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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㉓ 달마대사 제자 만나 인도 명상법 전해 줘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06/06 [08:43]
중국 선종 창시하고 혜가에게 법맥 상승, 담림에게 《이입사행론》 구술 편찬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㉓ 달마대사 제자 만나 인도 명상법 전해 줘

중국 선종 창시하고 혜가에게 법맥 상승, 담림에게 《이입사행론》 구술 편찬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06/06 [08:43]

중국 선종 창시하고 혜가에게 법맥 상승, 담림에게 이입사행론구술 편찬 

 

달마대사는 소림굴에서 9년간 면벽했는데, 극히 소수의 승려들이 동굴에서 인도의 한 승려가 벽을 보고 명상을 한다는 소문을 듣고 달마를 찾아왔다. 달마대사는 벽관을 수행을 하고 있었다. 이른바 벽관(璧觀)은 선종(禪宗)에서 매우 중요한 전통이 된다. 이 소문이 서서히 알려지기 시작했다. 수행자들이 간간히 찾아 왔으나, 달마는 이들을 거들 떠 보지도 않았다. 드디어 혜가((慧可,487~593)라는 승려가 달마를 찾아와서 제자가 되겠다고 애원하면서 끝까지 버텼다.

 

혜가는 하남성 영양현 사람인데, 속명이 희광(姬光)이며 호는 신광(神光)이다. 중국 선종의 2()가 되며 당나라 덕종은 혜가를 대홍선사(大弘禪師)라고 불렀으며 탑명은 대화지탑(大和之塔)이라 하고 정종보각대사(正宗普覺大師) 대조선사(大祖禪師)라고 시호를 내렸다.

▲ 제자 혜가가 달마대사에게 그의 팔을 잘라 올리는 장면으로 일본 무로마치 시대(1496년) 세수 토요(雪舟 等楊)가 그렸다.

 

혜가는 젊었을 때에는 노장(老莊)의 전적과 불전을 공부하고 후에 뤄양의 용문(龍門) 향산(香山)에 가서 보정선사(寶靜禪師)를 따라 출가하여 영목사(永穆寺)에서 계를 받았다. 그 후 각지를 편력하며 내외의 고명한 학문을 접하고 지식을 넓혔다. 32세에 다시 향산에 돌아가 8년간명상으로 보냈다. 520년 인도에서 온 한 승려가 동굴에서 벽을 쳐다보면서 참선만 한다는 소문을 듣고 숭산 소림사를 찾아가서 선종의 제1대조인 보리달마의 제자가 되어 이 곳에서 8년 동안 수도에 정진하였다.

 

처음에 달마를 찾았을 때 쉽사리 입실을 허락받지 못하자 무릎이 빠질 만큼 쌓인 눈 속에 서서 밤을 새워 끝내는 자기의 팔을 잘라 구도를 위하여서는 신명을 아끼지 않는 정신을 보임으로써 하락을 받았다는 전설은 유명하다. 이것을 천강홍설(天降紅雪)이라고 하는데, 매우 유명한 말이다. 하늘에서 붉은 눈발이 날렸다는 말인데, 팔을 자르니 선혈이 튀면서 눈을 적시니 붉은 눈발이 된 것이다,

 

달마대사에 대한 두 번째 문헌 소스는 제자였던 담림(曇林;506574)이 달마대사의 구술을 받아 적은 이입사행론(理入四行論)이다. 선종에서 이치와 일치하는 경지를 이입(理入)이라 하며, 보원행·수연행·무소구행·칭법행을 사행론(四行論)이라 한다.

 

이입사행론에 따르면 도에 들어가는 길이 여러 가지로 많지만 요약하면 이입(理入)과 행입(行入)의 두 가지를 벗어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이입이란 중생은 누구나 참된 마음바탕인 진성(眞性)을 가지고 있으나 번뇌 망상에 뒤덮여서 잘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믿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그와 같은 전제 아래 망념을 버리고 몸과 마음을 집중하여 벽관(壁觀)을 행하면 무념무심(無念無心)이 되어 자타(自他)와 범성(凡聖)에 대한 분별이 없어지고 글이나 말에 끌려 다니는 일이 없게 된다. 그리하여 이치와 일치하는 경지에 이르게 되는 고요하기 그지없는 무위(無爲)의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이입은 선종에서 천명하는 돈오사상(頓悟思想)의 모체가 되었다.

▲ 북송(北宋)때의 화가 석각(石恪)이 그린 《이조조심도(二祖調心圖)》

  

사행론은 첫째는 보원행(報怨行)이다. 이 보원행은 과거에 지은 잘못을 갚는 행위로서, 수도하는 자가 갖가지 고난을 당할 때 마땅히 다음과 같이 반성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

 

둘째는 인연을 따라서 행하는 수연행(隨緣行)이다. 모든 중생은 변하지 않는 개체가 아니라 연분(緣分)의 힘으로 전개되는 존재이다. 따라서 중생에게 따르는 고()와 낙()은 모두 인연을 따라서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셋째는 아무 것도 가지려 하지 않는 무소구행(無所求行)이다. 세상 사람들은 오랫동안 미혹에 빠져 가는 곳마다 욕심을 내고 집착을 한다. 이것을 일컬어 구한다고 한다. 그러나 지혜 있는 사람은 진성을 깨닫고 이치가 본질적으로 세속의 것이 아님을 알아서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억지로 구하려는 생각 없이 세상 돌아가는 대로 맡기고, 일체가 다 공()임을 알아서 쾌락을 즐기려는 욕심마저 가지지 않는 것이다. , 세속적인 것에 대한 허망한 욕심을 버리고 가지고자 함이 없는 것을 무소구행이라고 한다.

 

넷째는 법에 맞게 사는 행위인 칭법행(稱法行)이다. 이때의 법이란 중생들의 본래 성품이 다 청정무구한 것을 밝힌 이치를 뜻한다. 이 이치에 따르면 모든 외형적이고 인위적인 상()은 곧 공한 것이 되고, 무엇에 의하여 얽히거나 물듦이 없으며, 그 어떤 것에 대한 애착도 가지지 않게 된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이치에 의거하여 육체와 생명과 재물로써 보시(布施)의 덕을 실천하되 조금도 아끼고 아쉬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게 되며, 완전한 자리행(自利行)과 이타행(利他行)을 실천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입사행론을 구술 받아서 편찬한 담림선사(曇林禪師)는 호가 법림(法林)인데 달마 문하에서 혜가 대사와 동문수학했다. 담림은 명상을 하는 선승이면서도 교학에 능했던 것 같다.

 

담림의 기록에 의하면 법사(보디다르마)는 서역의 남인도 분이다. 그는 인도대왕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는 대승의 길을 걷기 위하여 하얀 옷을 벗고 검은 옷(가사)을 입은 승려가 되었다. 인도 밖의 나라에서 부처님의 참 가르침이 쇠퇴한 것을 한탄하여 먼 산과 바다를 건너 여행하면서 한나라와 위나라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파했다.”라고 하였다.

 

담림의 기록을 보면 양현지의 낙양가람기에서 보리달마를 서역의 페르시아인으로 묘사한 것보다는 서역의 남인도 왕자로 적고 있다. 담림은 달마 문하에서 직접 공부를 했기 때문에 양현지의 기록보다는 더 정확하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담림은 보리달마 대사의 제자들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특히 도육(道育)과 혜가(慧可)를 언급하고 있는데, 달마 대사의 문헌에서 혜가가 더 부각되고 있다. 일부에서는 담림이 혜가의 제자가 아닌지 모르겠다고 추측하고 있다. 당나라 정각선사(淨覺禪師, 683750)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의 서문에서 달마 대사는 서역의 남인도에서 왔으며, 바라문 왕의 세 번 째 왕자이다라고 기록했다.

▲ 고오타마 부처님이 라와나(羅刹)의 권청에 의하여 스리랑카 섬에 가서 대승불교를 설했다고 한다.

 

능가사자기는 중국 초기 선종의 등사(燈史)인 선종의 역사서이다. 중국 초기 선종은 능가경(楞伽經)을 소의 경전으로 삼았으며, 번역자는 구나발타라(求那跋陀羅)이다. 능가경은 랑카와타라 수트라(Laṅkāvatāra Sūtra)인데, 후기 대승불교의 경전이다. 여래장사상(如来蔵思想)과 유식사상(唯識思想)을 설명하고 있다. 능가경은 대승불교 중에서도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서 모든 인간은 여래와 같은 본성을 구비하고 있다는 입장에 입각하여 그 이전의 여러 학파의 설을 풍부하게 채택하고, 이들 학설이 종교경험과 어떻게 맺어져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점에서 귀중한 불교 경전으로 여겨지며 특히 초기의 선종에서 중시되었다.

 

경의 구성은 고오타마 붓다가 라와나 왕의 권청(勸請)에 의하여 랑카(스리랑카)에 건너가 불제자 중 대표적인 질문자인 대혜(大慧·Mahāmati)의 물음에 대하여 대승불교의 여러 교설을 설명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중국 초기선종의 북종파에서는 구나발타라의 능가경에 의존하여 보리달마(菩提達磨,禅宗初祖), 혜가(慧可, 禅宗二祖), 승찬(僧璨,禅宗三祖), 도신(道信,禅宗四祖), 홍인(弘忍,禅宗五祖)으로 맥이 이어지고 신수(神秀, 禅宗北宗初祖)와 보적(普寂,禅宗北宗二祖)으로 계승된다.

▲ 일본의 백은 혜학(白隠 慧鶴) 선사가 그린 달마도. 그는 ‘직지인심 견성성불’을 강조했다.

 

구나발타라(Guṇabhadra, 394468)는 중인도 출신의 역경승인데 인도에서는 바라문 출신이며, 어려서부터 오명(五明: 고대인도의 다섯 가지 학문)에 능통하였고, 천문, 수학, 의학,주술에도 광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잡아비담심론(雜阿毘曇心論, 불교 논서)을 읽고 불법에 귀의하였다고 한다. 불교에 귀의한 다음에는 여러 나라를 유행하고 스리랑카를 경유하여 435년 중국 광주에 도착, 남송의 문제(文帝)의 환영을 받고 건강(남경)에 들어갔다. 이후 많은 대소승의 경전을 한역하여 중국불교에 영향을 끼쳤다.

▲ 하꾸인 에카쿠(白隠 慧鶴1686〜1769) 선사가 직접 그린 자신의 초상화.

 

그러므로 중국 선종은 초기에는 능가경에 의존하였으며, 초기 선종의 역사서도 능가사자기라고 표현 할 정도로 스리랑카 상좌부의 전통에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데 6조 혜능 대에 오면 선종 역사가 달라진다. 6조는 금강경(金剛経)을 중시 여겼다. 이로써 중국 선종의 소의경전이 능가경에서 금강경으로 전환되었는데, 남종선 계통에서는 더욱 두드러졌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 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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