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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조선의 교육제도 성균관과 지방 향교(中)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2/03/23 [08:04]
한국사회에서의 유학과 성균관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조선의 교육제도 성균관과 지방 향교(中)

한국사회에서의 유학과 성균관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2/03/23 [08:04]

<연재순서>

()유교는 종교인가-儒家혹은 儒學이 적절

()한국사회에서의 유학과 성균관

()지방향교의 역사와 교육, 제향의식

 

한국 유교 3가지 기원설- 기자동래설, 전국시대 전래설, 한사군 유입설 

 

한국 유교의 기원에 대한 견해는 대체로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B.C 12세기경 은()나라가 망하자 기자(箕子)가 고조선으로 와서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원리에 따라 8조 금법(禁法)으로 우리 사회를 교화하였다는 이른바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다. 비록 역사적 사실성에 의문이 있지만, 이 견해는 한국 유교의 전통적 자부심을 확고히 해주었다.

 

고조선과 인접한 전국시대 연()나라를 통해 한자와 문물이 전래되면서 유교사상도 함께 전래되었다는 견해이다. 중국사료와 문헌을 통해 입증될 수 있다.

 

삼국의 발생을 전후하여 한사군(B.C.108-A.D.313)이 설치되면서 중국문물의 유입과 더불어 유교사상이 도입되었다는 견해이다. 우리 땅에서 나온 유물을 통하여 확인될 수 있는 주장이다.

 

삼국초기 고대국가가 성립되면서 유교문화의 수용이 더욱 확산되었던 것은 확실하다. 고구려 소수림왕 2(A.D.372) 유교경전을 가르치는 대학으로 태학을 세운 사실은 한국 유교사에 있어서 획기적 의미를 갖는다. 지방의 경당(扃堂)에서도 유교경전을 가르쳤으며, 율령(律令)을 펴고 역사를 기록하였다. 백제에서도 상당한 깊이의 유교사상이 수용되어 오경박사를 두고 일본에까지 한자와 유교사상을 전파하고 있다. 

▲ 광개토왕비의 비문은 유교문화수준을 증명해준다   

 

A.D. 414년에 세웠다는 광개토왕비의 비문은 유교문화수준을 증명하며, 신라의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은 당시 청년들의 경전연구와 유교정신의 실천자세를 보여준다.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巡狩碑)에도 유교적 통치원리를 간직하고 있다.

 

신라의 선덕여왕 9(640)에 당 태종이 유교를 장려하기 위하여 널리 해외의 학생을 모집하였으므로 이때 신라, 고구려, 백제에서는 자제들을 보내어 수학하도록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372년에 태학이 설립되었고 백제는 학교 시설의 시초 연대가 분명하지 않으나 고이왕(古爾王) 52(285) 왕인이 일본에 논어천자문을 전했으며, 신라에서도 학교 설립은 신문왕(神文王) 2(682)에 이루어졌다. 이때의 최고학부인 국자감의 교풍은 대개 경전을 잘 익하고 사기(史記)를 알아서 관리가 되는 일과 문장이나 시를 짓는 일을 주로 하였다. 대체로 이론을 찾는 것보다는 문장을 중심으로 하는 것이었고, 여말(麗末)에 주자학(朱子學)이 들어옴에 따라서 학풍도 점차로 달라졌다. 즉 한(),()의 학풍을 지녔던 때가 고려 이전이라고 한다면 고려 말기부터는 차츰 송학의 풍을 띠게 되었다. 이 당시의 유명한 학자로서는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최충(崔沖), 안유(安裕)를 비롯해서 이제현(李齊賢), 이색(李穡)과 함께 정몽주(鄭夢周), 권근(權近), 정도전(鄭道傳)을 들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의 국학의 역사-고려 말과 조선 시대의 최고 교육기관 성균관의 설립

 

향교의 역사와 문화는 성균관을 비롯하여 나라에서 운영하는 국학의 범주라는 점에서 깊은 관련성이 있다. 우리나라의 국학의 역사는 삼국시대부터 있었다. 고구려는 소수림왕 2(372)에 최초로 태학을 세워 태학박사를 두었고, 백제는 근초고왕 29(374)에 고흥이라는 사람을 박사로 삼았다는 기록과 함께 5경 박사라는 명칭이 삼국사기에 수록된 것으로 보아 그 당시에 국립교육기관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는 진덕여왕 2(648)에 김춘수가 당나라의 국학을 찾아 석전의 의식을 참관하고 돌아온 후 국학 설립을 추진하여 신문왕 2(682) 6월에 국학을 세우고 경() 1인을 두었다. 성덕왕 16(717)에는 태감 김수충이 당나라로부터 공부자(孔夫子)10() 72제자의 영정(影幀)을 들여와 국학에 안치하였다. 는 기록이 있어 석전의 의식이 국학에서 봉행(奉行)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고대 학교는 기록에 따르면 이미 397(고구려 소수림왕 7)에 태학과 경당이 세워졌고, 682(신라 신문왕 7)에 국학이 있었다. 이들 태학과 국학은 관학으로서 중앙의 소수 귀족자제들을 대상으로 하는 귀족제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 들어서는 관학의 설치가 각 지방으로까지 확대되는 괄목할 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었다. 958(고려 광종 9)에 과거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되면서, 과거를 통한 관료 제도를 제대로 정착시키기 위해 각 군현에 학교를 설립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312목을 비롯한 군현에 박사와 교수를 파견하여 향교교육을 시행하게 되었다. 군현 단위까지 국가의 지배력이 확대되는 결정적인 계기를 갖게 된 것이다.

 

한반도에 유학이 언제 수용되었는지 그 기록은 자세하지 않지만 고구려 소수림왕 2(372)에 태학을 세우고 자제를 가르치기 시작했다. 영양왕 11년 이문식으로 태학 박사를 삼았다. 백제 근초고왕 29년 고흥으로 박사를 삼아 백제는 개국으로부터 문자가 무()하더니 비로서 서기(書記)를 두었다. 신라는 신문왕 2(682)국학을 세워 유학을 가르쳤다. 그리고 성덕왕 16(717) 김수충이 당 나라로부터 공자를 비롯한 공자의 제자 십철(十哲), 칠십이현(七十二賢) 화상(畫像)을 모셔다가 국학에 봉안하였다. 이것이 우리나라 문묘(文廟)’설치의 시초라 하였다. 향교의 설치는 고려 930(태조 13) 평양에 향교를 설치하여 육부생(六部生)을 가르치고 문묘를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한 것이 그 직접적인 시초가 된다. 고려시대 성균관의 역사는 제26대 충선왕 2(1310)에서부터 제24대 공양왕 3(1392) 고려 왕조가 문을 닫는 해까지 82년 유지되었다.

 

성균관은 고려 말과 조선 시대의 최고 교육기관인 태학(大學)의 명칭. 학궁(學宮) 또는 반궁(泮宮)이라고도 하였다. 주례 周禮에 의하면 '성균'은 오제(五帝)의 학() 가운데 남쪽에 있었던 것으로 음악(音樂)으로 교육적 성과를 내기 위해 대사악(大司樂)이 그 성균지법(成均之法)을 맡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성균은 음악의 조율(調律)을 맞춘다는 말로서 즉 어그러짐을 바로 잡아 이루고, 과불급(過不及)을 고르게 한다는 뜻이다.

 

성균관의 위치와 연혁

 

고려의 국립대학인 국자감(國子監)이 충렬왕(忠烈王) 24(1298)에 성균감(成均監)으로 되었다가 충선왕(忠宣王) 즉위년(1308)에 성균관이라 하였다. 공민왕(恭愍王) 5(1356)에 국자감으로 환원하였다가 1362년 다시 성균관으로 고쳐서 조선시대에 계속 대학의 명칭으로 사용하였다. 고려시대 때의 위치는 개성(開城)에 있었고 조선시대에는 서울[漢陽]의 숭교방(崇敎坊 明倫洞)에 있었는데 현재까지 존속되고 있다.

 

조선 태조 7(1398) 7월에 교사(校舍)가 창건되었는데 이 해를 근대 학제 개편 이후의 성균관대학교 창립 연도로 삼고 있다. 태조 당시에는 유학(儒學)을 강의하는 명륜당(明倫堂), 공자(孔子) 및 중국과 한국의 역대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大成殿, 西廡), 유생(懦生)들이 거처하는 동ㆍ서재(西齋) 등이 있었다. 성종 때에 향관청(享官廳)과 존경각(尊經閣도서관)이 세워졌고 현종(顯宗) 때에 비천당(丕闡堂2과거장), 숙종(肅宗) 때에 계성사(啓聖祠공자 및 五聖奉安)가 증설되었다. 고종(高宗) 24(1887) 경학원(經學院)을 부설하였다.

 

학제

 

성균관의 직제는 각 시대별로 많은 변천을 하여 일일이 적을 수는 없으나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따르면 정2품 지사(知事) 1인과 종2품 동()지사 2인은 겸관(兼官)이었다. 3품 대사성(大司成) 1, 3품 사성 2, 4품 사예(司藝) 3, 5품 직강(直講) 4, 6품 전적(典籍) 13, 7품 박사(博士) 3, 8품 학정(學正) 3, 학유(學諭) 3, 9품 학록(學錄) 3인으로 교수직이 조선 초기의 22인에서 38인으로 증원되었다. 영조(英祖) 때의 속대전(續大典)에 의하면 제주(祭酒)가 정3품관으로 설치되어 12품관이 겸직하도록 하였다. 정조(正祖)때의 태학지(太學志)에는 지사(2품에서 정1품까지)를 대제학(大提學)이 겸직토록 하였고, 인원이 더욱 늘어났다. 입학 자격은 생원(生員)ㆍ진사(進士) 등 사마시(司馬試) 합격자에게만 한하여 부여되었다. 이들은 본과생(本科生)이라 하였다. 정원은 시대에 따라 다른데 초기에 200명이었는데 말기에 100명으로 축소하였다.

 

입학연령은 15세 이상이었으나 50세 장년도 있었으니 연령 제한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생원·진사의 자격을 가진 사람만 입학시켜 이후 사학(四學)의 생도 가운데서 15세 이상으로 소학(小學)ㆍ사서(四書)를 배우고 오경(五經) 가운데서 1경에 통한 자,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적자(嫡子)로서 소학에 능통한 자, 문과 및 생원ㆍ진사의 초시(初試漢城鄕試)에 합격한 자, 관리 중에서 입학을 원하는 자는 들어갈 수가 있었는데, 이들은 기재생(寄齋生)이라 하였다.

 

교과과정 및 교수방법

 

주요 교과 과정은 사서ㆍ오경을 구재(九齋)로 나누어 학생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그 밖에 과문(科文)의 제술(製述)도 부과하였고, 제사(諸史)도 독서하였다. 그러나 노장(老莊)ㆍ불경(佛經)ㆍ잡류(雜流)ㆍ백가자집(百家子集)은 읽지 못하도록 하였다. 교수 방법은 먼저 구재 가운데서 대학재(大學齋)에 들어가 대학 大學을 배웠다. 그것을 마친 다음 예조(禮曹)에 보고하면 예조에서 관원 1명과 대간(臺諫司憲府司諫院)의 관원 각각 1명씩을 성균관에 파견하여 성균관의 교관과 함께 학생에게 강문(講問)하여 강설(講說)이 자세하고 정확하며 전체의 뜻을 잘 파악한 자는 논어재(論語齋)에 올리고, 통하지 못한 자는 통할 때까지 대학재에 머물게 하였다. 이러한 방식으로 논어재에서 맹자재(孟子齋)ㆍ중용재(中庸齋)ㆍ시재(詩齋)ㆍ서재(書齋)ㆍ역재(易齋)로 차례차례 진재(進齋)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사서오경에 통한 자는 명부에 기재하고 성균관에 보관하였다가 식년(式年)에 예조에 보고하면, 예조에서는 왕에게 보고하여 문과초시(文科初試)를 보게 하였다. 이러한 분재제도는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제도였으나 조선시대에 와서는 시대에 따라서 원칙으로만 지켜지고 적당한 방법으로 교수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과거의 시험 과목과 방법이 시대에 따라 달라서 경서(經書)와 사장(詞章)의 학습 비중이 이에 맞추어 달라진 것이다. 교수와 학생 사이에 질의응답식의 교수 방식과 개별 지도에 치중하고 교수 1인당 학생이 10인을 넘지 않았다. 당시의 교수 방법은 교수의 강의에 의한 것이 아니었고 어디까지나 자기 스스로 학습에 의하여 얻은 지식을 문답식 고사를 통하여 그 성적을 평정하였으며 획일적이 아니라 개인의 성적을 표준삼아 그 진도를 결정하였다.

 

유생의 일과와 자치활동

 

태학지에는 유생들의 일과 및 지켜야 할 법도가 나오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유생들은 매월 초 1일 관대(冠帶)를 갖추고 문묘에 나아가 4배례(拜禮)를 행한다. 일과는 매일 새벽에 북소리가 한 번 나면 일어나고 날이 밝기 시작하여 북소리가 두 번 나면 의관을 갖추고 안정하게 밝아서 책을 읽는다. 북소리가 세 번 나면 식당에서 동 서로 마주앉아 식사를 마치고 퇴장한다. 다음에 교수들이 명륜당에 정좌하고 북소리가 나면 입정(入庭)하여 상읍례(相揖禮)하고 그것이 끝나면 자기 재 앞으로 가서 서로 절하고 인사를 교환한다. 유생이 교수에게 나아가 일강(日講)을 청하면 상재와 하재에서 각각 1명씩 뽑아 읽는 책을 상대로 강을 행한다. 북소리가 두 번 나면 모든 유생은 읽는 책을 가지고 사장(師長) 앞에 나아가 배운 것을 논란(論難)하여 그것을 해결한 다음 새 것을 배운다. 이 때 많이 배우는 것을 힘쓰지 않고 정밀하게 연찬하는 데에 힘쓴다. 과목당 독서 기간을 정하고 있는데 대학1개월, 중용2개월, 논어맹자는 각 4개월, 시경서경춘추는 각 5개월, 주역예기는 각 7개월로 하였다.

  

문묘와 교육시설

 

조선 초에 완비를 본 성균관의 시설은 임진왜란 때에 모두 불타버리고 선조 34(1601)에 재건에 착수하였다. 그 후 고종 때까지 새로운 시설과 개수 확장 사업을 계속하였다. 문묘는 공자를 위시한 중국과 한국의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던 곳으로 서울의 사학(四學)을 제외한 지방의 향교(鄕校)도 그 내용이 같았다. 건물의 규모는 96()이다. 문묘에서 향사(享祀)되는 인물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가 달랐고 조선시대에서도 전ㆍ후기가 다르다.

 

대성전(大成殿)에는 공자와 4(四聖顔子曾子子思子孟子)과 공문십철(孔門十哲), 그리고 송()나라 6()을 모셨고, 동ㆍ서무(西廡)에는 주ㆍ한()ㆍ진()ㆍ당()ㆍ원()ㆍ송나라 94()와 우리나라 신라ㆍ고려ㆍ조선 18위를 봉안하였다. 해방뒤에 무의 94위는 출향(黜享)하고 우리나라 18위를 대성전에 옮겨서 봉향하고 있다. 조선시대에는 임금이 문묘에 작헌례(酌獻禮)를 올린 뒤 명륜당에서 과거를 치루는 알성문과(謁聖文科)도 있었다. 명륜당은 대성전의 북쪽에 있고 좌우에 협실(夾室)이 있는데 남향으로 18[]이다. 동ㆍ서재는 각 18칸으로 기숙사이며, 육일각(六一閣)은 유학 교육에서 교양 과목이라 할 수 있는 육예(六藝) 가운데서 활쏘기[]에 관련된 기구를 보관한 곳이다. 이는 정신뿐만 아니라 육체의 건전한 단련도 중요시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외 존경각ㆍ비천당을 비롯하여 진사식당(進士食堂)ㆍ정록청(正錄廳)ㆍ향관청ㆍ양현고(養賢庫) 등 넓은 교육 시설이 완벽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특히 양현고는 성균관 학생의 식사와 등유(燈油)ㆍ돗자리[(鋪席)] 등 여러 가지 교육 기구와 석전의 비용을 조달하기 위하여 고려 예종 14(1119)에 안유(安裕)의 건의로 창설한 일종의 장학 기관이다. 현재에도 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에서는 양현재(養賢齋)를 그대로 두고 교육과 장학 사업을 계속하고 있다.


근대학제로의 변천과 오늘의 성균관

 

고종 32(1895) 성균관 관제(館制)를 칙령 제136호로 반포하여 성균관은 문묘를 받드는 기관으로 하고 교육은 경학과(經學科)에서 전담하게 하였다. 반상(班常)의 구별없이 인재를 육성하겠다는 교육의 기회 균등을 밝혔으며 시대적 요구와 추세로 인하여 '문명(文明)한 진보(進步)에 주의(注意)함을 요지(要旨)로 함'을 발표하였다. 1910년 한ㆍ일합병으로 인하여 성균관과 향교의 재산을 분리하고 교육을 일체 중지하여 국립대학과 민족 교육의 맥을 끊었고, 명칭도 경학원(經學院)으로 완전히 바꾸어 버렸다. 그 대신 일제는 식민지 교육을 위하여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犬學)1924년 설립하였다. 당시 전국의 유림(儒林)이 주권을 지키려는 운동으로 의병활동(義兵活動)과 파리장서사건(巴里長書事件) 등을 일으키고, 통문(通文)을 돌려 성균관의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 회복을 선도하자 그 회유책의 일환으로 1930년 명륜학원(明倫學院)을 설립하게 되었다.

 

1939년에 명륜전문학원으로, 1942년 명륜전문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지만 진실한 유학 교육과 문화 창달에 미치지 못하고 일본의 변질된 황도유학(皇道儒學)을 강요하게 되었다. 교과 과정에 있어서도 국민도덕ㆍ일어ㆍ일본사ㆍ교련 등을 넣어서 그들에 영합하는 교육으로 변모하였다. 그것마저 1943년 폐교 조치가 되고 청년연성소(靑年鍊成所)로 바뀌게 되었다. 일제에 의해 말살되었던 유일한 국립대학으로서 민족 교육을 이룩해내었던 전통을 되살리는 운동이 815광복과 더불어 일어났다. 1945년 명륜전문학교로 문을 열었다가 미군정시대에 명칭을 성균관으로 변경하였고 1946925일 성균관대학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1953년에는 성균관대학교로 종합대학이 되었다. 초대 학장 및 총장에는 전통 유림으로서 일제에 대항하였고 해방 후에는 반독재 투쟁에 앞장섰던 심산(心山) 김창숙(金昌淑) 선생이 취임하였다.

 

현재 성균관은 성균관대학교와 분리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전국 234개의 향교와 더불어 유교사상과 전통문화 계승·발전의 산실로서 그 맥을 잇고 있다. 특히, 매년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청소년 인성교육>을 비롯한 각종 사회봉사 활동, 예절상담을 통한 생활의례 보급, 전통문화 계승을 위한 출판사업 등 다양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성균관 문묘 배향 위치

 

성균관을 비롯해 전국 향교의 위패 봉안과 크기에 대해서는 시대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오늘날 대설위, 중설위, 소설위를 구분하며 성균관 문묘에 배향된 위치 문제를 살펴보면 1454년 완성된 세종실록오례의(世宗實錄五禮儀)오례, 길례, 서례, 신위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석전은 대성 지성 문선왕(한 가운데에 있게 하고 남쪽을 향하게 한다.) 연국 복성공, 성국 종성공, 기국 술성공, 추국 아성공(정위의 동남쪽에 있어 서쪽을 향하게 하고, 북쪽을 상)으로 한다. 만약 전이 협착하면 종성공과 아성공은 정위의 서남쪽에 있어 동쪽을 향하게 하고, 북쪽을 상으로 한다.

 

비공(민손, 1) 설공(염왕, 3) 여공(단목사, 5) 위공(중유, 7) 위공(복상,9) 전내의 동벽에 있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게 하고, 북쪽을 상으로 한다,

 

운공(염경, 2) 제공(재여, 4) 서공(염구, 6) 오공(언언, 8). 영천후(전손사, 10)전내의 서벽에 있는데 모두 동쪽을 향하게 하고, 북쪽을 상으로 한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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