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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유교의 이념과 실제, 그리고 한국의 유학
“불교, 도교와 달리 공자의 교설은 종교가 아니므로 유교라는 명칭은 부적절”
기사입력: 2021/10/22 [22:27]  최종편집: ⓒ 매일종교신문
장정태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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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자 탄생지인 취푸시 니산(尼山)진 광활한 면적의 야외에 공자 기념 공원을 조성했고 기단을 포함한 높이 90미터의 중국 최대 규모 공자상이 세워졌다     


유교란 공자가 --삼대의 문화를 계승하여 집대성한 敎學思想

 

유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공자(B,C 551-479)가 하() () () 삼대의 문화를 계승하여 집대성한 교학사상(敎學思想)이다. 유교는 중국 상고시대 인문정신(人文情神)의 총화라 할 수 있다. 유교사상은 동양문화사(東洋文化史)에서 역사적으로 장구하게 그 전통을 이루어 왔다. 공간적으로는 아시아 거의 전역에 걸쳐서 보편적으로 생활되어 예법과 습속의 근간을 이루어 왔다. 특히 중국 전통문화에서 유교가 차지하는 위치라든지 사상적,문화적으로 끼친 영향의 광범하고 심원함 등은 여타 학술 유파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유교 형성 과정을 보면 그 연원이 공자 이전으로 소급된다. 이와 관련하여 중용에서는 공자는 요순을 본받아 연술하시고 문왕(文王)과 무왕(武王)을 본받으시었다라고 하였다. 요순은 B.C. 2000년 무렵의 인물로 추정되며, 문왕과 무왕은 B.C. 1120년 무렵에 성립된 주나라의 성군들이다. 이를 근거로 유교에서는 전통적으로 요순---문왕 무왕-주공-공자-맹자로 도통이 이어진다고 보아왔다. 공자의 위상은 대성(大成)’이란 두 글자로 요약된다. 각급 공자묘(성균관)에서 그 정전의 이름을 대성전이라고 한 것은 이런 연유에서다. 후일에 가서는 유교를 공교(孔敎) 또는 공자교(孔子敎)라고도 불렀다.

 

*학술적 측면에 초점 둘 때 儒學, 교화나 실천에 초점 둘 때는 儒敎 또는 儒道

 

유교와 관련 명칭은 다양하다. 학술적(학문적) 측면에 초점을 둘 때는 유학(儒學)’이라 하고, 교화나 실천에 초점을 둘 때는 유교(儒敎)’ 또는 유도(儒道)’라 한다. 실천 방법의 측면에서는 유술(儒術)’이라 하는데, 유교의 기르침으로 세상을 구제하고 백성들을 편안하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밖에도 학술유파를 말할 때는 유가(儒家)’, 유교의 집단을 지칭할 때는 유림(儒林)’ 또는 유생(儒生)’이라고 한다.

 

는 본래 선비 또는 학자를 지칭하였다. 고대 중국의 수많은 직업 가운데 특히 예법을 담당하던 부류를 일컫는 말이었다. ‘는 사회를 교화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그러기에 매우 신성하고도 중요한 직업으로 인정을 받았다. ‘라는 글자 자체가 자에다 ()’자를 합친 것이다.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의미다. ‘자는 ()’와 통한다. 즉 사람의 도리를 익혀 자기 몸에 젖게 한 뒤, 그런 부드러운 모습으로 남을 가르쳐서, 마치 흰 종이에 물이 스며들 듯이 상대방의 마음속에 덕화가 젖어들게 하는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후일 는 개인이나 가정, 또는 정치 사회의 어느 상황에서도 인간의 도리를 적극 구현해 나가는 인간상으로 이해되었다.

 

유교의 사상과 이념, 주의와 주장 등을 보면 한마디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라 규정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을 수양함(修己)’백성을 잘 다스림(治人)’을 목표로 삼아, 인간 본래의 의미를 찾고, 인간답게 사는 길을 밝혀서, 행복이 넘치는 대동세계(大同世界)의 건설을 궁극적 이상으로 한다. 유교는 ()’ 또는 천명(天命)’ 사상과 같은 종교적 요소가 적지 않지만, 다른 종교에 비하여 비교적 개방적이었고, 시대에 따라서는 도교와 불교의 사상을 섭취하여 유교적으로 종합, 통일하려는 노력을 해 온 것도 사실이다.

 

공자사상의 중심 개념인 ()’은 인간 삶의 최고의 가치이자 만사의 근본이라 할 수 있다. ‘자를 파자(破子)하여 그 뜻을 풀어 보면 ()’() 사람()과의 관계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와 피아(彼我)의 관계를 이상적으로 풀어 갈 수 있는 지극한 도리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인간과 인간은 물론, 인간과 만물과의 관계에서는 근본 도리가 바로 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도리, 인간과 사물 사이의 도리, 인간과 국가 사이의 도리가 모두 다 으로 설명될 수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도리는 삼강(三綱)과 오륜(五倫)으로 요약할 수 있고, 인간과 사물 사이의 도리는 제생이물(濟生利物)의 도리, 즉 사람뿐만 아니라 짐승 한 마리, 풀 한 포기, 기물 하나라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며 함부로 훼손하지 않고 이롭게 육성하는 것이다.

 

*“불교, 도교와 달리 공자의 교설은 종교가 아니므로 유교라는 명칭은 부적절

 

유교란 말은 5,6세기에 불교 및 도교라는 명칭과 관련하여 등장했다. 주서(周書무제기상(武帝紀上)에는 삼교의 서열을 정하여 유교를 첫 번째로 삼았다. 따라서 원래는 석가와 노자의 것이 아니라 주공과 공자에 의한 유()의 가르침을 뜻했다. 그런데 근대에 들어와 ()’라는 말이 기독교라든가 이슬람교(회교) 등에서의 즉 종교의 의미로 쓰이게 되었다. 그러자 불교라든가 도교와 달리 공자의 교설은 종교가 아니므로 유교라는 명칭은 부적절하며 유가 혹은 유학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견해가 생겨났다.

 

유교를 종교로 보느냐 아니냐는 유교 그 자체의 성질이라기보다는 서양근대의 학문체계에서 유교가 어떻게 자리매김 되느냐와 관계가 있다. 유럽적 지()의 틀에서는 유교를 종교로 볼 수 있느냐 아니냐가 예로부터 논의되어 왔으며 아직도 그 결말이 나지 않았다. 가령 사상사적 위상과 관련하여, 공자는 소크라테스와 동류의 철학자였고 붓다,예수,무함마드와 같은 종교가는 아니라고 보는 입장이 한편에 있다. 다른 한편 공자의 교설은 천도에 입각하여 사람들에게 규범을 제시했으므로 종교의식, 종교정신을 본질로 한다는 견해도 있다.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같은 취급을 받을 수 없다는 자각론이 생겼다.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가 거의없다.

 

한국사회 유학의 기원과 유교문화의 확산 

*箕子東來說, 고조선때 연()나라 통한 전래설, 한사군 설치시 도입설

 

한국 유교의 기원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B.C 12세기경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와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원리에 따라 8조 금법(禁法)으로 우리 사회를 교화하였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비록 역사적 사실성에 의문이 있지만, 이 견해는 한국 유교의 전통적 자부심을 확고히 해주었다.

고조선과 인접한 전국시대 연()나라를 통해 한자와 문물이 전래되면서 유교사상도 함께 전래되었다는 견해이다. 중국사료와 문헌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삼국의 발생을 전후하여 한사군(B.C.108-A.D.313)이 설치되면서 중국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유교사상이 도입되었다는 견해이다. 우리 땅에서 나온 유물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는 주장이다.

 

*고구려 소수림왕 2, 유교 경전을 가르치는 대학...麗末에 주자학 들어와

 

삼국초기 고대국가가 성립되면서 유교문화의 수용이 더욱 확산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고구려 소수림왕 2(A.D.372)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대학으로 태학을 세운 사실은 한국 유교사에 있어서 획기적 의미를 갖는다. 지방의 경당(扃堂)에서도 유교경전을 가르쳤으며, 율령(律令)을 펴고 역사를 기록하였다. 백제에서도 상당한 깊이의 유교사상이 수용되어 오경박사를 두고 일본에까지 한자와 유교사상을 전파하고 있다.

▲ 유교적 통치원리를 간직하고 있는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 


A.D. 414년에 세웠다는 광개토왕비의 비문은 유교문화수준을 증명하며, 신라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당시 청년들의 경전연구와 유교정신의 실천자세를 보여준다.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에도 유교적 통치원리를 간직하고 있다.

 

신라의 선덕여왕 9(640)에 당 태종이 유교를 장려하기 위하여 널리 해외의 학생을 모집하였으므로 이때 신라, 고구려, 백제에서는 자제들을 보내어 수학하도록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에 태학이 설립되었고 백제는 학교 시설의 시초 연대가 분명하지 않으나 고이왕(古爾王) 52(285) 왕인이 일본에 논어천자문을 전했으며, 신라에서도 학교 설립은 신문왕(神文王) 2(682)에 이루어졌다.

 

이때의 최고학부인 국자감의 교풍은 대개 경전을 잘 익하고 사기(史記)를 알아서 관리가 되는 일과 문장이나 시를 짓는 일을 주로 하였다. 대체로 이론을 찾는 것보다는 문장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고, 여말(麗末)에 주자학(朱子學)이 들어옴에 따라서 학풍도 점차로 달라졌다. 즉 한(),()의 학풍을 지녔던 때가 고려 이전이라고 한다면 고려 말기부터는 차츰 송학의 풍을 띠게 되었다.

 

이 당시의 유명한 학자로서는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최충(崔沖),안유(安裕)를 비롯해서 이제현(李齊賢),이색(李穡)과 함께 정몽주(鄭夢周),권근(權近),정도전(鄭道傳)을 들 수 있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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