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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원 풍수전문대기자의 궁과 서원, 관공건물 순례-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6/11 [15:27]

이규원 풍수전문대기자의 궁과 서원, 관공건물 순례-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6/11 [15:27]
 

 6백 년 전통 민속촌 안동 하회마을과 병산서원

공덕을 쌓지 않고서는

이곳에 자리 잡을 수 없으니


‘물이 돈다’하여 하회河回라 이름 지어진 하회마을. 양기풍수의 대표지로 전국 풍수지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니, 도처가 현장학습지요 곳곳에 비보풍수의 흔적이라. 낙동강이 섬 모양으로 감싸돌고 있어 수태극을 이루고, 태백산에서 달려온 화산지맥이 산태극으로 드러나니….



서애 유성룡의 위패를 봉안한 병산서원

 

배달겨레 전통과 민속문화에 관심 있는 사람치고 안동 하회마을을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 그곳에는 풍산 유씨들이 많이 산다. 선조 때 영의정으로 임진왜란이란 국가적 재앙을 슬기롭게 극복해낸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1542~1607)이 문중을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7년간의 국란을 수기체로 기록한 그의 『징비록』(국보 제132호)과 여러 유물들이 이곳에 보존되어 있다.

원래 하회마을의 터줏대감은 고려 중엽 맨 먼저 정착한 허씨 문중이다. 그 뒤 안씨가 터전을 잡았으나 크게 융성하지 못하고 만다. 이러던 하회마을이 여말선초 공조전서 벼슬을 지낸 풍산 유씨 유종혜가 입향入鄕하면서 6백여 년 전통을 잇는 민속 마을로 형성된 것이다.

이곳에 와서는 ‘허씨 문전’에 ‘안씨 터전’에서 ‘유씨 배반’이라는 말부터 듣게 된다. 배반롤盤이란 낯선 단어는 잔치판 또는 씨앗의 알눈을 뜻하는 배아胚芽, 배자胚子로도 풀이되고 있다. 허씨네가 마을의 문을 열자 안씨네가 터전을 잡고, 유씨네가 들어와 열매를 맺었음을 빗댄 것이다. 뒤늦게 이주하여 영화를 누린 것 같은 유씨 문중이 성취해 낼 수 있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여기에는 풍수지리학의 최종 가르침이라 할 수 있는 적덕지가積德之家(덕을 쌓는 집안에) 필유여경必有餘慶(반드시 경사스런 일이 있다)라는 큰 뜻이 담겨 있다.

입향조 전서공이 이 마을에 정착하는 데는 남모를 텃세와 고초를 겪어야 했다. 집을 지으려고 주초柱礎를 세울 때마다 까닭 없이 무너지고, 우물을 파면 불순물이 섞여 먹지 못할 물이 치솟았다. 그러던 어느 날 전서공은 기이한 꿈을 꾸게 된다. 도인 스님 한 분이 나타나 “공덕을 쌓지 않고서는 이곳에 자리 잡을 수 없다”고 현몽하고는 사라졌다. 스님의 권유대로 먼저 살던 마을에 가 수년간 덕을 쌓은 후 다시 와 터를 잡으니 무탈했고 그 뒤부터 많은 유씨가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물이 돈다’하여 하회河回로 이름 지어진 이곳은 도·군 청사나 마을을 새로 형성하는 양기陽基풍수터의 대표지로 전국 풍수지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도처가 현장학습지로 비보풍수 흔적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다. 벽계풍수학회 벽계 조수창 회장과 회원들이 동행한 날은 평일인데도 10~20명씩 무리 지은 풍수동호인들이 이곳저곳 눈에 띄었다. 전국 십승지十勝地 중 하나로 6·25전쟁에도 병화를 덜 입었다는 528만 808평방미터 면적의 넓은 땅을 어디부터 살펴봐야 하는가.

“하회마을을 제대로 조감하려면 우선 건너편 부용대부터 올라가야 합니다. 왜 이곳을 ‘물도리동’이라 이름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고, 마을의 입수룡맥도 그곳에서 봐야 드러나니까요.”

벽계의 재촉으로 부용대에 오르니 말 그대로다.

낙동강이 섬 모양으로 동·남·서쪽을 감싸돌고 있는 독특한 지리적 형상이 손잡이 달린 숯불 다리미와 흡사하다. 누가 봐도 수태극이다. 마을 앞 남쪽에는 일월산 지맥인 남산南山이 멈춰 섰다. 뒤편에는 태백산에서 달려온 화산花山지맥이 마을 중앙을 가로지르고 있어 산태극으로 드러난다. 바로 산태극, 수태극을 누구나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마을 전체가 구릉에 자리하다 보니 배산임수로 좌향을 놓을 수 없는 것이 하회 지형의 특징입니다. 낮은 곳을 향해 가옥배치 한 까닭에 좌향이 일정치 않고 동서남북을 제각기 향해 있어요. 옆집 대문을 마주 보고 지은 집도 여럿 있어 이런 곳에서는 개인집보다 전체 국세를 봐야 합니다.”


며칠 전부터 내린 빗물로 강물이 불어나 거대한 연꽃 한 송이가 둥둥 떠 있는 것 같다. 연화부수형이다. 마을과 용맥이 이어지는 동북쪽의 조산에는 벼슬길에 들어가는 입조마入朝馬와 벼슬길에서 물러나 낙향하는 퇴조마退朝馬의 물형이 뚜렷하다. 말 등같이 높낮이가 다른 여러 개의 봉우리가 우측에서 좌측으로 가는 마국형馬局形이면 입조마이고, 같은 모양의 봉우리가 좌측에서 우측으로 달려가는 산세면 퇴조마에 해당된다. 마을 조산에는 입조마와 퇴조마가 함께 있어 벼슬길의 부침浮沈이 심했을 것이란 벽계의 물형 판단이다.


마을 전체가 중요민속자료 제122호로 지정(1984년 1월 10일)된 ‘물도리동’의 입수룡맥을 어디서부터 재느냐를 두고 잠시 의견이 엇갈렸다.

“마을 위쪽에 있는 교회와 창고 건물 사이를 타고 용맥이 내려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화산 줄기에서 이어진 등성이가 척추처럼 드러나 보이잖아요. 갑묘(동에서 북으로 7.5도) 쌍산룡에 묘룡(정동쪽)으로 내려오니 손좌(동에서 남으로 45도)건향(서에서 북으로 45도)으로 놓아 집을 지으면 새 기운을 찾아 명당 발복할 것입니다.”


벽계가 소점한 지점에 서 보니 조금 전 올랐던 부용대가 안산으로 다가와 아늑하다. 아직도 이곳에는 두 군데의 발복지가 남아 있다고 슬쩍 비친다. 토성土星체 산에서 맥이 내려와 금성金星체로 이어진 뒤 마을 전체가 수성水星체다. 토생금, 금생수로 상생을 이뤄 더없이 좋다면서 잠두형蠶頭形 마을 앞산을 가리킨다.

마을 안에 들어오니 전체 지형이 오른쪽으로 원을 그리듯 기울고, 낙동강 물은 왼쪽으로 포물선을 치며 경사져 흐르는 산·수태극 구조가 참으로 기이하다. 화산내룡이 마을 중심을 S자로 가로지르며 멈춰 선 곳에 서애 종가 충효당(보물 제414호)이 있다. 묘좌유향의 정동향 대문 앞에는 1999년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곳을 방문해 심은 주목이 잘 자라고 있다. 의성에서 태어난 서애가 성장기를 보내고 벼슬을 내던진 뒤 분을 삭이며 만년에 은거한 곳이다.

마을 중앙에는 큰 길이 가로지르는데 이를 경계로 북촌과 남촌으로 나뉜다. 전서공이 심었다는 노거목이 아직도 건재하며 하회별신굿 탈놀이의 삼신당이 되기도 한다. 〈허도령 전설〉에서 비롯되는 하회탈(국보 제121호)놀이는 탈바가지를 뒤집어쓴 백정이 양반과 선비를 골탕 먹이는 우리 전통춤으로 풍자와 해학을 담은 외설적 대화가 백미다.

백정: 샌님, 소불알을 머그만 양기에 억시기 좋으이 데이.

선비: 머라꼬, 양기에 좋다꼬. 음 - 그라만 내가 사지.

양반: 허허, 아까 날보고 먼저 사라꼬 켓스이께네 이건 내 불알일세.

선비: 아니, 이거는 내 불알일세.

백정: 아이쿠, 내 불알 터지니더.

할미: 쯔쯔쯔, 소불알 하나 가지고 양반은 지 불알이라 카고, 선비도 지 불알이라 카고, 백정 놈도 지 불알이라 카이께네 대관절 이 불알은 뉘 불알이로?


이쯤 되면 놀이마당을 몇 겹으로 둘러선 내·외국인들은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박장대소하며 뒤로 나자빠진다. 마음에 켕기던 앙금을 한 방에 날려버리는 흥겨운 놀이판이다. 하회 인접 부락에는 ‘허정승 묘’가 있는데 탈놀이가 허씨 문중에서 비롯됐다 하여 현재까지도 타성인 풍산 유씨들이 금초해 주고 있다.


하회마을에 와서는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서애의 친형인 겸암謙菴 유운룡柳雲龍(1539~1601)이 식재한 소나무숲이다. 마을 서쪽에서 불어오는 살풍을 막아 기를 보호하고 모래 바람을 막기 위해 만 그루의 소나무를 심었다는 ‘만송림’이다. 입향조인 전서공, 또는 서애가 식수했다고도 전해지나 비보풍수를 중요시한 문중 전통을 확인하는 현장이다.

서애의 위패가 배향된 병산서원은 사적 제260호로 경북 안동시 풍산면 병산리에 있다.

“서원 앞 안산이 병풍처럼 에워싼 절경 속에 자리하고 있으며 임좌(북에서 서로 15도)병향(남에서 동으로 15도)이니 거의 정남향입니다. 고려 말 건립된 이 서원에는 풍산 유씨와 의성 김씨 간에 얽힌 숨겨진 사연이 있습니다.”

1620년 퇴계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여강서원(후에 호계서원으로 개칭)으로 서애와 학봉 김성일(1538~1593) 위패를 동시에 봉안하면서 두 문중 간 미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관직은 서애(영의정)가 학봉(경상도 관찰사)보다 위인데 나이는 학봉이 네 살 연상이었다. 벼슬이냐, 연고年高냐를 따지다가 결국 서애가 상위(동쪽)로 가고, 학봉이 차위(서쪽)에 배향됐다. 이것이 유명한 ‘병호시비屛虎是非’다. 그러나 호계서원이 있는 장소는 의성 김씨 세거지이다.

후일 의성 김씨의 서원 주도권 장악에 반발한 서애 계열이 1629년 그의 위패를 다시 병산서원으로 봉안해 오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당시 서애의 후손은 대부분 동인에 속해 있었고, 학봉가는 남인이었다. 가문의 영고성쇠는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법. 이후 퇴계학파 정통맥이 학봉파인 남인 쪽으로 이어지며 17세기 이후 동인 계열은 조정에서 도태되고 만다.

“전국 산하를 주유하며 저렇게 높은 안산을 만나면 걱정부터 앞섭니다. 후대에 가 남이 능멸하거나 자리를 넘본다는 물형론적 근거 때문이지요.”

벽계가 서원 앞을 가로막은 안산을 보며 하는 말이다.

안동에 오면 꼭 먹고 가야 한다는 ‘헛제사밥’으로 늦은 점심을 먹는데 건너편 자리에서 누군가 그런다. “빈속에 독한 ‘안동소주’를 권하는 대로 들이켰더니 세상이 나근나근해졌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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