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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다시‘엄마’인가?

이광열 기자 | 기사입력 2009/09/27 [13:40]

왜 다시‘엄마’인가?

이광열 기자 | 입력 : 2009/09/27 [13:40]
 

심정미의 문화산책

왜 다시‘엄마’인가?

영화와 드라마 속 ‘엄마’의 변주, 그 속내는?


요즘 두 엄마가 떴다. 영화 ‘애자’의 영희(김영애), 드라마 ‘솔약국집 아들들’의 옥희(윤미라)다. 두 엄마를 보면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 엄마를 창조했다’는 격언을 ‘신은 모든 애를 다 두들겨 팰 수가 없어서 엄마를 창조했다’로 바꿔야 할 판이다. 오로지 눈물과 인내로 자식을 거두며 한과 분을 안으로만 꾹꾹 삭이던 쪽진 머리 엄니는 온 데 간데없다. 누가 더 패나 시합이라고 하듯 자식 때려잡는 데는 도가 텄다. 도대체 누가 엄마를 깡패로 만들었나. 아니 엄마는 왜 깡패가 돼야 했을까.


# 영희


아들만 위하느라 딸에겐 잔소리에 타박뿐인 ‘친엄마 의심증후군’ 엄마. 한때 날리던 부산 톨스토이로서 소설가의 꿈을 안고 상경한 애자에게 엄마는 “그래, 열심히 하다 보면 좋은 날이 올 거야. 힘내. 우리 딸” 같은 격려는커녕 “니 소설 써서 빤스 한 장이라도 사봤나. 가시나야”하고 이죽거리기 바쁘다. 맘에 안 드는 인간은 뒷덜미부터 잡아채고 보는 ‘모가지 신공’ 부산 아지매답게 딸이라고 봐줄리 만무하다. 대들다 맞는 게 일상인 애자, 혼내다 때리는 게 일상인 엄마. 엄마에게 ‘변고’가 생기는 그 직전까지 둘은 징글징글 웬수다.


# 옥희

      

장대 같은 아들 넷을 팬티 바람으로 줄 세워 놓고 빗자루로 후리고, 말 안 듣는다고 마당 한가운데서 매타작도 불사하는 엄마 옥희. 자기 맘에 안 드는 여자에게 장가들겠다는 큰 아들 앞에 며칠을 시위하며 머리 싸매고 드러눕는가 하면, 시아버지가 있거나 말거나 상 위에 음식도 뒤엎어버리는 간 큰 여자 옥희. 우여곡절 끝에 큰 아들 진풍이 결혼에 골인해 한 시름 놓았지만 오랜만에 등장한 ‘깡패 엄마’에 아직도 시청자들은 어안이 벙벙하다.


# 무서운 엄마 속에 숨은 나약한 자식들


엄마, 즉 모성은 언제나 드라마와 영화의 가장 날 선, 요즘 말로 ‘엣지 있는’ 소재다. 아이를 지키기 위해, 또는 아이를 잃은 엄마가 복수를 위해 무섭게 변모하는 모티브는 언제나 유효한 소재들이다. 작년 안방극장을 휘저었던 최강 막장드라마 ‘아내의 유혹’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상처받은 모성의 비명과 드잡이에 다름 아니다. 배 속의 아이를 잃고 복수를 다짐하는 주인공 은재나, 혼외에서 낳은 아이를 어떻게든 본가에 정착시키려는 악녀 애리나 결국은 모성의 수호에서 떠밀린 영혼들이다.

그렇다면 엄마는 언제 무서워지는가. 해답은 자명하다. 자식이 위험에 처할 때, 자식이 잘못된 길로 가려 할 때 엄마는 자동으로 무서워진다. 거기에 다른 ‘세력’이 가담이라도 한다면 영화 ‘마더’처럼 엄마는 자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못할 것이 없는 삽 든 전사요 투사가 된다.

영희와 옥희도 마찬가지 아닌가 싶다. 스물아홉 먹도록 사고나 치고 제 앞가림 못하는 딸에게 엄마는 무서워질 수밖에 없다. 마흔 살 먹도록 장가도 못가고 빌빌거리는 아들에게 엄마는 무서워질 수밖에 없다. 자식이 알아서 잘 한다는데 괜히 빗자루 들고 설칠 엄마는 세상에 없다.

애자나 진풍이까지는 아니더라도 사람 노릇 제대로 하기 정말로 어려운 요즘, 엄마 품이 다시 그리운 ‘어른아이’들이 영희나 옥희 같은 엄마를 불러온 것은 아닐까. 매 한 대 맞더라도 엄마 품에 다 시 한번 녹아내리고 싶은 나약한 철부지 어른들의 마음이 엄마를 갑자기 무섭게 만든 것은 아닌가 말이다. 엄마의 매가 아무리 매섭다 한들 그 속을 우리가 모르겠는가.

“엄마가 매를 드십니다. 그걸 보고 내가 웁니다.” (권영상의 시 「엄마」전문)
(
월간 VOLO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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