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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身의 正常’ 알아야 天壽 누린다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1/29 [10:45]

‘心身의 正常’ 알아야 天壽 누린다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1/29 [10:45]
 

‘心身의 正常’ 알아야 天壽 누린다


이번 겨울에는 유난히도 추운데다 많이 내린 눈으로 인해 다들 미처 예기치 못한 고생들을 했고, 가뜩이나 추위와 굶주림으로 힘겨운 삶을 살아가는 거리의 노숙자들 중에는 얼어 죽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대소한(大小寒)이란 이름에 걸맞은 강추위가 연일 이어졌고 설상가상으로 아이티 대지진 참사가 발생해 지구촌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우울하고 슬프게 한다.

훈풍에 새싹 돋고 초목이 번성하여 영화롭기 그지없던 산야가 황금 들판, 단풍의 산으로 물드는가 싶더니 어느덧 조락의 계절로 접어들어 삭풍에 눈보라 일며 세상은 온통 흰 눈으로 뒤덮이고 적막만 감돌뿐이다.

한철 참선삼매에 들어 그리도 마음(맴맴)의 중요성을 역설하던 매미들도 선화(仙化)하여 적멸의 본향으로 돌아간 지금, 세상은 차츰 조용해지고 간간이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소리만이 이따금 정적을 깨곤 한다.

초목의 잎새가 무성한 시절이 전성기련만 그 전성기는 오는가 싶더니 어느덧 가버리고 잎새 떨어진 나무들은 엄동설한의 시련기를 맞아 나신(裸身)으로 서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선정(禪定) 속에 몰입한다. 지중 온기에 의해 온 나무로 오르내리며 순환하던 생명의 감로수(甘露水)들은 다시금 지하로 모여 수심수도(修心修道)를 통해 만물의 실상(實相)을 비치는 심연(深淵)의 거울로 존재하게 된다.

우주 삼라만상을 보고 받아들여 지각하는 것은 사람마다 다르게 마련인데 누구의 어떤 견해를 받아들이는 게 현명한 지의 여부는 그 또한 각자 판단할 몫이다. 지엽(枝葉)이 무성한 나무가 본연의 제 모습이라 볼 수도 있고 가을을 맞아 잎이 떨어지고 본체와 가지만 서있는 모습을 나무의 본래 모습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인도의 석가세존께서는 ‘꽃은 피고 이윽고 진다’는 말로 보이는 현상세계의 무상(無常) 즉 덧없음의 속성을 일깨워준 바 있다. 이 가르침에는, 물론 보이지 않는 세계, 즉 현상 이면세계의 영원성에 대한 설명이 생략되어 있다. 덧없는 현상에 대한 온갖 집착을 버릴 때 영원성의 진상(眞常)은 저절로 파악되기 때문에 굳이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셨으리라 여겨진다.

“세상에 태어나 살아가는 것은 덧없음의 속성을 지닌다(諸行無常) / 그것이 바로 생겨난 것은 반드시 소멸하고야 마는 자연계의 법칙인 것이다(是生滅法) / 생겨났다 소멸하곤 하는 끊임없는 순환 고리(輪廻)로부터 벗어날 때(生滅滅己) /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는 불생불멸의 영원성 속에서 비로소 안락을 누리게 된다(寂滅爲樂).”

필자가 나름대로 살을 덧붙여 풀이한 이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석가모니께서는 지엽이 무성한 나무를 덧없음(無常)의 현상, 본체 및 가지만 남아 동안거(冬安居)에 들어간 나무를 진상(眞常)의 실체로 간주한 듯싶다.

“빔의 극치를 이루고(致虛極) 철저한 고요를 지키라(守靜篤). 만물이 생겨날 때 나는 그들이 제각기 종착역으로 복귀한 뒤의 모습을 미리 본다(萬物竝作 吾以觀復). 만물이 아무리 무성하다 해도 그들은 마침내 각자 뿌리로 돌아가게 된다(夫物芸芸 各復歸其根). 뿌리로 돌아감을 고요함(歸根曰靜)이라 하고 고요함을 조물주에의 복명(復命: 명령을 수행한 뒤 되돌아와 결과를 아룀)이라 한다(靜曰復命). 제자리로 돌아가는 게 정상이고(復命曰常) 정상을 올바로 인식하는 게 현명함이라 하겠다(知常曰明). 정상 상태에 대한 바른 인식이 없을 때 망령되이 좋지 못한 짓을 하게 된다(不知常妄作凶). 정상 상태를 알아야 그것을 지닐 수 있고(知常容) 정상 상태대로 지녀야 공명정대한 바른 길을 걷게 되고(容乃公) 바른 길을 걸어야 온전하게 되며(公乃全) 온전해야만 천지 이치를 따르게 된다(全乃天). 천지이치를 따라야 무위자연의 대도를 갈 수 있고(天乃道) 무위자연의 대도를 통해서 존재의 영원성을 터득하게 되며(道乃久) 마침내 육신의 생명이 다할 때까지 위태로울 일이 없게 된다(沒身不殆).”

노자(老子)의 <도덕경> 제16장의 전문인데, 이 역시 필자 나름의 견해에 따른 풀이인 만큼 학자에 따라 해석을 달리할 여지가 있을 것 같다. 도덕경에 접하여 그 구절구절을 인생의 화두(話頭)로 삼아 참구해온지 이제 어언 35년이 되어가는 시점이라 필자의 해설이 크게 노자의 본래 취지에 어긋나지는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석가모니도, 노자도 적멸의 고요를 눈에 보이는 모든 사물과 현상의 뿌리로 인식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인생의 여정(旅程)에서 우리가 어디에 착안하여 살펴보는 게 더 현명할지 자명해지게 된다.

오늘을 사는 인류의 상당수가 제 몸과 마음의 정상상태를 모르고 유한한 인생의 소중한 시간을 그저 ‘되는 대로’ 살아가고 있음은 심히 안타까운 노릇이다. 건강이 약화되고 질병의 싹이 서서히 자라도 감을 잡지 못하거나 어떠한 문제의식도 느끼지 못하다가 질병이 악화되어 위태로운 지경에 다다르면 그제야 혼비백산 허둥지둥하는 게 우리네 인생사다.

어떤 것이 ‘정상’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비정상의 위험상황이 도래해도 올바로 인식하거나 깨닫지 못하고 계속 자신을 위태롭게 만드는 엉뚱한 짓을 하게 된다(不知常妄作凶). 따라서 자연법칙에 따라 순리적 삶을 산다면 무병장수는 기본이 아니겠는가(道乃久 沒身不殆). 무병장수는 인생의 목표가 아니다. 우리 몸이 무병장수의 정상상태일 때 우리는 우리 인생의 목표(그 목표가 무엇이든지 간에)를 향해 안심하고 중단 없는 행보를 계속할 수 있으리라.

우리가 타고 다니는 승용차가 고장 나면 가고자 하는 목적지를 향해 가지 못하고 자동차수리센터에서 차를 고치게 되듯 우리 몸의 정상상태를 유지하지 못하면 크든 작든 그 고장을 수리하느라 많은 시간과 경비를 쏟아 부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몸과 마음의 정상상태가 어떤 것이냐에 대해 알아야 하고 그것을 아는 것에 대해 ‘현명하다(知常曰明)’고 말하게 되는 것이다.

고전(古典)에서 옛 성현의 가르침으로부터 삶의 지혜를 배울 때 우리의 삶은 좀 더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삶으로 승화될 수 있을 뿐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른 순리적 삶을 배워 건강하게 천수(天壽)를 누릴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것으로 판단된다. 암, 난치병, 괴질이 창궐하는 이 공해시대에 좀 더 고전을 가까이 하여 옛 성현의 심신(心身) 건강을 위한 신약묘방(神藥妙方)을 받아들여 자신과 가족들의 건강을 위한 이정표(里程標)로 활용한다면 가히 현명하다할 것이다.    <전주대학교 대체의학대학 객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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