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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㉗ 달마전법과 법맥 형성

보검 이치란 스님 | 기사입력 2022/07/04 [07:39]
5조 홍인 6조 혜능으로 이어져 남종선 확립

해양실크로드와 불교(종교)전파-㉗ 달마전법과 법맥 형성

5조 홍인 6조 혜능으로 이어져 남종선 확립

보검 이치란 스님 | 입력 : 2022/07/04 [07:39]
5조 홍인 6조 혜능으로 이어져 남종선 확립

인도 불법 중국-한국-일본으로, 이젠 서양으로 가는 달마법맥 

 

달마대사가 얼마나 크게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불교에 영향을 미쳤는가 하면, 그것은 말로써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지대했다. 지금 우리나라 불교는 아직도 달마의 그늘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다. 간화선법을 주창하는 선사들의 노력 때문에 달마선법은 아직도 막강한 힘을 발휘하고 있다. 한동안 남방의 위빠사나(관법)’가 힘을 얻으려 할 즈음에 선사들은 중국과 한국 전래의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주창하면서, 부흥하는데 경주하여 지금은 어느 정도 위상과 권위가 회복되었다.

▲ 선종불교의 5조 홍인대사가 머물렀던 중국 오조사(五祖寺). 

  

한국불교의 흐름이 다시 선종불교(禪宗佛敎)로 돌아간 듯 하는 양상을 띠고 있다. 한 때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이 무엇인고?’라든지 서래밀지(西來密旨)’운운 하는 분들이 많았다. 지금도 보면 회색 승복 누더기에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선객들을 더러 목격하는데, 하나도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고 혹시나 한 소식(見性)’한 분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 된다. 이런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그만큼 뇌리 속에 선불교 전통이 각인되어 있어서이다. 해방이 되면서 불교정화운동이 일어나고 대형 사찰의 주지가 교체되면서 불교계는 일대 혼란이 야기되고, 수좌(首座)가 힘을 얻는 선승(禪僧) 시대가 한동안 종단을 좌지우지했다.

 

어지간한 절이면 선원(禪院)이 있고, 선실(禪室)이 있다. 지금도 한국불교는 여름 안거, 겨울 안거를 철저히 고수하고 있다. 출가자 수가 줄어들고 불교신자 수가 감소하고 있지만, 이런 현상과 참선과는 무관하다는 논리이다. 사실은 포교와 깊은 관련이 있음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선불교 전통을 고수하는 종책(宗策)을 쓰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런 풍의 불교를 계속해야 되는가? 하는 의심이 들기도 하지만, 아직은 이런 선풍(禪風)이 유행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불교의 본 고향인 인도불교는 거의 쇠멸하다시피 했고, 중국불교는 당송(唐宋) 시대의 불교전통이 사라지고 근대불교의 모습으로 바꾸어진지가 이미 오래이다. 중국불교의 오랜 전통은 오히려 대만 불교에서 찾아야할 상황이다. 동아시아 불교에서 일본 불교도 완전히 종파불교로 더 심화되었다.

 

한국불교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중국 당송 시대의 선종 불교 전통이 그대로 잠재되어 있다. .청시대의 불교는 조선조에서 숭유억불 정책을 쓴 바람에 조선에 그렇게 강하게 전달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당송시대의 불교 특히 선종 불교의 전통이 통일신라 말과 고려시대에 한반도에 전파되어 정착한 것이다. 때문에 한국불교를 제대로 이해하려고 하면 중국 선종 불교의 전통과 맥을 제대로 짚어야 한다. 따라서 달마대사로부터 전해지는 달마불교를 제대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달마대사로부터 전해진 인도불교의 명상법이 혜가-승찬-도신-홍인-6조 혜능에 이르면서 법맥이 형성되는 과정과 선종불교로 체계화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오조 홍인선사의 활약을 한번 일별해 보기로 하자.

▲ 중국 황매산 사조사(四祖寺) 주지 진산식(취임식) 의식.  

 

오조 홍인대사는 우리에게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흔히 6조 혜능대사 이야기를 하면서 홍인대사의 극적인 의발전수와 전법을 우리는 귀에 익도록 듣고 또 들었고, 불문에 들어온 분들이라면 확실하게 기억하고 있는 스토리이다. 중국 선종의 홍인대사와 6조 혜능대사 이야기가 한국불교에 얼마나 영향을 미쳤으면 우리에게 강하게 각인되어있는가를 상상이 간다. 선종 일변도 그것도 혜능대사 이야기가 아니면 불교가 아닌 것처럼 되어 버린 한국불교의 획일성은 어딘지 우리 불교의 균형을 깨는 일이 되고 말았다.

 

달마문하의 제자들인 혜가-승찬-도신-홍인-혜능을 말해야 하고, 선을 논해야 불교를 하는 것처럼 되어 버린 우리불교의 자화상을 냉철하게 비판적 분석과 함께 어떤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남방 상좌부의 승가공동체나 비구들의 율장과 니까야 경전 등을 우리는 다시 재점검하여 받아들여야 하고, 티베트의 금강승 불교 특히 중관 유식의 교리와 철학의 신 해석을 재도입하는 것과 티베트 라마들의 승가공동체생활과 보살행, 달라이 라마 성하의 전법포교 활동 등을 냉정하게 받아들이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학문적으로도 일본 불교학문체계에 치중되어 있는 방법론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우리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중국의 선종 불교의 핵심 조사인 홍인 대사를 팩트 차원에서 일단 탐구해 보자. 홍인(602675)대사는 5대조사로 화려하게 등극되어 있는데, 그는 원적 후에는 대만선사 (大満禅師)란 시호를 받았다. 또한 법우(法雨)란 탑호(塔號)를 받기도 했다. 5조 홍인대사는 호북성 황매현 출신으로, 성은 주()씨였다. 12세에 도신대사의 문하에 들어갔는데,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에 따르면 7세였다고도 한다.

 

나중에 황매현의 빙무산(東山)에 머물면서 교화선도(敎化先導)에 전심전력해서, 중국선종의 본류가 된 동산법문을 발전시켰다. 동산은 서산과 대칭되는데, 사조 도신이 황매현 쌍봉산에 주석하였는데, 쌍봉산은 서산이 되고, 오조 홍인이 머물렀던 빙무산은 동산이 되어서 여기서 제자들과 일반인들에게 편 전법포교 활동을 동산법문이라고 부른다. 오조 홍인대사가 동산에서 주석하면서 크게 활약했기에 이른바 동산법문이라고 부르고, 또 달마 이래, 선법이 크게 확장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기에 선종사에서는 이렇게 동산법문이라고 하면서 큰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오조 홍인대사는 수심요론(修心要論)이란 저서를 남겼다고 하며, 제자 가운데는 법통을 이은 혜능 말고도 수제자 대통신수(大通神秀) 대사가 있는데, 신수는 북종선의 조사가 되었지만, 대가 단절되고 말았다고 보는 것이다.

▲ 선종 5조 홍인 대사. 

 

신수대사는 교종(敎宗)을 따르는 분이고, 북종선인 점수선(漸修禪)을 닦는 분으로 혜능의 남종선인 돈선(頓禪)보다도 하열의 선처럼 되어 있는데, 사실 신수대사는 혜능대사 보다 학식이 더 풍부했고, 이 분 또한 선의 경지가 높았던 고승이었다. 한국불교에서도 신수대사는 별것 아닌 것처럼 되어 버렸고, 북종선의 점수선을 닦는 하열의 조사쯤으로 매도해 버렸다. 중국에서 벌어진 남.북종선(南北宗禪) 간의 차이와 남종선 우위의 관점에서 하택신회(荷沢神会)의 설을 따른 것이었다. 심하게 말하면 하택 신회의 일방적인 획책이라고 할 수 있다.

▲ 5조 홍인대사의 수제자인 신수대사

 

그러면 과연 북종선의 신수대사는 우리가 경계하고 폄하해야할 분인가를 다시 재고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옥천신수(玉泉神秀606706)대사는 속성은 이 씨로 중국선종에서는 북종선의 6조로 추앙 받는 분이다. 신수대사는 13세에 출가하여 주로 교학을 닦다가 늦은 나이인 50세에 이르러서 기주 황매현 5조 문하로 들어갔다. 전법보기(伝法宝紀)에 의하면 신수대사는 56세시에, 일시 환속했다는 기록과 함께 10년간의 활동이 비밀에 쌓여 있다는 설을 기록했는데, 남종선파에서 공격하기 위해서 후대에 악의적인 조작기록이 아닌가 한다. 이후 절을 스스로 건립하고 94세시에는 당나라 고종 이치의 황후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 당나라 제7대 황제)의 초청을 받았고, 중종, 예종에 걸쳐 3대 황제의 국사로 활약했다.

▲ 15년간 황제로서 중국(당나라)을 다스렸던 측천무후.   

 

신수대사는 6조 혜능 대사보다도 왕실에서는 더욱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당대의 고승이 아니었다면 국사로 임명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혜능대사의 제자로 제7조라고 자칭했던 하택신회가 혜능을 높이기 위해서 신수를 비판한 결과이다.

 

달마대사로부터 법을 이어 받은 혜가 대사는 주로 두타행을 하면서 달마선법을 널리 유포했는데, 지금도 태국이나 스리랑카 미얀마 등지에 가면 두타행을 하는 상좌부권 비구들이 있다. 이들은 삼림인 정글에 살면서도 마을로 탁발을 다닌다. 또한 계행을 철저히 지키면서 수행생활을 하는 것이다. 인도에서 마하가섭존자가 그렇게 했듯이 두타행의 참뜻을 잘 준수하면서 주로 관법(觀法) 수행을 하는 것이다. 이런 전통은 중앙아시아인 서역에도 그대로 전해져서 주로 동굴 사원에서 이런 두타행을 했다. 사막지대인지라, 암벽 같은 데에 굴을 파서 수행했다. 둔황석굴이 바로 그런 경우이다. 하지만 중국에는 한 때, 두타행의 의미가 다소 잘못 와전되어 무조건 행각하면서 탁발하는 것을 두타행으로 잘못 인식한 적도 있었다. 이런 풍습으로 인하여, 지금도 중국에서는 머리를 기르고 행각하는 일군의 승려들을 볼 수 있었는데, 아마도 이런 풍경은 어제 오늘 생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나라라고 해서, 이런 식의의 행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본다.

 

중국에서 선종이 형성되기 까지는 이런 저런 우여곡절이 있었으며, 혜가 대사처럼 두타행을 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멸불(滅佛=불교탄압)의 삼무일종의 법난(三武一宗之法難)의 난세에서 취한 호법(護法)의 자구책이기도 했다.

보검<세계불교네트워크코리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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