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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원효의 화쟁사상과 오도송지(下)

장정태 논설위원 | 기사입력 2022/07/14 [09:06]
원효의 화쟁주의는 세계사상에 도전하는 동양 정신의 종합된 표현

장정태 박사의 한국종교학●원효의 화쟁사상과 오도송지(下)

원효의 화쟁주의는 세계사상에 도전하는 동양 정신의 종합된 표현

장정태 논설위원 | 입력 : 2022/07/14 [09:06]

<연재순서>

()원효의 생애와 사상-불교 토착화시킨 종교 다원주의자

()원효 화쟁사상의 특징-정토 신앙과 유불선 삼교의 회통

 

원효에 대한 최초의 기록인 서당화상 탑비에는 스님의 신기하고 기이한 탄생과 함께 화쟁사상에 대해서도 비교적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어머니의 꿈에 별이 떨어져 안으로 들어옴을 보았는데 그 뒤에 임신하였다. 그 후 만삭이 되어 해산할 때는 위인의 서조(瑞兆)로 홀연히 오색 서광이 어머니의 방 위를 가득히 덮었다. 진평왕 39년 대업 13년 정축이었다.

 

금문석에 기록된 옛 사람들은 늘 평범한 출생, 성장 그리고 활동이 아니다. 범상치 않고 하늘, 땅 등 우주와 함께하는 전형적인 탄생의 기록이다.

 

외서(外書) 등이 (결락) 세상으로부터 배척을 받고 있었다. 그 가운데 십문론(十門論)이 있었는데 여래가 재세시에는 붓다의 원음 설법에 힘입어 중생들이 빗방울처럼 모여들었으며, 공공(空空)의 논리가 구름처럼 분분하였다. 혹자는 자기의 말은 옳고, 타인의 말은 그르다 하며, 혹자는 자기 생각을 그럴듯하나 너의 주장은 옳지 않다면서 시시비비 서로서로 자기의 주장에만 집착하여 하한(河 漢;黃河漢水)과 같은 많은 파벌을 형성하였다. 마치 큰 산이 골짜기로 돌아가듯 유는 싫어하고 공만을 좋아하는 것이 나무를 떠나 장림(長林)에 나아가려 함과 같고, 비유하건대 청색과 쪽 풀이 공채(公體) 이며, 얼음과 물이 그 근원은 하나인 것과 같다. 거울은 모든 형상을 받아들이고, 물은 퉁융함을 나눈다. 이에 관한 서술을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이라 하나니, 모든 사람이 이를 보고 부정하는 자는 없고 모두 훌륭한 저술이라고 칭송하였다. 그리고 화엄종요는 그 내용인 즉 진리는 비록 하나이지만 (결락) 듣는 사람들의 근기에 따라 이해를 달리한다.

 

원효의 화쟁사상을 기반으로 다툼을 중재자들은 약자와 강자, 있는 자와 없는 자라는 이중적 잣대를 중심으로 나누고 있다. 언제나 약자, 가난한 자의 편에서 강자의 것을 나누는 방삭이 화쟁이라고 한다. 그들 방식대로 중재는 결국 자신들의 기준에 의한 사회적 약자와 함께 강자를 괴롭히는 괴물이 되어가고 있다. 가치의 중립적 중재가 아닌 이념적 소수자를 대변하는 것이다. 다툼의 끝 자락에서 또 다른 괴롭힘의 중재가가 이들이 말하는 화쟁주의다. 여래의 자리에서 여래의 옷을 입고 여래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여래의 옷을 걸치고 여래의 자리에 앉아 외도의 가르침을 말하고 있다.

▲ 원효는 붓을 꺾고 소성 거사라 지칭하여 무애 박을 쥐고 무애 노래를 부르며 무에 춤을 추면서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니며 교화하였다. 경산시 삼성현역사박물관 원효실에 있는 관련 그림. 

  

원효의 정토 신앙으로 회통 

 

원효에 관한 오해가 있다. 그를 통해 신라인들은 <나무아미타불>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화엄경설의 일체무애의 사람, 일도(一道)에 생사를 초출(招出)하다라고 한 내용에서 이름하여 나무라고 지칭하여 그것을 가지고 마을을 다니면서 노래와 춤으로 민중을 교화하였다. 그로 인해 글을 모르는 사람들도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게 되었다.

 

원효는 붓을 꺾고 소성 거사라 지칭하여 무애 박을 쥐고 무애 노래를 부르며 무에 춤을 추면서 방방곡곡을 두루 돌아다니며 교화하였다.

 

화엄경의 한 구절인 일체의 無㝵人(부처를 이름)은 한 길로 생사에서 벗어난다.’라는 문구를 따서 이름을 무애라 하고 계속 노래를 지어 세상에 유행하게 했다. 이 도구를 가지고 일찍이 수많은 마을을 돌며 노래하고 춤을 추며 교화시키고 읊다가 돌아오니 이로 말미암아 상추옹유(가난한 사람의 집), 확후(몽매한 사람)의 무리도 다 부처의 이름을 알고, 나무를 일컫게 하였으니 원효의 교화는 참으로 커다란 것이었다. 그러나 김영태는 나무아미타불염불 신앙을 했다는 구체적 행위를 논하지 않았지만, 문경현은 무지몽매한 무리로 하여금 모두 붓다의 이름을 알고 모두 나무아미타불을 부르게 하였다. 구체적으로 나무아미타불을 염불한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가마타 시게오는 나무를 통해 아미타 신앙으로 연결하고 있다.

 

원효에게 나무는 귀의의 대상을 특정하지 않고 있다. 붓다의 명호에서도 어느 특정한 대상을 향한 신앙이 아니다. 사람의 근기에 따라 그와 합의가 일어나는 불보살에 귀의하는 신앙에서 그는 화쟁을 말하고 있다. 붓다가 인도의 토착 신앙과 습합된 화쟁사상을 폈다면 원효의 화쟁사상이 태동하게 된 사회적 배경으로 신라 사회에 불교의 전파는 윤리, 도덕 생활에서 종교 생활로서의 전환을 뜻하는 것으로 <상대(相對)에서 절대>를 추구하게 되었으며 <천하(天下)밖에 정토의 존재>를 인정하는 즉 의식에서 일대 변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전래의 샤머니즘적 전통 위에 새로운 불교적 종교문화가 접합되는 과정이 형성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불교 신앙은 고유문화와 서로 습합되면서 신라불교는 법흥왕 15년 공인된 이후 급속도로 뿌리를 내려, 국가체제를 정비하며 흩어진 정신계를 수습하는 구심점(求心點)의 지위를 차지하는 것이었다. 가령 예로부터 신성시해온 천신(天神)숭배사상은 불교의 제석천으로 회통되고 또 산 그 자체를 신성시했고 바다가 곧 해신(海神)이던 재래신앙은 산신과 용왕으로 불리는 등 불교와 재래의 토속신앙은 서로 의지하면서 원효의 화쟁은 종교적 갈등의 치유를 위한 해결에서부터 출발한다. 붓다가 인도 사회 기존의 종교적 정서를 받아들여 듯 원효는 신라 사회 고유신앙을 통해 회통의 이론적 체계화를 이룬 것이다. 김영태는 원효의 회통사상은 당시 붓다의 교설을 해석을 통해 혼란스러운 교학을 하나로 통일하여 붓다의 가르침을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목적도 포함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유불선 삼교의 회통

 

원효는 중심사상으로 사회통합을 말하기 전 불교의 통합을 우선하는 이론이란 주장을 하게 된다. 김영태는 和諍會通和會를 통한한 마음(一佛心·一心)의 구현이다. 불교 안의 諸家異諍和解하고 經敎諸說會通하여 하나의 부처님 세계로 돌이키려는 것이다. 모든 經敎의 사상을 和會하고 통일함으로써 부처님의 참 정신을 구현하려고 하였다. 당시 여러 和諍會通하여 이 땅에 부처님의 산 가르침을 실현하고자 한 것이다. 김영태는 불교적 관점에서 불교 안에서 화쟁을 이해하고 있다면 이이화는 불교를 넘어 사회통합의 수단으로 회통을 이해하고 있다. 이이화의 해석은 이후 사회통합이란 현실참여의 이론을 제공하기 시작한다. 분열의 조짐을 보이는 신라 사회에 통합이론과 화합 이론을 제시하였다.

 

화쟁의 ()’누그러뜨린다, ‘이쟁(異錚)’으로 읽어, 화쟁은 배타적 언어 다툼을 누그러뜨리는 일종의 치유행위라는 주장에서 알 수 있듯 원효는 화쟁은 인간 내면에 있는 본성을 조화하는 치유적 요소가 있음을 말한다. ()말다툼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주장과 견해를 드러낸 로 보는 것이 적절하고, ‘이쟁(異諍)’이라는 말도 그저 같은 문제에 대한 다른 견해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화쟁주의 세계란 어떠한 설명으로도 해명될 수 없는 그야말로 진()을 부수지 아니하고도 속()을 밝힐 수 있는 높은 봉우리이며 어떠한 상상도 이를 허용될 수 없지만 허망한 마음도 스스로 통해지는 깊은 의미를 간직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매우 큰 그 이상의 경제이며, 상대심(相對心)으로는 도저히 해명될 수 없는 진리인 것이다. 그에 있어 모든 생성(生成)을 시간상으로 인식하는 유대승(有大乘)의 연기론이나 공간적으로 보는 공대승(空大乘)의 실상론과 같은 구분에도 전혀 구애되지 않았다.

 

원효는 화합과 통일의 사상, 조화와 평등의 원리를 가지고 서로 다른 주장으로 갈려 있는 불교 이론을 화쟁하며 왜곡된 불교 풍토를 쟁화(諍化)하려 하였다. 이처럼 간절한 염원이 담긴 화쟁적 논리는 무엇보다도 그 자신이 처해있는 시대 상황 속에서 마치 불난 집처럼 온갖 갈등과 대립과 모순과 아집으로 가득 찬 현실사회를 구출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화기(和氣)를 불어넣고 조화회통(調和會通)의 대도를 열어 이 동녘 해돋이 땅에 이상사회를 건설하려는 무에 한 원력을 발하였다.

 

불교와 유교 그리고 도교까지도 화쟁하려 하였던 원효불교의 이상은 실로 심물일원(心物一元)에 있고 개전불이(個全不二)에 있으며 나아가 심주물종(心主物從)의 세계를 추구하고 심체물용(心體物用)의 체계를 확립하는 데 있었다. 그런 이유에서도 원효의 화쟁주의는 세계사상에 도전하는 동양 정신의 종합된 표현이며 따라서 그것은 유현한 동양사상의 진수라 할 수 있다. 이론이 아니고 실천행이었던 화쟁론이야 말로 매우 진보적인 사상인 까닭에 그것이 이 시대에 충만할 때 물질 우위, 인간비하의 정신풍토는 치유될 수 있으며 나아가 인류사회의 영원한 평화는 성취될 수 있다.

 

화쟁사상은 단순히 화해이론이 아니라 견해들의 차이를 모아놓음으로써 소통의 가능성을 높이려는 소통이론이라는 관점이 이에 해당한다. 그러나 원효가 화쟁이라는 말로써 풀어보려고 했던 문제 상황은, 단지 교설에 대한 다른 견해들의 존재라기보다 다른 견해들의 배타적 대립과 불통이라는 이견(異見)들의 비생산적, 소모적 관계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할 것이다. 화쟁의 ()’누그러뜨린다.’라고, 이쟁(異諍)은 다르게 주장하면서 다툼으로 읽어, 화쟁은 배타적 언어 다툼을 누그러뜨리는 일종의 치유행위로 간주한다.

 

회통은 한번 보아 서로 모순되는 듯한 여러 주장을 모아 통석하는 것을 이르는 말, 화회소통(和會疏通)을 말하는 것으로 이처럼 한국불교를 규정하는 것은 최남선의 조선불교-동방문화 사상에 있는 그 지위에서 한국불교의 진정한 자랑과 독특한 지위를 회통적 성격으로 파악하였다. 한국불교의 회통성은 불교 내적으로는 불교 종파 간의 사상대립 및 선교의 대립을 불교 외적으로는 유교, 도교와 대립을 화해시키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화쟁사상은 다양한 교설로 인해 다툼과 분쟁의 소용돌이에 놓여있던 불교의 모든 이설을 화해시켜 부처의 올바른 진리에 도달시키고자 하였으며, 동시에 여래장 사상이 바탕이 된 일심을 통해 중생의 마음속에 선험적으로 내재한 불성을 다시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원효의 화쟁론은 모든 원리(一切法)를 외질 일심으로 삼는 대승기신론과 금강삼매경론을 바탕으로 전개되는데 이 두 논서는 또 다른 여래 사상과 연결되어 있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오늘날 학문상에서나 그 밖의 정치, 경제 등 사회문제에서 흑백 양론으로 대립하여 자시비타(自是非他; 자기만 옳고 다른 사람은 그름)의 외고집만을 고수함으로써 야기되는 온갖 병폐와 해악의 요소를 일소하는 데 큰 시사가 되리라 믿는다. 화합과 무쟁(無諍)이다.

▲ 원효의 오도송 관련 그 위치를 놓고 일부 연구자들과 불교계 일각에서는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다. 사진은 오도성지 성역화 사업을 하는 평택 수도사에 걸린 오도송 글.     


원효의 오도송과 바닷길- ‘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원효와 의상의 입당 구법을 전하고 있는 기록은 삼국유사송고승전이다.

 

1차 입당 구법은 원효와 함께 길을 나서 요동으로 가던 도중에 국경을 지키는 군사에게 첩자의 의심을 받고 수십 일 동안 갇혔다가 간신히 죽음을 면하고 돌아왔다.

 

의상은 영휘 원년에 원효와 동반하여 서방으로 가려 했다. 고구려까지 갔다가 어려움이 있어 되돌아왔다. 원효의 기록이 아니라 그와 함께 활동했던 의상의 전기에서 찾을 수 있다.

 

고구려 병사에 의해 좌절된 대당 순례는 10년 후 재시도된다. 1차와 달리 바닷길을 통한 시도다. 그동안 막혔던 바닷길이 열린 것이다. 신라가 나당연합군을 통해 백제의 땅을 귀속시킨 전쟁 승전의 결과물이다. 이와 같은 재 입당 시도는 또 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그의 좌절은 1차와 달리 깨달음을 통한 인식의 전환이다.

 

원효와 함께 본국 해문 당주계에 이르러, 큰 배를 구하여 장차 창파를 넘으려고 하였다. 그래서 진흙 길을 재촉하며 갔지만, 비바람을 만나 길옆 도굴에 은신하였다. 이튿날 깨어보니 그곳은 땅굴이 아니라 오래된 무덤이었고 해골도 뒹굴고 있었다. 그날도 비가 멎지 않고 땅도 진흙투성이라 한 걸음도 나아가기 어려워 하룻밤을 더 머물게 되었다. 밤에 깊어가면서 갑자기 귀신이 나타날 것과 같은 생각에 원효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어제는 땅굴이어서 편안하게 잘 수 있었던 것과 천지 차이였다. 그때 원효는 이에 모든 것이 마음 도리임을 깨달았다.

 

心生卽 種種法生(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가지가지 법이 생기고)

心滅卽 龕墳不二(마음이 멸하면 부처님 모신 감실과 해골이 묻혀 있는 무덤이 다르지 않네.)

三界唯心 萬法唯識(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만법이 오직 식이다.)

心外無法 胡用別求(마음밖에 법이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我不入唐(나는 당나라에 가지 않겠다.)

-원효대사 오도송-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해골 물 전설과 달리 주변에 흔어져 있는 유골들을 통해 인생의 무상함과 어제와 다른 자신을 발견한 것이다.

 

수행자의 궁극적 목적이 깨달음이라면 승려의 오도송은 거기에 대한 해답이다. 원효가 남긴 오도송은 수행 가운데 이룬 성취가 아니라 그의 인생을 바꾸는 전환기 얻은 것이다. 그리고 오랫동안 꿈꾸었던 대당 유학의 좌절 산물이다. 원효의 오도송은 삼국유사에 기록되지 않았지만, 원효를 대표하는 사상이다. 이 깨달음의 일어난 곳은 진산(현 성환과 천안 사이) 무덤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위치를 놓고 일부 연구자들과 불교계 일각에서는 특정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성역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지역연구를 한 향토사학자들은 일부 불교계와 연구자들이 주장하는 곳이 아니라는 의견을 내놓고 있다. 그의 유학의 길을 접는 것은 문밖에 나가지 않고도 천하를 알 수 있고, 창밖을 내다보지 않고도 천도를 볼 수 있다.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아는 것은 더욱 적어진다. 그러므로 성인은 가지 않고 도를 알고, 보지 않고도 부를 수 있으며, 하지 않고도 이룰 수 있다는 노자의 가르침과도 같다.

 

송 고승전에는 당주의 경계에서 큰 배를 구하려 하는데 도중에 비를 만나서 길옆의 흙 동굴에 들어가 비바람을 피하였다. 날이 밝아서 보니 사람의 뼈와 해골이 바로 옆에 뒹굴고 있는 옛 무덤이었다.

 

원효와 의상이 잠을 잔 곳은 무덤으로 오늘날의 화성 신흥사와 평택 수도사 어느 곳이기보다는 당시 남양만 당항진 즉 당항포의 관할지가 당성이었고, 당성이 현재의 경기도 화성에 있으며, 당시 중부횡단항로로 나아가는 출발지점이 남양만의 당은포라는 점을 고려하면, 원효의 오도처는 당항성 인근의 어느 무덤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볼 수 있다. 원효의 오도처는 남양만 당은포를 향해 나아가던 당항성 인근의 어느 무덤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원효와 의상 일행의 육지 행로는 신라의 견당사들이 주로 이용한 것처럼 이들도 경주-선산-상주-함창-문경-연풍-충주-죽산(육로)를 거쳐 당은포로 갔을 것이다. 이들이 충주에서 여주의 수로를 이용해 당은포로 나갔다. 이들이 이틀을 묵었던 무덤은 화성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현재는 무덤이 두 지역의 어느 한 지역이라고 확정하기는 어렵다. 대부분 연구자가 말하고 있는 옛 무덤 설과 평택시 소재 수도사 주변 토막에서 깨달았다는 주장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주변에 성인 두 사람이 누울 공간인 무덤이 존재해야 한다. 그 정도의 크기의 묘는 왕족, 지방 토호이다. 그러나 주변에는 이런 권력자가 존재하지 않고 있다. 원효의 오도지는 그들이 당으로 떠나는 길목에 있는 항구다. 원효 일행이 며칠 머문 장소는 그들이 활동할 수 있는 공감이 확보되어야 한다.

 

화쟁은 또 하나의 세력화를 이룬 집단의 구호로 변질한 화쟁...근원적 접근 필요

 

우리 학계는 원효사상은 연구하기 시작한 시기가 짧다. 짧은 만큼 많은 시행착오를 범하고 있다. 지역적으로 출행지, 오도송지에 대한 왜곡으로부터 시작한다. 전국적으로 흩어져 있는 원효가 창건한 사찰, 수도(수행)지다. 그의 사상은 한동안 원효의 사상을 민중불교와 정토 신앙으로 힌정적 연구 주제가 되었다. 이후 서민불교, 화쟁 사상으로 유행처럼 바뀌고 있다. 현재 한국 사회의 주 연구 주제는 화쟁 사상이다. 이처럼 급조되는 연구 주제의 다변적 변화는 적은 수의 연구자들에 의해 주제가 변화되어왔다. 여기에 일부 설익은 사회참여 승려를 포함한 집단에 의한 관심 또한 화쟁 사상이다. 그러나 그마저 연구의 진전이 없다. 화쟁은 다툼을 화해하기 이전 다툼에 접근이다. 이들은 현실에서 화쟁은 다툼을 약자의 편이라는 이중 구조에 의한 중재라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이번 연구에서 화쟁은 또 하나의 세력화를 이룬 집단의 구호로 변질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자기의 생각이나 기준으로 타인의 사상을 이해하려 든다. 간섭과 관심은 자기의 관점에서 바라본 모습이다. 그 결과 자신이 가진 잣대를 벗어나 있는 또 다른 생각을 자기와 같아지는 자기화를 주문한다. 자기중심의 이기심을 벗어나지 않고서 상대방과 평등해질 수는 없다. 객관적인 진실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견해를 비우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 원인에 대한 치유보다 현상을 덮는 해결만을 모색하고 있다, 자신들을 중재자가 아닌 논쟁의 심판자적 입장에서 바라본 원효의 사상이었다. 앞으로 원효의 연구는 정치, 이념적 시각이 아니다. 근원적 접근이 필요하다. 그것은 원효의 사상을 단순히 한 주제만으로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런 주문은 그의 오도송지를 찾는 연구방법에도 주문된다. 관 주도, 종교계 간섭이 아닌 순수학문 연구방법으로 접근이다. 본 논문에서 소략하게 다룬 이유도 이들 집단의 이기적 접근과 연구자 편의에 대한 첫 지적이다. 향후 두가지 조건이 성숙할 때 우리는 원효를 정확하게 볼 것이다.

장정태 삼국유사문화원장(철학박사. 한국불교사 전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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