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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디오예술가 백남준의 위대한 殺佛殺祖 마인드

매일종교신문 | 기사입력 2010/10/12 [11:53]

비디오예술가 백남준의 위대한 殺佛殺祖 마인드

매일종교신문 | 입력 : 2010/10/12 [11:53]
 백남준의 삶과 언어(1)

비디오예술가 백남준의 위대한 殺佛殺祖 마인드

 

비디오예술가 백남준의 말은 종종 우릴 감탄케 한다. 무언가 예언자적 울림이건, 아니면 턱없이 순진한 발언이건 간에 닳고 닳은 언어에 생동감을 부여하는 능력 때문이다. 그중 백남준스러운 말이 따로 있는데, 그걸 나는 동아일보 기자 오명철로부터 들었다. 구겐하임 회고전(2000년 10월) 직전 오명철이 인터뷰를 위해 뉴욕의 백남준 작업실을 찾았다. 4년 전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휠체어 신세를 지던 그는 “요즘 하루 100m씩 두 발로 걷는다”고 자랑했다. 저녁식사 뒤 지팡이 짚고 50m, 밤에 화장실 두 번 드나들며 또 50m라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호헌을 했다. 80세 되는 2012년에 세상을 놀라게 할 쇼를 할 것이며, 복용 중인 약이 좋아 곧 쾌차할 것이라는 얘기다. 히트는 그 다음이다. “몸이 좋아지면 무엇부터 하겠느냐?”고 물었다. “음, 휠체어에서 일어나 두 발로 센트럴파크를 걸어볼 거야. 예쁜 깔치를 사귄 뒤 그녀 손을 쥔 채 다리가 아플 정도로 아주 오래 걸을래.” 나이와 상관없이 이만큼 천진난만한 발언, 진솔한 욕망의 언어를 나는 알 지 못하는데, ‘깔치’란 말도 흥미롭다. 백남준은 1940년대 서울에서 10대 시절(경기중학 재학)을 보냈는데, 당시 여자 친구를 뜻하는 은어 ‘깔치’가 유행했음을 알려준다.

반세기 뒤 그걸 절묘한 타이밍에 구사한 솜씨도 날렵하다. 당시 인터뷰는 부인 구보타 시게코가 지켜보고 있었다. 그걸 개의할 백남준이 아니고, 질투할 구보타 역시 아니다. 그런 구보타가 한국의 신문기자 남정호(중앙일보)와 함께 쓴 책 <나의 사랑 백남준>을 보면서 확인한 정보가 여럿이다. 그가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은 작가로서 결정적 도약기, 따라서 뇌졸중은 백남준과 구보타에게는 그야말로 청천벽력이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도 막 지났는데, 작가로서는 사형선고였다. 첫 스트로크에서 깨어난 직후 “걱정 마. 오늘이 부활절이잖아”하며 부인을 달랬던 그였다. 쓰러졌던 날이 1996년 4월9일이었다. 막상 발병 초기 그는 병원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발광하다 지친 그에게 말을 붙이면 이렇게 앙금 섞인 말을 토했다. “세계의 부조리, 부조리에 대해 생각했어. 내가 왜 이리 쓰러져야 하지? 왜 나지?” 천하의 백남준은 “날개 꺾인 독수리, 사지를 읽은 맹수”와 같았으며, “믿을 수 없는 불행에 놀라고 슬퍼하고 절망했다.”(277쪽) 곁에서 지켜본 부인이 아니고는 나올 수 없는 증언이다.

<나의 사랑 백남준>은 구보타 구술을 남정호가 정리했다. 고백하지만, 나도 이 중요한 증언이 책으로 나오는 데 눈곱만한 기여를 했다는 게 자랑스럽다. 뉴욕에서 원고 쓰기에 지친 저자가 서울의 내게 전화를 해 하소연 겸 투정 하는 걸 수차례에 걸쳐 받아줘야 했으니 그것도 기여 아닌 기여가 아닐까? 어쨌거나 <나의 사랑 백남준>은 기대했던 것 이상이다. 입문서로 이만한 기록이 없다. 이용우의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2002년), 백남준의 유치원 친구의 <백남준 이야기>(2000년) 이외에 이렇다 할 게 없었다. 때문에 <나의 사랑 백남준>은 올해 초 나왔던 백남준 글 모음집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와 함께 특별한 관심거리가 아닐 수 없다.

두 책을 놓고 함께 봤는데, 그중 <나의 사랑 백남준>은 화자(話者)인 구보타의 시각에서 서술됐다. 문체도 호소력이 있고, 백남준에 대한 미스터리가 상당수 씻을 수 있었다. 일테면 왜 현대음악을 전공했던 그가 비디오예술로 건너뛰었을까? 6·25가 나던 해 18세이던 그는 어떤 과정을 거쳐 홍콩을 거쳐 일본으로 피난 갔을까? 백남준 삶의 결정적인 분기점인 플럭서스에는 언제 어떻게 들어갔던 것일까? 결정적 의문 하나가 또 있다. 구보타가 플럭서스 멤버였다지만, 왜 그는 3년간 다른 남자(백남준이 잘 알던 사람이었다)와 결혼에 골인했던 ‘돌씽’(이혼녀)을 기꺼이 아내로 받아들였을까?  

우선 6.25와 백남준. 그는 전쟁 나기 전 해인 49년 아버지 백낙승을 따라 홍콩을 출입했다. 외국여행이 달나라 가는 것만큼 힘들던 시절, 아버지가 정부에 의해 홍콩 내 인삼수출 대리인으로 임명된 탓이다. 당시 백남준은 통역으로 따라다녔다. 아버지 여권번호가 6번, 아들 번호가 7번이었다. 이러던 차 전쟁이 터지자 백남준은 형이 있던 도쿄로 건너갔다. 한국전쟁이란 변수 그의 삶에 던진 파문은 적지 않았다. 훗날 그는 이런 묘한 고백을 했다. “만일 내가 나의 이데올로기에 충실했다면, 1951년 한국에서 죽거나, 월북해 교사가 되어야 했”(<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 72쪽)다고….

그럼 현대음악에서 현대미술로 옮겨간 것은 어떤 배경인가? 백남준은 경기중 재학 당시 벌써 동시대의 현대 음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당시 음악교사 신재덕 밑에서 공부하면서 12음 기법의 쇤베르크를 익혔다. 이게 도쿄대에서 졸업논문 ‘아놀드 쇤베르크 연구’를 쓰게 된 배경이다. 그러던 그가 퍼포먼스를 비롯한 문화테러리스트 활동을 하는 등 활동영역을 넓힌 건 독일 유학 당시인 1958년 스승 존 케이지를 만나면서부터다.

쇤베르크가 현대음악의 문법 내부에서 놀았다면, 존 케이지는 묻지마 아방가르드로 나갔다. 장식적 효과나 오락적 요소 무시, 완성미에 대한 의도적 거리두기 즉 서구음악의 모든 기본을 물구나무 세우는 과감한 시도였다. 이 음악 아닌 음악에 백남준은 벼락을 맞았다. “마치 온몸에 소름이 쪽 돋는 것처럼 전율을 느꼈다”(59쪽)고 털어놓은 그는 존 케이지를 만나기 전후로 자기 삶이 기원전·기원후로 갈라진다고 고백했다.

피아노를 도끼로 뽀개거나 머리 위로 치켜든 바이올린을 힘껏 내치쳐 작살내버리는, 당시 가장 과격한 퍼포먼스를 그 이듬해부터 시작했고 이걸 ‘존 케이지를 위한 오마주’라고 이름 붙였으니 둘은 대단한 연분이다. 쉽게 말해 근대 이후 서구예술의 정수리를 뽀개버리면서 새로운 예술을 창출하려는 몸짓이다. ‘부처도 죽이고 조사도 죽이는’ 불퇴전의 살불살조(殺佛殺祖) 정신이라고 해도 좋다. 그게 플럭서스다. 즉 예술이어도 좋고 아니면 어떠냐는 식의 고단위 예술운동이었다.

이런 퍼포먼스란 시장에서 돈이 되지 않는다. 때문에 적절한 타이밍에 전향이 이뤄져야 하는데, 여기에 구보타의 권유가 작용했고, 그래서 비디오 예술이라는 신천지를 착목했다. 이것이 <나의 사랑 백남준>에서 점검해본 백남준 삶의 큰 줄기다. 어쨌거나 한국의 20세기 문화예술은 남의 사조를 카피하기 바빴다. 이 와중에 백남준은 비디오예술이라는 장르를 만들고, 그 장르의 비조가 됐다. 그럼에도 우리가 그에 대해 아는 것은 신통하게 많지 않다. 다음 호 <백남준: 말에서 크리스토까지>를 마저 읽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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