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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단상/이 봄, ‘사랑의 聖事’를 나누자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3/30 [14:10]

신앙 단상/이 봄, ‘사랑의 聖事’를 나누자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3/30 [14:10]

신앙 단상/최복현 전 천주교부천심곡본동사목회장


이 봄, ‘사랑의 聖事’를 나누자


 

지지난 가을 나는 아들을 데리고 집 근처 성주산엘 갔었다. 3년만이었다. 가을 숲속의 밝아오는 새벽 공기가 너무 신선해서 탁세에 찌든 내 가슴은 충격으로 그저 벅차기만 했다. 아, 이 맑은 공기! 날이 뿌옇게 밝아오면서 붉게 물든 단풍들이 숲속 사이사이로 마중나오 듯 찬란한 태양을 기다리고 서있는 모습들이 대견스러웠다.

‘참으로 무심했구나’ 퍼뜩 미안한 감을 느끼며 산을 오르니, 멀리서는 붉게⃨만 보였던 숲이 어느 덧 낙엽이 돼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다. 인간도 예외일 수 없다.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생자필멸(生者必滅)’ ‘윤회질서(輪廻秩序)’가 새삼 실감난다. 엽락귀근(葉落歸根)이라! 잎은 결국 뿌리로 돌아간다는 생명의 실상이 여기 있다.

봄이 오면 다시 빈 가지에 새 생명이 어김없이 돋아나겠지. ‘사랑이 바로 이런 것을….’ 산을 내려오며 나는 몇 번이고 이 말을 되뇌어 보았다. 흔히 잘도 인용하는 ‘한 알의 밀이 썩지 아니하면’ 새 생명이 날 수 없다는 사실을 얼마나 무심히 잊고 살아왔던가. 사랑의 힘은 이렇듯 누가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고귀한 생명으로 이어져 그침이 없음을 왜 이제야 알게 되는가? 그래서 사랑은 강하고, 희망적이고, 모든 것을 성숙하게 하는가 보다.

오래전 모 신문 사회면에서 가슴 아픈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시흥역 근처라 했다. ‘철길에서 놀던 두 아이를 철로 밖으로 밀쳐내 살리고 어머니 자신은 미처 피하지 못한 채 열차에 치어 숨졌다’는 기사였다. 인간, 아니 모정이란 이토록 강한 것인가. ‘사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고린도Ⅰ 13:2)는 말씀의 반증 아닌가.

가장 지극한 사랑이 가장 큰 희망을 낳는다는 사실은 동서고금의 수많은 일화가 말해주고 있다. 또한 가장 희생적인 사랑이 베풀어진 곳에 가장 희망적인 삶의 길이 열린다는 사실도 보아왔다. 그것은 아름다움이며 우리의 생을 살찌게 한다. 우리는 어쩌면 그것 때문에, 그것을 위해서 사는지도 모른다. 이웃 간에 나누는 평범한 사랑 속에서도 삶의 맛을 발견할 때가 많다. 그것이 참일수록 자신에게는 선이 되고, 남에게는 아름다움으로 남는다.


인간은 결국 두고 가는 존재

사랑만이 희망·생명체 키워내

장기주고 간 형수 생각 ‘절절’


사랑의 구도(求道)사업은 이제껏 악이 세상을 황폐화시킨 것 이상으로 일굼의 손길도 멈추지 않았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그 빛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이 시대의 ‘인간정신(크리스천적 소명)’을 불변의 인간애에서 구했던 마더 테레사 수녀는 불과 600원짜리 주사약 하나 못 맞아 하루에도 수천명씩 실명해 가는 인도의 달동네에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뛰어다녔다. 또 충북 음성 꽃동네에서 구빈(救貧)사업을 벌이고 있는 오웅진 신부의 “얻어먹을 힘만 있어도 그것은 축복”이라는 외침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침묵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일깨워주고 있다. 나눔의 참뜻을 다시 한번 되새기게 한다.

영화 ‘빠삐용’을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종신수인 주인공은 천애고도에 지어진 가혹한 형무소에서 수없이 탈출을 시도하다 고문으로 몸이 만신창이가 된다. 하지만, 끝까지 불의에 항거하며 탈출에 성공해 상어가 우글대는 대서양의 파도를 헤엄쳐 나간다. 이 영화는 인간에 대한 증오를 넘어 또 다른 세계의 인간에 대한 가능성, 즉 희망과 사랑을 굳게 믿고 자유를 향해 몸을 던지고 있음을 보게 한다.

어느 심리학자는 ‘사랑의 심성’을 3세대 합일체로 보았다. 즉 사람은 누구에게나 어린이로서의 마음, 청년으로서의 마음, 어른으로서의 마음을 다 가지고 있다고 한다. 소년대는 미래에 대한 꿈으로 청장년 지향적이 되고, 청년대에는 소년대의 꿈과 장년대의 성공을 향해 성취욕에 불타며, 노·장년대에 들어서면 청·소년대의 티 없던 마음을 다시 공유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성년이 된 사람이 어른으로서의 생각을 하는 경우는 오랜 경험에서 건져낸 지혜를 삶 속에서 발휘하는 때이다. 또한 청년심리로 돌아가려는 경우는 운동경기를 할 때라든가, 흥겨운 파티장에서 그 분위기에 몰입했을 때이다. 이때는 일상적인 체면이나 겉치레를 집어던지게 된다. 그런가 하면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는 아주 깊은 사랑에 빠졌을 때라고 한다. 남녀간의 사랑, 자식에 대한 사랑, 예술·자연·학문·진리에 대한 사랑에 심취했을 때야말로 어린이와 같은 마음으로 돌아가게 한다. 흔히 ‘노인은 어린이와 같다’는 말도 따지고 보면 어린이로 돌아가고자 하는 회귀 내지 회생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되지 않으면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성서의 가르침도 인간의 순수함(인간회복)에 더하여, 사랑으로 거듭나라는 말일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사랑이야말로 희망이며, 희망이 있는 곳에 생의 존재가치가 있기에, 우리는 사랑과 희망을 생명체 유지의 본질적 요소로 보는 것이다.

사랑의 힘은 정말 그침이 없고, 도처에 엄존해 있다. 화초 한 포기, 낟알 하나 생명체 어느 것 하나 사랑에 힘입지 않고 커가는 것 있는가. 하다못해 이웃집 애완견 모습에서도 우리는 개 주인의 사랑을 확인하게 된다. 하물며 인간이야 더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사랑을 먹지 않고서는 결코 정상적으로 커갈 수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예수님이나 부처님께서도 사랑(자비)을 인간의 첫째가는 덕목으로 꼽았다.

나는 오래전 둘째 형수님의 죽음과 그 유언에서 사랑의 힘과 인간의 성숙을 강렬하게 느낀 적이 있다. 그렇다고 이 자리를 빌려 형수님에 대한 칭찬이나 늘어놓자는 의도는 아니다. 왜냐하면 평소 그분이 삶이 그렇게 훌륭했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20여 년 전 일이다. 하루는 세브란스병원엘 문병차 갔었다. 형수는 유방암으로 5년을 앓았고, 간암으로 3년째 투병중인 중증환자였다. 병실에 들어서니 형수가 “마침 오시네요”하면서 억지로 몸을 일으키며 반갑게 맞아줬다. 형수의 손을 잡고 있던 형님의 눈에는 이슬이 고여 있었다. 나는 “그대로 누워 계시라”며 기다린 연유를 물으니, 지금 막 형님에게 나를 좀 불러달라고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형님에게 좀 나가 있어 달라고 하시더니 자기 손을 좀 잡아달라고 했다. 형수는 한참 동안 먼 곳을 응시한 채 긴 한숨을 내쉰 뒤, “서방님, 제가 이제 돌아보니 잘못한 것이 너무나 많군요.”라고 말했다. 사실 형수는 너무나 욕심이 많았고, 남의 아픈 곳을 많이 건드렸으며, 비웃기를 잘 했던 에고이스트였다. 그는 ‘잘못했다’는 말을 여간해서 하지 않는 자존심 덩어리였다. 특히 나에겐 그러했었다. 형수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찾아가서 잘못을 빌고 용서를 받아야 할 텐데, 이제 갈 수가 없군요.… 난 그동안 친척이나 이웃이나 성당교우들로부터 많은 것을 받기만 해왔는데 (한숨) 이제 막상 죽음을 눈앞에 두고 보니 줄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조금 전에 신부님이 다녀갔어요. 그래서 신부님한테 ‘이제 남은 것이라곤 하느님께서 주신 이 병든 육체 하나뿐인데 그것이라도 바치고 싶다’고 말씀 드렸어요. 내 안구는 성모병원에다 기증해 달라고 했고, 내 장기는 그동안 친절하게 돌봐준 세브란스병원의 연구자료로 써달라고 했어요.”

형수는 말씀하시는 동안 여러 번 눈물을 흘렸고, 입술을 깨물며 말끝을 흐렸다. 나는 부서져라 형수의 두 손을 움켜쥐고 고개를 숙였다. 달리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형수는 “부탁이 하나 있다”며, 조카들을 자식처럼 생각하고 돌봐 주고, 형님을 꼭 성당으로 인도해 달라고 했다. 애들 셋은 다 영세시켰는데 형님만 못했다는 것이다. 형수는 “서방님만 믿겠다”는 말을 남기고 다음날 먼 길을 떠났다.

‘이럴 수가, 이런 놀라운 변화가 있을 수 있는 건가, 인간이 죽음 앞에 이르러 이렇게 달라질 수도 있구나’

신부님은 영결미사 강론에서 고인의 유덕을 기린 뒤, ‘인간은 결국 가지고 가는 것이 아니고 두고 가는 존재’라는 요지로 말씀해 주셨다.

온갖 생명체가 약동하는 봄을 다시 맞으니 형수 생각이 절로 난다. 이 봄, 부활의 길목에서 ‘사랑의 성사(聖事)’를 나누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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