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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형식 목사의 지상 설교●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주형식 목사 | 기사입력 2022/05/02 [15:24]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주형식 목사의 지상 설교●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같이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주형식 목사 | 입력 : 2022/05/02 [15:24]

(시편 42:1-11) “[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2]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 앞에 뵈올꼬 [3] 사람들이 종일 나더러 하는 말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 하니 내 눈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 [4] 내가 전에 성일을 지키는 무리와 동행하여 기쁨과 찬송의 소리를 발하며 저희를 하나님의 집으로 인도하였더니 이제 이 일을 기억하고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5]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6] 내 하나님이여 내 영혼이 내 속에서 낙망이 되므로 내가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주를 기억하나이다 [7] 주의 폭포 소리에 깊은 바다가 서로 부르며 주의 파도와 물결이 나를 엄몰하도소이다 [8]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9] 내 반석이신 하나님께 말하기를 어찌하여 나를 잊으셨나이까 내가 어찌하여 원수의 압제로 인하여 슬프게 다니나이까 하리로다 [10] 내 뼈를 찌르는 칼 같이 내 대적이 나를 비방하여 늘 말하기를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도다 [11]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시편 42편의 저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혹자는 고라 자손이라고 하기도 하고, 일부 학자들은 다윗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자가 누구이든지 간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저자가 몹시 낙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5, 11, 그리고 435절을 보면 연속해서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고? 내 영혼아 어찌하여 네가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고?”

 

마음이 낙망하고 절망합니다. 4절 끝에는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내 마음이 상하는도다.”

 

마음에 고통이 너무 많아서 주체를 못합니다. 왜 이와 같은 낙망을 체험하고 있을까요? 본문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나와 있지 않지만 전후 문맥이나 이스라엘의 상황을 살펴볼 때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 저자는 눈앞에 있는 암담한 현실을 보고 낙망을 합니다. 그는 포로로 잡혀 간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었던 예루살렘에서의 행복한 삶을 빼앗겨 버리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외롭게 고통당하고 있습니다. 주변 사람들이 자기를 볼 때마다 '네 하나님이 어디 있어?'라며 빈정거리고 야유합니다.

 

또한 그는 현실 앞에 무능한 자신을 보고 절망을 합니다. 42, 43장을 보시면, 저자가 '', '나를'이라는 표현을 51회 사용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라는 말은 21회 밖에 쓰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면 ''라는 말을 이렇게 자주 사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에게 갇혀 있다는 것을 반증합니다. 자기만 쳐다보고 자기에게 매여 있습니다. 자기에게 매이면 매일수록, 자기 눈이 가려질수록 절망할 수 밖에 없습니다.

 

또 왜 절망합니까? 4절에서 보듯이 옛날과 지금을 비교하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지금 처한 환경을 서로 비교합니다. 전에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성소에 드나들면서 하나님을 찬송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행복하게 살았는데 이제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둘려 쌓여 비방을 듣고,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신세처럼 보이자 지금 자신의 처지가 너무나 한심해 보입니다.

 

사람마음이 옛날보다도 지금이 낫고 지금보다 내일이 더 좋아져야 마음이 좋지, 한때는 화려했는데 지금 신세는 너무나 초라한 것 같으면 누구나 다 낙심이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주 이러한 경험을 합니다. 사람이 절망하고 낙망하는 것은 다 비슷합니다. 그 뿌리가 똑같습니다. 암담한 현실, 무능한 내 자신, 그리고 예전과 비교해서 현재의 초라한 모습, 팔자, 이런 것들이 우리로 하여금 기를 못쓰게 만들어 버립니다.

 

우리는 낙망할 때가 자주 있습니다. 불안에 떨 때도 있습니다. 시험을 만나거나 어려움을 겪게될 경우가 있습니다. 생활이 어렵습니다. 질병으로 고통을 당합니다. 가정이 엉망진창입니다. 그런 모습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답답해집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눈을 크게 떠서 오늘의 현실을 바라봅니다. ‘세상이 계속 더러워지고 음란해지고 거짓투성이가 되고 자기만 알게 된다면 10, 20년 후에는 도대체 어떤 세상이 될까?’하는 생각을 하면 한숨이 나옵니다.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의 입장에서 우리 아이들이 이런 세상에서 자라간다면 어떻게 될까? 가정이 이렇게 걷잡을 수 없이 깨져 간다면 나중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될까? 게다가 이 세상을 구원하고 치료해야 할 교회가 세상을 감당 못하고, 거꾸로 세상에 욕을 먹고 지탄을 받는다면 어떻게 될까?

 

호주의 시드니에는 세인트 앤드류스(st. Andrew)라는 멋진 호텔 레스토랑이 있습니다. 그런데 세인트 앤드류스(St. Andrews)는 원래는 호텔 레스토랑이 아니라 교회였습니다. 이전에는 꽤 크고 유명한 교회였는데, 교인수가 점점 줄어들고 교회운영을 할 수 없게 되어서 교회건물을 팔았는데, 그 건물을 산 사람이 호텔과 레스토랑으로 꾸민 것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교회모양을 완전히 없애고 리모델링을 하면 좋은데, 교회모양을 그대로 유지해 놓고 식당을 운영한 것입니다. 일종의 영업전략인데 이렇게 해야 손님들이 많이 올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입니다. , 레스토랑에서 가장 비싼 A석은 설교자가 설교하던 강대상입니다. 제일 비싼 돈을 주고 거기서 술 마시고 음식을 주문합니다. 그 다음 비싼 자리는 B석인데 거기는 성가대가 있던 자리입니다. 이 예측은 성공해서, 실제로 그러한 좌석이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고 합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남의 이야기 같지 않습니다. 이렇게 교회가 힘을 잃어 가면 한국교회도 앞으로 20, 30년 후에 이렇게 안 된다고 누가 보장하겠습니까?

 

우리 모두 고민합니다. 그런데 낙망하는 사람은 믿음이 없는 사람인가요? 진정한 믿음은 낙망이 없나요? 불안하지 않나요? 성경을 보십시오. 위대한 믿음의 사람들치고 낙망을 경험하지 아니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믿음이 있어도 떱니다. 하나님 신실히 섬기는 사람도 불안해서 잠을 자지 못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한가지 있습니다. 낙망 때문에 하나님을 찾게 된다는 것입니다.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어떻게 반응하느냐가 중요하다.” (에머슨)

 

낙망이 될 때 내 반응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시편 기자도 너무나 낙심이 되고 불안하기에 5, 11절에서 이런 말을 반복하지 않습니까?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하나님을 바란다는 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시편 기자는 1절에서 이런 비유로 설명합니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팔레스타인은 건기가 되면 비가 잘 오지 않습니다. 더욱이 남부 지역은 거의 사막이기 때문에 비가 안 오는 때는 물 구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저자는 그렇게 가물 때 사슴 한 마리가 목이 너무나 말라서 물을 찾느라고 온 사방을 누비고 다니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루 종일 여기저기 골짜기마다 다니면서 물을 찾는 모습을 본 일이 있었나 봅니다. 그것을 연상하는 것입니다.

 

사슴의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집요합니까? 얼마나 간절합니까? 물 아니면 죽음입니다. 물을 찾으면 살고, 못 찾으면 죽습니다. 얼마나 절박합니까? 그러니 물을 찾을 때까지 쉬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찾을 때는 사슴처럼 저런 식으로 찾아야 되겠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 방법이 무엇입니까? ‘하나님 아니면 죽음이다라는 심정입니다.

 

이런 심정을 가졌던 사람 중의 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던 때의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모든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분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십니다. 막달라 마리아가 낙심했습니다. 안식 후 첫날, 무덤을 향해 달려갑니다. “죽은 시체라도 보자

 

얼마나 절박한 심정으로 찾아 갔을까요? 그런데 가서 보니 시체가 없습니다. 같이 갔던 여자들이 다 실망하고 가 버립니다. 그러나 막달라 마리아는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시체라도 보아야 돼. 이대로 떠날 수가 없어.” 그리고는 무덤 밖에 바위를 움켜 안고 흐느끼며 울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주님을 찾는 자의 심정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그에게 아름다운 선물을 주셨습니까?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위임 받으신 주님이 제자들보다도 먼저 막달라 마리아를 찾아 와서 '마리아야' 하고 불러 주셨습니다. 이런 심정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야 축복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갈망하는 법칙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적당히 성경을 들추고서 한두 장 읽는 게 아닙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폅니다. 절박한 마음으로 설교를 듣습니다.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에스겔 골짜기에 마른 뼈다귀들이 생명을 얻어 일어나지 않습니까? 이런 권세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박한 심정으로 사모해야 됩니다.

 

둘째는, 문이 열릴 때까지 끈질기게 기도하며 두드리는 것입니다. 한두 번 적당히 기도하고서 '하나님이 응답 안 하시더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자식을 낳지 못해서 상처받고 한이 서린 여인 한나를 보십시오. 얼마나 하나님을 간절하게 찾았던지 아무도 없는 성소 안에서 몇 시간이고 일어날 줄 모르고 중얼중얼 기도하는 것을 보고 엘리가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저 여자가 술에 취했다고 그랬습니다.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습니까?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 엎드렸을 때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이런 기도를 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3:25,26) "무릇 기다리는 자에게나 기도하면서 기다리는 자, 여호와께 구하는 자에게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시는도다. 사람이 여호와를 바라보며 잠잠히 기다림이 좋도다."

 

기도는 인내하는 것입니다. 내 기분대로 금방 어떤 응답이 오리라고 생각하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기도는 기다리는 것입니다. 조급함을 가지고 기도하면 안됩니다.

 

세번째는 믿음의 공동체에다 나 자신을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음의 공동체가 있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공동체는 이렇게 예배드리는 공동체입니다. 소그룹에서 하나님의 말씀 펴놓고 함께 둘러앉는 것 또한 소중한 공동체입니다. 그밖의 여러 모임들도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예수님이 함께 하시는 성도들의 모임, 이것이 공동체입니다.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목양이 이루어져야지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있습니다. 상처를 치유받지 못한 성도들이 모인 교회는 건강한 교회가 될 수 없습니다. 이 공동체에 자기를 맡기십시오. 솔직히 정말 가슴이 무너지면 기도가 잘 안됩니다. 무슨 말로 기도해야 될 지 기도가 나오지를 않습니다. 성경을 펴도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려움이 크면 클수록 공동체에다가 자기를 맡겨야 합니다. 형제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시간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수 있습니다. 형제들과 더불어 하나님의 말씀을 펴 놓고 이야기를 들으면서, 또 그들이 함께 자기를 위해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이 나를 치유하시는 놀라운 손길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모이기를 즐겨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게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갈급하여 하나님을 찾자 하나님이 오늘 시편 저자에게 어떤 은혜를 주셨습니까? 5절 끝에나, 11절 끝에 참 아름다운 말씀이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11절 끝에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히 사모하고, 기도로 사모하고, 공동체에 자기를 맡기며 사모했더니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습니다. “내 얼굴을 도우셨다는 말씀의 원 뜻은 내 얼굴을 들게 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낙심이 되고 눈앞이 캄캄해지면 고개가 자꾸 숙여지지 않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을 간절히 찾으면 하나님이 그 사람 얼굴을 들게 만듭니다. 소망을 갖게 하신다는 말입니다. 도와주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셨습니다.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50:15).

 

이 약속이 내 삶에서 실제로 자주 벌어지는 것이 내 믿음이 커지는 비결입니다. 응답이 금방 없다고 해서 하나님이 잠잠하시거나 무능하신 것이 아닙니다. 응답은 하나님의 주권에 달렸습니다.

 

현실은 우리를 자주 낙망케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을 바라고 사슴이 시냇물을 찾듯이 하나님을 찾습니다. 말씀을 붙들고 그분의 음성 듣기를 사모합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 앞에 매달립니다. 공동체 속에서 은혜 받기를 기다립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매달리기를 바랍니다. 기도에 매달리기를 바랍니다. 예배와 소그룹에 매달리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여러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습니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망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하여 하는고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나는 내 얼굴을 도우시는 내 하나님을 오히려 찬송하리로다."아멘. 

 

주형식 목사는 다수의 교회와 교단행정직에서 봉사를 하다가 미국 미시간주에 위치한 Andrews Theological Seminary에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를 취득한 후 귀국하여 현재 묵동교회 담임목사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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