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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삼국유사 감통편의 내용과 특징(下)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2/04/21 [08:54]
감통편에 드러난 무불습합 현상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삼국유사 감통편의 내용과 특징(下)

감통편에 드러난 무불습합 현상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2/04/21 [08:54]

<연재순서>

()불교 신앙과 다른 종교와의 습합과정을 잘 알 수 있는 삼국유사5권 감통편

()감통편에 드러난 무불습합 현상

 

진평왕대의 무불습합을 보여주는 <선도성모수희불사>와 함께 <융천사혜성가>

 

성도성모수희불사에는 부처를 섬기며 노력을 다하면 부족한 것은 부처의 도움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 고유신앙의 산신이 불전 수리를 돕는 구성은 무속, 불교의 전형적인 협업의 모습이다. 진평왕(재위 579-631) 당시 산신과 비구니, 신사와 불전, 불상과 천신 및 산신탱화가 습합되고 있는 면을 알 수 있다. 김택규는 신라 고래의 성지이던 것이 불교와 습합된 것으로 밝힌 바 있다.

 

이대근은 산신 신앙과 불교의 습합관계는 새로운 발전과 전개의 소지를 지니게 되며, 산신이 사원에서 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산지의 가람 건립 과정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불사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비구니 지혜에게 선도산 신모가 나타나 공동으로 불사를 권유하고 있는 선도산 산신의 성이 여성이었고 이분을 모신 신사가 있었던 점을 종합 고려해 보면 지혜가 사찰에 거주한 비구니라 표현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선도 산신을 모시는 무당이다. 선도산에 있는 성모의 도움으로 지혜라는 비구니가 수리한 불전에는 불상은 물론 오십삼불, 육류성중, 오악신군을 그려서 함께 신앙하고 있다는 이 설화는 불교와 도교는 물론 우리 민족의 시원 단군이라고 주장되는 신선 사상이 포함되어 있다.

 

김재경이 주장하는 무당의 불사를 사찰형식으로 창건하는 모습은 현재 한국불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무불습합종단, 승려의 모습과 유사하다.

 

무불습합종단은 무속인(무당, 박수, 철학관 운영자 포함)들에 의해 창교된 종단은 물론 대부분 한국불교에서 드러나는 현상이다. 진평왕대의 <선도성수희불사> 설화는 불교를 고대 무속적 토착 신앙과 관련되어 받아들이는 무불습합적 이식구조를 보여준다. 진평왕대의 무불습합을 보여주는 <선도성모수희불사>와 함께 <융천사혜성가>가 있다.

 

융천사혜성가

 

5 거열랑(居烈郞), 6 설처랑(實處郞; 혹은 돌처랑突處郞이라고도 씀), 7 보동랑(寶同郞) 등 세 화랑의 무리가 풍악(風岳)에 놀러 가려고 하는데 혜성(慧星)이 심대성(心大星)을 범하였다. 낭도(郎徒)들은 이를 의아스럽게 생각하고 그 여행을 중지하려고 했다. 이때 융천사(融天寺)가 노래를 지어 부르자 별의 괴변은 즉시 사라지고 일본(日本) 군사가 제 나라로 돌아가니 도리어 경사가 되었다. 이러한 노래를 지어서 부른 융천사의 신분이 승려인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지만, 무당처럼 노래을 통해 천기나 천체의 운행을 조절하고 융화할 뿐만 아니라 천지에 호응하여 하늘을 감동시키고 교화시킬 수 있는 탁월한 능력을 지녔으며 국가적인 위기가 닥쳐왔을 때 세 화랑을 보좌하여 향가를 지어 그 위기를 타개하는 낭승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용천사의 노래는 당시 신라 사람들이 향가를 숭상한 지 오래되었으니 대개 시·송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따금 천지와 귀신을 감동시킨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결국 용천사만이 특별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다. 그의 신분을 단정하기는 어렵다. 다만 <선도성모수희불사>와 융천사의 <혜성가>의 설화를 통해서 신라의 토착적인 산신신앙이 불교와 융합되는 무불습합적인 모습을 볼 수 있으며, 불교의 힘을 빌려 왕권을 유지하고 국가를 외적으로부터 지켜나가는 호국불교로서의 성격도 뚜렷하게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불습합은 일본의 신불습합에서 그 기원을 찾기도 하지만 최병헌은 한국불교의 역사적 성격론에서 한국 역사에서의 무불습합과 비교 고찰하는 작업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를 통하여 중국이나 일본의 불교와 구별되는 한국불교의 특성을 드러나게 된다.는 주장은 할 수 있다.

 

선도성모수희불사

 

진평왕(眞平王) 때 지혜(智惠)라는 비구니(比丘尼)가 있어 어진 행실이 많았다. 안흥사(安興寺)에 살았는데 새로 불전(佛殿)을 수리하려 했지만 힘이 모자랐다. 어느날 꿈에 모양이 아름답고 구슬로 머리를 장식한 한 선녀가 와서 그를 위로해 말했다. "나는 바로 선도산(仙桃山) 신모(神母)인데 네게 불전을 수리하려 하는 것을 기쁘게 생각하여 금 10근을 주어 돕고자 한다. 내가 있는 자리 밑에서 금을 꺼내서 주존(主尊) 삼상(三像)을 장식하고 벽 위에는 오삼불(五三佛) 육류성중(六類聖衆) 및 모든 천신(天神)과 오악(五岳)의 신군(神君; 신라 때의 오악五岳의 토함산吐含山, 의 지리산智異山, 西의 계룡산鷄龍山, 의 태백산太伯山, 중앙中央의 부악父岳, 또는 공산公山이다)을 그리고, 해마다 봄과 가을의 10일에 남녀 신도들을 많이 모아 널리 모든 함령(含靈)을 위해서 점찰법회(占擦法會)를 베푸는 것으로써 일정한 규정을 삼도록 하라....지혜가 놀라 꿈에서 깨어 무리들을 데리고 신사(神祀) 자리 밑에 가서, 황금 160냥을 파내어 불전 수리하는 일을 완성했으니, 이는 모두 신모(神母)가 시키는 대로 따랐던 것이다.

 

성모 신은 신라 시조의 모신(母神)으로 향전될 정도로 신라인의 신봉을 받았고, 영이 많은 국가진호신으로서 신라의 건국 이래 3사의 한 곳으로 봉사된 여신이다. 선도산의 성모 신은 사원의 소리에 황금을 시주하여 지원하고, 붓다와 함께 천신급오악신군을 봉사하고, 다시 점찰법회를 정례적으로 개설하라고 종용한다. 바로 신과 불을 함께 유지하려는 신라인의 의지 표현이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도교와 무속, 도교와 불교의 아름다운 교류사라 주장하고 있다. 현대에서 선도산(=서악)은 다종교 기도처가 되었다. 신모가 중국 왕실의 딸이라 한 것은 가락국 수로왕의 왕후 허왕후가 아유타국 공주라 한 것과 그 전설이 비숫하다. 이것은 고대 우리 민족은 선진문화 지역에서 한반도에 이주하여 정착하였음을 말하는 이같은 설화구조는 환웅이 인간 세상을 욕심을 내자 그의 아버지가 삼위태백을 내려다보니 인간을 널리 이롭게 할 만한지라 이에 천부인 세계를 주어 내려가 다스리게 했다. 한반도 최초의 건국신화에서도 이주민들의 이와 유사한 정착설화가 등장하고 있다. 그러나 마냥 이민사로만 볼 수 없는 것이 김수로왕에게 밝힌 아유타국 공주라는 신분은 조선 중기 정조 16(1792) 김수로왕 릉 주변에 들어서는 건축물에 처음 등장하는 상어문 문양이 조각되면서 설화적 요소가 사실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이 지금의 역사가 되었다. 인도의 아유타지명 중국의 보주라는 지역을 거쳐 태국의 아유타국까지 다양하고 폭넓게 허왕후의 출생지를 찾는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가락국 건국 시기에 해양과 육로를 통해 인도와 김해 가락국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허황옥이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으로부터 와서 가락국 건국에 참여했고 수로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전승되어 오다 통일기 이후 불교가 융성해 지면서 허황옥이 인도의 아유타국, 아니면 인도에서 왔다고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 김해 민속박물관 앞 정원의 허황옥 상. 가락국 건국 시기에 인도와 김해 가락국 사이에 직접적인 교류가 있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허황옥이 수로와 결혼했다는 이야기가 전승되어 오다 통일기 이후 불교가 융성해 지면서 허황옥이 인도의 아유타국, 아니면 인도에서 왔다고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허왕후가 왔다는 지명을 중심으로 찾아보면 허왕후가 실제 기원전 3세기경 갠지스강 중류 지대에서 크게 번성하였던 불교 왕조인 아요디아에서 왔다는 설, 인도 아요디아에서 중국 사찬성 보주(普州) 일대로 옮겨와 살던 브라만 집단의 일부가 양쯔강을 타고 동진하여 서해를 거쳐 가락국으로 이주설, 1350년경 시암(siam)왕국의 두 번째 수도 주장이다. 아유타야는 타이의 수도 방콕 북쪽에 있으며 불멸(사라지지 않는다)이란 뜻의 오래된 도시다. 아유타가 태국에 실재하였던 지명설이다. 이 왕조를 불교를 숭배했던 우롱 왕가가 건국한 왕국으로 40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 1767년 미얀마인들에 의해 지배되면서 파괴되어 200여 년 동안 잊혀 있던 도시다.

 

허왕후가 189년에 실제로 돌아갔다고 인정하더라고, ‘보주태후는 그로부터 1300년이 지난 후에 처음 사용되었기 때문에 용례는 처음 사용되었던 당시의 인식에 따르는 것이 더 합당하다.

 

불교에서는 붓다를 보지자普知者라 하고, 불법을 보법普法이라고 하며, 붓다를 숭배하는 것을 보례普禮라고 한다. 따라서보주불교의 땅을 말하는 것은 중국의 특정 지명으로 보주가 아니라 불교의 땅’(아유디아)에서 온 왕후란 의미다. 이것도 인도라고 전재했을 때 성립된다. 허왕후는 인도의 아요디아 왕조가 기원 1세기 이전에 지금의 태국 방콕에 건설한 식민국이었던 아유타야에서 왔다.는 주장 등이다.

 

정수,경흥 하늘의 소리를 듣다

 

빙녀정수

 

부처의 제자로서 바른 수행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해준다. <빙녀정수>조는 경주 시내를 벌거벗고 달려야 했던 정수스님 이야기다. 황룡사에 거주하는 정수가 삼랑사에서 돌아오다가 천엄사 문밖에 걸인 여성이 아이를 낳고 누워서 얼어 죽게 되었다. 산달에 여인이 다른 곳도 아닌 절문 앞에서 아이를 낳고 죽어가는 모습은 상상하기 힘들다. 만삭의 여인이 절 문 앞에 도착했고 그곳에서 아이를 낳을 때 많은 생각이 있었을 것이다. 절은 그녀에게 마지막 희망의 끈인지 모른다. 그러나 긴 진통 그리고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천엄사 사중식구 누구도 내다보지 않았다. 그곳을 지나는 정수에게 눈에 띄었고 그는 자신의 옷을 벗고 그녀를 자신의 체온으로 녹여주었다. 그가 아니였다면 고귀한 두 명의 생명은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누가 그 광경을 보았고 그 소문이 장안에 퍼져 애장왕 귀에 들어갔을 것이다. 그것이 정수사의 이야기 요체다. 가난하고 헐벗은 사람들조차 눈길을 주지 못하는 종교의 모습에 대한 깊은 질책이다. 걸인 여인의 신분과 관련 부처의 진신이 걸인으로 화현하여 사람이 지위를 얻기 전에 먼저 시험에 통과하게 한다. 불법의 계율인 그 색욕의 유혹을 극복하고 파계하지 않는 사람만이 사회적 지위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낮은 곳을 행해 내려올 것만 말하지 않고 있다. 그들을 가슴으로 품으라는 주문이 담겨있다. “중생이 아프니 내가 아프다의 경구처럼 권위적이지 말고 내려와 그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정수 스님을 왕사로 삼으라는 하늘의 소리는 하늘이란 공간적 목소리가 아니다.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소리다. 세상은 불편부당하다. 그것은 과거뿐 아니라 현재, 미래에도 인간 사는 곳에서는 끊임없이 일어나는 일이다. 그것을 잊지않고 살 것을 방편의 예시를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경흥우성조

 

삼국유사감통편 경흥우성조는 경흥의 생애를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앞부분은 경흥의 간단한 생애와 11면 관음보살, 문수보살을 만나는 설화 등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뒷부분은 그 가운데 문수보살 설화에 대한 일연의 언급과 찬으로 구성되어 있다.

 

두 가지 설화 또한 경흥의 삶의 궤적에 맞추어 기재되어 있다. 경흥은 백제의 웅천주에서 출생했다. 18세에 출가하여 경··론 삼장에 통달하였다. 백제가 신라에 의해 멸망된 이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그의 신분은 자연스럽게 신라인이 되었다. 신라 문무왕이 경흥을 국사로 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아들 신문왕은 즉위 초 경흥을 국로로 삼았다. 이와같은 역사적 배경을 중심으로 경흥의 생애를 구성해 보면. 신라 지도층, 승려, 일반 서민들로부터 질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었다면 백제 유민의 입장도 있었을 것이다. 백제를 멸망시킨 신라에 국로가 된 경흥 그의 마음도 편치 않을 것이다.

 

경흥의 고민을 관음보살이 착한 벗이 되어 고쳐주었다는 설화와 경흥의 사치스러운 행동을 깨우친 문수보살 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신문왕이 즉위하여 국로(國老)로 책봉된 후 삼낭사(三郎寺)에 살게 했는데 갑자기 병이 들어 한 달이나 되었다. 이때 여승 하나가 와서 그에게 문안하고 <화엄경(華嚴經)> 속의 '착한 벗이 병을 고쳐 준다.'는 말을 얘기하고 말했다. "지금 스님의 병은 근심으로써 생긴 것이니, 기쁘게 웃으면 나을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고 열한 가지 모습을 지어 저마다 각각 우스운 춤을 추게 하니, 그 모습은 뾰족하기도 하고 깎은듯도 하여 그 변하는 형용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어 모두 우스워서 턱이 빠질 지경이었다. 이에 법사의 병은 자기도 모르게 씻은 듯이 나았다. 대궐에 들어가려는 경흥 앞에 거사(혹은 사문)가 등장한다. 엉성한 모습에 지팡이를 짚고 등에는 마른 물고기가 담긴 광주리를 지고 있었다. 국노 경흥을 배경으로 삼는 시종이 꾸짖는다. “너는 중의 옷을 입고서 어찌 더러운 물건을 짊어지고 있느냐?” 하니 거사가 응답한다. "산 고기()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있는 것보다 삼시(三市)의 마른고기를 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 나쁘단 말인가." 말을 마치자 일어나 가 버렸다. 그는 문수보살이였다.

 

<경흥우성> 조에서 말을 타고 이동하는 경흥의 모습은 조선시대 양반가옥 구조를 보면 주인이 노비에게 지시하는 장소에서 노비의 눈높이는 주인의 발목 아랫부분이다. 그가 방안에서 지시를 하게 된다면 앉아있는 자리의 방석 부분에 해당한다. 말을 타고 다니는 경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높이는 경흥의 발 부분이다. 이들의 눈높이는 심리적으로 저항심을 느낄 수 없는 인간이 가장 모멸감을 느끼게 하는 위치다. 하늘이 경흥에게 말하는 것은 교통수단으로 말이 아니다. 권위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구조적 모순에서 자신을 낮추라는 말이다. 삼국유사 감통편에 등장하는 불보살은 현실에서 가장 낮은 곳에 초라한 모습으로 등장한다. 저자 일연이 사람을 외형으로만 판단하지 말라는 고언이다. 비속한 모습으로 나타난 불보살은 비속한 곳에 숭고한 불교적 진리가 존재할 수 있음을 보이는 것이다. 효소왕, 경흥, 정수는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 세속의 권력자 효소왕은 자신의 통 큰 양보를 자랑질하다. 석가 진신을 보지 못했다. 경흥은 출가자이면서 사문답지 못한 행동에 하늘의 소리를 듣고 정수는 그의 선행에 하늘의 소리를 들었다. 두 승려의 하늘 소리는 단순히 환청의 소리가 아니다. 당시 서민들이 기대던 성직자의 이상적 모습에 대한 그리움의 소리다. 세속과 다른 세계를 추구하지만 결국 서민들의 도움으로 생계가 이어져야 하는 모순 속에서 감사하고 고마워한 줄 아는 사문이기를 말한다.

 

우리 사회의 다종교사회, 다문화사회로의 진입은 종교 간 습합이론으로 이해 

 

감통편은 삼국유사 전 59편 가운데 뒤편에 속하는 이야기다. 저자의 의도가 중요 순으로 편집했다면 그리 중요해 보이지 않는 편이다. 그런데도 이 편이 주목받는 것은 현대 한국불교의 모습을 연구하는 기초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의 다종교사회, 다문화사회로의 진입은 종교 간 습합이론으로 이해된다.

 

이번 주제 논문으로 다루지 못한 감통편에서 정토 기도는 눈물나게 처절하고 절박함이 있다. <욱면비염불서승>은 절에서 기도하는 모습이 못마땅한 아간이라는 벼슬을 가진 귀진이 계집종 욱면에게 곡식 두 섬씩 하룻저녁에 찧게하고 욱면은 초저녁에 다 찧고는 기어코 절에 가 염불을 한다. 마당 좌우에 긴 말뚝을 세우고 두 손바닥을 뚫어 노끈으로 꿰어 말뚝 위에 매어놓고 합장하며 좌우로 움직이면서 스스로 격려하였다. 이와같은 지극한 기도에 감응한 이들이 욱면을 법당에 들어가 염불하라는 음성을 들려준다. 오래지 않아 그녀는 서쪽 하늘에서 연화대에 오른다. 욱면의 기도 모습은 백제의 부흥군끼리 반목으로 백제왕 풍장은 신복이 모반하였다고 의심하고 가죽으로 손바닥을 뚫어 묵었다. 욱면이 주인에게 손바닥을 꿰이는 등 모진 형벌을 받고 죽은 사실이 향전과 같이 망신염불의 형태로 윤색되고 욱면의 처형을 보고 구경하거나 천비의 불심에 감격하여 그녀의 정토왕생을 빈 것이라고 한다. 욱면이 기도를 통해 얻고자 했던 것은 내세 신앙이다. 기도를 통해 성취되었다는 정토 신앙의 완성이 아니라 기도만이 지금, 현실의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는 마지막 희망이 욱면의 기도에 담겨있는 것이다. 기도 만능, 제사만능이 아니라 그 당시 사람들 그리고 지금도 그런 바람은 계속되고 있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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