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조선의 교육제도 성균관과 지방 향교 (下)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2/03/26 [10:29]
지방향교의 역사와 교육, 제향의식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조선의 교육제도 성균관과 지방 향교 (下)

지방향교의 역사와 교육, 제향의식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2/03/26 [10:29]

<연재순서>

()유교는 종교인가-儒家혹은 儒學이 적절

()한국사회에서 유학과 성균관

()지방향교의 역사와 교육, 제향의식

 

고려 태조 때 시작된 지방향교의 역사

세종 때 一邑一校의 체제...8개도에 329개소의 향교 설립

 

지방의 향교는 오늘의 공립중고등학교 정도의 격을 가진 교육기관으로 전통시대 우리나라 교육의 중추였다. 지방의 교육이 최초로 제도화 된 것은 고구려가 평양으로 도읍을 옮긴 후 각 지역에 성립한 경당(扃堂)에서 비롯되었다. 지방향교의 설립은 고려 태조 13(930)에 평양에 학교를 세워 6부생을 가르치고 문묘(文廟)를 세워 제사를 지내기 시작이다.

 

향교라고 하는 명칭을 사용하기는 1220(고려 고종 8)에 창건한 백령향교(白翎鄕校) 처음이라고 하고 이후 대체적인 이름으로 불리어 왔으나 학서(學序), 상숙(庠塾), 주학(州學), 학교(學校), 이상(里庠), 향학(鄕學), 학궁(學宮) 등으로 불리어지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교육의 중앙집권적 경향은 향교 운영에서도 나타난다. 중앙 조정은 지방 군현 단위별로 향교를 설치를 강조하였다. 향교의 설립과 운영 실태를 수령의 가장 고유한 임무 중의 하나로 제도화하여 그들을 평가하는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 동시에 향촌사회에서의 수령권 강화를 위해, 고을 백성들이 수령을 고소하지 못하게 하는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과 수령을 함부로 교체하지 않고 정해진 기간 동안 안정되게 근무할 수 있도록 근무 기간을 보장해주는 구임법(久任法) 등을 시행하여 향촌에 대한 통제권을 강화하고, 수령에게 향교의 교수와 학생에 대한 감독권을 부여함으로써 교육의 중앙 집권화를 기도하였다. 이러한 노력에 따라 1488(성종 17) 무렵에는 전국의 모든 고을에 향교가 하나씩 설립되고, 조정에서는 각 향교에 교수를 임명하여 교육을 독려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중기에 이르자 향교교육은 이미 그 한계를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가장 큰 이유는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만한 교수요원을 확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조정에서는 향교 교수직에 과거 급제자를 임명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은 이른바 출세가 용이한 중앙부서에 청요직(淸要職)만 선호하고, 지방의 한미한 향교 교수직은 기피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향교 교수의 자격도 차츰 낮아져서 결국에는 자격 없는 인물들이 너도나도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급기야는 향교의 교수 중에 유학 경전조차 제대로 읽지 못하는 인물들이 다수 등장하게 되고, 그 수준이 학생들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향교 교수들의 수준이 이 지경에 이르자 학업에 뜻이 있는 많은 선비들은 향교를 차츰 멀리하게 되었다. 결국 대다수 고을의 향교에서는 교육활동이 사실상 중지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향교교육이 무력화되었다고 하여 향교의 사회적 기능까지 완전히 정지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특히 중인이나 평민에 해당하는 비양반 계층에게 향교는 신분상승의 통로로 적극 활용되었으며, 교육 외에 향교의 주요 기능이었던 의례적 기능 역시 꾸준히 유지되었다.

 

향교의 교생에게는 군역면제(軍役免除)라는 커다란 특권이 주어졌기 때문에 중인이나 평민들은 군역 면제를 통한 신분 상승을 목적으로 향교 교생이 되고자 하였다. 반면, 양반들은 굳이 향교 교생이 되지 않더라도 군역을 면제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교육의 질도 담보되지 않으며, 비양반 계층이 교생으로 들어오면서 향교의 구성원의 신분이 흔들리기 시작하는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이 노출되었다.

 

향교는 조선시대 지방의 유풍을 진작시키고 아울러 인재 양성을 목적으로 전국의 크고 작은 고을에 설치했던 지방의 학교 즉 관학을 의미한다. 향교가 언제 어디에 처음 설립 되었는지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지만 고려사학교조(學校條)仁宗五年三月 詔諸學 以廣敎導...” 즉 제주(諸州)에 학을 세워 도를 가르치라는 기록으로 볼때 인종 5(1127)에 학교를 세웠다는 기록이 향교 설립의 확실한 모습을 보여주는 기록으로 여겨지지만, 이때가 향교 설립의 처음이 아닌것은 이미 인종 재위 이전에도 5개교의 향교가 설립되었다는 기록이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향교 교육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하고 있다가 고려 충렬왕 때 강릉 안렴사 이승인이 화부산 연적암 아래에 문묘를 창립하자 전국의 각 군현이 그 뒤를 따라 문묘를 만들어 어느 정도 발전을 보이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 병란을 위시한 각종 내환이 계속되는 가운데 각 지방의 향교가 크게 쇠퇴 하였다.

 

고려의 향교제도는 중국의 향교제도를 도입 하였는데 공자를 성선으로 배사(配祀)하고 있다. 이를 조선시대 향교에도 계승되어 향교는 유교의 기본정신을 배우고 익히며, 점검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태조실록에 농상(農桑)은 왕정의 근본이요, 학교는 풍화의 근원이다, 즉위 이래 여러 번의 교서를 내려 농상을 권장하고 학교를 일으키는 뜻을 보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유교이념의 보급을 위해 향교 설립을 왕이 직접 명하고, 향교를 중심으로 하는 흥학 책은 수령의 중요한 임무중의 하나가 되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 결과 대부분의 향교가 태조부터 세종 조 사이에 건립을 보게 되었고 세종 17(1488)까지는 전국에 일읍일교(一邑一校)의 체제를 갖추어 8개도에 329개소의 향교가 설립되어 거의 모든 군·현에 향교가 분포되고 이후 발전을 거듭하여 1918년에는 335개소의 향교가 기록되고 있다. 목사가 부임을 하면 3일 안에 향교의 대성전에 참배하고 명륜당에 선비들을 모아 놓고 학문을 강론하였으며 관찰사가 주·현을 순시할 때도 이와 같은 행보를 보였다.

▲ 충남 서천향교 

  

향교의 교육과정과 제향의식

조선 말기까지 800여 년 동안 발 문묘선현 봉사, 풍속을 교화하는 역할

 

유학자나 평민이 향교에 입학하기 위해서는 교생 10인 이상이 입학 할 사람의 지학(志學)을 추천해야 했다. 그 다음에 소학(小學)과목을 강()해서 조통(粗通) 이상의 등급을 받아야 가능하였다. 향교의 교재, 수업방식과 벌, 휴가와 방학에 관한 것이다. 향교의 교재는 대부분 소학(小學), 사서오경(四書五經), 근사록(近思錄), 성리대전(性理大全), 주자가례(朱子家禮)또는 의례(儀禮)가 교재로 채택되었으며, 수업은 1교시는 이전에 배운 내용을 강()을 통해 복습하고, 2교시는 새롭게 배운 내용을 토론을 통해 익혀 나가는 것이었다.

 

한편, 수업 중 집중하지 않거나 졸거나 할 때에는 회초리 또는 과제를 부과하는 벌이 가해졌다. 향교의 휴가 횟수는 각 지방향교의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으며, 방학 또한 정기적인 것이 아니라 농번기나 흉년이 들었을 때 수시로 하고 있었다. 향교에서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정기적인 문묘참배 행사가 있었고, 교생이 기상(起牀)하여 아침식사를 하기까지는 세 단계를 거치고 있었는데, 침상에서 일어나는 단계, 의관을 정제하고 독서를 하는 단계, 식당에 가서 식사를 하는 단계였다. 식당을 출입할 때는 식당에 온 차례대로 식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연장자 순으로 식사를 하여 장유유서가 철저히 지켜지고 있었다. 교생이 수령, 사장, 향로, 선달(守令, 師長, 鄕老, 先達) 등을 대할 때는 교관과 동등하게 대우하였다.

 

조선 초기에 향교설립이 활발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통치이념이 바로 유교사상이었고 향교 설립을 통하여 유교 이념을 실현하고 왕의 지방통치 기반을 확고히 다지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향교는 조선중기 이후 서원이 등장하면서 교육적 기능이 감소되기는 하였으나 고려중기 이후 조선 말기까지 800여 년 동안 발전과 쇠퇴를 거듭하면서 문묘선현에 봉사하고 국가인재양성 및 지역사회의 풍속을 교화하는 역할을 다하였다.

▲ 충남 당진 매천향교의 배치도 안내     

  

향교의 공간구성-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이 하나의 축 

 

향교는 제향 공간과 강학 공간이 하나의 축으로 형성되어 있고, 각 공간마다 대지고저차(垈地高低差)를 두어 공간의 확실한 구분과 독립성을 주었다. 향교는 문묘가 없으면 향교의 개념에 속하지 않았고 공자를 비롯하여 중국의 선현과 우리나라의 선현 등 많은 선현을 배향하고 있어 문묘의 규모가 서원의 사당에 비해 규모가 크다.

 

문묘의 공간 건축 구성은 공자를 중심으로 한 선현의 위패를 안치한 대성전을 중심축으로 대성전 전면 기단 아래에 동서로 선현의 위패를 안치한 동서무(西廡)가 있다. 서원과 향교의 교육 공간구성은 문묘와 사당의 차이가 날 뿐 강학의 공간과 문루에서 강학 공간까지의 공간은 비슷한 규모와 배치 형식을 갖추고 있다.

 

향교의 공간구성은 전묘후학(前廟後學), 전학후묘(前學後廟), 좌묘우학(左廟右學), 좌학우묘(左學右廟)가 있다. 전묘후학(前廟後學)은 문묘 공간이 강학 공간 앞에 오면서 일직선 축을 형상하는 방식이다. 전묘후학의 공간구성을 가진 향교들의 공통점은 모두 평지에 건립된 점이다.

 

성균관의 경우 동서무가 각각 11, 서제가 각각 18칸으로 무()와 재()의 길이가 길어 경사지에 건립하기 어려웠으므로 평지에 배치되어야 했다. 경주전주나주 향교도 계수관향교(界首官鄕校)로서 太學(太學)의 제도를 따라 무()의 길이가 길어서 평지에 배치되어야 했다. 그러나 계수관 향교도 상하로의 수직적 위계성을 표현할 수 있는 곳은 전학후묘(前學後廟)가 되었다. 전학후묘는 강학 공간이 문묘 공간 앞에 오는 형식으로 경상도와 전라도의 향교 104개소 중 86개소 83%에 이른다. 이 형식은 대부분 경사지에 위치하는데, 이것은 산지가 70%를 넘는 우리나라의 지형적 요인도 있겠지만 오히려 앞(과 뒤()라는 수평성보다 위()와 아래()라는 수직성이 위계표현에 적합했고, 또한 문묘는 음의 공간으로서 후면에 배치하여 폐쇄성을 강조했다.

 

이는 강학과 존현의 위계를 상징하는 유교적 예의 영향으로 보인다. 좌묘우학(左廟右學), 좌학우묘(左學右廟)의 공간구성은 강학 공간과 문묘 공간이 좌우로 배치되는 경우로 역시 지형적인 요인도 있지만, 일직선 축을 형성할 수 있는 여건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후기에 강학 기능의 쇠퇴로 강학 공간은 주로 平民의 자제들이 이용하면서 강학 공간과 문묘 공간의 동선을 분리하는 것이 문묘 공간에 대한 존숭과 양반들의 권위 표현에 적합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강학 공간 내부에서 강당과 동서재의 배치 관계를 보면, 대도호부도호부에 있는 향교 22개소 중 강학 공간인 명륜당의 건물배치는 동재와 서재의 배치 형태에 따라 명륜당보다 동서재가 앞에 위치하는 전재후당(前齋後堂)12개소 55%, 명륜당이 앞에 있는 전당후재(前堂後齋)6개소 27% 동서재가 없는 곳이 4개소 18%로 나타났다. 현에 있는 향교 18개소 중 전재후당이 9개소 50%, 전당후묘가 8개소 44%, 서재가 없는 곳이 1개소 6%로 전재후당과 전당후묘가 비슷한 숫자로 나타났다. 문묘 공간과 강학 공간의 배치에서는 강학 공간을 전면에 배치한 전학후묘의 공간구성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강학 공간 내에서의 명륜당과 동서재의 배치는 동서재를 명륜당 앞에 배치한 전재후당의 공간구성이 다소 높은 비중을 차지한다. 성균관과 같은 전묘후학과 전재후당의 구성을 따른 향교는 나주향교, 경주향교, 전주향교 등이 있으며, 전학후묘와 전당후재로 구성된 향교는 강릉향교, 광주향교 등이 있다.

 

문묘의 공간은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이 공간을 축으로 다른 공간이 조화되도록 연결되어 있다. 이 공간은 서원의 사당과 마찬가지로 상징적 정신적 지주가 되는 장소이다. 문묘 건물 주위를 돌담으로 싸고 있어 이 공간의 신성함을 나타낸다. 문묘는 모든 주요 의식이나 행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신성 영역의 공간으로 배치상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다. 문묘 공간 내 건물들은 대성전을 축으로 대성전 전면 좌우로 동서무가 좌우에 엄정하게 위치하고 있어 이 공간 내에 진입하면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대성전은 공자를 중심으로 사성(四聖)과 십철(十哲)등의 신위를 모시고 있으므로 이것에 의해 건물 규모가 정해져 있다.

 

향교의 입지는 주위에서 교촌(校村), 교동(敎洞), 향교동(鄕校洞), 교운리(校雲里), 교성리(校星里), 교흥리(敎興里), 교월리(校月里), 교원리(校院里), 대교리(大校里), 교사리(校士里), 교평리(校平里), 校峴洞(校峴洞)등의 이름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이름에 학교를 나타내는 교()자가 들어 있다는 것이며, 이것은 그곳에 오래 전부터 학교가 있었기 때문에 이름 붙여진 것이 행정 구역명으로 굳어진 것이다. 물론 이때 학교라는 것은 향교를 말한다. 지금은 비록 이들 지역내 향교 건물이 없다 해도 이전에는 있었으며, 혹은 새로 지을 때 다른 곳에 옮겨 현재 향교는 없지만 과거 교육기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학인 향교는 守令이 통치하는 관아 근처 위치, 사립 기관인 서원은 한적한 곳에

 

향교는 관학이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守令이 통치하는 관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의 기록을 보면 대부분 관아에서 불과 몇 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향교가 위치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립 교육 기관인 서원이 수령의 간섭에서 벗어난 한적한 곳, 경치가 수려한 곳에 위치하는 것과 대조를 이룬다. 따라서 향교가 있었던 곳은 당시 도회지 가운데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처음에는 향교 건물이 없더라도 가정집에서 스승을 두고 학생을 가르친 경우도 있으며, 관아나 퇴락한 사찰을 이용하기도 하였다. 특히 조선은 건국과 더불어 숭유억불(崇儒抑佛) 정책에 따라 많은 사찰이 헐렸는데, 이때 사찰의 재목을 향교 짓는 데 사용하였다. 예를 들어 나주향교와 창평향교의 대성전(大成殿) 주춧돌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가까운 곳의 사찰이 헐리면서 석재를 옮겨 사용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들이다. 또 경상북도의 고령향교에서도 사찰에서 사용한 듯한 석재가 이용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향교의 건물은 크게 선현에 제사지내는 배향 공간과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 공간으로 나누어지며, 두 공간 사이는 담을 쌓아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구조가 언제부터 정착되었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고려시대에는 배향 공간과 교육 공간이 한 건물 안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당시 향교의 목적이 교육에 있었고, 배향은 부수적인 의미였다는 것을 말해 준다.

 

배향 공간에는 공자의 사당인 대성전을 중심으로 그 앞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다. 대성전은 대성을 의미하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던 건물에서 유래를 찾을 수 있는데, 즉 대성전에는 공자뿐 아니라, 안자, 증자, 자사, 맹자 등 네 명의 성인, 공자의 수제자 열 명(十哲) 주돈이, 정호, 정이, 소옹, 장재, 주희 등 송나라 6(宋朝六賢)의 위패를 봉안한다. 그리고 동무와 서무에는 공자의 문하 72(孔門七十二賢) ,,송나라의 22(漢唐宋二十二賢), 우리나라의 18(東國十八賢)을 모신다.

 

조선시대에는 각 읍의 크기에 따라 향교의 규모도 다르게 나타난다. 향교는 그 크기에 따라 대설위, 중설위, 소설위로 구분하는데, 이에 따라 앞에서 나열한 선현의 위패를 모시는 숫자도 차이가 난다.

 

현재와 같은 배향인물을 설치한 것은 1949년 유도회에서 우리의 문묘(文廟)에 중국의 10,72,22현까지 봉안하는 것은 사대사상(事大思想)의 표현이라 하여 공자와 4, 송조2(정호,주희) 외 위패는 없애고 우리나라의 18현을 대성전에 함께 배향하는 결의하였다. 그러다가 1961년에 공문 10철과 송조 4현을 복위시킴으로써 오늘날 대부분의 향교가 이에 따르고 있다.

 

향교의 건축물 외부공간에는 하마비, 홍살문, 공자상, 성생단, 정료대, 관세대, 망료대, 비석, 지당이 있다. 경주향교의 경우 송단이 설치되어 있다.

▲ 인천향교 홍살문     

 

(1)홍살문

유학의 상징으로서 신성한 성역임을 알리는 상징적인 홍살문이 있는데 위치는 대부분 향교의 입구 정면에 두고 있으며 대략 거리는 30~100m 내에 위치하는데, 심지어 200~300m 떨어져 둔 곳도 있다. 

▲ 강화향교 하마비     

  

(2)하마비

하마비는 보통 향교 외삼문 밖의 홍살문 앞에 세워 성역임을 알리는 표지석으로써 남녀노소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그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리게 했다. 대개 대소인하마(大小人下馬), 대소인원개하마,(大小人員皆下馬,)등으로 음각한 문구가 새겨져 있으며, 전주향교에는 높이 198m로 전면에 과차자개하마(過此者皆下馬)라 기록하고, 뒷면에는 정덕기난구월립(正德己卵九月立)이라 새겨져 있는데 이것은 중종 14(1519)에 해당한다.

 

(3)공자상

유교의 시조인 공자를 향교의 명륜당 앞에 모신 오산 궐리사의 사례이며, 대구향교 등에서 볼 수 있다.

 

(4)성생단

성생단은 생단 또는 성생석이라고도 하는데 제향 때 제수로 쓰이는 생물을 검사하기 위하여 새운 단 즉 생간품을 행하기 위한 제단이다. 생간품이란 향사 전날 제관들이 제물로 살아 있는 짐승을 이 단위에 세워놓고 품평을 하는 의례를 말한다.

 

(5)정료대

정료대는 대성전 앞 또는 명륜당, 전사청 앞 등 넓은 뜻 경역에서 약간 조명이 필요한 곳에 세우는 석물로서 보통 2개가 놓이는데 지금은 없거나 1개만 남이 있는 곳도 있다. 석전제를 지내는 시간은 지금은 정오에 지내고 있으나, 원래는 새벽 즉 축시(丑時 새벽 2시 새벽 4) 오각(五刻 3시경)에 행해졌으므로 대성전 앞에는 춘추 석전 제향 시 새벽에 불 밝힐 때 사용하고, 명륜당 앞에 설치된 정료대는 교생들이 공부할 때 사용되었다.

 

(6)관세대

관세대는 제향 때 헌관 및 집사 등 임원이 의식을 거행하기에 앞서 대성전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기 위하여 물을 담아 놓을 수 있도록 만든 석조물로서 물을 담을 수 있도록 사각형 또는 원형으로 홈을 파고 하부에는 물이 빠지도록 배수 구멍을 만들어 놓은 경우가 일반적이다. 물 홈통이 없이 상단을 평평하게 만들어 물그릇을 올려놓는 세수대로 만든 예도 있다. 

▲ 망료대   

 

(7)망료대

망료대는 일면 예감대라 부르기도 하는 제향 의식 석물로 석전 행사에서 마지막으로 행하는 망료례 축문이나 행사 후 소각 대상물을 태워 묻는 석물이다. 일반적으로 망료대는 대성전 내의 의식이 끝나고 나오는 우측면 뒤쪽에 위치한다.

▲ 부안 고부향교의 비석     

 

(8)비석

대부분 향교의 입구나 경내의 강학 구역에는 관련 기념비가 2~3기 많게는 10~15기가 나열된 경우가 일반적이다. 비의 성격상 역대 수령들의 선정비, 흥학비, 공적비 등 다양한 비들이 있다.

 

(9)지당

물을 고이게 하는 수경시설의 시초는 외적의 방어를 목적으로 조성한 상고시대의 구지(溝池)에서 시작되었으며, 삼국시대에는 못 속에 섬을 꾸미고 자연스러운 호안처리를 하며 해안 경관을 실경화한 신선풍의 형식이 나타났다. 불교사원에서는 탑, 불전 주위의 자연경관 등을 못에 투영시키는 영지와 불교사상과 관련이 깊은 구품연지가 보급되었고 고려 시대 이후에는 정형적인 방지가 널리 보급되었다. 현재 나주향교 명륜당 좌측에 방지형태로 남아있고, 강릉향교 청운 정사 담장 앞에 타원형의 천운지가 있으며 표석도 세워져 있다.

 

(10) 송단

경주향교 명륜당 뒤편에 효종 6(1655)에 소나무를 식재하여 조성한 단이다.

 

제향의식-유학 통치이념 조선조, 文廟享祀는 향교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 

 

향교는 문묘(文廟) 유교의 이념 계승과 확산을 위한 선현들을 향사(享祀)하는 곳이다. 유학을 통치이념으로 채택한 조선조에 있어서 문묘향사(文廟享祀)는 향교의 중요한 기능의 하나였다. 대성전을 중심으로 전국 향교는 크게 차이가 없다. 문묘형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전주 향교는 대설위(大設位)로서 대성지성문선왕 공자(大成至聖文宣王)를 정위(正位)로 안자(顔子, 復聖公), 증자(曾子, 宗聖公), 자사(子思, 述聖公), 맹자(孟子, 亞聖公)를 모시고, 동벽(東壁)에는 공문(孔門) 10척 중 5위와 공조 3위를 종향(從享)하고 서벽(西壁)에는 공문 10철 중 5위와 송조 6현 중 3위를 종향한다. 동무(東廡)에는 중국7현 중 4위와 우리나라 18현 중 9위를 봉안(奉安)하고 서무(西廡)는 중국 7현 중3 위와 우리나라 18현 중 9위를 봉안하였다.

 

문묘(文廟)의 향사(享祀)는 처음 중국 당 나라의 석전례전(釋奠禮典)에 의거하여 서울 중앙 성균관에서는 춘하추동(春夏秋冬) 4시의 중월상정(仲月上丁)에 석전제(釋奠祭)를 행하고 지방의 향교에서는 춘추 중월상정(仲月上丁)의 두 차례 하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인지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뒤에 성균관이나 향교 다 같이 봄과 가을 두 차례 석전제를 거행하게 되었다.

 

석전시일(釋奠時日)은 중앙 성균관으로부터 지방의 향교에 이르기까지 전국적으로 같은 시일에 거행되는데, ‘매세중춘중추상정일석채선고사유(每歲仲春仲秋上丁日釋采先告事由)’라하여 음력 2월과 8월의 상정일(맨 처음 丁日)1년에 두 차례씩 제향(祭享)한다. 그런데 1949년 설위개정(設位改定)과 함께 석전(釋奠)의 일자도 개정하였다 즉 종래에 봄과 가을 두 차례로 하던 제향(祭享)1년에 한 번으로 하고 공자의 탄생일인 827일 양력에 기념 석전(釋奠)만을 올리는 그것으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성균관에서 먼저 시행을 하고 각 지방향교에 시달하였다. 그러나 각 지방향교에서는 이에 반대하는 편이 많아서 전례대로 봄과 가을 두 차례의 석전을 올리되 일자만 변경된 대로 따르게 되었다. 봄에는 종래의 예에 따라 음 2월 상정일(上丁日)로하되 가을에는 8월 상정일에 행하던 것을 고쳐 공자 탄신을 음 827일로 간주하여 이날에 석전을 행하게 되었다. 석전의 시각은 고대에는 밤 축시오각(丑時五刻)으로 하였던 것이나 현재 전주 향교에서는 정오 15분에 석전제(釋奠祭)를 시작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사정에 따라 다소 늦기도 한다.

 

유교를 통치이념으로 표방한 조선왕조는 사전(事典)을 크게 대··소로 나누었다. 종묘와 사직을 대사(大祀)에 넣고 공자에 대한 제례를 중사(中士)에 넣어 중시하였다. 향교가 교육기관으로서의 절대적 권위를 가지는 것은 바로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을 봉사(奉祀)하는 문묘(文廟)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문묘는 유학의 상징이었다. 왕도 향교 앞을 행차할 때는 하마(下馬)하거나 하가(下駕)하여야 했다. 그리고 감사가 군현(郡縣)을 순행할 때 수령이 도입하고 임금이 밀릴 때에 반드시 행하여야 할 의례가 문묘에의 알성(謁聖)이었다. 문묘를 성묘로 신성시하고 문묘에 대한 훼손이나 위판의 도난 등을 각 고을 객사에 봉안한 전패(殿牌)에 대한 모독과 같은 강상지변(綱常之變)으로 간주하여 수령을 파직하거나 심하면 고을을 항읍(降邑)하기도 하였다.

 

문묘에 대한 제례는 정기적인 것과 부정기적인 것으로 나눌 수 있다. 정기적인 것은 2, 8월의 상정일(上丁日)에 거행하는 가장 큰 제례인 석전제(釋奠祭)와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거행하는 삭망 분향 제(朔望 焚香 祭)가 있다. 부정기적인 것은 향교의 건물을 수리할 때 위패를 다른 곳으로 옮기면서 전후로 거행하는 이안제(移安祭)와 환안제(還安祭), 문묘에 불시의 재난(도난, 화재, 뇌우등)을 입었을 때의 위안제, 문묘에 위패를 새로이 봉안하거나 제외할 때의 예성제(禮成祭)등이 있었다. 대체로 석전제와 예성제는 수령이 친행(親行)하고 나머지 제례는 교임과 지방 양반들이 거행하였다. 16세기 후반 서원의 보급과 함께 향교의 교육적 기능은 상대적으로 더욱 위축되어 갔으나 이에 반하여 향교의 제례적 기능은 오히려 강화되었다. 그리하여향교에서 가장 존귀한 것이 성묘(聖廟)이고 가장귀중한 것이 향사하는 예법이다라고 하였고, 최근에 이르러향교는 제례에만 치중하니 공자의 사당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오게 되었다.

▲ 봉화향교의 석전제 모습   

  

제관(祭官)은 헌관(獻官), 전예관(典禮官), 제집사(諸執事), 알자(謁者), 찬인(贊引)등으로 구분된다. 헌관(獻官)은 공자 이하 4성에 술잔을 올리는 제관으로서초헌관(初獻官),아헌관(亞獻官),종헌관(終獻官)의 각 1인이 있고 동서로 종향(從享)된 설위(設位)에 잔을 올리는 분헌관(分獻官)이 있다. 중설위(中設位)와 소설위(小設位)의 종향설위의 차이에 따른 전예관(典禮官)은 제사의 진행을 맡아서 홀()을 부르는집예(執禮), 축문(祝文)을 읽는 대축(大祝), 제수(祭需)의 진설(陳設)을 맡은진설관(陳設官)이 각 1명씩이 있다. 집사는 전내집사(殿內執事)와 전외집사(殿外執事)로 구분되는데 전래 집사는 대성 전안에 제사를 지내는데 필요한 집사이다. 전외집사는 동·서무종향된 설위에 제사하는 집사와 서재집사(西齋執事)가 있다. 전래 집사는 술독이 술병을 맡아 헌관에게 술을 따라 드리는사준(司樽)과 향을 받드는봉향(奉香), 향로(香爐)를 받드는향로(奉爐), 술잔을 받드는봉작(奉爵)이 각 1인이 있다. 전외집사에는찬인(贊引)」「찬창(贊唱)」「찬알(贊謁)이 있는데 찬창은 집례가 홀을 부를 때에 뒤따라서 재창하는 임원으로 1인을 둔다. 찬알은 알자(謁者)라고도 하는데 행사의 시종을 고하고 헌관을 인도하는 임원으로 1인을 둔다. 찬인은 제집사와 유생들을 인도하는 임원으로서 소설위(小設位)의 경우에는 1인 중설위(中設位)의 경우에는 3인을 둔다. 제관분정(祭官分定)은 당시 향교의 운영을 장관(掌管)하는 전교(全校), 재장(齋長), 도유사(都有司)가 장의(葬儀) 또는 유생회의(儒生會議)를 거쳐 제관선정(祭官選定)의 결의에 따라 석전일의 1주일 전에 통고한다. 전에는 제관에 피선(被選)되는 사람은 잔치 수일 전부터 음주(飮酒)와 가무(歌舞)를 삼가고 적상문병(吊喪問病)을 하지 않으며 군수 목사는 형살치죄(刑殺治罪) 등 모든 악사(惡事)에 참관하지 않고 제전(祭前) 2일 동안 목욕재계를 하고 제소(祭所)에서 숙박치제(宿泊致齊)를 하였다.

 

▲ 혼백이 오가는 신도길     

  

현재는 이러한 치성은 보기 드물다. 제관들이 입는 제복은 소임(所任)에 따라 다르다 즉 헌관(獻官)은 제복이라 하여 위모관(偉帽冠)에 조복(朝服)과 같은 것을 입고 분헌관(分獻官)은 사모관대(紗帽冠帶)를 두른 관복을 입는다. 이처럼 조복이나 관복을 제복으로 하는 것은 공자를 대성지성문선왕(大成至聖文宣王)이라는 왕호를 붙이었기 때문에 왕 앞에 관복으로 진배(進拜)하는 것이다. 그리고 헌관은 혁포화(革布靴)를 신고 상아(象牙)나 목()으로 된 홀()을 잡는다. 집예(執禮), 대축(大祝)은 청색과 백색 도복을 입고, 집사들은 흑색 유건을 쓰고 흑색 도복을 입는다. 제복은 청의(靑衣), 적상(赤裳), 백중단(白中單)으로 되어있다. 

▲ 대성전 실내에진설된 음식과 위패  

  

문묘의 제사 때 쓰는 제기(祭器)는 고대의 제례에 쓰던 변수(籩豆)를 지금까지 사용하고 있다. ()은 대나무로 만든 죽기(竹器)요 두()는 나무로 만든 목기(木器)다 변기(籩器)는 신위의 좌변진설(左邊陳設)에 쓰고 목기(木器)는 신위의 우변진설(右邊陳設)에 쓴다. 신위(神位)의 정면 중앙에 조(,), 기장(), 피쌀()4가지 곡물을 올리는데 좌편의 백미와 수수는 모나게 만든 방형의 ()를 쓰고 우편의 기장과 피살은 둥글게 원형으로 된 ()를 사용한다. 이는 천지 음양의 이치를 좌우에 상징(象徵)하는 것이 다 좌편의 변기에는 건포(乾脯)와 과물(果物)등 마른 식물(食物)을 담고 우편의 두기(豆器)에는 젓갈이나 채류(菜類)로 된 김치 등 물기 있는 식물(食物)을 쓰는 것도 음양이치(陰陽理致)의 나눠짐을 적응시키는 것이다. 술을 올리는데도 인공(人工)을 가()한 단술(釀齋) 청주(盎齋)와 더불어 자연수(自然水)로 된 명수(明水)와 현주(玄酒)를 쓴다. 술을 담는 그릇도 소를 모형한 희준(犧罇)과 코끼리를 모형한 상준(象罇), 산을 그린 산준(山罇)의 세 가지를 갖추어 쓰게 된다. 술잔도 용 모양으로 된 용작(龍勺)을 갖추어야 한다.

 

공자와 안(), (), (), ()5성에는 폐백(幣帛)을 드리고 희생(犧牲)을 알린다. 폐백은 보통 창호지(窓戶紙)로 대용하고 공자에게 올리는 양성(羊腥, 염소머리)은 생계(生鷄)로 대용하고 4성에게 올리는 돈성(豚腥)은 저육(豬肉)을 쓴다. 예제(禮祭)에 규정된 녹포(鹿脯), 사슴 고기포는 쇠고기 포(牛肉脯)로 대용하고 녹해(鹿醢), 사슴고기 젓갈은 소의 허파로 대용하며 면해(免醢)는 새우젓갈로 대용할 수밖에 없다. 봉자(棒子), 깨금은 은행으로 능인(菱仁), 마람은 호도로 대용하는 등 형편에 따라고 하기 어려운 것은 모두 대용하고 있다.

 

제수(祭需)는 진설도(陳設圖)에 나타난 것을 갖추어야 한다. 이상은 공자의 설위전(設位前)에 제사하는 진설(陳設)과 그 밖에 전내좌우(殿內左右)와 전외동서무(殿外東西廡)에 종향(從享)하는 사위(祀位)에 제사하는 진설(陳設)은 따로 표시한 진설도(陳設圖)처럼 아주 간략하게 되어있다. 제사에 필요한 기물(器物)은 변(), (), (), () 외에 술잔, 잔대 술동이, 조육상(俎肉床), 향촉(香燭), 향합(香盒), 촉태(燭台), 축판(祝板), 축고(), 세면기(洗面器) 등이 있다.

 

제향의식(祭享儀式)은 그 절차가 매우 엄격하다. 초헌관(初獻官)이 알자(謁者)의 안내를 받아 전내(殿內)의 진설(陳設)을 점검한 뒤 제관(祭官)들이 명륜당에 모여 제복(祭服)을 입고 알자와 찬인(贊引)의 안내를 받아 대성전으로 들어간다. 대성전으로 들어간 헌관(獻官)이나 집사(執事)들은 각각 자기 위치에 배열하고 모두 함께 신위(神位)를 향해 사배(四拜)를 한 뒤 각자 신위 앞에 나아가서 공자로부터 사성의 신위에 차례로 분향하고 폐백(幣帛)을 드린다. 술잔을 올리는 데도 봉향(奉香)이 향을 받들고 봉작(奉爵)이 술잔을 받들면 사준(司樽)이 술병을 들어 술을 따르고 봉작이 술잔을 받아서 신위에 올리게 된다. 헌관은 술잔을 신위 앞에 올리는 동안 신위 앞에 꿇어앉았다가 일어나며 4배를 한다. 이때 나아가고 물러가는 일동일정(一動一靜)이 모두 집예(執禮)과 찬알(贊謁)이 홀기(笏記)에 적힌 행례절차(行禮節次)를 부르는 대로 행한다. 초헌관이 잔을 올리면 대축(大祝)이 축문을 읽는다. 삼헌관(三獻官)5성에 폐백과 술잔을 올리는 삼헌예(三獻禮)가 끝나고 분헌관들이 좌우에 배열된 종향 신위에 술잔을 올리는 분헌례가 끝나면 초헌관이 다시 신위 앞에 나아가서 신위에 올렸던 술잔과 조육(胙肉)을 받아서 음복(飮福)한다. 이는 신에게 복전(福田)을 받는다는 뜻에서 음복수조예(飮福受胙禮)라고한다. 이 예가 끝나면 초헌관이 축문과 폐백을 대성전 밖 서쪽에 불사르는 망예예(望瘞禮)가 있으며 이 망예례 뒤에 제관 학생 일동이 신위를 향하여 4배하고 물러남으로써 석전(釋奠)의 의례가 모두 끝나게 된다. 

▲ 석전대제일 남녀 혼성제관  

  

제례의식은 처음과 마침이 모두 홀기의 내용에 따라 행한다. 이 석전제에 주락(奏樂)이 뒤따르는데 지금은 성균관의 석전제에서만이 주악과 춤이 따르고 지방에서는 없어진 지가 오래 된다고 한다. 전주 향교 석전제에는 대학의 국악과 학생들이 참여하기도 한다. 석전제의 축문에 중국 연호를 썼으나 지금은 이를 없애고 단기년호(檀紀年號)를 쓴다. 그리고 옛날에는 5성 앞에 드리는 축문이 각각 따로 있었는데 지금은 하나의 축문으로 되어있다. 석전의 제례가 끝나면 제관들에게는 봉송(封送)이라는 명목으로 제물을 나누어 싸주는 것이 관례로 되어있다. 그리고 제관과 유생들이 다같이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제사가 끝난 다음에 유교에 대한 계발 강연하기도 하고, 지방의 효렬(孝烈)등 유행(流行)이 높은 사람을 가리어 시상하는 창선식(彰善式)을 갖기도 한다. 한편 향교의 의례 가운데 석전제(釋奠祭)외에 삭망분향예(朔望焚香禮)가 있다. 이 의례는 향교의 유반(儒班)이 선현의 도덕과 교훈을 잠시라도 잊지 않고 추모하는 정성을 표하는 의례이다. 이 의례는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대성전에서 5성의 신위 앞에 분향한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 도배방지 이미지

많이 본 기사
1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