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기사뉴스종합포커스범종교가톨릭개신교불교민족종교해외종교이슬람다문화 사회탐방 기획
전체기사 Trend & View 마음을 비춰보는 포토에세이 종교지도자 칼럼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편집  2021.12.06 [16:10]
守岩 칼럼
매일종교신문 공지 사항
안내데스크
신문사소개
광고안내
저작권문의
구독신청
불편신고
독자투고
제휴안내
개인정보취급방침
청소년보호 보호정책
기사제보
守岩 칼럼
세종대왕과 신미대사, 누가 한글을 만들었나
실록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고 밝히고 있어…일각에선 신미대사 창제설도 제기
기사입력: 2021/10/09 [11:30]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문윤홍 대기자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실록은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했다고 밝히고 있어일각에선 신미대사 창제설도 제기 

 

한글은 누가 만들었는가. 세종대왕(世宗大王)을 비롯해 집현전 학자, 신미대사(信眉大師) 등이 거론된다. 대세는 세종대왕 쪽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에는 전하창제(殿下創制)로 분명히 설명돼 있다. 세종실록(14431230일자)에도 임금이 창제했음을 밝혔다.

 

이달(12)에 임금께서 친히 언문 28자를 창제하였다. 그 글자는 옛 전자(篆字)를 모방하였고, 나누어 초성, 중성, 종성으로 삼아, 이를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룬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우리나라 말에 관한 것을 모두 글로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다. 이를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 이른다.

 

한글 창제는 세종대왕이 했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근래 불교계를 중심으로 신미대사가 결정적 역할을 했다는 형태로 부각시키고 있어 주목된다. 한글은 매우 체계적이고 독창적이어서 창제 주체와 유래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이에 관한 다양한 견해들을 정리해 봤다.

 

한글은 세종대왕이 아들딸과 만들었다 

 

한글은 대한민국 국민이 가장 자랑스러워하는 문화유산이다. 전세계에서 가장 과학적이면서도 배우기 쉬운 문자라는 칭송을 받는다. 무엇보다 세계 문자 중 만든 사람과 반포일, 글자를 만든 원리까지 아는 유일한 문자이다. 2013년 새로 지어져서 국보 자격 논란이 끊이지 않는 숭례문을 대신해 훈민정음을 국보 제1호로 지정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우리 국민은 독보적인 한글을 창제한 세종대왕(1397~1450·재위 1418~1450)을 한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하고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의 한문 해설서다. 한글을 만든 원리와 문자 사용에 대한 설명, 용례를 상세하게 밝히고 있다. 세로 23.3, 가로 16.8크기로, A4지 절반보다 조금 큰 크기이다. 3331책의 목판본이며 1부는 훈민정음 본문, 2부는 해례, 3부는 정인지의 서문을 실었다. 그 끝에 '정통(正統) 11(1446) 음력 9월 상한(上澣·상순)'이라고 적혀 있다. 1446(세종 28)이 한글 반포의 해이다. 한글날은 광복 후 해례본의 기록을 근거로 9월 상순의 마지막 날인 10일로 잡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 109일로 정했다. 한글 반포는 1446년이지만 창제한 것은 이보다 3년 전인 1443년이다. 

▲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해례본. 1943년 인수 당시 앞쪽 2장이 찢겨 나가 세종실록의 서문을 베껴 적어 복원했다. 세종대왕이 "나랏말씀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하는 서문을 직접 썼다    


한글은 매우 체계적이고 독창적이어서 창제 주체와 유래를 놓고 의견이 엇갈린다. 일반적으로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을 만든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록은 세종대왕의 작품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 그 글자가 옛 전자(篆字·중국의 고대 서체)를 모방하고 초성, 중성, 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야 글자를 이루었다. 무릇 문자에 관한 것과 이어(俚語·표준어가 아닌 언어)에 관한 것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비록 간단하고 요약하지만 전환하는 것이 무궁하니 이것을 훈민정음이라고 일렀다-1443(세종 25) 1230일자 실록.“

공부 벌레였던 세종대왕은 학식이 웬만한 학자들보다 높았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혼자 힘으로 이런 위대한 업적을 남길 수 있었을까. 이 때문에 창제 과정에 다른 인물이 도움을 줬을 것이라는 추측이 끊이지 않는다. 대표적인 인물이 조선 초 활동했던 신미대사(1403~1480)이다. 이미 영화에서도 다뤘던 소재이지만 일각에선 신미 대사에게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라는 거창한 존호가 내려진 것으로 미뤄 볼때 훈민정음은 신미 대사의 작품이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신미대사의 속명은 김수성으로, 세종 때 집현전 학사로 활동했고 세조 때 공조판서, 호조판서를 지낸 김수온(1410~1481)의 형이다. 

 

영산 김씨 대동보에 " ‘신미대사가 주지로 있던 복천암 사적기'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로부터 한글을 창제 중인 집현전 학사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술돼 있다"고 적혀 있다. 다른 곳에서는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없다. 다만, 그가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 후 각종 불경(佛經) 언해본을 발간하는 데는 적극적으로 관여한 것으로는 짐작된다.집현전 학사인 신숙주가 요동(遼東)으로 유배돼 온 명나라 학자 황찬을 찾아가 훈민정음에 관한 비결을 전수 받았다는 견해도 거론된다. 그러나 이는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란 견해도 있다. 144517일자 실록도 "집현전 부수찬 신숙주와 성균관 주부 성삼문을 요동에 보내 운서(韻書)를 질문하여 오게 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이 요동에 가서 했던 일이 1487(성종 18) 22일자 실록에 잘 나와 있다. 

 

"세종조에 신숙주 등을 요동에 보내 황찬에게 음과 훈을 물어보게 하여 홍무정운(洪武正韻), 사성통고(四聲通考)등의 책을 만들었다. 조선 사람들이 이에 힘입어 중국말을 대강 알게 되었다." 

 

새로운 문자에 대해 물어본 게 아니라, 한자의 뜻과 음을 자문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신숙주가 요동을 방문한 것은 한글이 탄생하고 2년 뒤인 1445(세종 27)의 일이다.

 

세종대왕은 대신 아들과 딸의 도움을 받았다. 1444(세종 26) 220일자 실록에 의하면,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는 훈민정음 창제의 부당함을 알리면서 "공적 업무라면 세자가 세세한 일을 맡을 수 있지만 언문처럼 급하지도 않은 일에 시간을 허비하면서 걱정하느냐"고 따졌다. 세종대왕은 "내가 나이 늙어서 세자에게 그 일을 맡겼노라"고 했다. 세종이 한글 창제의 상당 부분을 문종(1414~1452·재위 1450~1452)에게 일임했다는 뜻이다. 집현전을 책임졌던 최만리가 이처럼 세종대왕을 공격한 것을 볼 때 과연 집현전 학사들이 훈민정음 창제에 어떻게 참여했는지 의심이 들 정도이다.

 

세종대왕의 둘째 딸 정의공주(1415~1477)도 아버지를 도왔다. 정의공주는 머리가 비상했다. 공주가 시집간 죽산안씨 대동보는 "훈민정음을 창제할 제 변음(變音)과 토착(吐着)을 다 연구하지 못하여 여러 대군에게 풀게 했지만 답을 얻지 못하였다. 공주에게 내려보내니 곧 풀어서 바쳤다. 세종대왕이 크게 칭찬하며 노비 수백 구를 하사하였다"고 서술돼 있다.

  

실록의 정의공주 졸기도 "성품이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역산(曆算)을 해득하여 세종이 사랑하였다"고 썼다. 기원을 놓고서도 발음기관을 본떴다는 발음기관 상형설, 창문 상형설, 고대 중국 문자설, 고대 한국 문자설, 고대 인도의 문자인 범자설, 몽골자설 등 분분하다.

 

"세종대왕 둘째딸 정의공주, 한글 창제 도와

정광 고려대 명예교수, 저서 훈민정음과 파스파 문자에서 주장

 

한글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을 만큼 그 독창성과 우수성을 세계가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해외의 일부 학자들은 한글이 몽골의 '파스파' 문자를 본뜬 것이라는 주장을 펴왔다. 파스파 문자는 티베트의 고승 파스파가 중국 원나라를 건국한 쿠빌라이 칸의 명을 받아 만든 문자이다. 한글과 파스파 문자의 관계를 연구해온 정광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명예교수는 "많은 부분에서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의 원리에 의지했지만 독창적인 면도 적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정 교수는 201211월 출간한 저서 훈민정음과 파스파 문자(역락)에서 파스파 문자가 훈민정음 창제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고찰했다. 정 교수는 훈민정음이 파스파 문자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지만 "자형(字形. 글자의 모양)만은 파스파 문자가 티베트 문자를 모방한 것임에 비해 훈민정음은 발음기관 등을 상형해서 독창적으로 글자를 만들었다"고 분석했다.

  

한글 창제의 뒷이야기도 흥미를 자아낸다. "세종이 우리말이 문자로 (중국과) 상통하지 못하는 것을 걱정해 훈민정음을 제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발음을 바꾸어 토를 다는 것에 대해 아직 연구를 끝내지 못해 여러 대군(大君)을 시켜 (이 문제를) 풀게 했으나 모두 미치지 못하고 공주에게 내려보냈다. 공주가 즉시 이를 해결해 바치니 세종이 크게 칭찬하고 특별히 노비 수백 명을 내려주었다"(죽산안씨 족보인 '죽산안씨대동보' )

 

이 글에 언급된 공주는 죽산안씨 집안에 시집간 세종대왕의 둘째 딸 정의공주다. 정 교수는 "맨 처음 제정된 훈민정음은 한자음의 정리를 위한 문자였다"면서 훈민정음이 "처음에는 파스파 문자처럼 한자음 표음에 사용되다가 정의공주가 이를 이용해 구결의 변음토착(變音吐着)의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면서 고유어 표기에도 이용된다"고 설명했다.

 

또 고구려, 신라, 백제가 한자를 이용해 자국어를 표기하는 방법을 다양하게 고안해 냈다면서 특히 고구려는 한자를 변형해 표음적인 문자를 제정, 자국어를 표기했다고 소개했다.

 

한자를 변형해 새로운 문자를 만드는 방식은 고구려에서 발해로 전승됐으며 거란족이 세운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도 한자를 변형해 문자를 만들었다고 정 교수는 설명했다.

 

정 교수는 특히 한글을 인류 최고의 문자로 칭송하는 국수주의적 연구 태도를 비판하면서 "한글 발명에 대한 비논리적 연구의 범람은 오히려 훈민정음 제정의 참모습을 가리게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며 객관적 연구 태도를 강조했다.

 

"신미대사는 훈민정음 보급·확산 특등공신신미대사 업적 제대로 기리자"

 

거의 모든 사찰에서 발견할 수 있는 풍경이 있다. 기둥마다 새겨 놓은 한문 주련 글이다. 당연히 어설픈 한자 지식으론 번역이 안 되는 글귀들이다. 이런 글귀를 볼 때마다 떠오른 인물이 있다. 바로 세종과 세조를 도와 한글 보급에 매우 큰 공로를 남긴 신미대사다. 쉬운 문자로 중생을 제도하길 간절히 원했던 신미대사의 뜻을 잇는 사찰은 왜 이리도 적을까.

 

부처님이나 세종대왕, 신미대사가 문자에 대한 생각은 한결같았을 것이다. 어려운 문자와 문구로는 불법(佛法)을 가까이할 수 없거나 소통할 수 없는 중생의 번뇌와 고통을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다. 세종대왕과 신미대사의 뜻대로 불교가 훈민정음을 적극적으로 사용했다면 불교는 더욱 번성했을 것이다. 그런데 불교계는 그 반대의 길을 걸었다. 조선시대 불교억압 정책을 폈던 양반 사대부의 문자인 한문 불경을 더 가까이했기 때문이다.

 

그나마 석보상절(釋譜詳節), 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 월인석보(月印釋譜)등 수많은 언해(諺解) 불경, 한글 불경이 있어 한글이 명맥을 유지하고 발전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신미대사를 한글 창제 공로자가 아닌 반포 공로자로만 보는 시각을 마뜩잖게 바라보거나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창제는 1443년이고 반포는 1446년이다, 실제 백성들에게 알려진 것은 석보상절월인천강지곡이라는 불서(佛書)을 통해서이니 이 책이 나온 것은 1449년이다 보니 이런 논란이 생겼다. 신미대사의 한글 공로를 기리는 여러 행사를 기획하고 수행한 한글학자로서 신미스님을 반포 공로자로 기리는 것이 바르다고 본다. 창제 공로자 견해들은 객관적 추론이라기보다 상상에 가깝다. 반포 공로자만으로 기려도 참으로 위대한 업적을 남긴 것이다. 굳이 상상을 통해 논란을 일으키면 오히려 신미대사에게 누가 된다.

 

세종실록을 비롯해 세종신도비, 성삼문의 동자습, 신숙주의 홍무정운역훈, 증보문헌비고 등을 통해 세종대왕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또 세종대왕의 후궁인 신빈(愼嬪)김씨 소생인 담양군 (潭陽君)의 후손에게 내려오는 구전(口傳)도 왕이 친히 만든 것임을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이익의 성호사설(星湖僿說)에는 정인지 성삼문 신숙주 등에게 명하여 찬정(撰定)’이라는 표현이 있고, 지봉 이수광은 ()을 설치하여 만들었으나 글자의 정교함은 대왕의 밝은 슬기라고 적었다. 이는 세종대왕이 직접 한글을 창제한 게 아님을 의미한다. 이러한 것들이 세종대왕을 비롯한 조선 왕실과 집현전 학사들의 가장 주요한 업적으로 알려진 훈민정음 창제에 관한 근거이다. 하지만 불교계에서는 월인석보 근거로 신미대사로 대표되는 불교인들이 훈민정음 창제·보급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을 제기하고 있다. 

 

불교여성개발원 날란다독서모임은 830 훈민정음의 -혜각존자 신미평전 저자 박해진 작가를 초청해 도서특강을 열었다. 특강은 소수자만 오프라인으로 참여하고 대부분 온라인을 통해 참여할  있었다.  작가는 이 특강에서 훈민정음의 창제에 얽힌 여러 가지 이야기를 흥미롭게 풀어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배경에는 대왕의 정치 목표인 ‘백성을 편하고 즐겁게 하자 메시지가 숨어있다고 말했다. 그는 세종의 국정 슬로건이고 철학이며 처음부터 끝까지 32 동안 나라를 이끌고 갔던 바탕에는  편민(便民) 즐거움이 있다편해야 즐겁다. ‘백성이 편해야만 이 세상이 돈다 생각했다고 말했다.

 

 작가는 훈민정음 창제에 대해 양쪽의 바퀴를 온전히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쪽의 바퀴가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8학사이고다른  바퀴의 주요 인물이 혜각존자 신미대사와 그의 동생 김수온이라는 것이다. 훈민정음은 세조  간경도감에서 펴내는 월인석보 비롯한 한글 경전을 보급됐고 중심에 신미대사와 김수온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 8월30일 불교여성개발원 날란다독서모임에서 박해진 작가가 특강을 하고 있다.    

 

그래서 박 작가는 신미대사와 김수온이 훈민정음 보급과 확산의 특등 공신이라고 평가했다. 그는기획자로서의 세종대왕과실무자로서의 신미대사와 동생 김수온그리고 수양대군 4인방이 수양대군의 집에서 TF팀을 만들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훈민정음의 역사는 올바른 바퀴를 가지고 굴러갈  있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만약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지 않았으면 누가 만들었을까. 작가 박해진은 신미대사를 주목한다. 1998년부터 고건축 사진작가로 활동해온 그는 숭례문, 창덕궁 인정전, 경복궁 근정전, 덕수궁 중화전, 수원 화성 팔달문, 여수 진남관 등의 해체 보수, 조사 기록을 전담했다. 2002년 속리산 법주사 대웅보전 해체의 인연으로 혜각존자 신미대사를 접하게 됐다. 이후 대사의 발자취를 찾고, 훈민정음 연구에 몰입했다. 

 

10년 넘는 긴 시간 동안 훈민정음을 연구한 그는 훈민정음의 길-혜각존자 신미평전에서 한글 창제의 주역이 신미대사임을 상정한다. 많은 문헌 조사와 현장답사를 통해 내린 결론이다. 그는 15세기에 간행된 정사를 비롯해 학자의 개인 문집, 훈민정음 연구서와 논문, 현장답사를 통해 확인했다. 검증한 자료를 작은 부분도 빠뜨리지 않고 시간의 흐름에 맞게 생생하게 풀어냈다. 1374개의 주()는 실증적 자료조사의 결과물이다.

  

세종대왕은 신미대사를 절대적으로 신임한 듯하다. 세종대왕은 승하 며칠 전 신미대사를 침전으로 맞아들여 설법을 들었다. 세자(문종)에게 신미대사를 선교종도총섭(禪敎宗都摠攝) 밀전정법(密傳正法) 비지쌍운(悲智雙運) 우국이세(祐國利世) 원융무애(圓融無礙) 혜각존자(慧覺尊者)’에 봉하라는 유훈을 남겼다. 문종은 훈민정음으로 나라를 돕고 세상을 이롭게 했다(祐國利世)’라는 법호를 신미대사에게 내렸다.

 

세종대왕의 신미대사에 대한 신뢰는 작가 박해진에게도 이어진다. 조선 시대에 유교와의 버거운 경쟁을 해온 불교는 잊혀진 것도 많다. 신미대사도 그 한 부분일 수 있다. 박 작가는 흔적이 지워진 신미대사의 발자취를 팩션 형태로 복원했다. 한글을 세종대왕의 기획, 신미대사의 주연으로 보고 역사서를 썼다.

 

연세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상명대에서 훈민정음학으로 박사 학위를, 동국대에서 국어교육학 박사 학위를 받고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발달사(역락)를 쓴 김승옹은 이 책에서 신미대사의 객관적으로 드러난 주요 공적을 두 가지로 보았다.

 

첫째, 불경 언해의 업적이다. 기록에 남아 있는 불경언해서(佛經諺解書)만 하더라도 능엄경(언해), 원각경(언해), 목우자수심결(언해), 선종영가집(언해), 사법어(언해)” 등이 있다. 이는 신미대사가 훈민정음에 매우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석보상절의 편집을 실질적으로 이끌기도 했다.

 

한문 불경은 인도에서 건너온 산스크리트 불경에 기초한 것이고, 한문 불경을 소리 문자로 옮기기 위해서는 한문 불경에서 참고한 산스크리트 불경을 참고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대진언 등 산스크리트와 한문과 함께 적힌 문헌도 있다. 월인석보서문에서 자문해 준 첫 번째 인사로 신미대사를 들었고 뒤이어 서천(西天) 글자(산스크리트문자)로 만든 경전이 높이 쌓여 있어도 보고 싶은 사람이 독송하려면 오히려 어렵게 여겨서 우리나라 글로 번역하여 널리 배포하노니 사람마다 듣고 얻어서 읽고 외워 우러러 존중하기를 앙망하노라로 보아 불경 언해 과정에서 산스크리트어 식견이 있는 스님이 중용됐을 것이다. 물론 신미대사가 실제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는지 공식 기록은 없지만 위와 같은 월인석보서문이 간접 증거가 된다.

 

둘째, 신미대사는 최초로 언문으로 국가기관에 상소문을 올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파격적인 언문 역사의 주인공이다. 예종 1(1469) 627일에 신미대사가 비밀 언문 상소를 올렸다(예종실록). 이는 상소문 내용에 대한 평가를 떠나 조선시대 양반 사대부들의 언문 상소가 전무한 터에 대단히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신미대사는 나라에서 금강경과 법화경을 강의하게 하게 하려는데 나라에서 스님 억제정책을 시행하려 하자, “중으로서 경전을 외는 자는 간혹 있으나, 만약에 외워 강의하게 하면 천 명이나 만 명 중에 겨우 한둘뿐일 것이니, 원컨대 다만 외는 것만으로 시험하게 하소서라고 시험 수준을 낮춰달라고 상소하였다. 관련 법이 시행되기도 전에 이러한 상소가 올라가자 예종이 신미대사를 광평대군 옛집에 연금시켰다는 기사이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보아 신미대사의 훈민정음에 대한 열정과 실력, 이를 바탕으로 세종대왕과 세조를 도와 훈민정음 보급에 매우 큰 역할을 했고, 그에 걸맞은 업적을 남긴 매우 훌륭한 훈민정음 보급 공로자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또다른 책 훈민정음 비밀코드와 신미대사에서도 신미대사를 집중 조명하고 있다. 훈민정음 비밀코드 15가지. 수필 작가이자 현직 고등학교 교장인 저자 최시선은 다빈치코드에 버금가는 '한글코드'에 집중했다.

 

2019년 영화 '나랏말싸미'를 보고 의문이 폭발해 수십 권의 책을 사서 보고, 조선왕조실록과 조선왕조실록 사이트에 들어가 관련 자료들을 내려받아 틈나는 대로 읽었다고 한다. 세종 25(1443)1230일 기사에 딱 한 번 창제 사실이 나온다. 앞뒤가 잘려나간 채 달랑 57자의 한자가 전부이다. 왜 그랬을까? 그 중요한 새로운 문자의 창제 사실을 그렇게 간단하게 알렸을까?

저자는 108자의 '세종어제 훈민정음 서문(世宗御製 訓民正音 序文)' 등에 담긴 한글코드를 심어놓은 인물을 신미대사라고 확신한다. 그는 훈민정음을 공부하면서 놀랄만한 사실을 발견했다. 훈민정음 비밀코드 15가지다. 예를 들어 그 유명한 나랏말싸미 중국에 달아.’로 시작하는 세종어제 훈민정음 서문은 정확히 108자다. 이것은 약과다. 그 외에도 알 수 없는 코드가 널려 있다. 이는 다빈치 코드가 아니라, 한글 코드다.


이 책은 이러한 의문을 가감 없이 나타냈다. 교양서적이지만 어느 정도 합리적 의심으로 다가간 연구 보고서다. 한글 창제의 진실에 대해 화두를 던진다. 특히 신미대사와 관련된 실록 기사를 낱낱이 해부하여 실었다. 이러한 시도는 모름지기 최초일 것이다. 저자는 신미대사의 조선왕조실록 기사를 접하면서 눈물을 흘렸다고 고백한다. 역대 왕들은 신미대사를 왕사급으로 대우하는데, 대소신료들은 승냥이처럼 그를 물어뜯었다. 기사가 온통 비난과 질시로 가득하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 단지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시대였기 때문에? 그렇다면 신미대사는 한낱 승려로서 천민 신분이었는데, 역대 왕들의 존숭을 받으며 어떻게 실록에 당당히 등장할 수 있었을까?

이 책의 내용은 4부로 이루어졌다.

 

1부는 영화 나랏말싸미그 후. 영화를 보고 충격을 받은 후 저자 나름의 의문을 SNS에 올린 글을 다시 풀어썼다. 현장에 직접 가보기도 하고, 지인들과 함께 토론한 내용도 담았다.

 

2부는 훈민정음을 공부하다이다. 이런 의문을 바탕으로 훈민정음 해례본을 공부하고 알게 된 내용을 글로 썼다. 여기서 백미는 단연 훈민정음 비밀코드. 이곳에서 코드를 다 설명하지는 못했다. 비밀코드는 여러 곳에서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 빛나며 나타 난다.

 

3부는 훈민정음에서 신미를 보다이다. 이 글은 연구 논문이다. 공부하다 보니 공모 논문을 썼는데, 이것이 지역 학술지 충북학’ 21집에 실렸다.

 

4부는 조선왕조실록에서 훈민정음과 신미를 보다이다.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 훈민정음 10, 신미대사 69건의 기사(신미대사 이름으로 139번 등장함)를 샅샅이 뒤져서 하나하나 해설을 붙였다. 그리고 가감 없이 상상과 추론을 더했다. 종교적 이유로 오히려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 주장들 속에서 한글 창제에 있어 신미대사의 업적을 제대로 조명하는 활동들이 필요해 보인다.

 

신미대사는 누구인가 

 

신미대사(信眉大師, 1403~1480)는 부친 김훈(金訓)의 장남으로 서울에서 출생했다. 유학자이며 숭불(崇佛)을 주장한 김수온(金守溫)의 형님으로 본명이 수성(守省), 본관은 영산(永山, 지금의 영동)이다.

 

모친의 뱃속에서 나올 적부터 왼손 손바닥에 임금 왕()자가 손금에 있어 부모와 삼촌들은 크나큰 걱정이 아닐 수 없었다. 신라 때부터 조선에 이르는 동안 그런 사람은 나라에 역적이 된다고 하여 국법에 의해 잡아 죽였던 것이기에 죽음을 면하려고 배 안에서 병신 노릇을 하지 않을 수 없어 항상 손가락을 오그리고 주먹을 쥐고 살 수 밖에 없었다.

 

어려서부터 인물이 잘나고 평소에 말을 잘하지 않았으나 한번 입을 열면 청산유수 같았고 눈을 부릅뜨면 안광(眼光)에 눌리지 않는 자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왕이 될 만한 기품이 있었고 관상학 상으로 왕의 기상을 타고났다고 한다. 두뇌가 총명하여 하나를 배우면 열을 알았는데, 글을 읽어 집현전 학사로 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벼슬에 마음이 없고 불가(佛家)에 뜻이 있어 자칭 신미(信眉)’라 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다.

 

사대부 집안 가문에서 태어난 수성은 성균관에서도 촉망받던 인재였다. 하지만 옥구진병마사(沃溝鎭兵馬使)로 있던 아버지 김훈이 조모상을 치르지 않고 임지를 떠났다는 이유로 집현전 학자였던 박팽년 등으로부터 공격을 받고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이 일을 지켜본 수성은 양주 회암사에 주석하고 있던 함허당에게 출가했다. 처음에는 법주사에 출가하여 수미(守眉)와 함께 대장경과 율을 배웠다.

   

세종대왕은 재위 26년에 다섯째 아들 광평대군(廣平大君)을 잃었고, 세종27년에 일곱째 아들 평원대군(平原大君)을 잃었으며 세종 28년에는 소헌왕후(昭憲王后)를 잃는 등 3년에 걸쳐 잇따라 세 자녀를 잃고 인생의 허무함과 무상함을 뉘우쳤다. 그로 인해 병환으로 고통을 당할 적에 신미대사는 동생 김수온과 함께 세종대왕을 도와 내원당을 짓고 법요를 주관했다. 또한 복천사를 중수하고 그곳에 아미타삼존불을 봉안했다.

 

이러한 공로로 문종은 그에게 선교도총섭(禪敎都摠攝)에 임명했다. 문종과 수양대군 등이 세종대왕을 지성으로 시탕(侍湯)하였으나 효험이 없던 바, 신미대사로 하여금 약을 쓰게 하니 완쾌하였다. 그로부터 세종대왕은 신미대사와 가까워졌고 신미대사의 박식(博識)함에 감탄하고 인물됨에 매료되었다.

 

세종대왕은 신미대사에게 혜각존자(慧覺尊者)의 호를 내리려 하였으나 병으로 내리지 못하고, 문종에게 유교를 내리니 문종은 선왕의 뜻을 받들어 왕에 오르자 사호(賜號)하니 혜각존자라 칭했다. 특히 세조와는 수양 시절부터 친분이 두터웠다. 세조는 왕위에 올랐어도 꼭 존자라 불렀고 국사로 모셨으며 세조 7년에 간경도감(刊經都監)을 설치하고 신미대사를 수장으로 해서 효령대군(孝寧大君)과 김수온 등에게 불서를 언해하고 간행함에 따라 100종에 이르렀다.

 

1456(세조 2) 도갑사(道岬寺)를 중수하여 약사여래불상 3()를 조성·봉안했다. 1458년에 국가의 요청으로 해인사(海印寺)의 대장경을 인출할 때 이를 감독했고, 1461년 훈민정음을 널리 보급하기 위하여 간경도감을 설치할 당시 이를 주관했다. 이때 언해(諺解)된 불경이 법화경, 반야심경, 영가집 등이다.

 

1464년 왕이 속리산 복천사를 방문했을 때 사지(斯智), 학열(學悅), 학조(學祖) 등의 승려와 함께 대설법회(大說法會)를 열었다. 그해 상원사(上院寺)로 옮겨가, 왕에게 상원사의 중창을 건의했다.

 

신미대사는 여러 승려의 법어를 번역·해석하여 유통하게 했는데 기화(己和)금강경설의(金剛經說誼)를 교정하여 금강경오가해설의(金剛經五家解說誼)1책을 만들고, 선문영가집(禪門永嘉集)의 여러 본을 모아 교정했으며, ‘증도가(證道歌)’의 주를 모아 책으로 간행했다.

 

신미대사는 속리산 복천사(福泉寺)를 비롯해 오대산 상원사(上院寺), 월정사(月精寺), 낙산사(洛山寺) 대자암 등을 중건하고, 당시 이를 국책으로 처벌함에도 소신껏 불사에 힘썼으니 그 공이 지대했다. 성종 10(1480)에 열반에 들어 복천사 남쪽 200미터 지점에 신미부도(信眉浮屠)를 세웠으니 충청북도문화재 12호이다.

수암(守岩) 문 윤 홍 大記者/칼럼니스트 moon4758@naver.com

 

 

ⓒ 매일종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트위터 미투데이 페이스북 요즘 공감 카카오톡
주간베스트 TOP10
배너
배너
광고
광고
  안내데스크신문사소개광고안내저작권문의구독신청불편신고독자투고제휴안내개인정보취급방침청소년보호 보호정책기사제보보도자료기사검색
범 종교의 진정성을 두루 살펴 보고 이해함으로써 각 종교와 사회의 화평과 상생, 조화를 이룬다.
회장 이옥용 /발행-편집인 신민형 / 편집국장 이광열 / 청소년보호책임자 강은나
우) 04316 서울시 용산구 백범로77길 61-31, 401호 (원효로1가)
대표 전화: 02-703-8267 | 팩스: 02-3211-4419 인터넷 매일종교신문
등록번호:서울 (아)01319(범종교신문 등록 2009년 9월 1일,2013년 6월 15일 제호변경)
기사제보 : minhyung-s@hanmail.net
Copyright ⓒ 2009-2013 매일종교신문.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