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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식 목사의 지상 설교●보는 예배, 드리는 예배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21/11/08 [16:25]
주형식 목사의 성서이해

주형식 목사의 지상 설교●보는 예배, 드리는 예배

주형식 목사의 성서이해

주형식 목사 | 입력 : 2021/11/08 [16:25]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4:20-24)

 

사람들은 무언가를 위하여, 또 누군가를 만나기 위하여 기다리는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아니하는데 인생을 영원한 행복으로 안내해 줄 가장 귀한 시간, 예배를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흥분되고, 설레고, 간절히 기다리는 시간을 가지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예배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까? 오늘 나를 만나주실 하나님에 대한 기대가 있습니까? 매주의 예배가 마쳐지고 돌아갈 때 여러분은 어떤 마음이십니까?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세리의 심정, 비통한 심정으로 와서, 성전을 떠날 때는 기쁨으로 가슴 벅차 돌아가십니까? 혹시 교회에 올 때는 패잔병같이 왔지만, 예배하고 돌아갈 때는 결의에 찬 용사가 되어 교회를 떠나십니까?

 

한번은 예수님이 사마리아 수가로 가셨습니다. 거기에서 한 여인을 만났습니다. 다섯 명의 남자가 바뀌었지만, 여섯번째 남자도 만족하지 않는 가련한 여인입니다. 이 여인이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육신의 물 뿐 아니라, 영혼의 목마름을 채워줄 물이 필요했습니다. 그 여인에게 예수님은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생명수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때 여인은 이렇게 말합니다.

 

(4:20)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이 여인이 갑자기 왜 뜬금없이 예배 이야기를 꺼냈을까요? 이 여인이 어떤 이유로 예배 문제를 예수께 물어보았을까요? 어떤 신학자는 여인이 이것이 정말 궁금했기 때문이라고 하고, 어떤 신학자는 자신의 부끄러움을 피하기 위해 이야기 주제를 딴 데로 돌린 것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어쨌든 이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예배에 관한 아주 중요한 답변을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 조상들이란 사마리아인,” “이 산이란 그리심 산,” “당신들이란 유대인을 가리킵니다. 당시 남방 유다는 예루살렘에서, 북방 이스라엘은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백성의 절반은 그리심 산에 서고, 절반은 에발 산에 섰습니다(8). 이 때 여호수아가 모세가 명한 축복과 저주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축복의 말씀이 선포될 때 그리심 산에 있던 백성들이 아멘했고, 저주의 말씀이 선포될 때 에발 산에 있던 백성들이 아멘했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라가 남방 유다와 북방 이스라엘로 갈라졌는데, 이후에 예배 장소는 두 나라 사이에 첨예한 대립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북방 이스라엘이 BC 322년 그리심 산에 성전을 세웠고 거기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이 산이 이전에 축복의 산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후 이 성전은 BC 129년에 파괴되었지만 축복의 산이었던 그리심 산은 사마리아인에게 고향과 같은 곳으로 남아있었던 것입니다. 반면 남방 유다는 예루살렘을 결코 양보할 수 없었습니다. 예루살렘 외에 예배할 곳이 또 있다는 것은 그들에게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이런 배경을 알고 계신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4:21)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여인의 질문은 어디에서 예배드려야 하는가?”인데 예수님의 대답은 누구에게 예배드려야하는지, 언제 예배드려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인의 관심은 ‘where’(장소)이었는데, 예수님의 관심은 예배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을 비롯한 사마리아인,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유대인조차도 이 사실은 너무도 당연했기에 간과되고 있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이 사실이 간과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예배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큽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예배를 얼마나 많이 드렸느냐가 아니라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과연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예배인가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를 많이 드린다고 해서 그 예배가 다 하나님께서 가납하시는 예배가 될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받으시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닙니다. 인간 편에서 아무리 예배라 하여 모이고 순서지를 만들고 프로그램을 짜도 하나님께서 가납하시지 않는 예배는 예배가 아니라 수고스러운 행사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배는 크게 나누어 두 가지 예배가 있습니다. 보는 예배와 드리는 예배. 우리는 종종 습관삼아 예배보자’, ‘예배봅시다이렇게 말합니다.

 

(1:11-13)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나의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보는 예배는 어떤 예배입니까? 교회에 와서 참여자가 아닌 평가자로 예배에 임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순서가 매끄러운가 보자’. ‘기도는 잘 하는가 보자’. ‘오늘 찬양이 은혜로운가 보자’. ‘오늘 설교가 제대로 된 설교인가 보자’. 전혀 내가 포함된 예배가 아닙니다. 나는 제삼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런 예배는 주님이 받으실 수 없는 예배입니다. 성경에는 예배를 본다는 표현이 한군데도 나오지 않습니다. 모두 드린다고 표현되어 있습니다.

 

(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드려지는 예배는 모든 순서 속에 자신을 포함하여 드려지는 예배입니다. 공중기도를 하면 다른 사람이 기도를 해도 그 기도에 내 심령을 실어 하나님께 함께 올려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칫 잘못하면 다른 분이 기도를 하면 그 기도를 내가 들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기도를 잘했다, 못했다라는 평가를 하기 쉬운 것입니다. 공중기도는 사람이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마음을 함께 묶어 회중전체의 심령을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입니다. 찬양을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예배의 찬양을 들으며 우리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오늘 노래 잘하는데!’ ‘오늘 연습 많이 했는데!’ ‘저 사람 목소리 참 좋아’, ‘나는 언제 저런 악기 한번 다루어보나.’ 찬양은 예배의 구색을 맞추기 위해 있는 가무 중 하나가 아닙니다. 설교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음악 선물을 하거나, 성도들을 기쁘게 하기 위한 축하 공연은 더더욱 아닙니다. 찬양을 듣는 분은 신자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누군가 예배 시에 특창을 한다면 그 특창은 청중을 대표해서 부르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별한 찬양을 한다면 우리는 그 찬양에 함께 해야 하는 겁니다. 특창을 하는 사람은 신자들을 기쁘게 하는 연예인이 아니라, 신자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더 잘하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르는 찬양을 하나님이 듣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기분이 어떨까요? 하나님은 노래 잘 부르고 못 부르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찬양 심사위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찬양하는 사람의 가슴을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찬양을 할 때에 먼저 이런 기도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 우리의 찬양을 기쁘게 받아 주십시오. 오늘 부르는 그 가사처럼 우리가 그렇게 좋으신 하나님을 알기 원합니다. 이 찬양을 만든 사람이 이 찬양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던 그 이유를 우리도 알기 원합니다.” 설교 시에는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라 그 기별에 아멘으로 순간순간 응답하여 그 마음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멘이 중요한 것입니다. 내 중심을 주님께 드리는 표현입니다.

 

예배가 연극이나 음악 콘서트와 다른 것 중 하나는, 예배는 관람자를 위한 공연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많은 신자들은 관람자의 자세로 예배에 참여합니다. 예배가 어떻게 진행되어 가는지 관람합니다. 찬양대가 찬양을 어떻게 하는지 보고, ‘목사가 설교를 어떻게 하는가?’, ‘잘하는가? 못하는가?’, ‘이건 뭐가 맞았나? 틀렸나?’ 관람을 합니다. 마치 연극을 보듯이, 경기장에서 스포츠를 관람하듯이. 그리고 그 순서들을 확인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보는 예배입니까? 드리는 예배입니까? 어쩌면 이제껏 우리의 예배가 관망된 예배였기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바쳐지지 못하고, 우리 마음도 하나님의 영역에 동참하지 못했기 때문에 감동이 적은 것은 아닌지 다시 한번 스스로를 돌아보게 됩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가장 먼저 개혁할 일이 있다면 예배에 대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예배가 개혁되지 못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거의 대부분을 잃어버린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예배를 리모델링해야 합니다. 우리의 집을 리모델링하려고 돈을 투자하고 정력을 투자하기 이전에 우리 삶의 전반을 차지하고 있는 예배를 리모델링해야 할 것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성도들이 준비해야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은 주고받는 관계입니다. 따라서 예배에는 하나님과 만나서 주고받는 것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준비해야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드리러 올 때 반드시 가지고 오기를 바라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하나님이 예배하는 자가 가지고 오기를 바라는 것은 바로 상한 마음입니다.

 

(34:18)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

 

사람들이 예배드리러 올 때 세상에서 지치고 피곤하여 옵니다. 실패하고 연약한 상태로 옵니다. “상한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한 마디로 상한 마음은 배고픈 마음입니다. 그래서 상한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할 때 세상을 이길 수 있음을 믿는 마음입니다. 상한 마음은 예배를 통해 진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찾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예배자가 진심으로 하나님을 찾을 때 하나님이 만나주신다는 것을 믿는 마음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배고픈 마음입니까? 여러분의 마음이 오늘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바로 이런 마음이 전해져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 이러한 것을 주고받는 관계가 바로 예배입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우리를 그리워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숨결을 느끼고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가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떠날 때, 이렇게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 저는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까?’ 우리는 하나님께 보다 잘 준비된 예배를 드려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으십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자를 찾아 먼지나는 길을 걸어오셨습니다. 이 여인을 왜 찾으셨을까요? 예수님은 상처받은 자를 찾으십니다. 가난하고 굶주린 자도 찾으십니다. 회개하는 자도 찾으십니다. 하나님 없이 제대로 살지 못하는 사람도 찾으십니다. 왜 찾으십니까? 이 모든 사람을 찾으시는 이유는 그들을 예배하는 백성으로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예배할 때 진정으로 행복해집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통해 사랑의 하나님을 만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위해 우리에게 경배를 요구하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아십니다. 우리가 예배할 때 가장 행복하고 거룩하게 될 것을 아시는 겁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림으로 가장 큰 행복과 거룩을 맛보게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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