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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도인탐구/단군사상으로 후천결실시대 열다간 대도인 백산 손중환 ③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2/25 [16:52]

대한민국 도인탐구/단군사상으로 후천결실시대 열다간 대도인 백산 손중환 ③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2/25 [16:52]

대한민국 도인탐구/단군사상으로 후천결실시대 열다간 대도인 백산 손중환 ③

 

상대 입장에서 거래하니 이문은커녕 손해만···

 

백산이 사내아이를 낳자 백산의 부친은 손자를 데리고 강구 오십천을 걸으며 행복에 젖었다. 사진은 오십천의 가을 풍경.

 

고철장사로 적잖은 돈을 날리며 세상의 쓴 맛을 봤던 손중환은 다시 부모가 하던 오징어 건조업을 거들게 되었다. 그는 명태와 오징어를 말려 시장에 내다팔며 여러 상인들을 접하는 와중에 귀에 스윽 들어오는 이야기를 하나 들었다.

당시 지방에서는 판매에 직접 뛰어들지 않고 서울에 있는 자본가들로부터 주문을 받아 현지에서 물건을 사서 보내주고 수고의 대가로 수수료를 챙기는 사람들이 더러 있었다. 이들은 평소 생산지 물가를 파악하고 있다가 값이 떨어질 때 정보를 알려주는 것이었다. 그러면 자본가들은 대량으로 물건을 사들여 창고에 보관해 뒀다가 값이 오르면 내다팔아 막대한 시세 차익을 거둬들였다. 이 이야기를 접한 손중환은 몇몇 보따리 장사꾼들과 함께 서울과 부산 등지에서 주문을 받아 건어물을 구입해 보내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중환은 이 일이 단순한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음을 인식하고 상심에 잠겼다. 이윽고 그는 자신이 직접 물건을 사서 대도시에 내다팔면 어떨까 생각했다. 강구에서 생산되는 건어물을 대량 매입한 뒤 서울가락동시장에다 팔면 많은 이문을 남길 것 같았다. 이른바 건어물 유통업이었다. 당시만 해도 강구에는 그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었다. 더러 타지방 상인들이 와서 물건을 사간다 해도 소규모였으며, 그것도 꼭 필요한 것만 한정해 구입해 가는 것이었다. 손중환은 스스로 기발한 아이디어라고 여겨 무릎이 아플 정도로 힘차게 내려쳤다.

그즈음 손중환의 모친은 아들의 장사 실력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손중환은 건어물을 사들일 때 요령이 부족했다. 본래 상품 가치란 저마다 다른 것이다. 상품과 하품 등 천차만별이었다. 때문에 물건을 살 때는 크기와 건조상태, 보관상태 등을 꼼꼼히 관찰해 값을 차등으로 매길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손중환은 비슷하기만 하면 값을 똑같게 쳐주는 것이었다. 이 뿐 아니다. 대부분 건조업 종사자들이 동네 친분 있는 사람들이어서 상품의 질이 좀 떨어진다 해도 박절하게 대하지 못하였다. 손중환은 도무지 물건 값을 깎을 줄을 모르는 위인이었다. 자기 집 물건을 팔 때는 그 반대였다. 상인들이 값을 턱없이 내려 불러도 흥정을 해 볼 생각을 안 하고 물건을 넘겨 버렸다. 손중환은 살 때는 파는 사람 입장에서, 팔 때는 사는 사람 입장에서 물건을 거래했다. 그러니 돈이 벌어질 리 만무했다.

 

건어물유통업으로 서울서 큰 돈 날려

강구서 참한 처자 만나 옥동자 낳아

백산 부친, 장손 키우며 행복 만끽

 

손중환은 이렇게 저렇게 건어물 4000만원 어치를 사들여서 4톤 트럭으로 한 차를 마련했다. 드디어 트럭에 물건을 가득 싣고 생전에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한양 천리 길을 떠났다. 한번 하고자 한 일은 반드시 끝을 봐야 직성이 풀린다는 성격을 알기에 손중환의 모친은 말리지도 못하고 걱정만 태산 같았다. ‘저놈이 저래가지고 얼마 남지 않은 재산마저도 다 날리는 것은 아닌가’ 하고 안절부절 못했다. 모친의 낯빛에는 그래도 서울 가서 장사 잘하고 돌아오겠지 하는 일말의 기대감이 없지 않았다.

서울에 올라간 지 꼭 열흘 만에 손중환은 집으로 돌아왔다. 얼굴은 초췌했고, 가뜩이나 큰 눈은 객지 생활의 고단함으로 움푹 패여 더 횅댕그렁하게 보였다. 다행히 가지고 간 물건은 다 팔았다. 그러나 이문은 한 푼도 내지 못했다. 오히려 이것저것 경비를 제외하고 나니 본전도 못 건졌다. 큰 손해를 안 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손중환은 가족들 볼 면목이 없어 얼굴을 들지 못했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식이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반가웠는지 장사 결과에 대해서는 일체 내색을 하지 않았다. 단지, 아버지는 이렇게 신신당부했다.

“원거리 장사란 힘든 것이니, 다시는 서울까지 멀리 가지 마라.”

포항이 고향인 손중환의 혈관에는 거칠고 억센 경상도 남자의 피가 흘렀다. 손중환도 억양이 억세고 속마음을 잘 표현하지 않는 등 무뚝뚝했다. 이것은 이 지역 장점일 수 있는데 외지인들과 실제 경상도 사람들까지도 단점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이러한 강인한 기질이 백제를 통합하고 막강한 고구려를 무너뜨리는 저력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무심한 세월과 타지와의 문화적 교류로 지금은 많이 변하였지만 그래도 그 기질은 면면이 이어져 오고 있다. 손중환도 다르지 않았다. 이익이 남지 않는 줄 번연히 알면서 타협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밀어붙이는, 어쩌면 바보 같은 그런 기질의 대표적 소유자가 바로 손중환이었다.

손중환은 잠시 여독을 푸는가했는데, 어느새 강구항을 돌아다니며 물건을 사들여 지난번과 똑 같은 양을 구입했다. 이번에는 서울로 올라간 지 일주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가져간 물건을 절반 정도 처분하고, 나머지는 창고에 맡겨 팔아 달라고 의뢰해놓고 내려온 상태였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쯤 되어갈 무렵 최종 결산을 보았다. 이번에는 관리비가 지난번보다 배도 더 발생했다. 반차 정도 손해를 본 것이다. 마른 오징어는 지금도 축당(20마리) 2만원정도 하지만 70년대에도 가격(5000원 정도)이 별 차이가 없었다. 눈 깜박할 새 500만원정도를 날린 것이다. 당시 손중환과 함께 서울에 물건을 팔러 간 친구는 200만원정도 이익을 남겨서 돌아왔다. 손중환은 그 이후로는 서울로 건어물을 팔러가지 않았다.

당시 200만원이면 괜찮은 2층집을 구입할 수 있었던 액수였으니, 수업료 치고는 거액을 갖다 바친 셈이다. 좋은 말로 하면 세상물정을 모르는 순진무구한 사람이었고, 나쁜 말로 하면 바보짓을 한 것이다. 같은 나이였지만 또래들은 살아가는 길을 잘 알고 있었고, 장사도 제법 이골이 나 있었다. 손중환은 경험이 모자랐고, 세상을 너무 쉽게 생각한 게 탈이었다. 그보다는 남에게 피해가 되는 일은 일체 하지 않으려는 것도 문제였다. 마음이 여린 탓에 남의 말에 잘 현혹이 되는 것도 화근이었다. 손중환은 장사꾼은 못됐다. 장사를 하려면 물건을 살 때부터 수완을 발휘해야 한다. 우선 최상품을 최하의 가격에 구입할 줄 알아야 하고, 최하품이라도 최고의 값에 팔 줄 알아야 한다. 다음으로 거래에 따른 경비는 최소화해야 한다. 손중환은 이중 무엇 하나 잘 하는 게 없었으니, 장사와는 거리가 멀었다.

손중환은 다시 부모 일을 도왔다. 덕장에서 명태새끼(노가리)도 말렸고, 오징어 철에는 건조 작업도 거들었다. 생각 같아서는 더 크고, 더 많은 일을 하고 싶은데, 단순노동에 그치니 젊은 그로서는 가슴이 답답한 노릇이었다. 장남으로서 부모를 대신해 가족의 생계를 꾸려가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려 가끔 밤중에 막걸리 한잔을 걸치고 집에 들어오는 경우도 있었다.

1974년은 손중환이 일륜지 대사를 맞이한 해였다. 지역내 통조림 가공공장에 다니는 처자를 알게 돼 동거를 시작한 것이다. 처음에는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 뒤 살림을 차릴 계획이었지만, 스무 살인 처자 집에서 시집보낼 준비가 되어있지 않아 결혼식을 훗날로 미뤘던 것이다. 처자는 산간지역에서 살다가 직장생활을 위해 집을 떠나 강구에서 자취생활을 하던 중 손중환을 만났다. 처자는 참하고 부지런하며 영민했다. 두 사람은 가까운 곳에 단칸 월세방을 구해 잠만 그곳에서 자고, 밥을 먹거나 일을 하는 등 생활은 부모와 함께 했다. 이듬해 1월 두 사람 사이에 잘 생긴 사내아이가 태어났다. 손중환의 부모는 장손을 몹시 귀여워하였다. 특히 부친은 손자의 손을 잡고 청송에서 발원되어 강구 항으로 흘러가는 오십천을 따라 자주 산책을 다녔다. 손중환의 가족에게는 일생일대에 더없이 행복한 시절이었다. 하루는 할아버지와 손자가 같이 손잡고 오십천을 거니는데 황어가 바다에서 알을 낳으려고 떼 지어 올라오다 방향감각을 잃고 뭍으로 나오는 것을 주워서 보릿짚으로 엮어 가져왔다. 얼마나 흥분되고 재미있었는지 모른다.

손중환은 살림을 시작한지 2년여 만인 1976년 12월 강구에 있는 한 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그날은 바람이 몹시 불고 진눈개비가 휘날렸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자연현상을 보고 앞으로 살아갈 날이 순탄한지, 아닌지를 점친다. 그날 워낙 세찬 돌풍이 몰아쳤으므로 결혼생활이 평탄하지 않으리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정성수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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