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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원효의 오도송지와 대당출발지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2/06/15 [07:17]
학문 장사꾼들과 애향심 많은 이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는 원효 생애의 오류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원효의 오도송지와 대당출발지

학문 장사꾼들과 애향심 많은 이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는 원효 생애의 오류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2/06/15 [07:17]

학문 장사꾼들과 애향심 많은 이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는 원효 생애의 오류

 

원효는 한국불교사 뿐 아니라 한국 사상사에도 큰 업적을 남긴 인물이다. 그가 남긴 많은 저술을 통해 오늘날까지 승려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직간접적 영향을 주고 있다. 한편 원효의 생애와 관련된 연구는 미미한 실정이다. 그가 태어났다고 주장되는 경산시는 그가 출가하면서 자신이 살았던 집을 사찰로 변경했다는 기록과 달리 원효의 부인 요석공주가 몸을 풀고 아들 설총을 낳은 탄생설화가 존재하고 있다.

 

의상과 함께 떠난 유학길에서 그가 포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 깨달음의 오도송지 역시 구체적으로 드러나 있지 않다. 이와 관련 최근에는 경기도 화성, 평택 등 원효 당시 대당 무역선의 뱃길을 중심으로 연구되고 있다. 이들 지역에서 연구방법은 자신들의 지역이라는 전제 후 그 장소를 찾아가는 방식이다. 자신들이 주장하는 지역과 관련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증거가 될 논지가 필요한 것이다. 원효가 꼭 이곳이어야 한다는 명제에 끼워 맞추어져야 하는 불행한 접근이다. 이런 지역주의, 관 주도 연구 방법론의 제시는 일부 학문 장사꾼들과 애향심이 많은 이들에 의해 확대 재생산되고 있다.

▲ 소요산과 팔공산의 원효굴(사진 오른쪽)

 

▲ 소요산 원효굴에는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를 관광 상품화했다.  

 

<> 자신들의 지역에서 비를 피해 며칠을 머물렀고 그사이에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을 남겨야 한다. 학자는 그 주장에 온갖 이론적 배경을 제시해야 한다. 이때 주로 사용되는 방식이 오래 살았다는 촌로가 자신의 아버지 혹은 할아버지 혹은 동네 어른들에게서 들었다는 이야기가 그 근거이다. 그들이 이곳에 정착 시기를 따져보아야 한다. 단순히 2~3대 혹은 당대 어린 시절 이주민이라면 지역의 변화를 기억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효는 물론 현재 우리와 함께 살았던 인물에 대한 기록에서도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구체적인 확증이나 논증 자료 없이 구전되는 내용과 정황적 근거로 하여 글을 작성해야 한다.

 

불교 사상가, 종교 다원주의자, 교육자로서의 원효의 생애와 활동

 

원효는 우리 민족이 불교를 받아들인 지 1백 년 만나 가장 뛰어난 불교 사상가다. 그는 한국의 불교를 정리하여 사상적으로 불교 토착화시킨 종교 다원주의자다. 불교 이론의 천재일 뿐 아니라 불교 정신을 신라통일의 대업에 실천적으로 발휘하게 한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하였다.

▲ 이종상 화백의 원효대사상    

 

원효(617-686)는 진평왕 39년 압량군 불지촌(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북쪽 율곡에서 태어났다. 신라의 대표적인 고승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까지도 큰 영향을 준 스님이다. 역사적 기록으로는 스님이 세상을 떠난(686) 뒤 약 1백 년 후에 세워진 경주 고선사 서당화상탑비에 전하고 있다. 고려 명종 때 분황사에 화쟁국사비를 세웠으나 전해지지 않는다. 스님의 자료는 삼국사기46 설총 전, 삼국유사4 원효불기조, 그 외 낭지승운보현수, 사복불언, 의상전교, 이혜동진, 낙산이 대성 관음 정취 조신, 광덕엄장조에 원효와 관련된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중국 측 자료로는 송고승전이 있다. 금강삼매경론, 대승기신론소, 십문화쟁론등의 저술을 남겼다.

 

원효(元曉)에서 원()은 첫 새벽, ()에는 깨닫는다라는 불교적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다. 고유의 순수한 이두식 발음인 새 발(始旦, 새벽)에서 유래되었다. 그 외 10개의 별호 소성거사 일체무애인 서곡미사 구룡 백부론주 만인지적 해동사문 색부 각승 율곡이 있다. <해동종조>,<분황종 초조>라 하였다. 처음으로 부처를 빛나게 했기 때문에 그렇게 부르기 시작(蓋初輝佛日之意爾) 하였다.

 

그의 아명은 서당(誓幢)인데 당()은 속어로 털이라는 뜻이며 서동은 새 털이라는 의미이다. 그의 어머니가 그를 임신하고 달이 찼을 때 집 근처에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어 남편의 털옷 그 밤나무에 걸고 그 밑에 자리를 마련하여 아기를 낳는데서 얻어진 이름이다.

 

석가모니 부처의 출가가 사바세계의 중생을 제도하는 구세(救世)에 참뜻이 있었다면 원효의 출가는 이를 현실사회에서 실천하고 활용함으로써 부처를 더욱 빛나게 하는 숭고한 뜻을 지니는 큰 걸음이었다.

 

스님 나이 70이 되던 해 330일 서라벌 남산 기슭에 자리 잡은 혈사(穴寺)에서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감하고 입적(入寂)할 때까지 줄곧 만행의 길을 밟으며 유연무연의 중생을 찾아 나서되 바른길을 벗어나는 등 가지가지 기행을 연출하였던 만큼 거기에 따른 일화도 많다. 기연(奇緣)도 적지가 않았다. 이런 신묘한 설화도 그러한 것 중의 한 사례일 것으로 유추해 볼 수 있다 

▲ 경주 고선사 서당화상비의 받침돌. 원효의 일생이 새겨진 비석의 몸돌은 깨져 일부만 남아 있다. 절터가 수몰되는 바람에 국립경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원효에 대한 역사적 기록으로는 먼저 그가 세상을 떠난(686) 뒤 약 1백 년 후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고선사에 나타나 있는 글귀를 들 수 있다. 그것이 비록 뒤늦게 발견(1914)되기는 했지만, 원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며 화쟁 사상에 대해서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적어놓고 있는 점에서 매우 귀중한 의미가 있다 할 것이다. 원효 입적 후 약 3백 년 뒤에 찬영이 펴낸(988) 데 원효전이 실려 있다. 원효전에 의하면 19세에 출가하였으며 그는 특별히 스승이 없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원효의 학문 범위는 불교학을 넘어 유가의 경전인 논어는 물론 노장사상의 도덕경, 장자등 사상에도 정통하였다. 고려 시대 생존한 대각국사 의천의 시에는 고구려 고승으로 백제 땅인 전주 고대산으로 옮겨간 보덕 화상을 찾아 열반경, 유마경을 배운 것을 열반종계 승려로 분류되기도 한다. 삼국유사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낭지, 혜공을 만나 학문적 교류를 나눈 것으로 되어있다.

 

삼국유사송고승전에 기록된 원효의 오도송과 바닷 길

 

원효와 의상의 입당 구법을 전하고 있는 기록은 삼국유사송고승전이다. 1차 입당 구법은 삼국유사의상전교, 의상전교에 기록되어 있다.

 

원효와 함께 길을 나서 요동으로 가던 도중에 국경을 지키는 군사에게 첩자의 의심을 받고 수십 일 동안 갇혔다가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의상은 영휘 원년에 원효와 동반하여 서방으로 가려 했다. 고구려까지 갔다가 어려움이 있어 되돌아왔다. 원효의 기록이 아니라 의상의 기록 속에서 원효의 대당 유학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2차 입당 구법은 바닷길을 통해 시도되었다. 고구려 병사에 의해 좌절된 10여 년 지나서다. 재 입당 시도는 또 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좌절은 1차와 달리 깨달음을 통한 인식의 전환이다.

 

원효와 함께 본국 해문 당주계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하여 장차 창파를 넘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진흙 길을 재촉하며 갔지만, 비바람을 만나 길옆 도굴에 은신하였다. 이튿날 깨어보니 그곳은 땅굴이 아니라 오래된 무덤이었고 해골도 뒹굴고 있었다. 그날도 비가 멎지 않고 땅도 진흙투성이라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워 하룻밤을 더 머물게 되었다. 밤에 깊어가면서 갑자기 귀신이 나타날 것과 같은 생각에 원효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제는 땅굴이어서 편안하게 잘 수 있었던 것과 천지 차이였다. 그때 원효는 이에 모든 것이 마음 도리임을 깨달았다.

 

心生卽 種種法生(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

心滅卽 龕墳不二(마음이 멸하면 부처님 모신 감실과 해골이 묻혀 있는 무덤이 다르지 않네.)

三界唯心 萬法唯識(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식이다.)

心外無法 胡用別求(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我不入唐(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원효대사 오도송-

 

수행자의 궁극적 목적이 깨달음이라면 승려의 오도송은 거기에 대한 해답이다. 원효가 남긴 오도송은 수행 가운데 이룬 성취가 아니라 그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기에 나온 철저한 수행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좌절의 산물이다. 그의 유학의 길을 접는 것은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천도를 볼 수 있다.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아는 것은 더욱 적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가지 않고 도를 알고, 보지 않고도 부를 수 있으며, 하지 않고도 이룰 수 있다는 노자의 가르침과도 같다.

 

송 고승전에는 당주의 경계에서 큰 배를 구하려 하는데 도중에 비를 만나서 길옆의 흙 동굴에 들어가 비바람을 피하였다. 날이 밝아서 보니 사람의 뼈와 해골이 바로 옆에 뒹굴고 있는 옛 무덤이었다 

▲ 평택수도사 원효대사 깨달음체험관  


원효와 의상이 잠을 잔 무덤으로 오늘날의 화성 신흥사와 평택 수도사 어느 곳이기보다는 당시 남양만 당항진 즉 당항포의 관할지가 당성이었고, 당성이 현재의 경기도 화성에 있으며, 당시 중부횡단항로로 나아가는 출발지점이 남양만의 당은포라는 점을 고려하면, 원효의 오도처는 당항성 인근의 어느 무덤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원효의 오도처는 남양만 당은포를 향해 나아가던 당항성 인근의 어느 무덤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원효와 의상 일행의 육지 행로는 신라의 견당사들이 주로 이용한 것처럼 이들도 경주-선산-상주-함창-문경-연풍-충주-죽산(육로)를 거쳐 당은포로 갔을 것이다. 이들이 충주에서 여주의 수로를 이용해 당은포로 나갔다. 이들이 이틀을 묵었던 무덤은 화성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현재는 무덤이 두 지역의 어느 한 지역이라고 확정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연구자가 말하고 있는 옛 무덤설과 평택시 소재 수도사 주변 토막에서 깨달았다는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성인 두 사람이 누울 공간인 무덤이 존재해야 한다. 그 정도의 크기의 묘는 왕족, 지방 토호이다. 그러나 주변에는 이런 권력자가 존재하지 않고 있다.

 

원효의 오도처는 그들이 당으로 떠나는 길목에 있는 항구다. 원효 일행이 며칠 머문 장소는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

 

시류에 편승하는 연구자들의 연구물이 원효의 삶의 본질을 흐리고 있다 

 

한국인 사이에 가장 존경받는 두 명의 승려를 꼽는다면 원효가 분명 들어갈 것이다. 그만큼 존경을 받는 승려다. 그리고 당시 사람으로는 드물게 많은 자료를 전해오고 있다. 그런데도 그의 삶은 신화적 요소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극적이다. 요석공주와 만남은 물론 만나기 위해 그가 유포한 가사는 한 남자의 진솔함이 담겨있다.

 

의상과 함께 떠난 대당 유학길 그리고 유학을 포기하게 되는 동기는 그를 더 원효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한밤에 마신 물은 아침에 보니 해골 물이다. 그것을 본 순간 마음의 변화는 인간이 가질 수 있는 가장 괴로운 모습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변하지 않는 사실 순응하면서 깨달음으로 승화시킨다. 괴로움과 별개의 인식작용이다.

 

본 연구는 그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을 연구하기보다. 원효와 관련된 비논리적 연구를 찾고자 했다. 일부 연구자에 따라서는 기존의 자신 주장과 상반된 주장을 하고 있다. 원효를 상품화하는 집단에 의해 연구자의 중심이 흔들리고 있다는 추측의 결론을 내렸다. 앞으로 시류에 편승하는 연구자들의 연구물이 원효의 삶의 본질을 흐리고 있음을 밝히는 것이 새로운 과제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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