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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듣는 다석강의/우주와 신비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6/30 [09:19]

다시듣는 다석강의/우주와 신비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6/30 [09:19]

만물도 神의 부속물…범신론 싫어하면 참되게 살 수 없어


 

우주의 신비와 사람의 영성(靈性)은 한없이 깊은 곳에 담겨 있다. 이것이 사람의 본체(本體)이다. 하늘과 땅은 한 우주 안에 있다. 사람이 죽으면 땅속으로 들어간다는 것과 하늘나라로 들어간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다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늘과 땅을 달리 보려는 것은 하늘과 땅에 대한 추상이 다를 때에 한한다. 하늘과 땅은 그대로 하늘땅이다. 우주에는 그런 구별이 없다. 지구도 우주 안에 떠있는 하나의 천체(별)이다. 그러나 달리 볼 때에는 하늘과 땅처럼 다른 것이다. 땅에 대하여 하늘은 아주 다르다. 우리가 사는 이 지구는 상대세계에 있다. 상대세계에 사는 동안은 우리는 하늘과 땅이 서로 다른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르게 살아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마침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게 된다.

우리는 태양계 안에 살고 있다. 지구에 사는 우리에게는 해는 모든 힘(氣)의 원동력이 된다. 달(月)은 다름(異)을 뜻한다. 달은 날마다 그 모습이 달라진다. 이 우주 안에 모든 것은 시시각각으로 자꾸 달라진다. 산도, 강물도, 나무도, 풀도, 사람도 달라진다. 그래서 돌아가게 되어 있다. 해속에 '달리 돌림'이다 그래서 자연이 제 가운데 있게 된다. 이를 가운데(中)란 뜻인 가온(『.』)으로 나타내었다. 저절로 제 가운데로 돌아온다는 뜻이다. 얼도 이와 같다. 우주와 사람은 여러모로 해석될 수 있다. 모든 것은 모순된 것, 그리고 못된 것을 다 버리고 돌아가면 마침내 가온(『.』)으로 돌아간다.

우리가 우주인의 관념을 가진다면 주소라는 게 어디 필요하겠는가? 어디에 사느냐고 물으면 우주에 산다고 하면 그뿐이다. 도대체 어디에 사느냐고 묻는 것이 우스운 것이다. 우주 공간에 태어난 것으로 알면 어디에서도 잘 수 있고 어떤 음식도 먹을 수 있다. 적어도 태극천하(太極天下) 그 어디에 갖다 놓아도 나는 살 수 있다고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우주의 주인으로 살아야 한다. 우주를 삼킬 듯이 돌아다녀야 한다. 공연히 집 없다 걱정, 병날까 걱정, 자리 없다 걱정, 그저 걱정하다가 판을 끝내서야 되겠는가? 그러나 우주 여행가가 되어 우주선 타고 훨훨 돌아다닌다고 꼭 우주의 주인이 된 것은 아니다. 생각의 불꽃이 문제다. 다시 말하면 어떤 생각을 하느냐가 문제다. 어떤 이는 일생동안 고향에서 40리 밖을 나가지 못했다고 한다. 그렇더라도 생각의 불꽃이 우주의 주인이 되면 그것으로써 능히 우주인으로 사는 것이 된다.

사실 우리의 몸이 머무르고 있는 것 같지만 우리의 혈액은 쉼 없이 자꾸 돌고 있으며 우리의 호흡으로 태울 것을 죄다 태우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몸을 실은 지구 또한 굉장한 속도로 태양의 주위를 돌고 있다. 우리의 어제와 오늘은 허공(우주 공간)에서 본다면 엄청난 차이를 나타낸다. 우리는 순간순간 지나쳐 간다. 도대체 머무르는 곳이 어디에 있는가. 영원한 미래와 영원한 과거 사이에서 ‘이제 여기(now and here)’라는 것이 접촉하고 있을 뿐이다. 지나가는 한 점 그것이 ‘이제 여기’인 것이다. 그 한 점이 영원이라는 미래를 향해 가고 있다. 이렇게 보면 산다는 것은 ‘이제 여기’에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나는 ‘이제 여기’에 있다는 것은 대단히 훌륭한 발견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일정하게 머무를 곳이 없다. 그래서 무주(無住)다. 머무를 곳이 있다면 그것은 우주일 뿐이다. 우주 공간이 우리의 주소다. 사람들은 모두 머무를 곳을 찾는다. 그러나 머물면 썩는다. 주(住)라야 살 것 같지만 무주(無住)라야 산다. 머무르면 그쳐 버린다. 산다는 것은 자꾸 움직여 나가는 것이다.

우리 몸은 단순히 정신을 담는 그릇만이 아니다. 더 나아가서 60조의 살 알(세포)이 하나로 뭉치어 유기체를 이를 때에 여기서 개성이랄까, 성격이랄까 한 인격이 나타나는 것은 참으로 신비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60조 살 알이 저마다 정신을 차릴 때에 놀라운 전체 정신인 영원한 인격이 구성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런 뜻에서 건강한 육체는 단순한 그릇이 아니라 건강한 정신을 낳게 하는 모체인 것 같다. 나는 40억(현재는 68억) 인류가 뭉친 이 우주 위에는 하나의 신격(神格)인 영원한 정신이 꼭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유일신(唯一神)만을 생각하는 나머지 우주 만물을 하나의 죽은 물질로만 취급하는 사람이 많은데 나는 우주가 단순히 죽은 물질이라고 푸대접할 수는 없다. 내 몸의 살 알 하나하나가 산 것처럼 우주 만물은 하나하나가 산 것이며, 이 우주에는 절대의식(絶對意識), 절대신격이 있는 것으로 느껴진다. 하느님을 섬기라는 것은 만물을 무시하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태양은 인간을 위해 존재…열심히 살아야

걱정만 하다가 인생을 끝내서야 되겠는가

찬란한 대우주처럼 정신문명도 밝아졌으면

인간혁명은 하나님 아들임을 자각하는 것


하느님을 찾는 사람은 하느님의 향내라 할 수 있는 신비를 느껴야 한다. 신비를 느끼려면 자신의 무지(無知)와 부지(不知)를 알아야 한다. 스스로가 아무 것도 모르는 소자(小子)임을 깨달아야 한다. 하나(一)를 하느님으로 그리워하고 사랑하는 것이 참 삶의 길이다.

우리가 유일신(唯一神)을 따라서 퍽 밝은 세상에 사는 데, 우주라는 것을 아주 무생물 취급을 하는 수가 많다. 우주를 ‘산 것’이 아닌 ‘생명 없는 것’으로 알고 물건 취급을 한다. 우주가 사람들에게 퍽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우주가 사람들로부터 대접을 받든, 못 받든 거기에는 무엇인가 있다. 유일신을 받드는 사람으로서는 만유신론(萬有神論)이나 범신론(汎神論) 같은 것을 아주 싫어한다. 생각하는 것은 오직 한 하나님뿐이다. 사물에 신이 있다고 하면 당장 반신론(反神論)이라고 단정을 하고 내던진다. 그래서는 사람이 참되게 살 수가 없다. 한 하느님을 섬기라고 한 것은 참(진리)으로서 섬기란 것이지 다른 것을 무시하라고 한 것은 아니다. 되지 못하고 밝지 못한 정신을 가지고서 코로 제법 숨을 쉬니까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런 소리를 한다. 자기만 옳고 다른 것은 모두가 틀렸고 나쁘다고 하는 것은 안 된다. 만물도 하느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진 하느님의 부속물이다.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빛은 자연계를 비치는 해와 달의 빛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속에 비치는 고요하게 가라앉은 진리의 빛이다. 이 빛을 가지고 인류가 깨어나 대우주의 무한히 찬란한 빛처럼 이 세상에도 찬란한 정신문명의 얼 빛이 밝아졌으면 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 아버지께 영광을 받으라는 것이다. 이 우주의 모든 것은 그 분의 영광을 위해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늘이 아무리 영광을 받으셔도 또 아무리 존귀하게 계시더라도 그 아들 된 내가 그 아버지께 이르지 않으면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만다.

인생은 한정된 곳에 뜻이 있는 것이 아니고 한정 없는 곳에 뜻이 있다. 정신과 신앙과 철학을 가지고 살려는 사람은 이것을 절실히 느낀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모든 현상 속에서 산 우주가 지니고 있는 생명의 율동을 느껴야 한다. 하늘로 머리를 두고 있는 인간은 하늘을 쳐다보며 우주에서 생명의 고동을 느끼면서 살라는 것이다. 모든 상(像) 속에는 생명과 율동이 있다. 하늘과 땅이 모두 상이요 우주가 상이다. 악기에서 음률이 나오는 모양으로 우리는 삼라만상 속에서 생명의 고동을 느낀다. 상(像), 그것만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우리는 상 위의 무엇인가를 알려고 한다. 상의 핵심 속에 들어가서 그 주인을 만나보고 싶어 한다. 마음속에 좇아 들어가 신격(神格)이신 하느님의 정신을 알려고 한다.

주인 일을 모르면 종이고, 알면 아들이다. 아버지의 일을 알아서 해야 한다. 그래야 참으로 복음이다. 예수는 ‘우주혁명’ ‘우주해방’을 하러 오신 이다. 지금 기독교인들은 아들임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종노릇을 하고 있다. 기독교인들이 “나는 죄만 짓는 종이올시다”라고 한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보신다면 이게 무슨 답답한 일일까? 바울이 예수의 종이라고 한 것은 하느님 아들의 자각이 있어서 그런 것이다. 그런 뜻이라면 아들이라 하나, 종이라고 하나같다. 그런데 지금 교회에서 믿는다는 이들은 진짜 종이다. 성경 공부는 이렇게 수천 년 떨어진 것을 한 번에 모아 생각을 해보아야 한다. 제 맘에 맞는 성경 한 구절만 뽑아서 교리를 만들어 놓는 건 성경 공부도, 예수 믿음도 아니다. 성령이란 다른 게 아니다. 정직하게 살도록 하는 힘이다. 

큰 얼(성령의 하느님)을 높이 돌게 하느라고 이렇게 태양계라는 공장을 만들었는지 모르겠다. 이 조그마한 우리도 쓸데없는 일을 왜 하느냐고 하는데, 저 점잖은 태양이 쓸데없는 일을 하겠는가?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라고 또 모든 게 활동하라고 태양이 비춘다. 대자연이 아무리 우리에게 봉사해 주려고 해도 주인 되는 내가 뜨거운 맘을 먹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 된다. 

석가나 예수는 우주 재건을 가르친 이다. 우주 자체는 자연이다. 그러니 이건 내버려두고 나부터 혁명해야 한다. 우주혁명이란 인간혁명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자각이 뚜렷해야 한다. 불경을 보는 이는 ‘불성(Dharma)’을 뚜렷한 거로 느낀다. 하느님 아들이나 불성은 다 같이 영원한 생명인 얼 나이다. 얼 나가 뚜렷할 것 같으면 인생혁명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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