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고

간증/이윤진 선교사(이명박 대통령 막내 여동생)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3/30 [12:38]

간증/이윤진 선교사(이명박 대통령 막내 여동생)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3/30 [12:38]
 이윤진 선교사는 이명박 대통령의 막내 여동생으로 A국에서 15년째 선교하고 있다. 이 선교사는 모태신앙인이다. 서울 숭인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 받아 선교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포항여중과 서울 상명여자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한 후 총신대학원 졸업했다.


살아있는 것만도 하나님의 은혜

<디모데 전서 2장 1-4절>

 

이명박 장로와 형제라고 하면 진짜냐고 물어 본다. 그리고 바로 누나냐고 물어 본다. 나에겐 둘 다 유쾌하지 않은 질문들이다. 누군가는 내게 인물은 이 장로보다 났다고 위로의 말도 한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는가?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복을 주셨다. 받은 복을 하나님 뜻대로 영광을 돌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나는 잘 알고 있다.

요즘 매스컴을 통해서 한국소식을 들을 때마다 지금이 기도해야 하는 때임을 절실하게 알게 된다. 이런 시기에 말씀을 전하는 것은 내게도 어려운 일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고 말씀을 전하겠다.

본문 말씀 1절에 감사와 기도를 하되 구체적으로 기도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내 머리카락 까지 셀 수 있으신 하나님은 다 아시면서 그렇게 절절하게 기도해야만 들어주시는 분일까 생각할 수도 있다. 난 구원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라고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간절하게 응답을 받을 때까지 기도해야 한다.

나의 어머님의 기도를 소개 하겠다. 우리가족은 5남매였다. 이명박 장로가 바로 위의 오빠이다. 오빠가 둘 더 있고 맏이 언니다. 이 장로는 바로 위의 오빠였기에 함께하는 시간이 많았다. 포항이 고향이다. 큰 기와집에 살았다. 그냥 기와집이 아니라 절을 개조해서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방을 하나씩 빌려주던 곳이었다. 단칸방에서 부모님과 5형제가 살았다. 정말 어려웠다.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소원이었다.

어머니는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이 파는 좌판행상인이었다. 저녁이 되면 극장 앞에서도 행상을 했다. 단속이 들어오면 피하다가 팔던 수박이 떨어져 깨지곤 했다.

그런 날이면 수박도 먹고 수박껍질로 나물도 해서 먹었다. 어린마음에 수박이 자주 깨지길 원했다. 이명박 장로가 함께 어머님을 도왔지만 살기가 어려웠다. 부모님은 중풍환자가 사는 방에 칸을 막고 이 장로와 함께 기거하게 한 뒤 돈을 벌기 위해 서울로 가셨다.

그때 내 소원은 냄새나지 않는 따뜻한 방에서 배불리 먹는 것이었다. 마침내 서울 간 어머니로부터 밥은 먹게 되었으니까 서울로 오라고 연락이 왔다. 그날로 서울에 가게 되었다. 학비가 없어 학교를 다니지 못했기 때문에 서울에 가기위해 준비해야 할 것들이 없었다. 

서울에 갔지만 형편은 나아진 것은 없었다. 여전히 어머니는 좌판행상을 하셨고, 단지 너무 열심히 하니까 그 동네 재래시장에서 그 시장을 청소하는 일감을 맡게 되었다. 덕분에 나는 집에서 밥을 해야만 했다.

식구들 모두가 오물을 치우고 청소하고 그렇게 살았다. 오빠는 그런 와중에도 밤에 공부를 했다. 오빠와 엄마가 잠을 자는 모습을 본적이 없다. 새벽에 나가고 밤이 깊어 들어 왔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교회가 멀리 있어 늘 새벽기도를 집에서 드렸다. 그런 순간에도 수건이 흥건히 젖도록 매일 기도하셨다. 365일 하루도 거르신 적이 없었다. 기도하는 중보기도의 대상은 바뀔지 몰라도 어머니의 기도 순서는 한결 같았다.

처음에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셨다. 두 번째는 교회와 담임 목사님을 위해 기도하셨다. 세 번째는 동네를 위해 일하시는 분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리고 주변의 안타까운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셨다. 그리고 마지막이 우리를 위한 기도였다. 우리를 위한 기도는 늘 시간이 모자라 그 기도에 내 이름이 들어간 기억이 없다. 아마 오빠의 이름도 거의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왜 우리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지 않는지,

왜 엄마가 나라를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왜 동네 분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지 난 늘 의문이었다. 어머니는 "난 너무 가난하고 배운 게 없어 하나님 나라를 위해 일 할 능력이 없다. 능력이 되는 분들이 일은 잘할 수 있도록 난 기도 하는 일밖에 할 일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또 우리나라가 하나님을 증거 하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 하셨다. 어머니는 교회가 잘되어야지 목사님이 평안해야지 모두가 잘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셨다. 목사님 가족의 이름을 한 분 한 분 부르면서 울면서 기도하셨다.

아무리 어려워도 명절에 목사님께 계란 한 꾸러미라도 선물을 보내셨다. 심부름을 하는 나는 정말 그 계란이 너무 먹고 싶었다. 어머니는 선물을 드리고 나올 때는

반드시 축복 기도를 받고 오라고 하셨다. 그렇게 오빠와 나는 어머님과 목사님의 축복 기도를 받고 자랐다.

목사님의 기도와 어머님의 기도는 신기하게도 늘 같은 내용이었다. 자식들은 하나님이 책임져 주실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길게 기도하지 않으신다고 하셨다. 그 기도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고 모두 응답이 되어 돌아 왔다고 생각한다. 난 내가 받은 복에 대해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다. 어머니는 43년 전 53세로 소천 하셨지만 어머님의 간절한 기도가 하나씩 열매가 되어 돌아왔다고 생각한다.

어쩌다 없는 형편에 국수를 먹게 되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삼일절이나 광복절 같은 국가 기념일이었다. 그리고 어머님은 "좋은 날에는 좋은 것을 먹고 같이 기뻐해야 한다"라고 늘 말씀하셨다.

어머님 장례식 때 모르는 청년들이 와서 서럽게 울었다. 먹고 살기도 힘든 때 어머님은 그분들을 위해 모자라는 등록금이나 책을 사주셨다는 것이다. 신앙에 철이 들고 보니, 남을 도우는 것은 넉넉해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살면서 정말 어려움이 많았다. 남편이 사업에 실패를 하고, 자궁암에 류마티스까지 겹쳤다. 게다가 남편이 속을 썩이는 일까지 있어 연탄불을 피우고 아이들과 함께 자살하려 했다. 그때는 자살이 죄인지 몰랐다. 그런데 눈을 떠보니 내가 죽은 게 아니라 연탄불이 죽어 있었다. 그때는 재수가 없어서 살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4대째 주님을 사랑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죽을 수가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집회를 끝내고 나오는 길에 한 학생이 선교사역을 위해 하얀 봉투를 내밀었다. 가진 것이 이것뿐이라고 말하는 그 학생을 안고 기도를 했다. 눈물과 한숨의 기도가 터져 나왔다. 난 아무것도 알 수는 없지만 이 땅의 유학생들을 위해 힘없는 젊은이를 위해 정말 밤새 기도가 터져 나왔다. 

집에 와서 보니 그 안에는 그 학생의 전 재산인 1불짜리 7장과 몇 개의 동전이 있었다. 9불도 채 안 되는 돈을 받아들고 많이 울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성령님께서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늘도 간절히 기도하고 계심을 알아야 한다. 어려울 때 감사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어려울 때 감사기도를 하면 정말 감사할 일들이 생기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이 일어나면서 난 미국을 위해 기도하기 시작했다. 뭐가 아쉬운 나라여서 나 같은 사람이 미국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가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지금 내가 한국 대통령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통령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사랑으로 국민을 섬기고 그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2009년 7월 15일 뉴욕 간증집회

정리: 박병선 기자

  • 도배방지 이미지

모바일 상단 구글 배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