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한반도에 천리교 전래와 전개③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2/02/06 [12:44]
한국 천리교 역사와 포교활동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한반도에 천리교 전래와 전개③

한국 천리교 역사와 포교활동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2/02/06 [12:44]

<연재순서>

1. 미군정청에 의해 왜곡된 천리교, 70여년 지난 현재도 한국내 포교 어려움

2 메이지 정부 탄압을 받으면서 체계적으로 변화한 천리교 교리

3. 한국 천리교 역사와 포교활동

 

천리교가 한국에 최초로 전래된 것은 1876년 조일수호조규에 따른 부산의 개항이라는 조건으로 가능해졌다. 이 조약은 조선이 외국과 맺은 최초의 근대적 조약이자 일본 측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불평등 조약이었다. 일본 정부는 대마도(對馬) 주민에 한정되어 이루어지고 있던 조선으로의 도항 허가를 일본인 모두에게 가능한 것으로 확대시켰다. 1892년에서 1893년 무렵, 일본인 사토미 치타로(里見治太郎)가 부산에 와서 천리교 포교활동을 시작했다.

 

이들은 주요 장소에서 천리교인이 박자목(拍子木)이라는 짧은 나무 막대기 두 개를 서로 맞부딪쳐 딱딱 소리를 내거나 손춤을 추면서 포교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사토미 치타로는 일본 고치켄(高知県 다카오카군(高岡郡우사미마치(宇佐町)에 사는 신자였다. 그는 조선에서 포교를 시작하면서 천리교가 이 나라에서 크게 번창할 것이라 보고 고향인 고치켄 다카오카군 우사미마치아라이죠(宇佐町新町)에 사는 매부 츠노 수에키치(津野末吉)에게 편지를 보내, 부산에 와서 같이 포교활동을 해 줄 포교사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했다. 189310, 고치분교회(高知分敎會)에서는 사토미 치타로의 양자인 사토미 한지로(里見半治郎)를 조선으로 보냈다.

 

천리교 교회는 교회본부와 일반교회로 나누어진다. 각지의 일반교회는 모두 교회본부에 속하지만 교회본부에 직접 속하는 직속교회와 직속교회에 속하는 부속교회가 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종적인 계통으로 운영되고 있다. 그 때 이미 부산에 사는 일본인들 중 일부와 수십 명의 조선인들이 천리교의 신자였다. 18944월 사토미 부자는 앞으로의 포교활동을 위해서는 많은 준비가 필요하다고 여겨, 일단 일본으로 돌아가 고지분교회장을 만나 당시 부산의 상황을 알리고 한국 내 천리교 부흥문제를 상의하였다. 그리고 18953월에 사토미 한지로는 같은 고지분교회 신자 아오키 시게루(青木茂)와 함께 다시 부산으로 건너갔다. 반년도 채 못 되어서 조선인 200여 명이 천리교 신자가 되었다. 사토미 부자는 그 해 9월에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는데, 이는 조선 내 포교에 있어서는 조선어 습득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일본에서 부산 일본영사관 통역사인 무라카미 유기치(村上唯吉)와 조선인 조희자를 조선어 선생으로 데리고 갔다. 고지분교회장은 앞으로의 조선 포교의 중요성을 염두에 두고서, 조선포교사 양성을 위해 조선어숙을 설치, 청년들을 모아 조선어를 가르쳤다. 1902년 야마구치켄(山口県 무야교회) 소속의 나카무라 준페이(中村順平)가 부산으로 건너와 일본인의 집에서 포교활동을 시작하다가 그만두게 되자, 같은 교회 출신자인 코미도 요키치(香美豊吉), 야마모토로 쿠사부로(山本六三郎), 오오미네 니사부로(大峯仁三郎)가 포교활동을 지속해 나갔다.

 

1906년 무야분교회撫養分教会는 김해에 농장을 열어 약 20여 가구의 일본 이주민 신자들과 농경생활을 하면서, 조선인들과 문화적으로 교류했고, 이를 통해 많은 조선인 신자들을 얻었다. 그리고 카가와켄(香川県)으로부터 경성으로 건너와 포교활동을 시작한 카타야마 요시조(片山好造)와 그 누나인 오오쿠마 코마(大熊こま)1903년 경성을 중심으로 많은 교회를 열었다. 이들은 경성포교소를 설립하고, 경성선교소를 거쳐 한국에서 최초로 경성대교회를 설립한다.

 

아직 조선에 일본거류민이 많이 없었던 시기임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 포교가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당시에 천리교의 해외포교가 유난히 활발하게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천리교의 초기 한국 포교는 교단 교회본부에서 계획적으로 진행된 사업이 아니라 열정적인 한 신자나 각지에 있는 교회의 독자적인 방침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당시 한반도 내 일본인 거류민은 1900년에는 약 15천 명, 1905년에 는 약 42천 명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이주 일본인들은 거류지에서 독자적인 일본인 거리를 형성했다. 당시의 천리교 포교자들이 언어와 생활습관이 다른 객지에서 포교활동을 해 나간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작업이었을 것이라 생각되나 일본 각지에서 일본인이 한반도에 들어와 듯이 천리교 포교자들도 일본 내 각지의 교회로부터 한반도로 건너왔다.

 

을사조약 이후 1905년 일본은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두면서 한반도 내에서 독점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었고, 이러한 흐름과 함께 한반도 내 일본 거류민도 증가하게 되었다. 같은 해, 을사보호조약이 맺어지기 전, 190410월 한국에서 최초의 천리교 포교소가 일본 영사의 인가를 받아 부산에 설립되었다. 천리교는 이때부터 비로소 한국에서 정식으로 인가를 받은 포교의 거점을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한일합방이후 1906121일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통감부가 설치되고 종교에 관한 통감부령이 내려졌다.

 

이는 일본에서 한국으로 이주한 일본인 포교자를 대상으로 하는 국교의 선포에 관한 규칙이었다. 이 령의 내용은 신도, 불교, 기타 종교에 관한 교단과 포교에 종사하는 관리자는 한국에서 관리자를 선정하여 포교방법, 포교자의 관리방법, 교단의 관리와 유지운영방법 등을 명기하여 이력서를 제출하여 인가를받아야 한국 내에서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한국 내 종교를 통제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던 동시에, 일본 식민지정책에 일본 종교를 이용하기 위한 목적도 가지고 있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조선의 고유신앙과 전래의 풍속, 관습은 미신으로 규정하였으며 이 규장은 해방이후 지금까지 한국사회를 지배하고있는 대표적인 종교정책이 되었다.

 

1908 9월 일본 천리교교회 본부에서는 한국 포교 관리자로 마츠무라 기치따로(松村吉太郎)를 임명하고, 통감부의 인가를 받았다. 그 이전까지는 산발적으로 활동했던 한국 내 포교사들은, 이 사건 이후 일률적으로 관리될 수 있었다. 1909년 부산 선교소에서는 일한동심회라는 일본인과 한국인 양자 간의 친목을 다지는 단체를 결성하여 포교에 많은 긍정적 효과를 양산했다.

 

일한동심회의 취지는 한·일 국민의 친목을 도모하고, 경조사에 있어서 상호적으로 도움을 나누자는 것이었다. 특히 천리교는 당시 인격적으로 합당한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었던 조선 상민들의 장례식을 절차에 맞게 엄숙하게 치루어 주었다. 당시 많은 조선인들은 이러한 천리교의 태도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이와같은 열정은 일본계 다른 종교보다도 두드러졌다. 그런 가운데 191931일 한반도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은 우리민족에게는 독립을 열망하는 큰 줄기였다면 천리교를 비롯 일본계 종교들은 선교가 위축되었다. 다른 한편으로 19153월 공포한 포교규칙이 19204월에 개정되면서 지금까지 교회설치에 허가를 받도록한 것을 신고제로 바꾸게 된다. ‘천리교조선교의강습소1916년 개설되었지만 정식으로 시행되지 못하다가 19191010일 정식개설되었다. 19203월에 제1기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리고 강습소 본래 취지대로 192910월부터는 조선인만을 위한 강습이 시작되었다. 19211026일에는 한국인으로 최초로 마산에 미선 선교소를 설립, 포교는 그 보다 2년전부터 했지만 교회본부의 윤허를 받아 정식으로 개설한 것이 이때다.

▲ 대한천리교 본부    

  

한국적 천리교 추구 대한천리교와 일본식 천리교 한국천리교연합회두 파 형성

  

천리교가 일제시대에 일본계 종교 중에서는 천리교가 조선에서 가장 왕성했던 만큼, 광복 이후에는 서민의 혐오도 거셌다. 천리교에 대한 편견은 한국인들뿐만이 아니라 당시 미군정 당국자들도 매우 안좋게 인식되었다. 1945815일 해방은 되었지만 같은해 911일부터 3년간 미군정청의 지배를 받게된다. 이 기간 반공주의, 친미주의, 기독교주의를 근간으로 하는 국가 건설에 주력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초대 대통령 이승만)는 전체 인구의 2% 정도의 개신교 신도가 초대내각을 비롯 주요 요직을 독식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동안 친일파들이 장악하고 있던 종교권력을 민족주의자들이 차지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일본계 종교재산은 그에 상응하는 조선의 기관으로 귀속하기로 했다. 즉 일본불교 재산은 조선불교, 일본 기독교 재산은 기독교 재산으로 귀속했는데 여기에 문제가 발생했다. 일본에서 발생한 민족종교적 성향을 가진 종교에 대한 처리문제다.

 

처음부터 이 문제에 관여한 미국인 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는 기독교계 조합교회뿐만 아니라 일본 신사 그리고 교파신도계 종교재산들도 개신교에 유리하도록 작용했다. 천주교나 민족종교인 천도교, 대종교 그리고 유교는 거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불교계는 19467월과 8월에 미군정청 장관에게 사찰령 철폐를 요구하였다. 총무원과 남조선 과도입법위원의 의원 25명의 동의를 받아 사찰령, 사찰령 시행규칙, 포교규칙 등 4개 법령을 폐지할 것을 입법위원회에 정식으로 제출했다. 이 법을 미군정청은 반대했다. 막대한 적산사찰 재산이 불교계로 귀속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한 의도였다.

▲ 천리교 적산 가옥에 세워진 서울 성남교회   

  

적산재산이라는 이유로 조선 천리교 소유건물 등 거의 모든 천리교의 재산을 압류하고, 그중 40여 개 부동산을 기독교계에 불하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 그리고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계에 적극적으로 특혜를 주었다. 오늘날 영락교회 자리도 원래는 천리교 소유 부동산이었으나 적산재산 조치로 인해서 불하받은 것이다.

 

일부 천리교 신자들이 이런 조치에 항의하였으나, ‘민족반역자라고 하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미군정이 조선 천리교 해체 명령을 내리자, 천리교인들은 조선의 천리교란 뜻에서 조천교(朝天敎)라고 이름을 바꿔 명맥을 유지하였고, 미군정은 국가 신도적인 요소를 없앤다는 조건 아래 겨우 승인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미군정청이 스스로 내린 결정을 철회하고 천리교의 막대한 재산 대부분을 한국 개신교로 넘기는 조치를 착수했다. 일반인 사이에서도 천리교인들을 친일종교라고 생각한 만큼 이런 조치에는 아무 불만이 없었다. 천리교단의 자료를 보면 이 시기에 많은 신자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 천리교를 버렸다고 설명한다.

 

미군정청(종교 담당자 미첼 중위)의 천리교 해산 근거로 천리교는 군국주의 사상을 갖고 있다. 천리교는 일본에서 옛날부터 내려온 신도로서 국가신도에 속한 종교다. 천리교는 천황과 황실의 선조를 제신으로 삼고 있다.

 

이와중에 19475월에 김기수를 발기인으로 한 비공인 천리교연합회가 서울에서 결성, 19481014일 이순자 원장(일명 이영원, 이춘자라는 기록도 있음), 부원장 김태봉(초대 대구교회장)으로 하는 천경수양원이 공인단체로 서울 소격동에 설립되었다. 고문으로 참여한 사람으로 명제서(초대 심계원장) 김병로(초대 대법원장) 야당 정치치도자 조병옥 들이 있다. 이후 천경원은 대한천리교연합회로 재 탄생하게 된다.

 

천경수양원19521214대한천리교연합회로 명칭을 변경하고 회장에 김진조, 명예회장에 김선장이 맡게 된다. 이후 김기수 주도로 천리교연합회와 통합하여 19541014대한천리교본원으로 출범한다. 최초로 통합된 모체였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김태봉, 김순영(진해교회 초대)등이 대한천리교 본원을 이탈하여 195543일에 진해 여좌동에서 대한천리교 교리실천회를 발족한다. 김기수, 김선장, 김점이 등이 이탈하여 같은 해 414대한천리교연합회를 결성한다. 이후 대한천리교본원1956414대한천리교총본부로 개칭 다시 19594대한천리교본부’ 19611211대한천리교 총본부로 다시 개칭한다.

 

19631914재단법인 대한천리교단설립인가(이사장 김진조, 서울시 성동구 신당동 107-1번지 문교부 허가 제111) ‘대한천리교단을 이탈하여 1970414일 김기수 중심으로 대한천리교교회 연합회’(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1121-3)가 재창설, 1971218일 김태봉,김순염,조문봉이 이탈하여 진해에서 대한천리교실천회(회장 조문봉)’가 설립된다. 19791122일 최고협의회와 중앙사무국이 폐쇄되고 대한천리교본부로 다시 통합된다.

 

한국천리교는 교조의 근본정신에 따른 한국적 천리교를 만들려는 대한천리교와 일본식 천리교인 한국천리교연합회의 두 파가 형성되어 있다.

 

일본의 천리교는 명치 이후 신도 천리교가 되어 신앙상징이 교조 당대의 감로대가 아니라 일본 신도의 상징물인 쇠거울(神鏡) 야따노가마미(八經)를 예배의 목표물로 삼고 히노마루를 그린 빨간 부채를 들고 하오리하까마를 입고 천조대신의 부모신을 모시고 있다. 이같은 신앙은 그간 한국에서도 그대로 따르고 있었다. 1985년 신앙상징물을 신경 대신 감로대로 바꾸고 기타 신도적 요소를 모두 제거해버렸다. 이유는 일본의 민족신앙이 아닌 세계종교로서의 천리교를 믿고 교조의 근본정신에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반발하여 1987년 일본식 천리교를 고집하면서 마산 진해 지역의 천리교인들이 독립하여 진해시 여좌동 한국천리교연합를 조직 독립해 나갔다. 현재 교세는 두 파를 합하여 8개 교구 5백여 교회와 1천여의 포교소가 있으며 신도수는 약 45만명에 달한다. 1960년대를 시작으로 천리교는 해방이전 교세를 능가하는 발전을 이루게 된다. 새로운 천리교를 꿈꾸며 다양한 천리교인들의 모임체를 모색하기 시작한다. 그 흐름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천리교 교회본부와 연결하여 조선포교관리소 같은 것을 살려내자는 흐름 둘째 자주,자립하는 독립교단을 만들자는 흐름 셋째 개통이 나누어진 개개 교회들을 조합처럼 모아 연합회를 구성하자는 흐름이다.

 

최재한은 192716세로 일본에 와 한센씨병으로 고생한 끝에 1947년 천리교에 입신했다. 그는 한동안 큐슈(九州 복부 및 히로시마(廣島)의 재일교포 지역에서 포교한 후. 1955년 한국에 밀항. 눈부신 포교성과를 올렸다. 이 최재한은 1988년까지 원남성 교회에서 17개소의 교회가 설립될 정도였다. 최재한 이후, 재일 한국인들에 의한 모국방문과 포교가 줄을 이었다. 현재 한국의 천리교 신자 가운데. 이처럼 재일교포의 귀국에 의해 설립된 교회 계통에 속한 신자들이, 패전 이전부터 존속했던 교회의 계통에 속한 신자들보다도 수적으로 더 많다고 한다. 패전 후 한국 천리교의 교세확대는 최재한이 설립한 원남성교회의 발전과 보조를 맞추어, 1960년대 및 70년대에 실현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국내 천리교 가운데 대한 천리교의 성직자(교직자)양성기관인 대한천리교 수강원 천리교 한국교단의 유일한 용재(교역자) 양성기관이다. 서울 용산구 창파동을 비롯하여 부산시 영도구 동삼동, 대구, 진해, 광주. 제주 등지에 수강원이 있으며 3개월 간에 천리교의 교리와 기본적인 신앙체계를 확립하여 교역자를 양성한다.

 

수강원에서 청강할 수 있는 자격은 남녀 만 17세 이상의 신자로서 학력 불문하고 합숙생활을 원칙으로 하는대 3개월 동안에 천리교 교의원전. 교전. 교조전 신낙가해설, 종교사 예전. 신무 등의 교과과목을 이수한다. 수업방법으로 오전에는 주로 강당에서 수업을 하고 오후에는 개인적인 신앙정진에 전념한다.

 

수강생들은 교육을 통해 재전악기 연습도 하고 특히 신상(질병)사정(고민)등으로 고난과 역경에 처해 있는 불우한 사람들의 갱생의 기쁨을 맛보게 하며 나아가 가정과 사회의 즐거움을 베푸는 사람으로의 인격수양을 한다.

 

수강원을 마친후에는 교역자(천리교에서는 용재라 함)가 될수 있으며 현재 국내에 산재해 있는 1천여개의 천리교 포교소의 포교사로 활동하게 된다. 현재까지 대한천리교 수강원 수료생은 3만여명을 헤아린다.

 

천리교가 기구조직은 교통을 정점으로 하여 교의(敎議)있고 그 아래 교정집행기구로서 교무원을 두고 있으며 교무원 산하에 8개 교구가 직할시. 도 단위로 있다.

 

교역자 양성기관으로 수강원이 있고 그외 교정기관으로 갑사위원회. 심사위원회. 번역위원회. 징계위원회가 있으며 유지재단으로 재단법인 대한천리교로 설립 인가를 받아 복지후생을 맡고 있다.

 

특기 할것은 천리교의 봉사활동을 히노끼싱’(陽氣生活)이라고 하는대 그뜻은 나날이 살아가고 있은데 대한 감사와 즐거움에서 어버이신님께 바치는 일체의 인간적 행위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어버이신님이 즐겨하는 것과 바라는 것을 스스로 행하는 행위가 어버이신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는 것이며 그래서 즐거운 생활 양기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그래서 천리교 신도들은 매달 거리에 나가서 청소도 하고 교통정리. 유원지에서의 어린의 보호활동등 봉사활동을 정기적으로 실시한다. 교주격인 교통은 4년만에 한번씩 최고의 결심의 기구인 교의회에서 선출되며 교단을 대표하는 직위로서 초대 교통은 김진조. 2대 교통온 최재한, 그리고 최명진이 3~4대 교통직을 역임했고 1983813일자로 제5대 교통으로 취임한 김기수 는 1904년 재주도 출신으로 1920년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한 후 상경하여 1925 서울법정학교 법학과를 수료하고 1933년에 천리교에 입교하여 천리교 교의강습소 재33기 수료를 했고 해방 후 성동구에서 천리교 혜성교회를 설립하였다. 1946년 대한 천리교단의 모체가 되는 천리수강원 결성에 참여하였고 1954년 대한천리교 교정부장. 1955년 대한천리교 수강원장이 되었으며 1983813일에 재단 이사장 및 교통(敎統)으로 피선되어 1984114일에 취임식을 가졌다. 대한천리교 조수현 교통은 1986년 한국천리교연합회로 갈라져 수차 재산 문재를 둘러싼 갈등을 1993211일 교단본부(서울시 용산구 청파동 소재)을 전격 접수하면서 업무개시와 동시에일본본부 간섭 배재로 자주교단 운영천리신앙의 한국 토착화’,‘교단의 민주체제 전환등을 내세우고 일본과의 종속적관계 단절을 주장하고 있다.

 

일본 천리교와 분명하게 선을 그은 대한천리교와 달리, 천리교 한국교단은 일본 천리교와의 관계에서 매우 어중간한 입장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 교단에서도 일본 천리교에 예속되었다는 비판을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천리교 본부는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망월사역 근처에, 천리교 한국교단의 본부 격인 한국 전도청은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에 있다.

 

두 교단을 합쳐 한국 천리교인이 대략 30만 명 남짓이라고 설명하는 자료도 있긴 한데 믿기는 어렵다. 문화공보부에서 1974년에 발행한 종교법인 단체 일람표에 따르면, 당시 대한천리교(교단 분열 이전)의 신자 수가 368천 명이라고 하는데 1974년 당시 한국 총 인구수 3470만 명 대비 1%에 불과하다. 나이든 천리교인들이 '신도 수가 그때와 비교하면 바닥을 쳤다.'고 이야기하므로, 신자 수가 그때보다 줄면 줄었지 절대로 늘진 않았다.

 

신뢰할 만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2000년대에 발표된 몇몇 논문들에서는 2004년을 기준으로 대한천리교 3만 명, 천리교 한국교단 155천 명이라고 서술한다. 2004년 총인구수 4810만 명 대비 0.38%라는 수치다.

 

그런데 2005년에 통계청이 인구주택총조사를 하면서 종교인구를 집계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불교, 개신교 등 8개 종교를 제외한 기타 종교인 수가 163085명이다. 천리교는 당연히 기타 종교로 들어가는데, 당연히 천리교인이 아무리 많아도 16만 명을 넘을 수 없다. 대한천리교/천리교 한국교단이 이야기하는 신자 수에 거품이 심함을 알 수 있다. 통계에서 별도로 항목을 잡지 않았을 정도로 교세가 미약함을 감안하면, 3만 명 이하일 가능성도 상당히 있다.

 

천리교인들 사이에서는 실제 신자 수가 4천 명쯤이 아니냐는 비관적인 추측도 나오는 듯하다. 게다가 젊은 신자들이 안 들어오기 때문에 신자들 중에서는 60을 넘어 70대인 사람이 흔하다고 한다.

▲ 서울 성남교회 예수상 아래에 태극문양(사진 오른쪽 )이 조각되어 있다.    

  

민간신앙과 습합 현상-무속이 천리교의 의례 방식과 유사 

 

종교라는 말은 으뜸되는 가르침이라는 말이다. (--머리)이라는 글자의 뜻은 가르침 가운데서도 머리가 되는이라는 말이고, 교는 모르는 사람에게 가르쳐 준다는 뜻이다. 종교라는 단어가 처음 쓰인 것은 서기 600년 후의 일로, 중국의 천태지의스님이 󰡔법화경󰡕을 해석하면서 그의 저서 󰡔법화현의󰡕에서 이니 니 하는 말을 쓴 것에서 유래한다. ‘은 부처님 말씀 가운데 어떤 특정된 교설을 지목해서 말할 때 쓰였고, ‘는 그 뜻의 크고 작음이나 힘과 내실의 정도를 밝히는 의미로 쓰였다. 즉 종교는 부처님의 어떤 특정한 교설을 언어나 문자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그는 지의스님의 󰡔법화경󰡕을 가장 훌륭한 부처님의 말씀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법화경󰡕을 부처님 말씀 중에서 으뜸 되는 가르침이라고 본 것이다. 이후 종교라는 단어는 가장 근원적인 가르침을 제시하는 의미를 가지고 다른 유사한 유교·도교 등에서도 확대 적용하여 쓰였다. 그렇기에 훌륭한 성인들이 교설한 가르침을 모두 종교라고 한다.

 

사전적 의미로 습합이란 서로 다른 교의ㆍ주의를 절충시켜 조화시키는 것다시 말해 문화융합의 방식을 의미한다. 이에 대해 김용표는󰡒습합이란 관습적으로 자연스럽게 결합된다는 뜻󰡓으로 보았다. 융합이란 본래 물질의 화학작용을 가리키는 말이다.

 

사전적 의미로도 녹여서 하나로 합치는 것이나 융해하고 화합하는 것을 의미하고, 영어로 융합을 의미하는 ‘fusion’도 라틴어의 ‘fundo(융해하다)’‘fusus(융해)’에서 유래하고 있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역사상의 모든 종교는 기존 문화의 혼합을 통해 형성된다고 말할 때, 역사 현상으로서의 혼합현상이 적용되는 것이다. 어떠한 종교가 수용되었을 때, 이전에 있던 요소가 그대로 유지되면서 새 종교 안에서 새로운 요소와 결합하는 것이다. 결국 순수한 종교나 순수한 종교 사상은 있을 수 없기 때문에 한 종교는 불가피하게 여러 종교 전통의 사상적 유산을 동시에 수용하게 된다.

 

일반적으로 종교적 습합(syncretism)두 가지 이상의 종교적 요소(혹은 전통)의 상호접촉에 의하여 생기는 현상, 형태로 규정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 현상이나 형태에 대해서는 그것을 보는 시각이나 보이는 상황에 따라서 다르다. 일본은 신크레티즘의 현상을 혼성교, 혼효종교, 습합종교, 중층신앙, 융합종교, 종교적 중층화, 종교적 병렬화 과정 등으로 다양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개념과 내용 파악의 어려움을 보이는 것이라 하겠다. 영어권에서도 syncretism 이외에 blending, parallelism, coalition, co-existence 등의 용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종교의 습합은 사실 종교 전통 사이의 교섭 관계를 의미한다. 특히 종교사상의 습합 내지 교섭 관계는 무궤도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원칙에 입각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기복, 구도, 개벽의 삼대 신념 유형은 어느 종교 전통(특히 고전 종교)에나 다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느 개인이나 특정 집단이 어떤 특정한 신념 유형을 유지하게 될 때 그 유형에 입각해서 여러 종교 전통의 사상 내용들을 수용하게 되고, 이렇게 해서 새로운 습합사상 내지, 습합종교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러므로 이 3대 신념 유형간의 삼각관계가 습합현상의 규범을 이루고 있다. 습합이란 두 문화가 절충하여 서로 변모하고 때로는 제3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문화변용을 말한다.

 

습합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한 것은 󰡔예기󰡕이다. 천자가 낙사에게 명하여 예낙을 습합하게 한다”(內命藥師習合禮樂) 하여 습합을 調節의 의미로 썼으다. 이런 습합현상은 종교사의 발전과정에서 흔히 발견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천리교가 한국인에게 받아들여진 또 다른 요인으로 우리는 한국 고유의 토속 신앙인 무속이 천리교의 의례 방식과 매우 유사하다는 사실을 제시해 볼 수 있다. 한국에서는 굿이라는 의례를 집행할 수 있는 사람을 무당이라고 하는데, 무당은 과학적으로 치유가 불가능한 병을 영적인 힘을 통해 치유하는 이들이다. 환자들의 병 치유를 위주로 천리교 포교를 해 나갔던 포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는 마치 무당과 같은 존재로 인식되어졌다. 천리교 최초의 조선인 강사 최정현은 교의강습소에서 발행하는 나오이가케 4천리교에 행하는 여러 의식이나 태도들이 조선의 무당과 흡사하다. 조선인 신도는 구습의 부녀자들이 대부분이고 남자나 신식여성들은 거의 없다. 천리교의 교의나 의식은 일본문화가 짙게배여 있다. 세계인류을 구제한다면서 특정한 민족문화로 돌아가는 듯하여 안타깝다.’ 천리교가 한국의 무속신앙과 닮았다 하여 일반 저층 민중에게 파고드는 장점을 밝히면서도 남자와 신여성들이 접근하기에는 미흡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천리교가 조선인에게 수용될 수 있었던 것은 천리교의 의식과 질병 기도의 방식이 한국의 무속신앙의 그것과 매우 유사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집안의 우환이 있어 일시적으로 무당에게 의지하여 기도를 하지만 문제가 해결되면 그들과 관계가 소원해진다. 현대 한국사회에서 만신과 신자의 관계와 유사하다.

 

한국 무속신앙과 천리교를 비교한 선행연구가 아직 없지만, 이는 매우 연구해볼만한 가치가 있는 연구주제라 생각한다.

 

무속신앙은 고대부터 한국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토속종교이다. 무속신앙에서는 의례를 집행하는 자를 무당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무당의 기능 중 하나는 병을 치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무당의 조건은 천리교의 창시자이자 교조인 나카야마 미키가 접신경험을 통해 종교를 설립하게 된 것과 매우 유사하다. 무속신앙에서는 접신을 신병[혹은 무병]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빙의현상의 하나로 미키가 경험한 것과 매우 유사한 것이다. 교조 미키는 이러한 경험을 바탕으로 병치유를 통해 선교활동을 했다는 점에서도 한국의 무속신앙과 매우 유사하다. 조선 사람들은 천리교 신자를 왜 무당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러한 천리교의 의례와 한국 무속신앙의 유사성을 생각해 볼 때, 천리교가 한국의 토속신앙과 상당 부분에 있어서 유사한 면을 가지고 있다. 종교간 습합현상이 한반도에 진출한 천리교에서 발견되고 있다.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서는 일본인들의 신앙을 먼저 알아야 

 

우리는 동아시아 지역 공동체로 일본과 관계를 끊을 수 없다. 대외의존도만을 놓고 볼 때 한일관계를 끊으면 경제적 위기는 심각하다. 한국과 일본의 관계는 경제공동체다. 여기에 중국을 포함한 한··일 삼국은 서로 주고받는 공동체다. 아시아의 평화를 원한다면 가장 시급한 것이 삼국의 상호협조다. 아시아의 평화는 궁극적으로 세계평화를 의미하고 있다. 우리가 가장 가까우면서 먼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본인들의 신앙을 먼저 알아야 한다. 국내에 들어와 있는 종교 가운데 천리교는평화를 위해 노력하는 종교단체다.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에 정착하지 못한 점에 주목한 연구는 내용분석에 머물게 되었다. 향후 연구를 통해 이점을 보충할 것이다. 정치적 다툼을 넘어 세계일화의 공동체의식으로 모두를 포용해야 한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 도배방지 이미지

많이 본 기사
1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