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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거릿 맥밀런의 <역사 사용설명서>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10/01/29 [09:58]

마거릿 맥밀런의 <역사 사용설명서>

이광열 기자 | 입력 : 2010/01/29 [09:58]
 

역사로 어지러운 세상에 나온 또 다른 역사론



친일파 논쟁으로 세상이 잠시 어지러웠다. 지난 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두고 칼러를 달리 하는 신문들이 심한 당파성(黨派性)을 드러내면서 충돌하는가 하면, 진보·보수 양진영 역시 달아올랐다. 한쪽에서는 “대한민국 정통성의 훼손을 노린 좌파사관 친일사전”이라고 비판했고, 다른 한쪽은 “(보수 메이저 신문들이) 어설픈 논리로 친일 행위 자체를 합리화하려 한다”고 흥분했다.


자칫 공론장(公論場)으로서의 언론이 흔들릴 지경인데, 나는 이런 구조를 대한민국의 고질적인 내출혈의 구조라고 보는 쪽이다. 전시대의 아픔에 대한 성찰이 의미있는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 즉 사회적 합의로 연결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와중에 등장한 마거릿 맥밀런의 책 <역사 사용설명서>은 유용한 가이드북이다. 핵심 메시지를 요약하자면 “역사를 둘러싼 과도한 열기를 식히라”는 것이다. 즉 “역사에서 교훈을 찾자”는 생각부터 일단 벗어나라는 주장이다.


저자가 가장 경계하는 것은 “역사가 우리 모두를 판단해줄 것이다”는 식의 호언장담이다. 역사가 무엇이기에 사람들은 흥분하는가를 저변부터 차근히 살피기 때문이다. 지금의 한국사회를 염두에 둔 듯이 과거사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는 대목에 대한 그의 생각도 드러낸다. 맥밀란은 남아공·호주·프랑스의 사례를 소개하며 이렇게 말한다. “다른 시대에 다른 신념에 따라 행한 일을 사과한다고 과연 현재 사회에 도움이 될까?”(45쪽) “역사를 너무 많이 돌아보고 사과를 통해 어설프게 역사를 고치다 보면, 현재의 어려운 문제를 제대로 신경 쓰지 못할 위험이 있다”(51쪽)


저자의 이런 시선은 논란의 여지가 없지 않을 것이다. 보기에 따라 냉소적이거나 가치중립적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일 역사가 레오폴트 폰 랑케처럼 “실제 일어난 일”로 보는, 근대적 확신을 가진 흔치 않은 역사가다. 포스트모던한 지금 ‘사실 그 자체’가 엄연히 존재한다고 보는, 보기 드물게 근대적 역사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역사=사실 그 자체’라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역사는 이와 동시에 ‘기억의 공동체’를 유지해주는 수단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개인, 민족, 국가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역사가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가 그릇된 과거를 반복하지 않기 위한 전범(典範)으로서 핵심 역할을 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역사는 단순화되거나 편향되어서는 안 된다는 게 저자의 입장이다. 역사를 왜곡·악용하는 특정 개인, 집단, 민족, 국가, 이념에 상관없이 두루 비판적인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도 마음에 놓이지 않았는지 “역사의 이름으로 내세우는 거창한 주장이나, 진실을 단정적으로 내뱉는 자들을 경계해야 한다. 내가 들려주고 싶은 조언은 이것이다. 역사를 사용하고 즐기되, 언제나 신중하게 다루어라.”고 당부한다.


책을 쓴 동기도 걸핏하면 그렇게 말했던 조지 W 부시 전 미국 대통령의 역사 남용에 질렸기 때문이다. 저자가 보기에 그건 “정의로 위장된 오만”(247쪽)이거나 세상을 단순화하는 잘못이다. 그럼 과연 역사란 무엇인가? 쿨하게 말해 역사란 의문을 던지는 법을 가르쳐주는 영역이다. 회의·겸손이야말로 역사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인데, 현실은 그 반대로만 돌아간다. 요즘 역사란 핫 세일 품목이다. 역사 전문 TV채널도 있고, 드라마·영화·출판물은 셀 수 없다. 실은 이 책은 역사 오·남용에 능했던 이들이 무엇보다 정치인, 그 중에서도 독재자임을 지적하면서 그들의 과거 왜곡과 파괴를 세밀하게 조명하고 있어 흥미롭다.


프랑스혁명의 총아 로베스피에르를 보라. 그는 새로운 달력(혁명력)을 제정해 완전히 새로운 역사를 쓰려고 했다. 중국 마오쩌둥, 옛 소련의 레닌·스탈린도 빠질 수 없다. 즉 이 책에서는 역사 속의 숱한 ‘역사 오남용’의 사례 지적이 볼만한데, 일테면 스탈린의 경우 라이벌 트로츠키를 모든 기록에서 지워버렸다. 독재자뿐인가? 사회가 역사를 오·남용을 한다. 구체적으로 중국에는 제2차 세계대전을 주제로 한 박물관들이 많지만, 보통의 박물관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잔학 행위를 보여주기 위한 테마 전시장에 가깝다(181쪽). 일본에 대한 민족주의적 적개심을 불러일으켜 중국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전략이다.


반면 중국은 문화 혁명이나 톈안먼 사태, 티베트 침공 같은 과거에 대해서는 눈과 귀와 입을 틀어막고 있다. 전통 사회를 경멸하는 척하면서도 과거의 통치자들을 답습하며 대중에게 지배 논리와 들어맞는 한 가지 역사만 주입한다. 일본도 마찬가지다. 고고학자들이 왕실 무덤을 조사하려는 것을 차단하고 있다. 왕실 무덤 조사에서 일본 왕들의 혈통이 이른바 “태양신의 직계”가 아닌 중국이나 한국과의 혼혈로 밝혀지면 우익 민족주의의 신화가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현대사 왜곡도 지적된다. 일본은 제2차 세계대전 후에 스스로를 희생자로 그려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사실을 이용해 자신들의 전쟁범죄에 대한 관심을 분산시켰다. 왜곡된 역사교과서에 관해서는 미국, 러시아, 인도, 중국, 프랑스, 이스라엘 등의 예를 들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역사 몸살’이 특정 국가를 떠나 가히 전지구촌 차원의 것임을 보여준다. 때문에 민족주의가 강하고 청산할 과거가 많은 우리나라에 도움이 될 만하다.


참고로 저자는 역사학자로 대표성이 없지 않다. 1943년 캐나다 토론토에서 태어났으며, 지난 세기 초 영국 총리를 지낸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의 외증손녀이다. 1974년 옥스퍼드대학 세인트앤터니스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대영제국과 20세기 국제관계에 정통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 서술의 밀도가 높은 것은 아니다. 아무래도 대중용 교양물이라는 성격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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