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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원 사찰과 종교성지순례- 명동대성당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3/30 [13:04]

이규원 사찰과 종교성지순례- 명동대성당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3/30 [13:04]
 

한국 천주교의 요람

명동대성당과 하느님, 하나님


사방 살풍 맞는 자리지만

모두를 아우르는 두령 격이라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은 웅장한 북악산을 주산으로 앉혔는데, 성당이 경복궁과 마주 보고 있는 형세라…. 열왕들의 영정을 내려다보고 조선 정궁을 한눈에 조감하는 곳. 경사지 구릉의 산봉우리를 깎은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으니 확연히 드러나는 우월한 기세라.


성당 후원에 있는 무염시태 성모상. 1948년 프랑스에서 제작되었다.

좌청룡에 해당하는 로얄호텔과 건물군들. 새로 생긴 건물들이 명동대성당을 잘 감싸주고 있어 명성과 위치가 더욱 견고해질 듯하다.


우백호 격의 가톨릭회관이 배반하듯 휘어져 있고 장교빌딩과 틈새가 넓어  돈이 나갈 형국이나 다른 비보빌딩이 들어서고 있다.

 

하나의 건축물이 지니는 상징적 의미가 의외로 클 때가 있다. 더구나 그 건물에 민족적 애환이 내포되어 있거나 종교적 신성성이 부여될 때는 무한한 존재가치를 인정받게 된다. 중국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는 여러 차례 보수를 거치면서도 영구보존하려는 국가적 의지가 담겨 있다. 사적 제258호로 지정(1977년 11월 22일)된 가톨릭 명동대성당은 이 땅에 천주교 신자들이 존재하는 한 지금 그 자리에 그대로 보전될 것이다.

현재 명동대성당은 1898년 프랑스인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여 축성, 봉헌한 이래 본당 길이 69미터, 너비 28미터, 지붕 높이 23미터, 종탑 높이 45미터가 그대로이며 순수한 고딕양식과 라틴 십자형 삼랑식三廊式 구조에도 변함이 없다.

서울 중구 명동 2가 1번지. 명동대성당은 1만 442평방미터의 부지 위에 건평만도 1,498평방미터나 된다. 성당을 중심으로 가톨릭회관(전 성모병원), 주교관, 사제관, 수녀원, 문화관, 교육관, 계성여고 등 관련 집합건물을 모두 합치면 명동 전체를 양대 분할한 규모라고 할 정도다. 이것이 한국가톨릭의 저력이고 막강한 사회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3월 중순 원광대 동양학대학원에 재학 중인 정산 이상호 씨와 명동대성당을 찾았을 때는 지난 2월 16일 선종善終한 김수환 추기경의 추모열기로 찾는 이들 표정이 안타깝고 숙연했다. 본당 언덕을 오르는 우측 계단 옆에 김 추기경 사진이 발길을 멈추게 하고 “고맙습니다. 사랑하세요”란 생전의 당부가 적힌 현수막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아무나 할 수 있을 법한 ‘저 말’이 이토록 진한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단 말인가.

“병좌(남에서 동으로 15도)임향(북에서 서로 15도)으로 정북향에 가깝습니다. 당시 코스트 신부가 풍수에 의존해 축성했을 리는 없겠지만 무학 대사가 즐겨 놨다는 좌향입니다. 경복궁을 정면으로 마주 보게 배치한 것도 큰 뜻이 있었으리라고 여겨집니다. 왕실로부터 참혹한 박해를 당한 끝에 얻어낸 성당 신축 허가였을 테니까요.”

사실 명동대성당이 지어질 무렵 조선왕조는 시아버지(흥선대원군)와 며느리(명성황후) 간 이전투구에다 일본 러시아 청국의 내정간섭으로 이미 망조가 든 때였다. 더구나 천주교 측에는 신해(1791)·신유(1801)·을해(1815)·기해(1839)·병인(1866)박해에 수만 명의 신자를 처형한 입장이어서 면목 또한 있을 수 없었다.

원래 명동대성당 터는 판서를 지낸 윤정현의 저택이 있던 자리로 바깥채만 60여 칸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였다. 천주교는 이 땅을 1833년 매입한 뒤 국내 정세를 살피다가 1877년 본격적인 정지작업에 들어갔다. 그러자 조선왕실은 성당 자리가 영희전永禧殿(역대 임금의 영정을 봉안한 곳)의 주맥에 해당한다는 풍수지리적인 이유를 들어 작업중지와 함께 소유권 포기를 강력히 요구했다. 열왕列王들의 영정을 내려다보고 조선 정궁을 한 눈에 조감할 수 있는 지정학적 위치가 용납 안 됐던 것이다.

3년간 계속된 분쟁이 프랑스 공사관의 중재 노력으로 왕실 측의 양보를 얻어내 착공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조선사회에는 양옥을 지을 만한 기능공이 없어 목수, 벽돌공, 미장이 등을 중국에서 데려와야 했다. 파리 외방전도회 지원으로 완공된 성당 공사비는 6만 달러(약 150만 냥)의 거금이었다. 그때 성인의 한 달 급료가 보통 4달러였다. 축성공사를 설계 감독한 코스트 신부는 약현성당과 용산신학교도 지어 한국가톨릭 근대건축사에 중요한 인물로 기록되고 있다.


성당 후원에 성모마리아가 원죄 없이 잉태함을 상징하는 성모상이 있다. 낮은 구릉처럼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본당 쪽으로 치켜 올라가는 지세다. 누구나 예사롭게 보아 넘길 지형인데 이씨의 물형해석이 뒤따른다.


“비룡상천형입니다. 용이 승천을 위해 낮은 자세로 엎드린 형국인데. 바로 그 위에 본당이 세워진 것입니다. 용은 비바람이 몰아쳐야 하늘로 오르는데 이곳은 고개 위여서 사방의 바람을 피할 수 없는 곳이지요. 지세가 높다 보니 멀리서도 우러러보게 됩니다.”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은 산각山脚이 갈라지지 않은 원만형이다. 그러나 안산에 해당하는 남산은 산각이 여러 갈래로 찢어져 골짜기마다 크고 작은 물길이 발원해 하천을 이룬다. 사대문 안을 가로질러 흐르는 청계천 이북은 배산임수의 절대향(태양향)이 되나 이남 지역은 상대향(지세향)을 놓을 수밖에 없다. 이래서 청계천 이북의 북촌에는 권세 있는 양반들이 주로 살았고, 남촌에는 몰락한 양반이나 서민 상인들이 모여 살았다.

“전통적인 양택 길지로는 앞쪽이 낮고 후방이 높은 전저후고의 배산임수 지형을 꼽습니다. 명동대성당이 멀리 있는 북악산을 주산으로 삼을 경우 반대로 배수(청계천)임산(남산)의 전고후저 역좌향이 되어버려 등 뒤 살풍을 피할 수 없게 되지요. 전법에서 배수진을 친다 함은 물러설 곳 없는 물길을 후방에 두는 것이므로 양택에서도 배수지세는 기피하는 지형입니다.”

남산에서 발원한 물길들이 남대문시장, 명동, 소공동을 거쳐 청계천으로 집중하는 남촌 지역에 상업 지역이 밀집되어 있음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풍수에서는 물이 재물과 여자를 지칭한다. 최근 청계천을 사이에 두고 엇갈리는 기업 간 희비를 면밀히 살펴도 풍수의 진면목을 엿볼 수 있을 듯싶다.


“현재 명동대성당의 풍수적 환경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어요. 좌청룡 격인 로얄호텔과 전국은행연합회 건물이 잘 감싸 주고 있어 명성과 위치는 더욱 견고해질 입지입니다. 남주작에 해당하는 SK사옥이 높기는 하나 원래의 성당 위치가 높은 고도여서 별 영향을 줄 수가 없고 다만 우백호를 이루는 가톨릭회관이 밖으로 배반하듯 휘어져 있어 장교빌딩과의 틈새가 넓은 연유로 돈이 빠져나갈 형국입니다. 그러나 최근 을지로 지역의 재개발로 다른 건물이 들어서고 있어 저 틈새를 비보로 막아 줄 것입니다.”


명동대성당은 예사 건물이 아니다. 성당을 지은 벽돌은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것으로 사용된 흙이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병인박해 때 순교한 9명의 프랑스 선교사와 8천여 명이 처형당한 한강 변 새남터 흙을 파다 구운 붉은색과 회색 벽돌이다. 또 지하성당에는 기해박해 때 순교한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 주교와 무명 순교자 등 9명의 유해 일부가 안치되어 있다. 건립 당시 지명에 따라 ‘종현鐘峴당’으로 불리면서 장안의 명물이 되었다. 광복 이후 이 일대가 명동으로 편입되면서 ‘명동대성당’으로 바뀐 한국 최초의 본당은 굴절된 근현대사를 끌어안는다. 교회사가들은 다음 네 단계로 성당의 변혁기를 구분 짓기도 한다.


1단계, 1909년 이재명 의사가 벨기에 레오돌프 황제 추도식에 참석하고 나오던 매국노 이완용을 저격해 정치사 중심무대로 등장

2단계, 6·25전쟁 당시 인민군 병영시설로 징발당해 지하성당 순교자 묘역이 당한 수난

3단계, 1975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인권회복 및 국민투표거부운동’으로 민주화운동의 도화선이 된 현장

4단계, 19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조작규탄 범국민대회가 6월 항쟁으로 이어지며 민주화 성지로 변모


한때는 치외법권 지대로 여겨져 모든 시위가 한꺼번에 잇따라 수배자의 은신처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때마다 시위현장에서는 ‘오! 하느님’과  ‘오! 하나님’이란 부르짖음이 허공에 난무했다. 가톨릭 신자는 하느님이었고, 개신교 신자는 하나님이었다. 나는 당시 취재현장에서 시위마저 잠시 접어 둔 채 격한 논쟁으로 서로 간 마음 상하는 것을 목격했다. 그렇다면 야훼, 즉 여호와에 대한 호칭이 하느님인가, 하나님인가. 현재까지도 개신교에서는 애국가 ‘하느님이 보우하사’를 ‘하나님이 보우하사’로 부르고 있다.

일찍이 우리나라에서도 ‘한울님’, ‘하늘님’이란 최고 신에 대한 호칭이 있어 타종교에서는 별다른 혼란이 없다. 전통적으로 우리 조상들은 상제上帝로 일컫는 하늘님을 섬겨 왔기 때문이다. 현재도 민족종교 천도교에서는 한울님을 숭배하고 있다.

가톨릭에서는 하늘에서 가장 높은 분을 하느님으로 지칭하나, 개신교에서는 유일신인 하나라는 개념에 경칭인 ‘님’자를 붙여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 국어학자들은 하나, 둘, 셋 하는 수사數詞에 존칭을 붙이면 ‘두님’, ‘세님’ 할 수가 없다는 용례를 들어 난색해 하는 입장이다. 이 같은 신학적 갈등은 1970년대 가톨릭과 개신교가 공동번역성서를 간행하면서 더욱 구체적인 갈등으로 불거졌다.

우리말 사전에 하느님은 ‘천지를 만든 창조자로서 전지전능하고 영원하며 인류와 만물을 섭리로써 다스림’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신교에서 하느님을 일컫는 말’이라고 명시해 놓았다. 공동번역성서에는 ‘야훼 하느님’이라 채택했으나 개신교 예배서 이를 따르는 곳은 별로 없다.

‘하늘heaven에 계신 분’이란 뜻의 하느님, ‘하나one이신 분’이라는 뜻의 하나님. 성모 마리아와 예수를 구분 지어 섬기는 신앙적 간극이 채워지지 않는 한 두 용어의 통일은 요원하다는 신학계의 판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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