남기셨다고 평가했다.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 강대흥 사무총장은 조 목사님은 한국교회와 선교, 나아가 동남아 유럽 남미 북미 심지어 아프리카를 다니며 집회를 인도하고, 성령 충만한 메시지로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신 분이라고 회고했다.

 

한국교회언론회도 조 목사는 가난하고 병들고 헐벗은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목회를 했다면서 미국의 빌리 그레이엄 목사와 함께 20세기 세계적인 전도자였다. 이제는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절망의 시대 희망을 꽃피우다조용기 목사의 삶과 65년 목회 인생

 

조용기 목사는 1936316일 울산 울주군 삼남면 교동리에서 부친 조두천씨와 모친 김복선 여사의 54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한학(漢學), 유교, 불교 철학에 해박한 부친으로부터 다양한 지식을 습득했다. 

▲ 9월14일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에 마련된 조문소와 고 조용기 목사 영정 사진   


부산 동래중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지만 1950년 부친이 울산 갑구 민의원 선거에 낙선하면서 가세가 기울었고 기술자가 되기 위해 부산공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마침 학교 근처에 미군 부대가 있어서 미군 병사들에게 영어를 배울 수 있었고 교장 선생님과 부대장 간 통역을 맡기도 했다.

▲ 조용기 목사(오른쪽)가 부산공고 재학시절 친구들과 함께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그러나 조 목사는 고등학교 2학년 1학기 때 폐병에 걸린다. 이때 폐결핵 3기로 6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으면서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그는 질병의 고통 속에서도 영어사전을 외우고 교과서를 독파하며 삶의 의지를 불태웠다. 그러다 세 살 위 누나의 친구로 병문안을 온 동래여고 학생 김정애를 통해 복음을 듣고 예수를 영접하게 됐다.

 

병이 호전되지 않자 공기가 맑은 고향에 내려가 휴양을 하면서 부산으로 통원치료를 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미국인 켄 타이즈 선교사가 부산의 한 거리에서 인도하던 천막부흥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게 됐고, 선교사의 통역을 도우며 기독교의 진리를 깨닫게 됐다.

▲ 순복음신학교 재학 시절 최자실 목사와 함께한 조용기 목사(오른쪽)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분명한 확신이 없어 신앙적으로 갈등하던 그는 간절한 마음으로 금식기도를 했고 어느 날 찬란한 광채 속 나타나신 예수님을 환상 중에 만나고 성령 충만을 체험한다.

 

신학을 공부하기 위해 1956년 서울에 올라온 조 목사는 순복음신학교에 수석으로 입학한다. 여기서 평생 목회의 동역자이자 장모인 최자실 목사를 만난다. 그는 탁월한 영어 실력을 인정받아 학교장 존 허스톤 선교사의 통역을 맡았고 가정교사를 하며 학비와 생활비를 해결했다.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한312)

 

조용기 목사가 평생 가장 사랑했던 성경 구절이다. 그는 이 말씀을 매일 묵상하며 평생을 지냈다고 한다. 조 목사의 핵심 목회 사상 중 하나인 삼중축복의 근간이 되는 구절이다. 그는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삼중축복의 요체를 예수를 믿어 영혼이 잘되고,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협력해 범사가 잘되는 삶을 살며, 구원받은 성도가 질병의 고통에서 해방돼 강건하게 된다고 설명했다.

 

조 목사의 삶과 목회 사역을 관통하는 말은 희망긍정이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할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고 긍정한다면 무엇이든 진짜로 이뤄진다는 것이다. 

▲ 조용기 목사가 1959년 전도사 시절, 신문지로 벽지를 붙인 서울 대조동 천막교회에서 외국인 선교사와 함께 복음을 전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죽을 고비에서 만난 하나님

 

조 목사는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불교 가정에서 태어난 뒤 17세 때 폐병에 걸렸을 때 살 만한 운명이 있으면 살고 안 그러면 죽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죽음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던 그에게 누나 친구가 전해준 성경책은 예수님을 접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폐결핵 투병 중 조 목사는 우연히 부산역 천막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켄 타이스 선교사를 만난다. 이후 타이스 선교사의 통역을 도우면서 많은 기독교 서적을 탐독했다. 하지만 신앙적으로 분명한 확신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밤 금식기도를 하다 예수님을 환상 중에 만났다. 조 목사는 폐병을 고쳐줄 테니 평생 내 종이 되겠느냐는 예수님의 다리를 힘껏 붙잡았다. 폐결핵은 완치됐고 조 목사는 주의 종이 되기로 결심한다.

 

서울 대조동 천막교회

 

조 목사는 19569월 서울로 올라와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 소속 순복음신학교에 입학한다. 이곳에서 목회의 동역자이자 믿음의 어머니최자실(1915~1989) 목사를 만난다. 급성 폐렴으로 사경을 헤맬 때 밤새 병간호를 해준 이도 최 목사였다. 조 목사는 학생회장으로, 최 목사는 전도부장으로 노방전도에 나섰다.

 

19583월 순복음신학교를 졸업한 조 목사는 최 목사의 요청으로 그해 518일 서울 서대문구(현 은평구) 대조동 최 목사(당시 전도사)의 집 거실에서 첫 목회지 개척 예배 설교를 했다. 1958518일 당시 조용기 전도사, 최 전도사와 자녀 그리고 밭일하다 비를 피해 들어온 이웃 주부 등 5명이 사과 상자를 보자기로 덮은 강대상을 놓고 예배를 드렸다. 원래 5명이 오기로 했지만 끝내 오지 않고 당시 최자실 전도사와 그의 세 자녀만 예배에 참석했다.

 

성도 30명만 만들어 달라는 최 목사의 요청에 조 목사는 원래 계획했던 미국 유학을 미뤘다. 교회는 점점 부흥했다. 성도가 50여명에 이르자 마당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 바닥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는 설교 때마다 하면 된다, 해보자라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했다. 중풍으로 쓰러진 여인이 낫고, 걷지 못하던 소년이 일어서는 기적이 일어나자 많은 사람들이 천막교회에 밀려들었다. 5명으로 시작된 천막교회는 3년도 안 돼 300명이 넘는 교회로 성장했다.

 

시작은 미약했지만 목회 초반부터 조용기 신드롬은 뜨거웠다. 당시 은평구 일대는 영호남에서 먹고살려고 상경한 가난한 사람이 많았다. 당시 개신교계의 일반적 분위기와는 달리 방언(方言·성령의 힘으로 말한다는 내용을 알 수 없는 말)’신유(神癒·신의 힘으로 병이 낫는 것)’를 강조한 조 목사의 뜨거운 목회는 이단 논쟁도 불렀지만 신자 수 급증으로 이어졌다. 창립 3년 만에 서대문로터리에서 부흥회를 개최한 것을 계기로 교회를 이전했다.

 

서대문 시대

 

조용기 목사는 갑자기 입영 영장을 받고 19611월 입대했다. 하지만 장 질환으로 대수술을 받고 8개월 만에 의병제대한다. 다시 교회로 돌아온 조 목사에게 미국 하나님의성회 동양선교부 선교사 존 허스톤 목사는 자신과 함께 사역할 것을 제안했다. 고민하던 무렵 조 목사는 너는 곧 한국 최대의 교회를 세우게 될 것이라는 음성을 듣는다. 당시 한국 최대의 교회는

한경직 목사가 시무하던 영락교회로 교인이 6000명이었다.

▲ 조용기 목사가 1967년 4월 영국 웨스트민스터 센트럴홀에서 열린 세계하나님의성회 부활절 예배에서 아시아 대표로 말씀을 전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196111월 서대문구 충정로1가에 1500석 규모의 새 교회당이 완공됐다. 이듬해 218일 헌당예배를 드리고 순복음중앙부흥회관으로 명명했다. 그해 4월 당시 조용기 전도사는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 다음 달엔 순복음중앙교회로 명칭을 변경했다. 성도들은 매주 2030명씩 증가했고 서대문 이전 3년 만인 64년엔 3000명이 됐다. 늘어나는 성도들을 수용할 수 없게 되자 64517일 주일부터 대예배를 1(오전 10)2(12)로 나눠 드렸다.

 

하지만 조 목사의 건강은 악화되고 있었다. 예배 중 쓰러지길 반복했다. 당시 조 목사는 목회를 혼자서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때 성경을 묵상하며 출애굽기(18:18)에서 모세가 천부장, 백부장, 오십부장 등을 세워 자신의 업무를 분담시킨 것을, 사도행전(2:4647)에서 소그룹 예배를 통한 부흥 비결을 발견하고 목회에 적용했다. 여 집사를 중심으로 서울을 20개 교구로 나누는 구역조직을 탄생시켰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성장의 핵심인 구역은 이렇게 시작됐다.

 

여의도시대 개막

 

1973년엔 국회의사당과 시범아파트 외에는 허허벌판이던 여의도에 교회를 신축해 옮겼다. 조 목사는 지난 2018년 교회 창립 60주년을 맞아 조선일보와 가진 인터뷰에서 평생 가장 기뻤던 일이 여의도 예배당 입당이라고 말했다. 당시 오일쇼크 여파로 공사가 수차례 중단됐지만 오히려 성도는 늘어나는 기현상이 일어났다고 했다. 여의도 이전 후 교회 이름도 여의도순복음교회로 바꿨다. 이때부터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성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입당 당시 1만명이던 성도는 197910만명, 198440만명을 넘어섰고, 1992년엔 70만명을 넘어 기네스북에 세계 최대 교회로 등재됐다.

 

교회는 각 구역장에게 성도들을 양육하고 함께 기도하는 일을 가르쳤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것을 당부했다. 구역원이 15명 정도가 되면 새로운 구역으로 분리시켰다. 구역조직에 힘입어 성도 수가 688000명에 이르자 주일 예배를 3부로 늘렸다. 하지만 나날이 성장하는 성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조 목사는 여의도 이전을 계획하고 성도 1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성전을 건축하기로 했다. 당시 여의도는 모래벌판이었고 교통편도 제공되지 않았던 미개발지역이었기 때문에 극심한 비난과 반대에 부딪혔다. 건축비 8억원이 필요한 공사였지만 교회에는 100만원밖에 없었다. 조 목사는 하나님만 믿고 건축헌금 작정에 들어갔고, 694월 기공식을 갖고 성전건축에 들어갔다.하지만 공사가 시작되자마자 제2차 석유파동이 발생해 세계적인 불황이 닥쳤다. 결국 성전 건축이 중단되기에 이른다. 당시 조 목사는 죽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나님께 저는 실패자라는 마지막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하나님은 참고 견디어라. 내가 어떻게 일을 마무리하는지 보게 될 것이라고 응답했다. 조 목사는 매일 새벽 공사가 중단된 교회 바닥에 꿇어 앉아 울며 회개했다. 그러자 성도들도 교회 살리기 운동에 나섰다. 그렇게 성전은 완공돼 73923일 헌당 예배를 드렸다. 

▲ 여의도순복음교회의 새성전(민족제단) 상량예배가 1971년 12월16일 진행되고 있다. 여의도 새성전은 조용기 목사를 비롯한 성도들의 뜨거운 기도에 의해 수많은 역경을 이겨내고 1973년 8월15일 완공됐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여의도 이전 후 교회는 수직 성장했다. 7910, 81년에는 20만 성도가 됐다. ‘여의도순복음교회로 이름을 바꾼 8440, 8950, 93년에는 70만명을 돌파했다. 기네스북은 여의도순복음교회를 단일 교회로서는 세계 최대 규모로 등재했다.

 

조 목사는 80년대 이후 해외 선교를 강화한다. 특히 92년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3일간 열린 모스크바 대성회에는 4만여명이 참석해 15000여명이 결신하는 놀라운 성과를 낸다. 사회구제 사업에도 적극 나선다. 불우 청소년과 무의탁 노인을 위한 엘림복지타운을 건립하고 굿피플을 통해 소외지역 개발과 빈곤퇴치, 아동보호 활동을 펼쳤다. 2007년 북한동포를 돕기 위해 평양조용기심장전문병원을 착공했다. 2008년 사랑과행복나눔재단(현 영산조용기자선재단)을 설립했다.

 

교회 리더십의 민주적 이양

 

20085월 조 목사는 3차례 투표를 통한 민주적 절차를 거쳐 영적 아들인 이영훈 목사에게 담임목사직을 이양했다. 대형 교회들이 세습으로 비난받던 상황에서 신선한 충격이었다. 담임목사직을 내려놓은 후에도 조 목사는 매일 새벽 2~3시면 일어나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매주 주일 오후 1시 예배 설교도 계속했다. 

▲ 조용기(오른쪽) 목사와 후임 이영훈 목사. 조 목사는 만 70세이던 2006년 이영훈 목사를 후임으로 선출하고 담임목사직을 물려줌으로써 대형 교회 담임목사직 승계의 모범을 보였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세계 최대의 교회인 만큼 한때 조 목사의 은퇴 여부가 사회적 관심을 끌기도 했다. 원래 교회가 속한 기독교대한하나님의성회(기하성) 교단의 목사 정년은 75세였다. 조 목사는 만 70세이던 2006년 당회의 투표를 거쳐 이영훈 목사를 후임자로 뽑았다. 이영훈 목사는 3년간 담임목사 서리 기간을 거쳐 20092대 담임목사로 취임했다. 이 목사 취임 후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지교회를 독립시켜 40만명 규모로 축소했으나 이후 다시 교인이 늘어 현재는 57만명에 달한다.

 

사회봉사 활동

 

교회 규모가 커지면서 사회봉사 활동에도 나섰다. 1980년대부터 국내와 동남아 등 심장병 어린이 수술을 도운 것이 5000명에 이른다. IMF(국제통화기금) 구제 금융 사태로 실업자와 노숙자가 속출하던 1990년대 말에는 금 모으기 운동에도 앞장섰다. 1999년엔 국내외 구제 활동을 위한 NGO(비정부기구) 굿피플을 창립했고, 2007년에는 평양에 심장 전문 병원을 착공했다. 그는 생전에 병원 이름에서 내 이름은 빼도 된다며 병원 설립에 큰 관심을 보였지만 남북 관계 악화와 대북 제재 등의 여파로 병원은 아직 완공되지 못했다.

 

가난한 영혼의 언어로 구원의 메시지 전파65년 사역에 담긴 목회철학

 

조용기 목사의 65년 목회의 핵심을 요약하면 오중복음, 삼중축복, 4차원의 영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성령님을 환영하고 인정하고 모셔 들이고 의지하라는 당부는 영산(靈山: 조용기 목사의 호)이 평생 추구했던 목회 전부였다고 할 수 있다. 

 

조용기 목사의 목회 스타일은 희망 목회로 불린다. 조 목사가 목회의 첫걸음을 내딛던 1960년대는 한국 경제도 기지개를 켜기 시작한 때다.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되면서 농촌을 떠나 서울로 시민들이 몰리는 이농 현상이 본격화했다. 이 시기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어렵게 뿌리내리던 이들에게 조 목사는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희망을 설교했다. 조 목사는 생전에 저 스스로 가난이 지긋지긋했다. 가난에 한이 맺혀 천당과 지옥 이야기보다는 용기와 희망을 설교하려 애썼다. 부자 교회 못 가고 우리 교회 온 가난한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고 위로를 받는 것이 제게 큰 힘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교회 성장의 비결로 여성 구역장의 활약을 꼽기도 했다. 여성들이 전도 일선에 나서고 평신도 조직의 책임을 맡으면서 비약적 성장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오중복음과 삼중축복

 

조 목사는 성령께 나를 온전히 맡기면 성령은 내 삶의 주체가 되고 나는 객체가 된다며 늘 성령과 동행하는 삶을 강조했다. 그는 미국 오순절 선교사를 통해 순복음신학을 접했는데, 한국전쟁 고난과 폐병 신경쇠약 심장병 위장병 파킨슨병의 고통 속 하나님의 임재와 치료를 체험했다. 그리고 이 경험에서 절대긍정, 절대희망, 바라봄의 법칙이라는 목회원리를 끌어냈다.

 

6.25전쟁 이후 절망에 빠진 가난한 민중에게 희망의 신학을 설파했다. 특히 요한312절 말씀을 강조했는데, 여기서 영혼과 범사가 잘되고 강건한 삼중축복이 나왔다.

 

조 목사의 제자그룹인 영제회’ 1대 회장인 손문수 동탄순복음교회 목사는 조 목사가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목회는 성령의 권능을 받고 가서 귀신 쫓아내고 병든 사람을 고치는 것이었다면서 영혼과 범사가 잘되며 강건해진다는 스승의 가르침대로 목회 현장에서 성령세례를 중시했더니 정말 질병에서 치료되고 그때부터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 조용기 목사가 1992년 8월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열린 세계 성령화 대성회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창조력 지닌 4차원의 영성

 

조 목사는 기하학적 비유를 통해 무질서와 혼동의 3차원의 세계를 지배하는 4차원의 영적인 세계의 원리를 소개했다. 3차원의 육적 세계에서 4차원의 영적 세계라는 문을 열기 위해선 생각을 바꾸고 꿈을 꾸며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입술로 고백해야 한다는 것이다.여의도순복음교회 교육연구소장 출신인 이일성 파주 순복음삼마교회 목사는 혼돈과 흑암의 3차원 세계라 할지라도 성령께서 운행하시면 굉장한 창조력이 생기고 생기가 돈다면서 “3차원의 물질세계에서 생각 꿈 말 믿음을 통해 십자가를 붙들고 성령님을 모시면 4차원의 영적세계와 연결되고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다는 게 조 목사가 평생 외친 4차원의 영성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여의도순복음교회가 세계 최대의 교회가 된 것은 조 목사의 신앙지도에 따라 성도들이 바라봄의 법칙을 통해 성령과 매일 창조적 대화에 힘썼기 때문이라면서 그를 1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한 영적 거인, 세계적 목회자라고 불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강조했다.

 

대중의 언어로 희망 제시

 

조 목사는 말씀과 성령의 관계, 성경적 원리를 성도들의 삶 속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왔다. 갈보리 십자가와 성령을 일반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만들어 구원과 희망의 복음을 제시한 것이다.

 

장훈태 전 백석대 선교학 교수는 러시아 오지와 케냐 우간다를 갔을 때 현지인으로부터 혹시 닥터 조를 아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았다. 그 정도로 조 목사는 전 세계 목회자와 성도에게 적잖은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고 설명했다.

 

미래 목회 내다본 선각자

 

조 목사는 20세기 한경직 김준곤 목사와 함께 한국교회를 대표하는 목회자였다. 미국 대통령이 방한하면 조 목사를 초청해 안수기도를 요청할 정도로 깊은 영성과 통찰력이 있었다.장 교수는 조 목사는 50년 전 매스미디어 선교를 시작하고 대규모 주차장을 마련하고 사회봉사에 앞장서는 등 세상이 어떻게 움직일 것인지, 미래 목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예측했다면서 요즘 말로 하면 메타버스를 타고 움직인 선각자였다고 평가했다.

 

박명수 전 서울신대 교회사 교수도 조 목사는 한국전쟁 이후 교회와 사회에 성령운동, 4차원의 영성을 통해 희망과 용기를 불어넣은 목회자라면서 산업화 시대 한국인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전개한 새마을운동과 조 목사의 성령목회를 통해 부정적 사고를 긍정적으로 바꾸고 사회변혁을 이뤘다고 분석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의 폭발적 성장 동력은?

 

여의도순복음교회는 19622월 서울 서대문 로터리 부근 순복음중앙부흥회관으로 예배당을 이전하면서 폭발적 부흥을 했다. 강력한 신유의 은사가 나타나자 1500석 규모의 예배당이 가득 찼다. 병자들이 통로에 누워 조 목사의 설교를 들을 정도로 예배당이 가득 찼다.

 

1964년 출석 성도가 3000명이 될 때였다. 300명에게 침례를 베푼 조 목사가 저녁 예배 때 미국 부흥사의 통역을 할 때였다. 심장 주변에 경련이 일어났고 강단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나는 죽어가요.” 조 목사는 존 허스톤 선교사의 팔에 안겨 정신을 잃었다. 그는 병원에 입원했다가 1주일 만에 다시 강단에 섰지만, 온몸이 떨리고 다리가 풀리면서 8분 만에 또다시 실신했다.

 

죽음의 절망 앞에서 조 목사는 하나님께 출애굽기 1821~22절 말씀을 받는다. 장인 이드로가 과중한 업무에 시달리는 모세에게 작은 권한은 위임하라고 권유하는 내용이다. 조 목사는 이 말씀을 통해 교회 일을 혼자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한다. 그리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2:46~47) 말씀에서 가정집에서 모임을 하는 구역예배의 원리를 뽑아냈다.

 

당시만 해도 한국사회는 유교적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어 여성을 리더로 세운다는 게 큰 모험이었다. 조 목사는 기도 중에 나는 여성들을 구역 리더로 세우길 원한다는 말씀을 받는다.확신을 얻은 조 목사는 다음 주일 여선교회를 소집했고 최자실 전도사를 총책임자로 서울을 20개 교구로 나눠 구역조직을 가동했다. 구역장들에게 담당구역의 성도들을 양육하고 기도· 전도하는 일을 맡겼다.

 

조 목사는 교회 성장의 비결로 여성 구역장의 활약을 꼽기도 했다. 여성들이 전도 일선에 나서고 평신도 조직의 책임을 맡으면서 비약적 성장이 이뤄졌다는 뜻이다. 

▲ 1962년 2월18일 헌당한 서울 서대문 순복음중앙부흥회관. 교회 자리는 지하철 5호선 서대문역 3번 출구 부근으로 현재 서대문역 디타워돈의문이 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제공  


구역은 묵도와 사도신경, 찬양, 합심 기도 후 구역장이 설교하거나 가르치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주기도문으로 마무리한 뒤 가벼운 다과를 나누며 성도 간 교제를 갖도록 했다. 목사의 권한 위임을 통해 무한대로 성장하는 교회 안의 교회개념이다.구역원이 15명이 되면 새로운 구역으로 분리하고 구역예배를 가질 때마다 예배 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토록 했다. 여성구역의 성공을 보고 남성구역은 68년 출범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성장의 엔진이라 할 수 있는 구역은 이렇게 시작했다.

 

20개 구역으로 시작한 구역조직은 현재 19093개로 성장했다.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진 G12, D12 제자양육 시스템의 원조도 사실은 여의도순복음교회 구역조직이다.

 

이영훈 목사 절대긍정의 힘으로 조용기 목사 신앙 이어갈 것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원로목사 빈소에서 추모 메시지 발표

 

이영훈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가 914일 별세한 고() 조용기 원로목사를 추모하며 절대 긍정과 절대 감사의 힘으로 조 목사님의 신앙을 이어가겠다고 밝혔다. 이 목사는 15일 오전 조 목사의 빈소가 마련된 서울 여의도의 교회에서 추모 메시지를 발표하고 이같이 말했다.

 

이 목사는 메시지에서 조 목사님은 한국교회의 거목이요, 세계교회의 위대한 복음 전도자였다면서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해보자고 설파하신 목사님의 그 카랑카랑한 음성이 귀에 쟁쟁하다고 말했다. 이어 더욱이 조 목사님은 제게 영적인 아버지이자 스승이셨다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셨던 목사님을 잃은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 목사는 조 목사가 생전 펼친 성령 운동을 모성적 성령 운동이라고 평가하며, “조 목사님이 전한 희망과 긍정과 용기의 복음은 전쟁 후 가난과 절망에 빠진 이 나라의 수많은 사람을 일으켜 세우고 격려해 비로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한 원동력이 됐다고 말했다.

 

15 이영훈 목사가 915일 서울 여의도순복음교회 대성전 1층 베다니홀에 마련된 조용기 원로목사의 빈소 앞에서 추모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이 목사는 또 우리 사회가 광복과 6·25전쟁, 4·19, 5·16으로 이어지는 혼돈의 시간을 지나며 가난과 불안정의 고난을 견뎌내는 데는 조 목사님의 성령 운동이 깊이 기여했다면서 고난을 딛고 일어나게 하는 성령의 능력은 가난을 극복하며 개인 구원이 사회구원으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전환해줬다고 말했다.

 

이어 예수님께서 소외된 사람들과 같이하셨듯이 여의도순복음교회는 조 목사님과 함께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면서 그들의 삶을 변화시켜왔다면서 세대 간, 지역 간, 남녀 간, 이념 간 그 어느 때보다 심한 갈등을 겪는 우리 사회와 갈등의 황폐한 심령에 다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시는 능력을 간절히 구하고, 희망을 이야기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 목사는 이날부터 18일까지 이어지는 조 목사의 한국교회장에서 집행위원장을 맡았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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