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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종교의 죽음관

매일종교신문 | 기사입력 2013/07/18 [11:13]
죽음에 대한 이해에 따라 삶의 방식도 다르다

세계종교의 죽음관

죽음에 대한 이해에 따라 삶의 방식도 다르다

매일종교신문 | 입력 : 2013/07/18 [11:13]

세계종교의 죽음관
 
죽음에 대한 이해 따라 삶의 방식도 다르다



<한국의 무속 신앙과 죽음>
‘돌아가셨다’는 ‘돌아가서 산다’는 뜻




육체에서 영혼이 떠나 버리면 정말 죽은 것이고, 그 영혼이 다시 그 육체 속으로 돌아오면 살아난다고 생각한다. 인간이 호흡을 멈추면 그 사람이 입던 옷을 가지고 지붕 한가운데로 가서 북쪽을 바라보며 그 사람의 이름을 세 번 길게 부르는데 이는 혼이 다시 몸에 합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고복(皐復) 혹은 초혼(招魂) 이라고 하며 이렇게 해도 살아나지 않으면 그때에야 비로소 '죽음'으로 규정한다.


한국인의 영혼관은 두 가지로 구분하는데 하나는 사람이 죽은 후 저승으로 가는 사령(死靈)이고, 다른 하나는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깃들여 있는 생령(生靈)이다. 무교는 영혼을 평안히 모셔서 저승으로 잘 가게 하는데 특색이 있다. 한국인은 영혼에 대한 모습과 성격 규정을 살아있는 사람과 동일하게 인격적으로 대우한다. 죽음을 '돌아가셨다'라고 하는 것도 이 세상에서 살다가 늙어 수명이 다해   저 세상으로 '돌아가서 살게 된다' 는 한국인의 생사관의 반영이다.




<유교 사상과 죽음>
태어나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공자의 제자인 계로가 "죽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묻자 공자는 "태어나는 것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라고 했다. 유교는 내세관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죽음관도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공자도 경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 유가는 죽음 자체의 의미나 죽어서 시작하는 또 다른 세계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삶과 죽음을 대자연의 법칙에 의한 신귀과정으로 봄으로써 형이상학적 문제로 돌렸다. 그러므로 삶과 죽음 때문에 앞뒤로 연장될 수 있는 상념을 처음부터 단념하고 거의 일회적인 인생 자체에 몰두하게 되었다. 유교가 종교로서 지탱하는 이유는 제사 제도인데 제사행위가 이루어질 때 조령들은 이승에 남아 살아있는 후손들의 정성과 기도에 감응한다고 본다.




<도교 사상과 죽음>
삶은 죽음의 동반자, 죽음은 삶의 시작


도교는 중국 고대의 민간 신앙을 바탕으로 삼는 신선설(神仙說)을 중심으로 불로장생을 주목적으로 하는 현세 이익적인 자연종교라고 할 수 있다. 도교는 죽음을 문제시하지 않고 죽음을 단지 자연 변화의 일부로서 도(道)에 의하여 지배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삶은 죽음의 동반자요, 죽음은 삶의 시작이니, 어느 것이 근본임을 누가 알랴? 삶이란 기운(氣運)의 모임이고 기운이 모이면 태어나고 기운이 흩어지면 죽는 것인데 이같이 사(死)와 생(生)이 같은 짝을 만나면 무엇을 조심하랴. 내 생애를 잘 지냈으면 죽음 또한 의연하게 맞이해야 한다."


장자의 도교적 입장의 죽음관을 대변해 준다.




<불교 사상과 죽음>
삶과 죽음을 초월하는 열반의 경지가 최고의 가치


불교에서는 죽음을 인간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보았다. 그리고 죽음이라는 실상을 초연하는 보다 높은 차원의 진실을 체득함으로써 현실적 죽음의 문제가 극복된다는 것이 불교의 입장이다. 이러한 극복을 통해 자유로움을 추구하는 것이 불교 전반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사후(死後)의 존재가 아니라, 죽음에 대한 새로운 차원의 인식이다. 즉 삶에도 번민하지 않고 죽음에도 번민하지 않는, 생명에 대한 추구였다. 삶과 죽음을 초월해 업과 윤회를 벗어난 경지로서 번뇌를 꺼 버린다는 열반의 경지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운다.


죽음이란 커다란 생명의 연기(緣起)적 존재 양태이며 큰 생명의 흐름의 과정 속에있는 한단계 고리일 뿐이므로 독립적인 죽음실체는 없다고 본다. 불교에서의 죽음의 문제는 마음의 문제로 귀결되며 마음의 문제는 궁극적으로 무심(無心) 의 상태, 즉 적정(寂靜) 이며 열반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을 때 해결된다.




<그리스도교 사상과 죽음>
부활, 그리고 영혼과 육신이 결합된 영생


죽음과 관련된 그리스도교 사상은 우선 구약성서를 통해서 그 기원을 알 수 있다. 구약의 창세기부터 시편 이후까지는 죽음의 보편성과 아울러 연관된 인생의 허무함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구약은 죽음의 보편성에서 다시 새로운 죽음의 의미를 부여하여 죽음과 죄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으로 본다. 하느님은 인간을 불사 불멸하도록 창조하였으며, 인간은 죽음을 면제받을 소지를 지니고 창조되었다. 그러나, 인류의 원조 아담과 하와가 하느님께 순종치 않음으로써 죽음이 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죄로 인해 '죽음' 이라는 벌을 받게 된 것으로 믿는다.


신약에서의 죽음관은 예수와 죽음의 관계를 통해서 이해한다. 인간의 조건으로는 감수해 낼 수 없는 고통스러운 최악의 죽음을 완전히 극복함으로써, 벌받은 인간의 죽음을 영원한 생명으로 구원하였고, 그리스도가 죽은 후, 3일만에 부활하였듯이 모든 인류도 이 세상의 종말에는 모두 부활하고 영혼과 육신이 결합되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고 본다.




<인도의 힌두교와 죽음>
낡은 옷을 벗고 새옷을 갈아 입는다


고대 인도인은 사람들이 죽어서 가는 세상을 야마(Yama)라고 불렀고 이것이 불교에 들어오게 되면 염라(閻羅)라고 음역된다. 그러나 후기 베다시대(기원전 8세기경)에 이르면 야마의 왕국에서조차 삶과 죽음이 있다는 논쟁이 일어나서 윤회 사상이 싹트게 되었다. 인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불가사의를 죽음이라고 생각했다. 인도인은  죽음이란 것을 낡은 옷을 벗고 새옷을 갈아 입듯이 새로운 생명을 얻어 껍질을 벗는 새롭고도 영원한 재생으로서 파악했다. 죽음을 바로 생명 과정의 하나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본질적 자아가 생사의 순환을 벗어난 존재로 이해하기 때문에 현세의 죽음을 정복할 뿐만 아니라 내세의 생명과 죽음까지도 정복하기를 열망한다.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달았을 때 죽음의 공포는 자취를 감추고 생사의 순환에서 자유로우며 육신의 죽음은 깨달은 자에게 있어서는 죽음이 아니라고 본다. 죽은 것은 육신이지 본질적 자아는 아니라는 것이다.




<천도교 사상과 죽음>
사후 개체 자아의 성령이 창조적 조우관계로 현존


천도교는 지기일원론(至氣一元論)적 하눌님관을 갖고 시천주 신앙을 중요시한다. 시천주 사상은 인내천 사상으로 발전한다. 따라서 사람이 죽으면 타 종교에서처럼 시공간적 신령세계로 이주한다고 보지 않는다. 무궁한 총체적 대생명 세계에서 개체 자아의 성령이 창조적 조우관계를 가지면서 현실적 삶속에 현존한다고 본다.  즉 천도교의 죽음 이해는 육신은 해체되지만 지기의 분신체로서 영묘한 성령적 생명체는 후손 생명들과 우주 생명체와 함께 현세적 지상천국이 이뤄질 때까지 공존공역하면서 영생한다고 믿는다. 개체 생명이 부활체로서 다시 부활한다는 영생관이나 피안세계의 영계로 옮겨져 영생한다는 사상은 없다.




<이슬람 사상과 죽음>
종말아닌 시작, 고통에서의 해방


이슬람에서의 죽음은 종말, 생명의 손상이 아닌 영혼과 육체의 일체감의 소멸을 의미한다. 따라서 죽음은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며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에 기쁨으로 본다. 내세는 이승과는 비교되지 않는 고차원적 상태가 보장되는 곳이다. 화장하면 연혼의 안식처가 소멸된다고 보아 무덤이라는 영혼의 거주공간에 매장한다. 또한 부활과 심판에 대한 믿음도 확고하다. 즉 이슬람의 내세관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혼합적 요소를 갖고 있다. 특히 신과 인간을 위한 거룩한 일, ‘지하드’에 참가하다 죽으면 낙원으로 간다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일본종교 신도의 사상과 죽음>
죽음은 더러움, 후손들이 받들어야 정화 


신도는 일본의 토속신아과 불교가 혼합된 종교로 발전됐다. 따라서 불교의 극락교리와 다를 바 없다. 다만 다신교이면서도 선조숭배가 강하기 때문에 오랜 된 것일수록 높게 받든다. 죽은 영혼도 본래의 개성을 그대로 지니고 있으며 죽음으로 인해 더러워져 있다고 본다. 더러워진 영혼을 후손들이 제사와 숭배로 받들면 더러움이 제거되어 후손들의 수호신이 된다는 믿음이다. 이렇게 정화된 조상의 영혼은 후손들이 부적이나 위패로 만들어져 신사나 특정한 곳에 놓여 숭배된다.




<그리스신화의 사상과 죽음>
삶과 죽음을 지상과 지하로 구분



그리스신화에서 땅 밑은 죽음의 세계이다. 죽은 자는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하데스의 궁전에 이르기까지 슬픔(아케론), 시름(코키토스), 불(플레게톤), 망각(레테), 증오(스튁스) 등 5개의 강을 건너야 하는데 그 이름에 해당하는 것을 던져 버려야 저승의 삶을 시작할 수 있다고 믿었다. 마지막 강을 건너면 벌판이 나오는데 오른쪽에는 낙원의 들판인 엘뤼시온, 왼쪽엔 무한지옥인 타르타토스가 나온다고 믿었다.


<이집트 ‘사자의 서’와 죽음> 
육체와 영혼의 분리현상

▲ 이집트 무덤서 발견된 사자의서     ©매일종교신문


고대 이집트인들은 죽음을 육체와 영혼의 분리 현상으로 보았다. 고대 이집트의 묘에서 발견된 사후 세계에 대한 글과 죽은 자의 영생에 대한 기원문 ‘사자의 서(書)’가 있다. 이에 따르면 사자는 태양신 '라'의 배를 타고 공포의 계곡을 건너 7-22개에 이르는 성문을 통과, 오시리스의 심판대에 이르러야 한다. 성문마다 안내인, 문지기, 전령이 있으며, 그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경의를 표해야만 성문이 열리고 통과가 허락되며, 그 이름들이 ‘사자의 서’에 기록되어 있다. 오시리스의 법정에서 심판을 받아야 부활의 자격이 주어진다. 영혼이 부활하기 위해서는 온전한 육체가 있어야 했으며, 이것이 미라 제작의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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